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국에 비판적인 책을 판매하는 홍콩 코즈웨이베이(銅鑼灣) 서점의 주요 주주 리보(李波·65)의 실종 사건을 두고 중국과 영국 정부가 갈등을 빚고 있다. 리보는 지난해 12월 30일 책을 찾기 위해 창고에 간다고 나간 후 실종되었는데, 이후 중국 당국에 구류된 사실이 확인됐다.
지난 2월 13일자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따르면, 영국 정부가 발표한 <2015년 하반기 홍콩 보고서>에서 "리보는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홍콩에서 중국으로 끌려갔다"고 밝혔다. 영국 정부는 중국이 자신들과 합의한 홍콩의 일국양제 원칙에 위배되는 행위를 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중국 정부는 자신들은 일국양제 원칙을 분명히 지키고 있으며 근거 없이 중국을 비난하거나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고 반박했다.
애증이 교차하는 중국-영국 관계
중국과 영국은 1840년 아편 전쟁 이후 176년간 애증의 관계를 거듭해왔다. 영국은 두 차례의 아편 전쟁을 통해 중국에 뼈아픈 수모를 안긴 바 있고, 157년이 지난 1997년 7월 1일 홍콩 문제를 해결하고 동아시아에서 식민지 시대의 잔영을 지울 수 있었다.
이른바 중국이 경험한 '치욕의 100년'은 영국과의 아편 전쟁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1840년 아편 전쟁에서 중국군 5만 명은 영국군 3000명에게 패했다. 영국의 '함포 외교'에 전통 대국 중국이 무릎을 꿇은 것이다. 핵심적인 차이는 전통 무기와 신식 무기의 사용 여부였다.
함포 외교의 선봉장이던 영국은 해군이 강력했다. 당시 영국의 군함은 대형 함정은 길이가 110미터, 너비가 20미터로 3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에 72문의 함포를 장착하고 최대 7000여 명을 승선시킬 수 있었다. 소형 함정은 길이가 90미터에 30문의 함포를 장착할 수 있었다. 함포의 유효 사격 거리는 5킬로미터 정도였다. 당시로서는 강력한 군사력이다. 당연히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중국군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편 전쟁 이후, 군사력의 약점에 전전긍긍하던 청조는 해군력 증강에 부심하던 차에 영국 해군이 주도하는 중영연합함대를 창설하게 된다. '오스본 함대(Osborn Fleet)'가 그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중영연합함대가 창설되었다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져 버렸다. 한바탕의 해프닝이었다. 그 이유는 장기적인 안목에 기반을 두고 수립된 국방 전략이 아니라 일시적인 대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이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중영연합함대의 설립 배경은 다음과 같다.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 즉 에로우 호 사건 이후 중국은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와 각각 '북경 조약'을 체결했다.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한 서구 열강은 침략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중국 정부에 대해 군사적 원조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가장 적극적인 국가가 영국이었다. 동아시아에서의 새로운 국제 정세 하에서 영국은 청조와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청조의 통치를 유지시켜주는 대신에 청조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나약한 정부를 도와주면 이득이 훨씬 많이 남는다는 논리였다. 1861년 당시 중국의 세관 업무도 외국인이 관리하고 있었다. 관세 주권이 외국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중국세관을 총괄하고 있던 영국인 로버트 하트(Robert Hart)가 이 프로젝트의 제안자였다.
1861년 7월 7일, 하트는 당시 중국의 외교 실력자 공친왕(恭親王) 혁흔(奕欣)에게 접근했다. 혁흔은 함풍제(咸豐帝)에게 함대 건설 프로젝트를 건의했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하트는 아편 관세와 아편 징수 화물세로 보충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청 정부는 이에 동의하고 신속하게 함정 구매를 결정을 내렸다. 평상시 의사 결정과는 다르게 매우 신속하게 이뤄졌다.
이유가 있었다. 당시 국내적으로 '태평천국의 난'의 기세가 등등했기 때문이다. 태평군은 파죽지세로 소흥(紹興), 영파(寧波), 항주(杭州) 등 중국의 중남부를 석권하고 최대의 상업 도시 상해를 압박했다. 더욱이 태평군이 외국 윤선을 구매한다는 소문도 청정부의 정보망에 들어왔다.
다급해진 청 조정은 1862년 1월 하트와의 논의를 거쳐 영국의 전함과 각종 무기를 구매하고 외국인 해군을 모집하기로 결정했다. 하트는 양광총독 노숭광(勞崇光)과의 담판을 거쳐 백은 65만 량으로 7척의 영국 함선을 구매하기로 계약했다.
함대를 이끌 영국 사령관에는 영국 해군 대령인 셰라드 오스본(Sherard Osborn)이 선임되었다. 그는 두 차례의 아편 전쟁에 참전했고 북극 탐험가로도 명성을 떨치던 인물이었다. 오스본 함대는 7척의 군함과 2척의 공급선으로 구성됐다. 전체 함대의 화력은 함포가 40여 문이었고 장병은 400여 명이었다.
청 정부가 원래 계획한 것은 중형 전함에는 서양 군인 40명, 중국 군인 100명으로 구성하고, 소형 전함에는 서양인 10인, 중국 군인 30~40명으로 계획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 영국 군인으로 구성되었다. 창설 과정에서 구매자인 중국 측의 의사는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고 중국 측에서 명명한 함선의 이름도 사용되지 않았다.
중영연합함대, 왜 흐지부지되었나?
그러나 중영연합함대의 창설은 진행된 지 1년 6개월 만에 위기를 맞이했다. 중영연합함대 창설의 주요 목적이었던 태평천국 운동의 진압과 관련하여 정세가 변한 것이다. 태평천국의 충왕 이수성(李守成)이 대군을 이끌고 다급해진 '천경'을 구하러 남경으로 떠난 것인데, 결과적으로 상해가 태평군의 포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더욱이 이홍장의 회군(淮軍)이 영국과 프랑스 용병으로 구성된 '상승군'의 협력 하에 가정(嘉定)을 수복했다. 청조가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면서 상황이 변한 것이다.
청조는 태도를 바꾸고 기존의 오스본 함대에 관한 계약 이행을 거부했다. 첫째는 지휘권의 문제였다. 오스본 함대는 중앙 정부의 지휘를 받도록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청조는 지방을 관할하는 총독과 순무들의 소관으로 격하시켜 버렸다. 둘째, 함대의 총사령관을 증국번과 이홍장이 추천하는 중국 측 관리로 하고 부사령관을 오스본으로 해야 한다고 입장을 바꿨다.
중영연합함대 사령관 오스본은 이러한 상황을 전해 듣고 매우 분개하여 이 사건과 연계된 14명의 관병들을 해직시켜버렸다. 오스본은 이홍장에게도 분노를 표출했다. 오스본은 자신의 사명이 서방 문명을 중국에 전파하고 전 인류의 상업적인 이익을 진전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스본과 중국의 외교 담당 기구인 총리아문과과의 충돌이 격화되었다. 그는 청조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점에 대해 강력한 불만을 표출했다.
1863년 10월 19일 청 정부로부터 만족한 회신을 받지 못한 오스본은 주중 영국 공사 브루스에게 주선해 주도록 요청을 했다. 오스본은 중영연합함대 해산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문제는 함대가 구매자인 청조의 재산이라는 데 있었다. 오스본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었다. 청조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강력한 화력을 가진 함대가 지방의 실력자들 수중에 떨어진다면 정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였다. 국가의 안위보다는 정권의 안위가 중요한 시기였다. 주중 영국 공사 브루스는 "함대의 지휘권이 오로지 여왕정부의 신임을 얻은 자가 지휘해야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브루스는 오스본에게 함대를 장악하고 있도록 지시하고 영국정부의 훈령이 있기 전 누구에게도 넘겨서는 안 된다고 했다.
양국 간의 갈등이 깊어지자 중재자가 나타났다. 주중 미국공사 앤손 버링감(Anson Bulingame)이었다. 그의 주선 하에 청조의 총리아문과 영국 공사 간에 신속한 합의가 이뤄졌다. 합의의 내용은 오스본이 모든 함정을 이끌고 영국으로 돌아가라는 결론이었다. 그간의 경비는 청조가 부담하기로 했다. 오스본은 1863년 11월 6일 북경을 떠났고 그가 청조로부터 받은 위로금은 백은 1만 량의 거액이었다.
그렇다면, 오스본 함대는 어떻게 되었을까? 영국으로 돌아간 오스본은 '로얄 소버린(Royal Sovereign)' 함대의 함장이 되었고, 그가 끌고 간 북경함, 천진함, 중국함 등은 자신의 함대 소속이 되었다. 중영연합함대에 속한 함정은 영국 해군이 구매했다. 오스본은 영국 해군에서 퇴역한 뒤 상업계로 진출했다. 이후 그가 좋아하던 북극권 탐험을 계속했다.
오스본 함대가 해산된 뒤 일부 영국 병사들은 중국에 남았다. 그 가운데 일부 군인은 다양한 이유로 태평군에 가담했다. 오스본 함대가 해산 된 뒤 11년이 지난 1875년, 청정부는 영국으로부터 군함을 구매하고 새로운 함대 건조 계획을 밝힌다. 이렇게 창설된 것이 이홍장의 북양함대다.
나약하고 무능한 정부가 외국인에게 자국의 안보를 맡겨보려 했던 중영연합함대 창설 해프닝은 이렇게 비용과 지휘권의 문제로 갈등을 겪다 실패하고 만 것이다. 국가의 안보를 지키는 일이 국내적으로 악용될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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