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는 음식 만드는 일을 '팽임(烹飪)'이라 부른다. '팽(烹)'은 음식물을 삶는 것이고 '임(飪)'은 익힌다는 뜻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요리사들을 '화부(伙夫)', '주자(厨子)', '주역(橱役)'이라 불렀다. 최근에는 일반적으로 '주사(廚師)'라 부른다.
중국 고전에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이란 말이 있다. '백성에게는 먹는 것이 하늘'이라는 뜻이다. 먹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래서인지 우리말의 '의식주'가 중국어에서는 '식의주'로 읽힌다. 우선순위의 차이 때문이리라.
'팽임(烹飪)'의 역사는 중국 역사만큼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음식 문화에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요리사들로는 누가 있을까? 수많은 요리사 중 중국 역사에서 가장 이름을 떨쳤던 10명의 셰프를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 주방의 조상', 최초의 노예 출신 요리사 이윤(伊尹)
이윤(伊尹)은 노예 출신으로 처음에는 탕왕의 요리사였지만 지략이 출중하여 재상(宰相)에까지 발탁된 인물이다. 후에 탕왕을 보좌하여 하(夏) 나라를 멸망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상조(商朝) 건립(建立) 유공자(有功者)가 되었다. 단순히 음식만을 요리한 것이 아니라 정치도 요리한 것이다.
그는 중원의 음식을 체계화하여 '요리의 성인'이라 불린다. '이윤탕액(伊尹湯液)'이란 말은 1000년을 이어져온 말인데,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는 연회가 시작될 때 처음 올라오는 요리가 죽이다. 이윤에게서 기원된 것이다.
이윤과 관련하여 '이정조갱(以鼎調羹)'라는 표현이 있다. 이 시기는 아직 철이 발견되지 않아 청동기로 솥을 만들었다. 청동기가 두꺼워 밥을 지을 수 없다. 그래서 당시에는 죽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또한 '조화오미(造化五味)'라는 표현도 있다. 즉 단맛·매운맛·신맛·쓴맛·짠맛의 다섯 가지 맛을 조화롭게 한다는 뜻이다. 음식을 제대로 만드는 일이 그에게는 정치와 다름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친아들을 요리하여 제환공에게 바친 역아(易牙)
역아는 다른 말로 적아(狄牙)라고도 한다. 춘추 시대의 유명한 요리사다. 요리의 대가로 제환공의 환심을 샀다. 제환공은 춘추 시대 패주의 우두머리로 사마천 <사기>의 <관중열전>에 여러 차례 제후들을 소집하여 천하를 장악한 것(九合諸侯, 一匡天下)으로 나온다. 그러나 만년에는 오히려 혼용무도한 군주가 되었다.
그는 먹고 마시고 노는데 부심했다. 그는 늘 산해진미를 먹다보니 다른 고기 맛을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사람 고기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에 관한 기록은 <관자> '소칭' 편에 나온다. "역아는 요리로 공의 일을 도왔으며 공은 말하길 오로지 어린아이 맛을 보지 못했다"고 발언한다.
그래서 역아는 4살짜리 자기 큰 아들의 고기를 제환공에게 헌납한다. 역아는 만약 군왕이 어린아이의 고기를 먹고 싶다는데 신하인 자신이 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불충이라 생각했고, 언제든지 죽음의 화를 입을 수밖에 없던 당시의 시대 상황을 보여준다. 그는 이러한 난처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아이를 희생시키는 것에 가책을 느껴 자신의 자식을 희생시킨 것이다.
혼군이었던 제환공은 매우 기뻐하며 역아를 중용했다. 그러나 제환공이 병이 들어 눕게 되자 역아는 궁문을 막고 담을 높이 쌓아 제환공이 굶어 죽도록 만들었다. 그는 그렇게 자식의 복수를 했다.
오나라의 생선구이 전문 요리사 전제(專諸)
전제는 춘추 말년 오나라의 유명한 요리사였다. 그는 특히 생선구이로 명성을 떨쳤다. 이로 인해 오왕 희료(姬僚)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전제는 오나라 내부의 권력 투쟁에 이용되었다. 오왕 합려(闔閭)가 왕위 찬탈을 획책하고 있을 때 명장 오자서(伍子胥)가 전제를 추천했다.
합려는 전제에게 희료를 제거해 달라고 부탁한다. 오왕 희료가 전제의 생선구이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전제는 희료를 제거하기 위해 잘 구은 잉어의 배속에 단검을 넣었다. 전제는 음식을 올리는 기회를 틈타 희료에게 가까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장에서 잉어구이 배속에 숨겨두었던 단검을 꺼내 순식간에 희료를 살해했다. 그러나 전제는 오왕의 군인들에게 난자를 당해 죽었다. 권력 투쟁에 이용당한 후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최초의 여성 요리사 당나라의 선조(膳祖)
선조는 당대의 유명한 요리사였다. 당나라 승상이었던 단문창(段文昌)의 집안의 주방장이었다.
단문창은 음식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식경(食經)> 50장을 편찬했다. 이 공로로 추평군공(鄒平郡公)에 봉해졌다. 당시 이 책은 <추평군공식헌장>이라고 불렸다. 단문창은 자신의 집 주방에 '연진당(煉珍堂)'과 '행진관(行珍館)'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선조는 이곳에서 자신의 요리 실력을 발휘했다.
선조는 요리 재료를 잘 선별하고 맛의 안배에 능했으며, 특히 요리할 때 불의 세기와 시간 조절을 잘하였다. 단문창의 집에서 40년간 봉사한 이 여자 주방장은 이후 자신의 요리 비법을 100명의 여자 노비들 중 9명을 선별하여 전수했다.
오대 시기의 비구니 요리사 범정(梵正)
범정은 오대 시기의 비구니 출신 요리사다. 그녀는 비구니일 뿐만 아니라 요리사로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특히 중국의 소식(素食) 요리, 즉 채식의 새로운 장을 연 인물이다. 그녀가 만든 '꿀로 버무린 튀김 요리(蜂蜜球)'와 '연뿌리를 갈아 만든 전병(煎藕餠)' 등은 소식 요리 중에 가장 유명하다.
그녀는 문학과 회화에도 정통했다. 왕유(王維, 701~761년)의 '망천한거(輞川閑居)' 별장을 바탕으로 하여 과일, 채소 등을 조각에 사용하여 풍경들을 요리로 만들어 접시에 담았다. 중국 문학에 나타나는 유명한 풍경들을 요리로 재현하였다. 이른바 '망천소상(輞川小祥)'을 창제하여 풍경을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요리와 조형 예술을 융합한 것이다. 현재도 중국에서는 음식 재료로 풍경이나 그림을 그려내 식욕을 돋우고 있다.
중국 최초의 여성 궁중 요리사 류낭자(劉娘子)
남송 고종 시기 중국 최초의 여성 궁중 요리사였다. 그녀는 황제의 어선을 주관했다. 류낭자의 손재주는 매우 뛰어났다. 당시 궁중에서 요리사로 최고의 직책은 '5품'관인 '상식(尙食)'이었다. 당시는 이 직책은 대대로 남자가 담당하였다. 그러나 류낭자는 여자 신분으로는 최초로 이 직책을 담당했다. 황제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를 잘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당시 궁중의 남자 요리사들의 질투와 견제가 심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녀에게 '상식'의 직책을 맡겼다. 모두가 그녀를 존경하여 '상식 유낭자'라 불렀다. 중국에서는 지난 2013년 이 여성 요리사를 기념하여 <상식 류낭자>라는 책을 출판했다.
남송 시기 민간 요리사 송오수(宋五嫂)
그녀의 원적은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음식점을 경영했었다. 특히 생선을 잘 만졌다. 금나라 병사들이 침략해오자 남송의 수도인 임안(臨安, 지금의 杭州)으로 내려왔다.
항주는 바다에 연해있고 이곳의 명소인 서호에서도 각종 물고기들이 많이 잡혔다. 당연히 항주 사람들은 남녀노소 생선 먹는 것을 좋아했다. 항주성 내외의 주점에서는 모두가 생선 요리로 손님을 끌었다. 생선 요리의 수도 다양했다.
송오수는 다른 집과는 차별을 두기 위해 여러 차례 테스트를 거쳐 마침내 식초를 주재료로 생강, 마늘, 설탕, 소금으로 만든 새로운 생선요리를 선보이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초류어(醋溜魚)'다. 이 요리는 항주 사람들의 가장 좋아하는 요리가 되었다.
현재도 서호(西湖)가에 있는 유명한 식당들인 '루외루(樓外樓)'와 '오류거(五柳居)' 등에서 이 요리를 손님들에게 내놓고 있는데 수백 년이 지났지만 송오수의 요리 맛을 지금도 즐길 수 있다.
호랑이 껍질요리(호피육)의 창시자 동소완(董小宛)
동소완은 소주성 내의 '동가수장(童家繡庄)'에서 태어났다. '동가수장'은 소주에서 유명한 소주자수를 생산하는 집이었다. 자수의 품질이 좋아 사업이 잘되었다. 대대로 200년간 자수를 업으로 하면서 내려온 집안이었다. 자수는 매우 세심하고 예술적인 재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집에서 13살이 되던 해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동소완은 기생으로 팔려갔다. 그녀는 남경의 '진회팔절(秦淮八絶)'이라고 할 정도로 재기가 뛰어났다. 1639년 모벽강(冒辟疆)이라는 지식인을 만나 그의 첩이 되었다. 그녀는 채소로 만든 케이크를 잘 만들었다. 특히 복숭아 잼, 참외 잼과 야채 절임을 잘했다고 한다.
그녀의 명성은 강남에 퍼져나갔고 오늘날의 양주의 관향동당(灌香董糖), 권소동당(卷酥董糖) 등도 그녀가 처음 만든 것이다. '동당'이란 순백의 깨, 백설탕, 강력분, 맥아당 등을 원료로 만드는 것으로 종이처럼 얇게 만드는 과자를 말한다. 동소완은 늘 메뉴를 개발하고 어디에 특별한 맛이 있으면 가서 그것을 직접 구해 그것의 제조 방법을 알아내는 수고를 게으르지 않았다.
오늘날 중국인들이 즐기는 호피육(虎皮肉)도 그녀가 창시한 요리다. 호피육은 다른 말로 '동육(董肉)'이라고도 한다. 절강성의 한족의 전통 요리로 돼지고기 삼겹살을 사용하여 만드는데 느끼하지 않고 향이 있고 달며 무늬가 마치 호랑이 표피와 같아서 지어진 이름이다. 미용 효과도 뛰어나다.
딤섬의 일인자 소미인(蕭美人)
소미인은 양주와 남경사이에 있는 의정(儀征)의 진주성 남쪽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청조의 유명한 딤섬 전문가였다. 만두와 케이크, 교자 등을 잘 만들었다. 그녀는 대단한 미녀였다. 여러 시가에서 그녀를 묘사하고 있는데 "얼굴은 부용과도 같고, 반짝이는 눈은 맑은 가을 물빛 같다"고 했다. 너무도 아름다워 이름도 그냥 미인이라고 불렀다.
청대 저명한 미식가이자 문학가였던 원목(袁牧)이 <수원식단(隨園食單)>에서 "의정(儀征)의 남문밖에 소미인이 딤섬을 너무 잘 만들었다. 만두와 케이크 종류가 아주 작고 귀엽기가 그지없으며 순백하기가 마치 눈과도 같았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청대 건륭 59년(1794년) 중양절에 원목은 사람을 파견하여 소미인의 딤섬 8종류 3000개를 배로 남경으로 운반해 왔다. 그 가운데 1000개는 강소 순무였던 기풍액(奇豊額)에게 뇌물로 주었다.
청대의 시인이었던 조익모(趙翼慕)는 소미인의 딤섬을 동파육과 미공병(眉公餠, 청대 강희조의 관료인 심조초(沈朝初)가 특별히 좋아한 전병)과 같은 급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소미인은 25세가 되었을 때 옆집에서 불이나 부모가 죽고 남편도 죽자 생계 유지를 위해 시장에 나와 장사를 하게 되었다.
자기 집 앞에 가게를 차리고 교자와 다식 등을 팔았는데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건륭 황제가 이 소문을 듣고 이 가게에서 2000개의 딤섬을 정기적으로 구입하여 후궁 귀인과 황비들이 맛보게 했다고 한다.
청대 최고의 요리가 왕소여(王小余)
왕소여는 청조 건륭 시기 미식가였던 원목(袁牧) 집안의 개인 요리사였다. 다양한 기예와 이론을 겸비한 왕소여는 음식에 관한 풍부한 이론적인 배경을 갖고 있었다. 그가 만드는 요리는 향기가 너무도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음식에 대해 많은 연구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구체적으로 밝힌 적이 있다. 이 이론들은 원목이 집필한 <수원식단(隨園食單)>에 실렸는데 왕소여의 음식에 대한 다양한 사상들이 반영되어 있다. 원목은 왕소여를 매우 총애했는데, 왕소여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자 특별히 <요리사 왕소여전(廚子王小余傳)>을 집필하기도 했다.
이처럼 중국 역사에 길이 남은 요리사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그들의 재능과 관심이 단지 요리에만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정치에도 관여하여 권력을 요리했고, 문화예술에도 깊은 조예를 보였다. 결국 좋은 음식을 만든다는 것은 단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깊은 인문학적 마인드와 과학적 탐구력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무릇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일이고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다. 하지만, 먹방이 트렌드로 자리 잡은 배경에 우리 사회의 정서적 허기가 드러난 것은 아닐까. 정서적 허기는 경제적 결핍에서 비롯되는 면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관계적 결핍과 인문학적 결핍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음식이 단지 경제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어머니가 손수 차려준 집 밥이 가장 든든하고 그리워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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