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재 영입'이 한국 정당 정치의 향배를 가를 승부처로 부상하고 있다.
각 정당은 정책을 개발하기보다 이합집산을 하며 인재 영입을 통해 당의 이미지를 확보하는 전략에 모든 걸 걸고 있다. 제대로 된 정당이라면 국가의 발전과 사회의 진보에 열정을 지닌 청년 당원을 육성하여 훌륭한 정치가로 길러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터인데, 우리의 현실은 인재영입위원회는 있어도 인재육성위원회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10년 이상의 역사를 지탱해온 정당이 없는 한국 상황에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의 정치판은 선거철만 다가오면 사회 각 분야에서 성공한 인물을 영입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당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노력보다 이미 만들어진 기존의 인물 영입을 통해 자당의 이미지를 부각하는데 부심한다. 결국 어떤 인물을 먼저 선점하느냐에 정당의 성패가 갈리고 선거 판세가 결정되어 왔다.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는" 인재 영입인가?
'인재 영입' 자체는 좋은 것이다. 하지만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고(長江後浪推前浪), 새로운 사람이 옛 사람을 대체하는 것(世上新人換舊人)"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세계가 젊은 지도자들을 영입하여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판에서는 젊은이들보다는 나이든 사람을 찾는데 부심하고 있다.
현재 국회의원의 평균 연령이 58세이고, 각 당의 이른바 '멘토'라고 불리는 '책사'들의 평균 나이는 70세 중반이다. 문제는 한국 상황에서는 지난 정권에서 음으로 양으로 활동한 '책사'들의 과거 경력이 문제될 수밖에 없다. 명색이 전통 유가적 가치관을 여전히 중시하는 우리 사회지만 '지조'있는 정치가를 찾기가 쉽지 않다. 과거 정권에서 영화를 누렸던 '책사'들이 반대편의 자리로 영입되어 서로 비난의 화살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작금의 한국 정치 상황을 보면서 중국 역사에서의 인재 영입을 떠올리게 된다. 역사의 묘미는 시대가 혼란 속에 빠졌을 때 영웅들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에는 세 번의 큰 혼란의 시기가 있었다. 첫 번째 혼란은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로 549년간의 춘추 전국 시대로, 이 시기는 제자백가의 등장으로 여러 사상들이 뿌리를 내린 시기였다. 두 번째 혼란은 기원후 196년부터 589년까지 약 393년간의 위진 남북조 시기로 정치적으로는 분열의 시대였지만 문화적으로는 다양하면서도 통일성이 있는 특유한 면모를 보인 시기였다. 세 번째로 907년부터 979년까지 71년간 5대 10국의 시기가 이어졌는데 각 나라는 문화 활동이 활발했고, 특산품도 생겨 유통 경제가 발전했던 시기다. 그렇게 보면 난세가 결코 암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중국의 역사에서 5대 10국은 당나라가 멸망한 뒤 북방의 민족들이 중원에 들어와 한족들을 지배하면서 이른바 '호한 체제(胡漢體制)'로 가치관의 혼란을 겪는다. 이 시대에 10개 왕조에서 재상을 지낸 풍도(馮道, 882~954년)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10개 왕조의 이민족 천자를 섬기면서 고위 관리로서 40여 개의 직책을 맡아 30년, 재상으로 20년을 지냈다. 도대체 어떻게 10개 왕조에서 그를 '책사'로 모셨던 것일까? 그의 식견은 얼마나 대단했던 것일까?
10개 왕조의 원로를 지낸 풍도(馮道)
풍도는 5대 시기, 10명의 황제를 거치면서 중국 역사상 유일한 '10개 왕조의 원로'라고 불린다. 통상적으로 역사에서 어떤 인물이 경험이 풍부하고 능력이 있으면 '3개 왕조의 원로'라며 최고의 찬사를 보낸다. 그런데 풍도는 10개 왕조의 모든 왕에게 중용을 받은 인물이니 명실상부하게 '관료 사회의 오뚝이'라 불릴 만하다.
그러나 풍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단으로 갈린다. 하나는 유가적인 관점이다. 대표적인 인사가 송대의 구양수(歐陽修)다. 그는 풍도를 혹평한다. 절개와 염치가 없는 인물이라고! 중국 전통 독서인들의 기준에서 보면 그는 당연히 기준 미달이다. 구양수는 풍도를 소위 "젖만 주면 엄마라 부른다(有奶便是媽)"라고 혹독한 비난을 퍼부었다.
또 다른 평가는 대단한 호인(好人)이라는 것이다. 송대의 왕안석(王安石)과 소동파(蘇東坡)가 그렇게 평한다. 왕안석은 풍도를 "살아있는 보살"이라고 평했으며, 소동파는 그를 "보살이 다시 현신했다"라고 평가했다. 역사에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어렵다. 사람은 누구나 양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풍도라는 인물이 10개 왕조의 재상을 지낸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 풍도는 황제가 바뀔 때마다 재상을 지냈지만 '간신'이라고 평가받지 않았다. 그 이유를 풍도는 "울타리 위에 자라는 풀"에 비유했다. 그는 바람이 부는 대로 움직였다. 강한 권력자가 등장하면 그에게 투신했다. 뻔뻔함이 극치에 이르렀다. 특히 오랑캐 거란에 투신했을 때는 그가 남긴 말은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항변했다.
"남조(南朝)의 아들이요, 북조(北朝)가 나의 아버지이니 나는 양조의 신하이다. 어찌 구분을 하랴!"
자기 합리화의 극치다. 그는 오랑캐 거란의 야율덕광(耶律德光)의 태부(太傅), 즉 황제의 스승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다. 이상한 것은 이후의 후한 고조 유지원(劉知遠), 후주 태조 곽위(郭威)도 그 일로 인해서 그를 비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자기 왕조의 태사로 계속 임명했다. 불가사의한 일이다.
둘째, 풍도는 지조는 없었지만 독서광이었다. 그는 성현들의 책을 읽느라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잊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출신이 미천했다. 조상들은 농사를 짓거나 서당의 훈장을 지냈다. 풍도는 집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다. 먹는 것과 입는 것에 까다롭지 않았다. 큰 눈이 내려 문을 막았을 때도 독서만을 할 정도였고 그 소문은 밖으로 퍼져나갔고 장강 남북으로 최고의 명사였다. 어떤 왕조이든 간에 모두가 그를 초빙하여 그를 관료에 앉히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독서광이기는 했으나 역사에 남을 만한 저작은 하나도 없었다. 시만 몇 편 남아 있다.
셋째, 풍도는 비록 지조는 없었으나 탐관오리는 아니었다. 특히 풍도는 권력자에게 환심을 사려고 아부만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전형적인 탐관오리들과는 전혀 달랐다. 풍도는 자기 검열이 엄격한 인물이었다. 그는 백성들의 고통을 살폈다. 풍도는 고향에 기근이 들자 전 재산을 털어 고향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자신은 초가집에서 힘든 생활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가 고관이 되어 고향집을 방문했을 때 사람들 앞에서 절대로 우쭐대지 않았다. 비록 고위 관료였으나 직접 농사를 짓기도 하고 땔감을 구해오기도 했다. 때로는 일손이 부족한 농촌을 돕기도 했다. 민생에 철두철미한 인물이었다.
넷째, 돈과 여색을 절대로 탐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가들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두 가지 문제다. 하나는 돈 문제이고, 하나는 여자 문제다. 풍도는 이 두 가지 문제에 문제가 없었다. 당시 후당과 후량이 전쟁을 벌일 때 어떤 장군들이 강탈한 미녀를 풍도에게 보내왔다. 풍도는 그녀를 당분간 자기 집에서 생활하게 한 뒤 고향집을 수소문하여 돌려보냈다.
지조는 없었지만 청렴하고 백성을 사랑했던 '인재'
그는 세상을 떠날 때도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을 쓸모없는 땅을 골라 장례를 치러달라고 부탁했다. 다른 권력자들처럼 후장(厚葬)을 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또 호화로운 수의도 입히지 말고 보통의 거친 삼베로 안장해달라고 했다. 대만(타이완)의 국학 대가 남회근(南懷瑾)은 풍도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73살 동안 살다가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정치권에서 시비 분쟁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 누구도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간단한 인물이 아니었다. 혼란의 시기에도 그는 장수했다. 그는 자칭 '장락노인(長樂老人)'이라 자랑했다. 오랫동안 인생을 즐기며 살았다는 의미다. 당시로는 정말 장수한 인물이다. 중국 역사상 두 사람이 이렇게 자랑했다. 한 사람은 건륭황제로 자신을 완벽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했다. 신하의 신분으로는 풍도가 유일하다.
그는 학문이 뛰어나지 않았다. 시작 몇 수 남긴 것이 전부다. 그의 시 우작(偶作)의 마지막 구절에서 그의 입장을 들어볼 수 있다. 그는 '이리와 호랑이들이 우글거리는 가운데서도 나를 똑바로 세웠다(狼虎从中也立身)'는 시로 자신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의미인즉슨, 자신의 마음만 올바르게 서면 사상과 행위는 떳떳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오랑캐 왕조의 황제들을 호랑이와 이리로 보았다. 그의 삶은 청렴, 엄격, 순박했고, 도량은 당연히 크고 넓었다. 정적들을 끌어안고 원수들을 감화시켰다. 그가 학문적인 소양이 있다거나 지조가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적대자들을 포용하고 감화시킨 점은 평가해야 할 것이다."
'지조' 없는 풍도였다고 하지만 적어도 그는 청렴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백성을 사랑했다. 요즘 한국 정치의 유행이 되어버린 고령의 책사들뿐 아니라 정치 지도자들에게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이다. 정치가들은 '역사'를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당대에 발복(發福)을 하려고 과욕을 부릴 때 우리 사회의 모습은 더욱 황폐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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