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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춘절 풍습, 어떤 의미가 담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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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춘절 풍습, 어떤 의미가 담겼나?

[한인희의 중국 역사의 뒤뜰] 춘절의 기원과 풍습들

우리의 설 명절과 같이 춘절(春節·음력설)은 중국의 최대 명절이다. 춘절 연휴에는 중국 전역에서 고향을 찾는 13억 인구의 민족 대이동이 이뤄진다. 또한 폭죽을 터뜨려 악귀를 쫓는 풍습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인데, 정월 초하루가 시작되는 0시부터 요란하게 폭죽을 터뜨려 대보름까지 15일간 밤낮으로 계속된다.

중국 당국은 최근 불법 폭죽을 단속하느라 바쁘다. 예년부터 폭죽 관련 사고가 많이 발생했는데, 금년 들어서도 폭죽과 관련한 사고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최근 중국 랴오닝(遼寧)성 선양(沈陽)시 공안 당국은 단속으로 적발한 4,515개의 불법폭죽을 소각 처리했다. 춘절 기간 스모그 발생과 화재 발생 예방을 위해 폭죽 사용을 제한하고 불법 폭죽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상하이는 '폭죽안전관리조례'를 통과시키고 외환(外环) 선 이내 지역의 폭죽 및 불꽃놀이를 전면 금지했다. 지난 1월 14일 하남(河南)성 개봉(開封)시 통허(通許) 현의 한 폭죽공장에서도 폭발사고가 발생해 10명이 사망하고 7명이 다친 것으로 알려졌다. 강서(江西)성의 한 폭죽 공장에서도 1월 20일 폭발사고가 발생해 3명이 숨지고, 50여 명이 실종되거나 다친 것으로 전해졌다. 수도 베이징은 스모그 적색경보를 발동하고 폭죽놀이를 금지시키고 있다. 이처럼 폭죽과 관련한 사건 사고가 끝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폭죽놀이의 신화적 기원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왜 춘절에 이처럼 폭죽놀이를 즐기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중국에는 고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다.

한 해를 의미하는 '년(年)'은 원래 괴수의 이름이었다. 머리가 길고 뿔이 커다란 대단히 흉악하고 무서운 괴물로 전해진다. 이 괴수 '년'은 평소에는 잠만 잔다. 잠을 자는 시간이 무려 365일이다. 이렇게 잠만 자다가 섣달 그믐날 깨어나 허기진 배를 채우려 인간 세상에 내려온다. 배가 고프니 보이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사람이든 식물이든 가리지 않고 왕성한 식욕을 자랑한다. 해마다 섣달 그믐날 중국인들은 이 괴수 '년'으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해 온 가족이 남부여대하고 깊은 산속으로 피신하는 것이 연례행사처럼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자신이 괴수 '년'을 물리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마다 피해를 본 마을 사람들은 노인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백발노인에게 산으로 함께 피신할 것을 권했다. 결국 백발 노인만이 마을에 홀로 남게 되었다.

밤이 이슥해지자. 드디어 괴수 '년'이 마을에 모습을 드러냈다. '년'은 마을이 예전과는 다른 분위기임을 감지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괴수 '년'은 마을의 동쪽에 있는 한 집 앞에 다다랐다. 그런데 괴수 '년'의 눈에 그 집 대문에 커다란 붉은 종이가 양쪽에 붙어 있고, 실내에는 촛불이 켜져 있고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괴수 '년'은 놀라서 괴성을 질렀다. 이때 갑자기 대나무가 타는 불꽃이 튀어 올랐고, 괴수 '년'은 두려움에 질려 도망을 가 버렸다.

백발 노인은 괴수 '년'이 특별히 무서워하던 붉은색, 촛불, 폭발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산으로 피신했던 마을 사람들이 걱정을 하며 돌아왔다. 그런데 괴수 '년'에 의해 쑥대밭이 되었을 거라 생각했던 마을은 아주 멀쩡한 상태였다. 백발노인은 신선처럼 나타나 괴수 '년'을 물리쳐 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이때부터 중국인들은 한 해, '년'을 보내기 위해 세 가지를 하게 되었다. 매년 섣달 그믐날에 집집마다 대문에 붉은 대련을 붙이고, 폭죽을 터뜨리고, 집집마다 날이 밝을 때까지 불을 켜놓게 된 것이다. 이것이 중국 민간에서 가장 중요한 명절인 '궈녠(過年, 해를 넘어가다)'의 풍습이 되었다.

춘절 문화의 역사

그렇다면 중화문명의 지표인 춘절(春節)은 언제부터 그 절기가 시작될까? 춘절은 음력(農曆)으로 정월 초하루 날이지만 전통적 의미에서의 춘절은 좀 더 일찍 그 준비가 시작된다. 섣달인 음력 12월(臘月) 초여드레(臘八)에 조상과 신들에게 제사를 지낸다(臘祭). 그리고 섣달 23일이나 24일에 부엌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臘灶). 이렇게 춘절을 맞이한 후 정월 대보름까지가 새해맞이 행사였다. 이 기간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섣달그믐(除夕)과 춘절이다. 오랜 기간의 발전 과정에서 이 행사는 고정적인 풍속과 습관으로 형성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 국무원은 2006년 5월 20일 춘절을 '국가급비물질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정월 초하루는 과거에 원일(元日), 원진(元辰), 원정(元正), 원삭(元朔), 원단(元旦) 등으로 불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국의 왕조마다 원단의 월일이 일치하지는 않았었다. 이를테면 하(夏)나라는 정월 초하루였고, 상(商) 나라는 12월 초하루였으며, 주(周)나라는 11월 초하루에, 그리고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뒤의 진(秦)나라에서는 10월 초하루를 원단이라 했다. 이후 한나라에 이르러 한무제가 하나라의 역을 회복했다. 그리하여 정월 초하루를 다시 원단이라 정하게 되었다. 이후 역대 왕조가 모두 이를 따랐으며 신해혁명 이전까지는 바뀌지 않았다.

춘절과 한 해(년)의 개념은 농업문명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중국의 고대 사람들은 곡식의 생장주기를 '년'이라 표현했다. [설문해자·화부(說文解字·禾部)]에는 “년이란 곡식이 익는 것을 뜻한다”고 되어있다. 하나라와 상나라에서는 달의 기울기에 따라 월(月)이라 했고, 1년을 12달로 구분하고 매월 달이 보이지 않는 것을 삭(朔)이라고 했다. 정월 삭일(朔日)의 자시(子時)를 정초(歲首)라고 했다.

년이라는 명칭은 주나라부터 시작되었으며 서한에 이르러 정식으로 고정된 뒤 현재까지 이르렀다. 따라서 고대에 정월 초하루는 '원단'이라고 했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남경임시정부는 농업을 위한 시간의 통계에 편리를 기하기 위해 민간에서는 음력을 사용하게 하고, 정부기관 및 학교와 단체들에서는 양력을 사용하여 양력 1월 1일을 '원단'으로 했다. 음력 정월 초하루는 보통 입춘을 전후하여 있기 때문에 음력 초하루를 '춘절'이라고 분리해서 사용하게 되었다.

중국인들의 대표적인 춘절 풍습들


중국인들이 춘절을 지내면서 즐기는 풍습들을 살펴보자. 먼저 폭죽이다. 중국인들은 폭죽을 '비엔파오(鞭炮)'라 부른다. 중국인들은 명절을 지내거나 결혼, 진학, 승진, 건물의 낙성식, 개업 등 축하할 일이 있으면 폭죽을 터뜨린다. 어떤 지방에서는 심지어 사람이 죽었을 때도 폭죽을 터뜨린다. 중국에서 폭죽은 25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정월 초하루 닭이 울면 일어나 정원에서 폭죽을 터뜨렸다. 악귀를 몰아낸다는 의미다. 화약과 종이가 없던 시기에는 사람들이 대나무를 태워 대나무의 갈라지는 소리로 악귀를 물리치고 복을 빌었다.

다음으로 춘롄(春聯)이다. 다른 말로 '춘티에(春貼)' '먼두이(門對)'라고도 한다. 춘절에 대문 양편에 붙인다는 의미다. 붉은 종이에 원하는 글자들을 써서 붙이는 것이다. 글자의 수는 제한이 없다. 춘리엔은 도부(桃符)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도부란 주나라 시기 대문 양편에 장방형의 복숭아나무 판을 붙인데서 기원했다. “길이가 6촌, 넓이가 3촌” 정도의 나무판이었다. 복숭아 나무판에 두 단어를 쓴다. '선투(神荼)'와 '위레이(郁垒)'다. 중국인들이 신봉하는 문을 지키는 수호신의 이름이다. 선투는 왼쪽에 위레이는 오른쪽이다. 선투는 무기를 들고 있지만 위레이는 빈손이다. 악귀를 막아주고 집안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풍습이다. 이후 종이가 발견되고 붉은 종이에 춘리엔을 적어 가가호호 붙였다. 가축들이 있는 외양간 등에도 모두 춘롄을 붙여 악귀를 몰아내고 육축이 흥왕하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집안의 사당에는 황지(黃紙)를 붙이고, 노인이 세상을 떠난 집은 3년 동안 붉은 종이를 붙이지 않았다. 돌아가신지 첫해는 백지(白紙), 다음해는 녹지(綠紙), 3년차에는 황지(黃紙)를 붙였다. 3년 상을 치르고 나면 다시 홍지를 붙였다. 그래서 백지, 녹지, 황지로 만든 춘롄은 '효련(孝聯)'이라고 불렀다. 효의 중요성을 강조한 내용이다. 왕조마다 다른 춘롄도 있었다. 마지막 왕조였던 청조는 만주족이었다. 청조는 흰색을 숭상했다. 따라서 궁정 내에서는 흰색으로 만든 춘롄을 사용했는데, 바깥쪽에는 남색, 안쪽에는 붉은색 종이로 테두리를 해서 춘롄을 만들어 사용했다.

다음으로 세뱃돈이다. 중국인들은 세뱃돈을 '야수이치엔(壓歲錢)'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한족의 풍습이다. 처음에는 악귀를 몰아내고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어린아이에게 세뱃돈을 주는 이유는 어린아이들이 귀신이나 악귀로부터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돈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평안하게 한 해를 보낼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중국인들의 특유의 해음(諧音)의 지혜가 발휘된 것인데, '수이(歲')라고 하는 발음은 '수이(祟)'와 같은 발음이다. '수이(祟)'는 귀신이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세뱃돈을 주는 것은 이들 귀신을 눌러놓는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세뱃돈은 나이든 사람이 어린사람에게 줄 때 세(歲)는 '나이'의 의미가 있지만, 젊은이가 나이든 어른께 드릴 때의 세(歲)의 의미는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와 관련이 있다.

세뱃돈은 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압승전(壓勝錢)'이라 불렀다. 이것은 당시 통용되는 화폐가 아니었다. 화폐 모양의 장식품이었다. 허리에 차고 다녔다. 이 또한 벽사(辟邪)의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화폐 표면에 '천하태평' 등 길상의 의미를 지닌 글자가 적혀있었다. 당나라 시기에는 '춘일산전(春日散錢)'이 유행했다. 당시 춘절은 '입춘'이었다. 궁내에서 조배(朝拜)가 있었지만 민간에는 이런 풍습이 없었다. 다만 당 현종이 양귀비가 이 날을 맞이하여 금은과 돈을 씻는 것을 보았다고 <자치통감>에 기록되어 있다.

전통 농업 사회에서는 설날이 가장 중요한 절기였다. 이 가장 중요한 절기 때마다 우리의 선조들은 악귀에 대한 두려움을 물리치고 복을 받고자 했다. 복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건강과 재물의 복을 얻는 것이리라. 설을 맞이하여 이 엄혹한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이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소확행(小确幸)부터 누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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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희

건국대학교 국제학부에서 가르치며, 한중사회과학학회 회장과 KU 중국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대만 중국문화대에서 중국 근대 정치사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대 중국의 영웅들>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와 <중국 외교사> 시리즈 및 <대만 현대 정치사> 등 20여 권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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