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기록에 남을 만한 강력한 한파가 한반도를 엄습했다. 서울의 기온은 영하 19도까지 떨어졌고, 제주도는 폭설과 한파로 공항 활주로가 폐쇄되면서 수만 명의 발이 묶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원인은 영하 45도의 북극 지방 공기가 이례적으로 한반도로 내려왔기 때문이라 한다. 찬 공기가 따뜻한 바닷물과 만나면서 남부 지방에 많은 눈이 내렸다.
해외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국의 워싱턴과 뉴욕 등에는 100년 만의 폭설이 내렸고, 28명이 숨졌으며 재산 피해만 1조2000억 원에 달했다. 중국 내몽골 북쪽 어얼구나 시(额尔古纳市) 지역에는 영하 60도의 혹한이 찾아왔다.
대만(타이완)에서는 겨울에 통상 영상 10도가 가장 추운 날씨인데, 이번에 영상 2도까지 기온이 내려가면서 갑작스러운 추위에 저체온증과 심근 경색으로 85명이 숨졌다. 아열대 지역으로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는 지역인 홍콩의 판링(粉嶺)까지 눈이 내렸다는 소식이다. 한마디로 기상이변이다.
전통적으로 농업 국가인 중국에서는 농사짓는데 필요한 농력(農曆, 음력)을 삶의 기준으로 삼았다. 지역적으로는 북방을 기준으로 삼았다. 중국의 초기의 왕조들이 모두 북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탕에 농사와 관련하여 24절기가 있다. 태양이 지구를 도는 시간을 상정하고, 15도씩 옮겨갈 때마다 절기 하나씩을 둔다. 그리고 동지(冬至)를 시작점으로 했다.
중국의 가장 추운 겨울, 싼지우(三九)
동지는 북반구에서 태양이 가장 낮게 뜨는 날이다. 즉, 1년 가운데 정오에 해의 그림자가 가장 긴 날이다. 그래서 가장 긴 날이라는 의미의 지(至)자를 쓴다. 중국에서는 민간에서 겨울을 계산하는 방법이 있다. 동지로부터 계산하여 9일마다 나누는 방법이다. 그렇게 하여 9번의 9일이 되는 81일간을 겨울로 계산한다.
그리하여 동지로부터 첫 번째 9일을 '일구(一九)'라고 하는데 작년 12월 22일이 동지였으니 30일까지였다. 두 번째 9일을 '이구(二九)'라고 한다. 작년 12월 31일부터 1월 8일까지였다. 지난 1월 6일이 소한(小寒)이었는데, 우리의 전통에서는 가장 추운 절기가 소한(小寒)으로 "대한이 소한 집에 놀러 갔다가 얼어 죽었다"는 속설이 생길 정도로 소한의 추위가 유명하지만, 중국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렇게 18일이 지나고 나면 가장 추운 시기를 '삼구(三九, 싼지우)'라고 한다. 그러니까 금년 1월 9일부터 17일까지였다. 그런데 그때는 그렇게 춥지 않았다. '사구(四九)'는 1월 18일부터 26일까지였다. 1월 21일이 대한(大寒)이었다. 이번 기상 파동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고 유난스런 추위였다.
중국 민간에서는 "1, 2구에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지 않고, 3, 4구에는 얼음 위를 걸어갈 수 있으며, 5, 6구에는 강가에서 버드나무를 볼 수 있고, 7구에는 얼었던 강물이 풀리고, 8구에는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고, 9구가 되면 쟁기질이 시작된다."고 했다. 그러니 이제 겨울도 절반이 지나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퍼시 셸리의 '서풍부'에서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라는 시구가 생각난다.
추운 날씨가 계속되는 중에 중국 역사에서의 기후의 변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 기후 변화와 관련하여 중국에 저명한 학자가 한 명 있다. 축가정(竺可楨, 1890~1974년) 박사인데, 그는 <중국 5000년 이래 기상 변천의 초보 연구>에서 중국 역사를 네 시기로 구분했다.
그리고 네 가지 조사 분석 방법을 동원했다. (1) 기원전 3000년부터 기원전 1000년까지의 '고고 시기'라고 이름 짓고 주로 서안 근처의 반파(半坡) 유적지와 하남성의 안양(安陽) 유적지를 살피고, 은상(殷商) 시기 갑골문을 통해 기상 상황을 살폈다. (2) 기원전 1100년부터 기원후 1400년까지를 그는 '방지(方志) 시기'라고 명명하고 중국 역사에서 관방 사료 중 기후 관련 기록을 살폈다. (3) 기원후 1400년부터 1900년까지로 역시 '방지(方志) 시기'로 중국의 광범위한 방지 자료들을 고찰했다. (4) 기원후 1900년부터 1979년으로 '기계 예측 시기'로 명명하고 청대의 비가 온 날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1867년부터 1927년은 러시아 과학원이 북경(베이징)에 설립한 기상과 지질 측후소의 자료를 살펴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앙소문화(仰韶文化)에서 안양의 은허(殷墟) 시기까지 2000년 동안 황하 유역의 연평균 온도는 현재보다 2도가 높았으며, 1월 평균 온도는 3~5도 정도였다. 그 이후 일련의 추위와 더위의 변동이 있었다. 온도차는 대체로 1~2도 정도였다. 매번 파동의 주기는 400년에서 800년으로 파악했다.
역사적으로 중국에서는 몇 차례 저온 시기가 나타났다. 기원전 1000년, 기원 400년, 1200년과 1700년에는 기온이 크게 내려갔다. 기상 변화의 기본 주기가 400년에서 800년이라면 이러한 저온 시기는 50년에서 100년 주기로 나타났다. 저온의 변동 폭은 0.5~1도 정도였다.
그 밖에도 축가정 박사는 기후의 파동성은 세계적이라고 분석했다. 가장 추운 시기마다 거의 예외 없이 동아시아 태평양 연안에서 먼저 추위가 나타난 뒤 점차로 그 파동이 유럽과 아프리카의 대서양 연해로 이동했다. 이러한 대변동의 원인은 주로 태양 복사열의 영향이라고 보았다. 작은 변동의 규칙성은 대기 환류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중국 역사상 기후가 만들어낸 정치 경제적 파장은?
결국, 중국 역사상 등장하는 기상 변화의 특징은 단순하게 기상학적 측면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첫째, 기후 변화와 토양, 식생, 자연재해, 농업 생산과 연계된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기상 변화는 농업과 목축업 등 각종 산업에 영향을 미친다.
둘째, 기후변화와 인구의 변천, 민족 관계의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한족의 농업 생산과 서북부 지역의 소수 민족의 목축업 등도 기후의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유목 민족들의 동쪽과 남쪽으로의 이동을 통한 내습, 한족들의 동쪽과 남쪽으로의 대거 이동 등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 농업과 목축업의 투쟁, 한족과 유목민족 간의 갈등도 모두 기후와 연관이 되어 있었다.
셋째, 기후와 각 왕조의 경제, 사회, 정치 안정과의 관계에서 보면 양자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대체로 기온이 따듯한 시기의 왕조들은 경제력이 강성했고, 사회와 정치가 안정되었던 시기이다. 예를 들면 하, 상, 서주, 양한, 수, 당 등이 그랬다. 반대로 기온이 낮았던 시기에 존재한 왕조들은 전란으로 나라가 어수선했고, 정치도 불안정했던 시기였다. 이를테면 북송과 남송 시기, 원, 명, 청 등이 힘들었던 왕조들이다. 시기적으로 뒤로 갈수록 추위가 더 심해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네 삶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기후의 변화가 미래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이번 추위를 겪으면서 일시적인 한파의 내습이 아니라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오히려 '북극의 역설'이라는 표현들을 하고 있다.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전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고 각 미래 연구 기관들마다 우려들을 내놓고 있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단순한 표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 각국의 기상 변화를 조사한 귄 다이어(Gwynne Dyer)의 <기후대전>(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에서 이렇게 예견했다.
"2030년 중국 남방에서는 수재가 빈발할 것이며, 이로 인해 중국 정부는 북방에 수십만에서 수백만의 이재민을 수용할 곳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2040년에는 중국의 하천들이 축소될 것이고 장강의 삼협댐도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다. 연해 지역은 해수면이 상승하여 열대 폭풍의 내습으로 크게 피해를 입을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관계가 긴장되고 심지어는 전쟁이 발생할 수 있다."
그냥 흘려들을 수 있는 얘기는 아닌 것 같다. 자연의 변화가 과거와 같은 규칙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중국에서 가장 춥다고 믿었던 '싼지우(三九)'라는 표현도 이제는 '쓰지우(四九)'나 '우지우(五九)'로 바뀌어야할 상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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