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병신년(丙申年)으로 붉은 원숭이해이다.
새해가 되면 정치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경제가 곤궁해지더라도, 몸 하나만이라도 건강하기를 꿈꾸는 것이 평범한 필부들의 삶이다. 인간에게 불로장생은 최고의 바람이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집안에 세 가지 신을 모시고 산다. '장수', '승진', '재물'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가 결국 인간 삶의 최대의 꿈인 셈이다.
최근 중국에서 재미있는 글이 발표되었다. 지난 1월 4일 <과학기술통신(科技迅)>이란 중국 매체에 오해염(吳海艶)이 쓴 "진시황이 그토록 찾았던 불로장생의 선약은 결국 키위가 아닐까?"라는 글이다. 이 글은 진시황이 서복(徐福)에게 불로초를 찾아오라고 동남동녀 3000명과 함께 동쪽으로 보낸 이야기와 연결된다. 서복이 찾으러 간 불로초가 일본의 이와이시마(祝島)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불로초 '천세(千歲)'라는 식물인 것 같고, '천세'는 결국 키위라는 이야기다.
서복이 진시황을 위해 찾아다닌 불로초는 키위?
서복이 중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는 키위가 중국이 원산지이고 특히 진시황이 살고 있던 서안 근처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야생 미허우타오(彌猴桃)였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서복이 진시황을 속였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일본에 눌러 앉았다는 내용이다. 이 가설의 진위 여부는 논외로 하자. 관심은 키위의 문제이다. 그런데 키위라는 과일이 중국이 원산지였고, 일찍이 <시경>에도 기록된 과일이 어떻게 뉴질랜드로 넘어가 세계에서 뉴질랜드의 대표 과일이 되었는지 살펴봐야겠다.
키위(Actinidia chinensis Planch)는 중국이 원산지다. 1904년 뉴질랜드로 가서 상품화된 이후에 다시 중국으로 수입되면서 치이궈(奇異果)라고 불리고 있다. 키위(kiwi fruit)는 다래과 덩굴성 낙엽과수이다. 원산지는 중국 양쯔 강 연안이다. 20세기 들어 중국에서 뉴질랜드로 전해져 개량을 거듭하여 오늘날 키위가 되었다.
열매 형태가 갈색 털로 덮여 있어 뉴질랜드에 서식하는 '키위'라는 새와 닮아 키위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양다래 혹은 참다래라 부른다. 뉴질랜드에 서식하는 키위 새는 원시적인 새로 날개는 없고 털 모양의 깃털이 온 몸에 나며 크기는 닭만 하다. 낮에는 땅속, 바위틈, 나무구멍 등에 있다가 밤에 나와 활동하며 '키위 키위'하고 울기 때문에 이름을 '키위'라고 했다.
중국에서는 키위를 미허우타오(彌猴桃)라고 한다. '미허우(彌猴)'라는 말은 히말라야 원숭이(Macaca mulatta), 혹은 붉은 털 원숭이를 뜻한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키위의 의미는 '붉은 원숭이가 좋아하는 복숭아'다. 올해가 붉은 원숭이해이고, 건강과 장수를 꿈꾸었던 진시황이 그토록 찾았던 불로초 선약이 키위라니? 재미있는 연관성이 아닐 수 없다.
서복의 고사에서 삼신산을 한국은 금강산, 한라산 그리고 두류산이고, 불로초는 산삼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서불과지(徐巿過之)'를 근거로 제주도를 거쳐 갔으며 제주에는 '서복공원'이 있고, 서복과 관련된 연관성을 주장한다. 일본의 기록에 따르면 서복이 말하는 삼신산은 일본의 혼슈(本州), 시코쿠(四國), 규슈(九州) 3개 섬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요즈음은 한-중-일 3국이 서복을 상호 연구하고 교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해염(吳海艶)은 서복이 일본에서 찾고자 했던 불노초가 키위라는 근거를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일본의 서복회 이사장을 지낸 시게무라 사다오(重村定夫)가 자신의 고향 이와이시마(祝島)에 불로초가 있는데 오늘날까지도 전설로 전해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와이시마는 세토(瀨戶) 내해로 혼슈(本州), 시코쿠(四國), 규슈(九州) 3개 섬이 둘러싼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삼신산이라는 의미다.
이 섬은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지만 옛부터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섬의 깊은 계곡에 일종의 신기한 덩굴 과일이 있는데 속명이 '카카(窠窠)'라 했다. 일본 고적에서 그것을 '천세(千歲)'라고 불렀다. 먹으면 1000년을 살 수 있는 식물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불로초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크기가 호두알 정도 크고 즙이 많으며 단맛이 나는 과일이라고 보았다. 식용하면 1000년을 불사한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 섬의 사람들 사이에서 이것을 먹으면 수명을 3년 3개월 더 늘린다는 전설도 남아있다.
이와 관련하여 19세기말 일본 식물학자 마키노 도미타로(牧野富太郞 : 일본의 식물학자. 독학으로 식물 분류학을 연구하여 1889년 일본 식물에 처음으로 학명을 붙여 신종 1000여 종, 신변종 1500여 종을 발표하였다. 저서에 <일본식물지도편>, <마키노 식물도감> 등이 있다)는 이 신비한 식물을 찾으러 노력한 끝에 마침내 '천세'의 표본을 채취할 수 있었다. 그는 표본을 채취한 뒤 너무도 기쁜 나머지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것은 내가 가장 발견한 가장 귀중한 발견으로 그것의 가치는 형용할 수 없다"라고 흥분했다.
이와이시마의 민간에는 이 식물의 가지로 만든 지팡이가 있는데 이를 '봉래장(蓬萊杖)'이라 불렀다. 삼신산의 하나인 봉래와도 관련을 맺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오이시마의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서복이 당시 자신들의 섬을 거쳐 갔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한 근거로 해안의 암석에 석각된 바둑판이 있는데 서복이 남긴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천세'란 어떤 식물인가? 이와이시마의 공무원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천세'는 학명이 바로 키위(Actinidia chinensis Pianch)였다. 따라서 서복이 찾던 불로초를 키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키위는 뿌리와 과일은 사람의 기를 조절하고 침이나 체액의 분비를 촉진하며 몸에 윤기가 나게 하고, 해열과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혈액의 순환을 도와 부종을 내리게 하는 효과가 있다. 과육은 녹색이고 과피는 부드럽고 털이 있다. 지금 우리가 먹는 것은 이미 인공재배를 한 품종이다. 과실도 몇 배로 커졌다. 장복하면 신체가 건강하고 장수할 수 있다.
키위의 고향은 중국이었다?
그렇다면, 키위의 고향이 중국이 맞는지 살펴보자. 미허우타오는 양도(陽桃), 모도(毛桃), 산양도(山洋桃), 모리도(毛梨桃)라는 별칭이 있다. 선진(先秦) 시기 <시경>에도 키위의 기록이 나온다.
"습지에 장초(萇楚 : 미허우타오의 옛 이름)가 있다."
명나라 때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에서는 미허우타오의 형태와 색깔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 형태가 마치 배와 같고, 색깔은 복숭아 같다. 원숭이가 좋아해서 그러한 명칭을 얻었다."
중국 절강성 대주시(臺州市) 황암구(黃岩區) 초갱촌(焦坑村)에는 심산에서 이식해 온 200년이나 된 미허우타오 나무가 자라고 있다.
중국에는 미허우타오(彌猴桃)라고 불리는 식물이 매우 많다. 식물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미허우타오에 속하는 식물은 52종 이상이다. 그 가운데 대부분은 식용이다. 현재 중국의 시장에서는 주로 '중화 미허우타오'로 1984년 개량하여 신종 '메이웨이 미호우타오'가 판매되고 있다. 야생 분포 지역은 북방의 섬서, 감숙, 하남 그리고 남방은 양광과 복건, 서남의 귀주, 운남, 사천 및 장강 중하류의 각 성에 모두 재배되고 있다. 특히 장강 유역에 가장 많이 자라고 있다.
미허우타오(彌猴桃)라는 이름은 당대(唐代)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한다. 당나라의 <본초심유(本草拾遺)>에 미허우타오를 "약용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주로 관절통, 반신불수, 장년의 백발, 치질 등에 약효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1200년 전, 중국은 이미 정원에 미허우타오(彌猴桃)를 몇 그루씩 심어놓고 있었다.
과일로 식용하는 것 이외에도 미허우타오의 잎과 꽃이 아름다워 관상화목으로 정원에 재배하게 된 것도 당나라 때부터다. 당대 시인 잠삼(岑參 : 715~770년)의 시 '태백산 동계의 이 선생 집에 머물며 동생과 조카에게 부치다(宿太白東溪李老舍寄弟侄)'에서 "정원의 우물가에 난간을 세우니 미허우타오가 넝쿨을 타고 오르네(中庭井闌上,一架獼猴桃)"라는 구절이 있다.
송대에 들어서 개보(開寶) 연간(973~974년)에 편찬된 <개보본초(開寶本草)>에는 미허우타오가 "이름의 하나는 넝쿨배(藤梨), 하나는 나무(木子), 하나는 원숭이배(彌猴梨)"라고 하고 "그 형태가 달걀 크기이고, 그 껍질은 갈색이며 서리를 맞고 나면 달기가 더하고 맛이 있다." 이러한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인들은 미허우타오를 일종의 야생 과일로 식용했다.
송나라 원풍 5년(1082년) 당신징(唐慎徵)은 <증류본초(證類本草)>에서 "이 과일은 맛이 달고 시며, 산 계곡에서 자라고, 등이 나무에 기생하며 잎이 둥글고 털이 있으며, 그 과일 형태는 오리 알 크기만 하며 서리를 맞으면 더욱 달고 맛있다"고 했다.
그러면 어떻게 키위라는 서양 이름을 얻게 되었고 서양에서 더 유명하게 되었을까? 서양인으로 중국에서 미허우타오를 최초로 수집한 인물은 영국의 식물학자이다. 그는 플랜트 헌터(Plant hunter)라고도 불리는 로버트 포춘(Robert Fortune)이었다. 그는 1840년 아편 전쟁이 발생하고 남경조약(1842년)이 체결된 다음 해인 1843년 런던원예협회의 위탁을 받고 중국의 각지를 여행했다.
그는 협회와의 계약을 맺고 "영국에서 재배된 적이 없는 중국의 관상용 혹은 실용의 식물과 종자를 수집했고 중국의 화훼 및 농업 분야의 자료를 수집했다." 그러나 미허우타오는 자웅이주(雌雄異株)로 포춘이 미호우타오의 암나무만을 수집해 갔기 때문에 번식시킬 수 없었다.
1899년 영국의 화훼종묘회사의 원예학자 윌슨(E. H. Wilson)이 중국 호북의 서부 지역에서 조사를 하던 중 미허우타오를 발견했다. 그 나무의 꽃이 아름답고 과실이 매우 단 것을 보고 영국으로 가져갔으나 상품화하지는 못했다. 미허우타오를 관상 식물로서 즐기는 정도였다. 이후 1904년 영국의 한 종묘회사에서는 미허우타오를 신종 상품에 등록하고 이후 미국과 프랑스에서 전문적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미허우타오가 서양으로 이주를 하게 된 것은 뉴질랜드 사람들의 성과였다. 그들은 후발 주자였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꽃으로만 재배하던 방법을 식용으로 발전시켰다. 1903년 뉴질랜드 북섬 서해안에 왕가누여자학교 교사였던 프레이저(M. I. Fraser)가 휴가를 맞아 중국 의창(宜昌)에 가 그곳에 거주하던 자매들을 만났다.
이후 1904년 2월 그녀는 귀국길에 미허우타오 종자를 뉴질랜드로 가져갔다. 그런 뒤 어느 학부형에게 주었다. 그 학부형은 이 종자를 다시 자신의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가 바로 현지에서 양을 치고 과수원을 하던 농장주 엘리슨(Allison)이었다. 엘리슨은 6년간의 노력을 거쳐 마침내 1910년 키위를 과일로 재배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하여 뉴질랜드에서 최초에 성공한 농장이 되었다.
마침 뉴질랜드 지역이 미허우타오가 자라기에 토양과 기후가 적당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지인들의 입맛에 잘 맞았다. 비타민도 풍부했다. 따라서 지속적인 개량을 통해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뉴질랜드에 간 중국 과일 미허우타오는 키위(Kiwi)라고 명명되고 뉴질랜드가 세계 최대 생산국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결국 인간이 영원히 늙지 않고 죽지 않는다는 것은 꿈일 뿐이다. 진시황이 오매불망 구하고자했던 먼 동쪽 바다 건너에 있다던 불로초도 사실은 내 주변에 있었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한다. 붉은 원숭이해에 원숭이가 좋아해 이름 붙여진 미허우타오를 '불로초'로 생각하며 건강을 챙기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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