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와 비리로 중국 역사에 길이 남을 부를 축적했던 청대 탐관 화신(和珅)의 이야기를 이어가려 한다.
1940년대 쓰인 후 중국 학술사의 중요한 고전이 된 장춘밍(張純明, 1902~1984년)의 책 <중국정치 이천년(中國政治二千年)>에는 중국 정치의 중요한 특징으로 독직(瀆職)을 들고 있다. 그는 중국 정치사가 탐관오리들로 가득 차 있다고 술회하고 있다. 존경 받을 만한 '청백리'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의 정사(正史)를 기록한 것으로 인정받는 <이십사사(二十四史)>에 청백리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순리전(循吏傳)'을 보면 청렴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청렴'은 관리가 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었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청렴'은 관리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이었다. 그렇다면, 중국의 관료사회에 왜 '청렴'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최고 통치자인 황제의 측근으로부터 시작된다. 과거 중국의 권력자들은 권력의 확장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자신의 신하가 청렴한 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다. 중국 역사에서 성군으로 꼽히는 건륭제가 최고의 탐관 화신을 측근에 두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건륭제로부터 총애를 받은 다섯 가지 비결
중국중앙방송(CCTV)의 <백가강단(百家講壇)>에서 '화신'에 대해 강의한 지롄하이(紀連海)의 설명에 따르면 건륭제가 화신을 총애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화신은 황제의 마음을 읽고 그것에 맞게 대처했다. 1786년(건륭 51년)에 대만(타이완)에서 린수앙원(林爽文)의 반란이 일어났다. 건륭제는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대신들의 의견을 듣고자 어전 회의를 소집했다. 그러자 대신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결론이 나지 않자 건륭제는 자신의 위세를 보이기 위해 직접 진압에 나서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대신들은 모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머리만 조아릴 뿐이었다.
그러자 화신은 황제께서 직접 출정하시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건륭제는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 화신이 자신의 속마음을 너무도 잘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신의 주장은 이번 반란이 대만을 통치하는 청조 관리들이 문제라고 일갈했다. 그러니 황제께서는 대만을 통치하는 관리들을 처벌하고 신임 관리를 파견하여 사건을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이어서 화신은 황제께서는 백성에게 덕을 보여주시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었다. 건륭제가 어찌 화신을 총애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둘째, 화신은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능수능란하게 처리했다. 1770년 건륭제 70수 축하 잔치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어전 회의를 개최하고 있는데 티베트에서 급한 상소문이 올라왔다. 상소문은 티베트 어로 쓰여 있었다. 문제는 대신들 가운데 티베트 어를 해독할 인물이 없었다. 그러나 화신은 어린 시절 함안궁(咸安宮)에서 공부할 때 티베트 어를 배워두지 않았던가? 화신은 즉시 상소문을 해석하며 읽어 내려갔다. 그 내용은 티베트의 종교 지도자 판첸라마(Panchan Lama) 6세가 건륭제의 70수 축하연에 참석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건륭제는 즉시 한어, 만주어, 티베트 어로 조서를 내리고 환영의 뜻을 발표했다. 그리고 청조의 서양 오랑캐 담당 외교 기관인 이번원(理藩院)의 책임자로 화신을 임명했다. 이렇게 화신은 청조의 모든 외교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건륭제는 피서산장에 판첸라마 6세가 머물 궁궐을 건설하도록 지시하고 그 책임도 화신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피서산장에 라마교 궁궐이 건축되게 된 것이다.
셋째, 화신은 건륭제와 함께 슬퍼하고 기뻐했다. 화신은 황제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탁월했다. 건륭제는 효심이 지극했다. 건륭제의 모친 효성헌황후 뉴호록씨(孝聖憲皇后 鈕祜祿氏)는 1777년(건륭 42년)에 세상을 떠났다. 청 왕조에서 가장 장수한 황태후다. 황태후 생전에 건륭제는 궁녀들이 모친의 머리를 빗길 때마다 떨어지는 머리칼을 모두 모아 금으로 만든 상자 안에 넣어 보관했다. 지금도 자금성 안에 그 상자가 보관되어 있다. 건륭제는 모친이 사망하자 3일간 식음을 전패하고 무릎을 꿇고 모친을 기렸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건륭제에게 건강을 보존하시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화신은 달랐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건륭제와 함께 3일간을 황제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제와 똑같이 식음을 전폐했다. 마음의 고통을 자신과 함께 하고 있으니 황제가 어찌 마음에 두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넷째, 화신은 건륭제의 아들 가경제보다도 더 깊이 황제를 이해하고 있었다. 건륭제가 황위를 가경제에게 '선위'할 무렵은 백련교도(1795~1804년)들의 봉기가 9년 동안 계속되던 시기였다. 어느 날 건륭제는 화신을 불렀다. 단독 접견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건청궁에서 남쪽을 향해 앉았다. 건륭제 옆에는 가경제도 함께 있었다.
그런데 건륭제와 화신은 서로 중얼거리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들인 가경제는 이 두 사람의 대화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 시간 쯤 지나자 건륭제가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화신은 백련교의 두목의 이름인 서천덕(徐天德)과 구문명(苟文明)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이후에도 건륭제는 계속 혼자 중얼거렸다. 2시간이 지나자 건륭제는 화신에게 집에 가라고 했다.
가경제는 이 두 사람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며칠 후 가경제는 화신에게 그날의 일에 대해 물었다. "부친과 당신이 한 문자 유희가 무엇이요?" 그러자 화신은 건륭제가 백련교의 주문을 읊으면서 백련교 두목들의 이름을 물어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부친이 말씀하시는 내용을 어찌 알았소?" 화신은 대답했다. "황제의 입술을 보고 알았습니다." 화신이 건륭제를 그 정도로 깊이 이해하고 있었으니 어찌 신뢰하지 않았겠는가?
다섯째, 화신은 건륭제의 걱정거리를 해결해 주었다. 건륭제는 중국 역대 황제와 자신의 업적을 비교하기를 좋아했다. 할아버지 강희제는 근면하기로 유명한 황제였다. 그러나 할아버지를 뛰어넘고 싶었다. 지금 황실의 경제는 문제가 없다. 화신이 내무부를 맡은 이후 재정이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85세의 건륭제는 중국 역사에 선례가 없는 '선위'를 함으로써 다른 황제와의 차별화를 꿈꿨다. 어떻게 해야 더욱 폼 나게 할 수 있을까? 중국 역대 황제 중 '선위'를 한 황제는 당고조 이연(李淵)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둘째 아들 이세민이 다른 형제를 죽이는 상황에서 정치에 신물을 느껴 어쩔 수 없이 선위했을 뿐이었다.
재위 60년이던 1795년 건륭제는 어떻게 하면 선위의 의미를 극대화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해결사는 역시 화신이었다. 그는 청나라의 70세 이상 노인들과 황제가 함께 식사 자리를 가질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이벤트는 할아버지 강희제도 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강희제는 한 겨울에 노인들을 불러 자금성에서 음식을 대접했었다. 음식이 식어 효과가 없었다.
이를 거울삼아 화신은 1795년(건륭 60년) 정월 초나흘 자금성 황극전 앞으로 1550명의 노인들을 초대하여 중국식 샤브샤브인 훠궈(火鍋)를 대접했다. 날씨는 추웠지만 불과 함께 따뜻한 국물이 있었으니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욱이 황제가 노인을 존경하니 효의 근본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칭송이 자자했다.
황제에게 대접 받은 노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입소문'을 낼 터이니 효과는 만점이었다. 게다가 건륭제가 60년의 재위를 마치고 스스로 아들에게 '선위'를 하니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일거삼득이었다. 이 이벤트의 기획자가 화신이었으니 어찌 곁에 두고 싶지 않았겠는가?
건륭제는 역사에 기록될 만한 황제로 남기 위해 세 가지를 생각했다.
첫째는 덕을 베푸는 일이었다. 자신의 덕을 보여주기 위해 권력을 아들에게 '선양'했다. 둘째는 전공(戰功)이다. 그는 외적과의 전투에서 십전 십승이었다. 그리하여 '십전 노인'이라 불렸다. 마지막으로 학술 분야의 치적이었다. 할아버지 강희제가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완성했다는 점을 생각했다.
건륭제는 역사에 길이 남을 유서(類書)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하기로 결정했다. <사고전서>의 편찬은 강희제가 편찬한 <고금도서집성>이 원문을 모두 실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흡하다고 여겨 시작된 것이다. 그리하여 건륭제는 1741년(건륭 6년)에 천하의 서(書)를 수집한다는 소(詔)를 내려 1772년(건륭 37년)에 편찬소(編纂所)인 '사고전서관'을 개설하였다.
1781년에 <사고전서>의 첫 세트가 완성되었다. 그 후 궁정에 4세트(열하(熱河)의 문진각(文津閣), 북경 원명원(圓明園)의 문원각(文源閣), 자금성 안의 문연각(文淵閣), 심양의 문삭각(文溯閣)), 그리고 민간에 열람시키는 3세트 등 도합 7세트가 만들어졌다. 수록된 책은 3458종, 7만9582권에 이르렀으며, 경(經)-사(史)-자(子)-집(集)의 4부로 분류 편집되었다.
분류 방법으로 경은 사서오경, 사는 24사와 자치동감, 자는 제자백가, 집은 한부, 당시, 송사, 원곡, 원명 소설 등을 포함시켰다. 특히 <홍루몽>과 <석두기>를 원명 소설에 포함시켰다. 이를 주장한 이가 화신이었다. 이 작업은 매우 고단한 작업으로 책임을 졌던 학자들이 과로사하기 일쑤였다. 10년간 편찬 작업을 했는데 마지막 2년을 약관 26세의 화신이 책임자가 되어 마무리했다.
탐관 화신의 말로
그렇다면, 화신은 어떻게 처벌되었는가? 그는 무엇보다 정적이 많았다. 권력을 장악한 이들의 숙명이다. 당연히 많은 이들의 분노를 사고 있었다. 그들은 여러 차례 화신을 탄핵하라고 주청했다. 그러나 건륭제라는 보호막이 있었다.
화신의 몰락 배후에는 결정적으로 가경제가 있었다. 화신이 득세할 때는 누가 다음 황제가 될지 몰랐다. 한족과 달리 만주족은 장자 계승이 아니었다. 만주족은 이른바 '밀건법'이라는 방법으로 계승했다. 비밀리에 다음 황제의 이름을 써놓는 것이다. 하나는 황제가 가지고 있고, 하나는 자금성 건청궁의 황제 보좌 뒤에 걸려있는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 뒤에 '건저갑(建儲匣)'에 넣어두고 황제가 붕어한 뒤 개봉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건륭제의 아들은 20여 명이었다. 화신은 향후 누가 황제가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1794년(건륭 59년)에 태자를 선택하게 되었다. 청조의 정치 일정 중 매년 10월 초하루에 책력이 발간된다. 특히 선위를 하게 되었기에 이날 다음 황제의 연호가 결정된다. 따라서 너무도 급하게 건륭제의 15번째 아들 가경제가 다음 황제로 결정되었다. 화신은 건륭제를 태상황으로 모셔 권력을 유지해보려 했으나 가경제는 부친이 붕어하기를 기다려 화신을 처벌한다.
1799년(가경 4년) 정월 초사흘 건륭제가 붕어했다. 가경제는 곧바로 화신의 모든 관직을 삭탈하고 야유하듯이 "네가 그렇게 존경하는 건륭제께서 붕어하셨으니 너는 청동릉(淸東陵)으로 따라가라"는 성지를 내린다. 다음날 분이 풀리지 않은 가경제는 성지를 변경하고 곧바로 화신을 체포하도록 지시했다.
화신에게 다시 건륭제가 붕어한 지 15일째인 정월 18일 스스로 목을 매어 자진하도록 성지가 내려졌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49년의 생을 마감한다. 화신은 생전에 하북성 계주(薊州)에 호화로운 분묘를 수축했었다. 민간에서는 황제릉에 비유하여 '화릉(和陵)'이라고도 불렸다.
지금은 천진시 관할 지역인 교수(橋水庫) 댐이 건설되는 바람에 수몰되었다. 댐에 물이 마르면 가끔 보이기도 한다. 그의 실제 묘지는 북경에서 서북 지역에 있는 창평시(昌平市)의 산자락에 있다. 중국에서 1990년부터 2014년까지 화신과 관련된 TV 연속극만 25편이 제작되었다. 그만큼 드라마틱한 인물이며 여전히 중국인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역사 속에서 권력의 옆에서 호가호위하는 인물들을 보면 '태양과 달'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태양이 권력의 중심이라면 그 권력을 호가호위하는 자들은 달과 같다. 태양의 빛이 사라지면 달빛도 사라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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