서평 대상으로 선정된 고전 50권은 "우리에게 맞춤한 우리 시대"의 과학 고전을 과학자, 과학 담당 기자, 과학 저술가, 도서평론가 등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2015년에 새롭게 선정한 것입니다.
2005년 7월 1일 과학 저널 <사이언스>의 특별 세션에는 '우리는 무엇을 모르고 있나'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실렸다.
현대 과학이 해결해야할 가장 중요한 쟁점 100가지를 골라서 간략한 설명을 붙인 기사였다. 21세기가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한 탐구의 시대라는 것을 반영하듯이 생명과학과 관련된 주제들이 넘치는 가운데 천문우주학과 관련된 주제들이 제법 많이 보였다.
이 기사에서 언급한 내용 중 천문우주학과 관련된 쟁점들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고전적인 물리학적 쟁점들은 아래 목록에 넣지 않았다.
- 우주는 어떤 것들로 구성되어 있는가?
- 우리 우주가 유일한 우주인가?
- 급팽창을 일으킨 원인은 무엇인가?
- 언제 어떻게 첫 번째 별과 은하가 형성되었는가?
- 고에너지 우주선(cosmic ray)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 퀘이사의 동력은 무엇인가?
- 블랙홀의 물리적 성질은 무엇인가?
- 왜 물질이 반물질보다 많은가?
- 중력의 정체는 무엇인가?
- 왜 시간은 다른 차원과 구분되는가?
- 완벽한 광학 렌즈를 만들 수 있는가?
- 행성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 태양 자기장의 변화를 일으키는 동력은 무엇인가?
- 태양계 내에 외계 생명체가 존재하는가? 존재했었는가?
- 외계 지적 생명체는 존재하는가?
어느 시대나 과학적 질문들은 늘 궁극적이었고 그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학적 진리 탐구 과정 또한 늘 당대의 최첨단 장비를 동원한 역동적인 도전이었다. 그런데 과학기술 문명이 발달할수록 과학자 집단의 성취를 일반인들이 공감하고 같이 호흡할 수 있는 여지가 점점 줄어드는 것도 사실이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성취를 보통 전문가 집단만이 공유하는 자기 분야의 '저널'을 통해서 전문적인 언어로 발표한다. 그러니 점점 더 복잡해지고 정교해지는 과학적 탐구 작업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 간극을 메우려는 작업이 이른바 '과학 대중화' 작업인데 그 핵심에는 여전히 '교양 과학 책'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서울 시내 대형 서점 한 곳과 인터넷 서점 한 군데를 들러서 교양 천문우주학 책들을 관심을 갖고 살펴보았다. 위에서 늘어놓았던 현대 천문우주학의 화두가 되는 내용들이 생생하게 담긴 교양 천문우주학 책들이 넘쳐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런데 현실은 참담했다. 솔직히 고백하면 번역서 몇 권과 국내 천문학자 몇몇이 쓴 책을 제외하면 읽을 만한 책을 발견하기가 힘들었다.
우선 위에서 길게 나열했던 현대 천문우주학의 쟁점들을 현장감 있게 담은 책들이 부족했다. 여전히 지난 세기의 이야기를 버젓이 현대적인 논쟁이라며 늘어놓고 있는 책들이 많았다. 심지어는 잘못된 내용이 확대 재생산된 듯 여러 책에서 비슷하게 설명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과학이라는 탈을 쓴 종교 서적도 있었다. 짜깁기가 심한 책들이 눈에 보였다. 과학적 발견의 무게를 가늠하지 못한 듯 사소한 것을 침소봉대하고 중요한 것을 빠뜨리는 우를 범한 책들도 눈에 들어왔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전혀 엉뚱한 생경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교육대학교 학생을 위한 교과서도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금 인류가 갈릴레오, 뉴턴, 아인슈타인의 시대 이상의 지식 혁명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주의 기원과 운명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기원과 운명, 이것이야말로 인류 지식의 궁극적 목표가 아닐까?"
"그런 지식의 혁명이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다. 바로 이 순간, 인류 최대의 질문인 우주의 기원과 운명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50년 쯤 지나면 과학 교과서가 말할 것이다. 2010년경에 드디어 인류가 우주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알게 되었다고."
이석영은 현재 진행 중인 천문우주학적 사건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인지하고 있었고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무한 우주의 심연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다"면서 그 내용들을 독자들에게 알리려고 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책은 지은이를 닮는 것 같다. <모든 사람을 위한 빅뱅 우주론 강의>는 이석영만큼이나 스마트한 책이다. 현대 우주론 이야기를 흐트러짐 없이 차분하고 깔끔하게 서술해 나가고 있다. 한편, 스마트한 서술인 만큼 글이 까칠해질 수 있는 여지가 있을 수 있었는데 책 곳곳에 녹아 있는 지은이의 감동과 경험담이 이를 상쇄시키면서 따뜻한 책이 되었다. 한 구절을 옮겨 적는다.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촌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옥외 광고를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A letter from Abell 1689'라고 씌어 있었다. 그래서 그날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아벨1689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은하단인데 도대체 이 광고는 무엇인가요?'라고 물었더니 한 학생이 '인기 가수가 부른 노래 제목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얼마나 눈물 나게 반갑던지. 21세기 한국 사람들은 과학에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
또 다른 한 장면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느 날 내가 새로운 분석을 해서 그림 하나를 만들어 옴러 교수에게 보이며 '별다른 관계식을 찾을 수가 없는데요' 했더니 '아냐, 관계식이 있어' 하면서 얼핏 보기에는 무작위 분포처럼 보이는 자료 사이로 굵직한 선을 하나 긋는 것이 아닌가. '앗! 이런 돌팔이가 있다니…….' 그런데 훗날, 동일한 천체에 대해 더 나은 관측 자료를 얻고 보니 거짓말처럼 바로 그 관계식이 나타났다. 역시 거장의 눈에는 별게 다 보이나 보다. 안타깝게도 그게 무슨 관계식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샜다."
이 책의 가독성을 높이는 또 다른 요소들 중 하나는 천문우주학적 사건들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풍부하고 친절한 설명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각 장의 끝에 등장하는 천문우주학 관련 연구소에 대한 소개와 그곳에서 일하는 천문학자들에 대한 에피소드는 이 책의 재미와 가독성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현대 우주론 이야기를 자신의 것으로 녹인 후 자신감 있게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서술해 가는 이석영의 스토리텔링 스타일이 이 책에 대한 신뢰를 더해 준다.
이 책은 빅뱅 우주론을 중심으로 현대 천문우주학이 던지는 쟁점에 대한 현대 우주론적 해답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식으로 구성되어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백미는 '빅뱅 핵 합성'이라는 생소하고도 어려운 내용을 정확하게 하지만 쉽게 비유적으로 풀어서 짧고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우주의 나이가 1초가 되었을 때 운명의 순간이 왔다. 우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벌어진 것이다. 이때 우주의 크기는 오늘날의 100억분의 1이고, 온도는 약 100억 도였다. 이 순간, 우주에 가득 찬 광자들의 에너지가 중성자와 양성자의 질량 차이에 해당하는 에너지와 같아졌다. 이 순간부터 광자가 가지는 에너지는 양성자와 반응해서 중성자를 다시 중성자로 되돌려 줄 흑기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양성자의 수가 많아져서 우주의 나이가 2~3분 정도 될 때 양성자 대 중성자의 개수 비는 대략 8대1이 된다. 이때 우주 역사의 한 막이 오르게 되는데, 최초로 수소와 헬륨 원자핵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우주의 나이 1초부터 3분까지 일어난 이 현상을 빅뱅 핵 합성이라고 부른다."
이 책 곳곳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빅뱅 핵 합성에 대한 좀 더 전문적인 설명 또한 콤팩트하고 설득력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 책이 갖고 있는 이런 많은 강점과 미덕에도 에도 불구하고 아쉬움 또한 남는다. 먼저 같은 내용이 여러 번 반복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 책에서 가장 공감이 갔던 빅뱅 핵 합성에 대한 내용도 여러 차례 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 다른 내용들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자칫 읽는 사람의 재미와 긴장감을 떨어뜨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쉬웠다.
이 책의 구성에도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다. 빅뱅 우주론을 전체적으로 다루는 것이 이 책의 기본 구성인데, 몇 가지 기본적인 내용을 다루지 않고 넘어간 것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상대성 이론에 대한 것이다. 이석영은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 놓았다.
"'뭐라고? 시간과 공간이 하나라고? 시공간이 휜다고? 빛이 시공간을 따라 휘어 진행한다고?' 아마 끝도 없는 질문이 생길 것이다. 내 대답은 '하하. 알고 싶으세요? 천문학 공부하세요'이다. 심술궂다고? 일반 상대성 이론 이야기를 지금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빅뱅 우주론의 다른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이 책이 끝나고 만다. 그래서 잠시 접어 두자."
하지만 상대성 이론에서 유발되는 예컨대 중력 렌즈 효과 같은 이야기는 이 책에 여러 번 등장한다. "앞에서 여러 번 설명한 것처럼" 질량을 가진 물체는 시공간을 휜다, 라고 서술하는 장면도 있다. 상대성 이론에 대한 설명을 다 하자면 이석영의 고백처럼 책 몇 권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린이용 만화책에서도 그에 걸맞게 상대성 이론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 이석영이 '빅뱅 핵 합성'을 설명하던 솜씨로 상대성 이론을 이 책에서 필요한 만큼의 길이와 깊이로 설명하는 것도 힘든 일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칫 부력에 대한 설명은 생략된 '유레카'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이 책은 또한 "우주의 지평 문제, 편평도 문제, 원시 입자의 문제, 이 세 문제는 승승장구하던 빅뱅 우주론에 치명적인 도전장을 내밀었다"면서 이 문제들에 대해서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빅뱅 우주론'을 다루는 이 책에서 정작 '팽창 우주' 자체에 대한 원리와 개념 설명이 부족한 것도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물체의 시공간 팽창 원리를 담고 있는 상대성 이론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이 생략되어 있는 것과 연계되는 문제 같아 보인다.
우주의 기원에 대한 부분을 넣지 않은 것도 정말 아쉽다.
"일부 과학자들은 빅뱅이 왜 시작되었는가에 대해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그야말로 우리 우주의 시간이 시작하기 전에 대한 연구라고 볼 수 있다. '막 세계 이론'이라고도 불리는 브레인 월드 이론이 그 중 하나의 예인데, 이는 우리 우주를 넘어선 초우주의 세계가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범위는 관측을 중시하는 천문학적 우주론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빅뱅 이후의 시간에 대해서만 설명하고자 한다."
이석영은 이렇게 우주의 기원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분명한 선을 그어 놓았다. 그런데 사실은 이미 첫 장에서부터 "그러나 여기가 끝이 아니다. 수학적으로 보면 우리 우주는 혼자가 아닐 수 있다. 다중 우주일수도 있는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이미 꺼내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양자역학에 대한 기본 원리도 포함되었어야 했고 양자역학적 우주 기원론 정도는 소개를 했어야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오히려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 부분, 그리고 우주의 기원에 대한 몇몇 이론을 설명하는 부분을 넣고 은하와 별에 대한 부분은 과감하게 빼버리는 것이 <모든 사람을 위한 빅뱅 우주론 강의>라는 타이틀에 더 잘 어울리고 책 자체로서의 완성도도 높이는 구성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모든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을 위한 빅뱅 우주론>은 그 자체로서 여전히 미덕이 더 큰 반갑고 고맙고 매력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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