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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자금성은 누가 건축했을까?

[한인희의 중국역사의 뒤뜰] 명대 최고의 궁전 건축가, 괴상(蒯祥)

중국의 수도 베이징을 상징하는 건축물은 고궁이라 불리는 자금성(紫禁城)이다. 명, 청대에 걸쳐 24명의 황제가 거주하며 통치하던 곳이다. 현재 중국의 권부가 자리하고 있는 곳도 예전 자금성의 일부 중난하이(中南海)에 위치해 있다. 1407년(명 영락 5년)에 건축이 시작된 이래 600여 년 동안 중국 정치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자금성은 베이징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필수 코스다. 2015년 한 해 자금성을 방문한 사람은 1506만 명에 이른다. 이처럼 많은 이들이 자금성을 방문하는 이유는 중국의 최고 권력자들이 어떤 곳에 살면서 정치를 펼쳤는지 피부로 느껴 보고 싶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자금성은 언제 건축되었고, 건축 책임자는 누구이며, 어떠한 원칙에 따라 건축되었을까? 그 의미를 추적하는 것은 중국의 봉건 사회의 사상과 예제(禮制) 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이 방대한 건축물이 어떻게 건축되었는지 살펴보자.

명나라 영락제(永樂帝)는 태조 홍무제(洪武帝, 주원장)의 넷째 아들이다. 그는 연왕(燕王)에 봉해졌고 관할 지역은 베이징 일대였다. 홍무제가 죽은 뒤 적손(嫡孫)인 건문제(建文帝)가 즉위했는데, 건문제는 삼촌인 연왕을 견제하기 위해 삭봉책(削封策)을 취했다. 권력에 도전할 잠재적 위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연왕은 이에 반발하여 거병(擧兵)했다. 이것이 유명한 '정란(靖難)의 변'이다.

건문제의 황제군과 연왕의 군대는 3년의 격전을 벌였고, 최종 승자는 연왕이었다. 연왕은 수도 난징을 함락시켰고, 건문제는 황궁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황제에 오른 영락제는 당시의 수도인 난징을 꺼렸다. 그래서 자신의 세력 기반이 있는 지금의 베이징으로 천도를 결정했다. 천도가 결정된 후 1407년(영락 5년)에 베이징에 새로운 궁궐인 자금성 건설이 시작됐다. 동원된 인력만 연 20만 명이었다. 터를 닦은 지 13년 만인 1420년(명 영락 18년) 마침내 자금성이 완공되었다.

자금성은 황제의 권력과 위엄을 상징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중국인들은 황궁을 천제(天帝)가 살고 있는 곳과 동등한 지상의 등가물이라 여겼다. 황궁의 명칭은 중국의 고대 별자리 학설에 따라 자금성이라 불렀다. 자금원(紫禁垣), 즉 북극성이 중천에 떠 있고 그곳에 천제가 살고 있다고 믿은 것이다. 하늘과 인간의 합일이었다. 황제의 허가 없이는 그 누구도 안으로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었다.

현재 자금성은 남북으로 길이가 961미터, 동서로 폭이 753미터이며, 전체 면적은 72만 평방미터이다. 우리네 평수로 21만8000여 평이다. 건물이 980동이고, 방은 8704칸이다. 직사각형 모양의 건물 단지에는 대칭적으로 성문이 나 있고 주변에는 깊이 6미터의 해자와 높이 10미터의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자금성 건축에 담겨 있는 원칙들

중국 궁전 건축의 특징은 무엇인가? 중국의 궁전 건축은 배치와 공정에 원칙이 정해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예제(禮制)이자 예치(禮治)다.

첫째,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원칙이다. 이러한 원칙은 주(周)나라 이래 지속되어온 원칙이다. 제왕이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곳은 궁전 건축의 전면, 그리고 생활과 오락을 즐기는 곳은 뒷부분에 배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금성이 이러한 원칙의 모범이다.

둘째, '삼조오문(三朝五門)'의 원칙이다. 삼조란 대조(大朝), 외조(外朝), 내조(內朝)를 가리킨다. 그리고 '오문'이란 궁궐문은 반드시 다섯 개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궁궐은 오중궁문(五重宮門)을 배치해야 하는데, 규정에는 고문(皐門)-영문(英門)-로문(路門)-고문(庫門)-치문(雉門)을 설치해야한다. 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차례로 배치되어야 한다. 이래야만 거대하고 위엄을 갖추며 예치에 맞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베이징 자금성의 다섯 개의 궁문은 대청문-천안문-단문(端門)-오문(午門)-태화문을 배치했다. 이는 중국 고대의 종법 사회 등급과 질서 정신의 상징이자 그것을 체현한 것이다.

셋째, '좌조우사(左朝右社)'의 원칙이다. 좌측에 종묘(宗廟), 즉 태묘가 있고, 우측에 사직단(社稷壇)이라는 의미다. 근거는 <주례> 춘관 소종백에서 '나라를 세우는 신위는 좌측에 종묘요, 우측에 사직이다'라는 원칙에 따랐다. 종묘는 조상 숭배를 위한 장치이다. 유교의 조상 숭배의 산물이다. 사직단은 토지신과 곡신(穀神)에 대한 총칭이다. 농업 사회를 바탕으로 하는 중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것으로 오곡이 풍성하길 제사하는 곳이었다.

넷째는 '중축대칭(中軸對稱)'의 원칙이다. 궁전 건축을 계획할 때 주요 핵심 건축물을 남북으로 일직선을 긋고 그 종축선상에 차례대로 배치하고 동서로 대칭을 맞추어야 한다. 건물 배치는 엄격하고 질서정연해야 한다. 자금성의 전조의 삼대전, 후삼궁 및 중요한 궁문, 광장 등은 모두 중축선 상에 배치하고 있다. 궁전 내부의 부속 건물들은 대칭으로 양측에 배치한다. 이러한 배치는 고대 사회 황권의 지고무상과 유아독존의 의미를 체현하는 것이다.

자금성 내부 전각들의 명칭은 명대와 청대가 동일했을까? 태화전(太和殿)은 1420년(명 영락 18년) 처음 건축되었을 때는 봉천전(奉天殿)이라 불렸고, 1562년(명 가정 41년)에는 황극전(皇極殿)으로 불렸다. 이후 청조가 들어오면서 태화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중화전(中和殿)은 명나라 초기에 화개전(華蓋殿)이라 불렸으나, 가정(嘉靖) 황제 때 소실된 뒤 중극전(中極殿)이라 불렸으며, 보화전은 명나라 초기에는 근신전(謹身殿)이었다가 건극전(建極殿)으로 개명되었다.

이후 자금성의 전각들은 지속적으로 수리와 개축이 진행됐다. 현재 자금성 내의 목조 건축물 대부분은 청나라 때 새롭게 건축된 것이다. 그러나 백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장대한 궁전의 기단인 수미단(須彌壇)과 어도(御道), 계단, 난간 등은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며, 목조 건축들의 건물 외관도 명대의 건축 당시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그 가운데 건물의 기단인 수미단의 의미가 큰데, 수미단은 불상을 모셔놓은 단이다. '수미'라는 말은 수미산(須彌山)에서 비롯되었다. 수미단은 높이가 8만 유순(由旬), 즉 80만 킬로미터나 된다. 유순이란 고대 인도에서 이수를 잰 단위로 대유순(80리), 중유순(60리), 소유순(40리)의 세 가지가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수미산 위에 불상을 모신다는 것은 부처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황제가 거주하는 건물도 같은 의미로 수미단을 기단으로 사용했다. 황제가 지고 무상한 권력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자금성의 건축가, 괴상(蒯祥)

이 방대한 건축을 누가 최초로 설계하고 완수했을까? 이 건축의 책임자는 괴상(蒯祥, 1399~1477년)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중국 명대 건축가로 84살까지 장수했던 인물이다.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오현(吳縣) 향산(香山) 출신이다. 괴상의 부친은 괴부(蒯富)로 알려져 있고 역시 건축 기술 보유자였다. 괴부는 명 왕조 황궁 건설의 전문가로 '도목수(木工首)'였다. 괴상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건축 기술을 배웠고, 부친을 이어 가업을 계승했다.

자금성 건축에 일군의 기술자 그룹인 '향산방(香山幇)'은 누구인가? 괴상의 고향인 향산은 '강남 목공 모두가 향산 출신'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들 고건축 전문가들을 '향산방'이라고 불렀다. '향산방'은 건축 기능공들의 집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완벽한 분업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각자의 장기대로 고난도의 건축 기술 수요에 적응했다.

예를 들면 '향산방'의 목공은 '대목'과 '소목'으로 나뉘었다. '대목'은 주로 건물의 대들보와 상량, 서까래, 두공(頭椌), 처마, 비첨(飛檐), 교각(翹角) 등을 제작했다. 이에 비해 '소목'은 문짝, 창문 살, 덮개, 난간, 칸막이 등에 장기를 발휘했다. '소목' 가운데는 전문적으로 문양을 조각하는 이가 있었다.

또 '향산방'은 목공에 필요한 장비가 특별했다. 이를테면 끌과 정이 다섯 가지나 있었는데 각기 다른 사이즈에 맞도록 사용할 수 있었다. '향산방' 건축의 특징은 색조가 조화롭고 전체적인 구조가 정교한 짜임새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괴상의 자금성 건축에는 이들 '향산방'의 도움이 컸다.

괴상은 최초로 천안문 성루를 설계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괴상이 베이징의 자금성을 건축하는데 동원되었을 때, 첫 번째 임무는 황궁의 정문인 승천문(承天門, 지금의 천안문)의 시공이었다. 당시 22살이었던 괴상의 주도 하에 1421년(영락 19년) 준공되었다. 그 성루의 모습은 오늘 날과 거의 대동소이하다. '승천문'이 완공된 후 괴상은 문무백관들의 찬사를 받았다. 영락황제도 크게 기뻐하며 그를 '괴노반(蒯魯班)'이라고 불렀다. 노반(魯班, 기원전 507~?)은 중국 역사에서 '장인들의 수호신'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건축가로서 최고의 찬사를 받은 셈이다.

'승천문'을 시공한 괴상은 주요 황실 건축의 책임자가 되었다. 1456년 공부좌시랑(工部左侍郞)에 올랐는데, 현재의 중국 관직으로 보면 건설부, 교통부, 수리부를 통합한 기구가 공부(工部)이므로 그의 직책은 부총리급의 고위직에 해당한다. 그는 자금성 외조의 삼대전, 장릉(長陵, 1423년), 헌릉(獻陵, 1425년), 유릉(裕陵, 1464년), 베이징의 서원(西苑), 즉 지금의 북해, 중해, 남해에 산재한 전각들(1460년), 융복사(隆福寺, 1490년)를 건축하는 책임자였다.

괴상은 인품도 훌륭했다. 그는 고위직의 관료였으나 겸손했다. 만년에 사직을 하였지만 궁전을 수리하거나 건축하는 과정에서 자문을 요청하면 언제든 마다하지 않았다. 베이징에는 그의 업적을 기념하여 그가 거주했던 지역을 괴시랑(蒯侍郞) 호동(胡桐)이라고 명명했다. 그의 후손들은 모두 이 골목에 살았다. 그의 후손들이 괴상의 기예를 전수받아 계속 궁전 건축에 참여했다. 괴상의 건축 실력은 당시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베이징의 건축계에서는 "그의 가르침을 위반하는 자는 잘못된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건축 전문 논저들의 평가를 보면 괴상은 건축학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척도 계산에 정통했다. 시공 전에 언제나 정확한 계산을 했다. 준공 이후 위치, 거리, 대소 치수, 설계도 등과 비교해 조금의 차이도 없었다. 그는 기하학의 원리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괴상은 중국 고전 건축 방식인 요철 형태로 끼어 맞추는 순묘(榫卯) 방식에 정통했는데, 이것은 목재 건축의 핵심 기술이다.

이러한 구조로 건축한 건물은 매우 정확하고 구조가 단단하다. 괴상은 자금성을 건축하면서 강남의 건축 예술 방식을 잘 운용하였다. 그는 소주 지방의 채화, 유리기와를 사용하여 전각 건축에 화려함을 더욱 배가시켰던 것이다.

베이징을 방문한 독자들이 자금성을 관람하기 위해 정문인 천안문에서 후문인 신무문(神武門)까지 걷다 보면, 자금성의 거대한 크기에 심취되어 자연스레 우리의 것과 비교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그러나 굳이 그 규모에 놀랄 일은 아니다. 과거나 현재를 불문하고 정치권력은 자신의 권력 확장이 최대의 관심사다. 백성을 다스리는 마음은 궁전의 거대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아픔을 아우르는 것이 먼저다. 그래서 그런지 청대의 황제들의 집무실은 자그마한 '양심전(養心殿)'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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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희

건국대학교 국제학부에서 가르치며, 한중사회과학학회 회장과 KU 중국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대만 중국문화대에서 중국 근대 정치사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대 중국의 영웅들>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와 <중국 외교사> 시리즈 및 <대만 현대 정치사> 등 20여 권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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