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2015년 한 해를 상징하는 '올해의 한자'로 청렴할 '염(廉)'자를 선정했다. 지난 18일 중국 인민망(人民網)은 교육부 산하 국가언어자원조사연구센터,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 등과 공동 주최하는 '올해의 한자'에 '염' 자가 선정됐다고 전했다. '염'자가 선정된 것은 중국 시진핑 지도부가 몇 년째 추진 중인 강력한 부패 척결 캠페인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 역사에서 가장 부패한 관료는 누구일까? 청대 건륭제 시기의 관료였던 화신(和珅)이 있다. 2001년 <월스트리트 저널 아시아>가 선정한 '지난 1000년간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50인'의 명단에 오른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부패 정도는 상상을 초월하여 지금도 중국 역사극의 단골 메뉴가 되어 있다. 북경(베이징)을 여행해 본 독자들 중에 스차하이(什刹海)의 공친왕부(恭親王府)를 가 본 적이 있으리라. 이곳이 바로 화신의 사저였다. 사저가 궁궐과도 같았다. 그의 권력은 당시 나는 새도 떨어트릴 정도로 대단했다.
그는 만주족 뉴고록씨(紐祜禄氏) 출신이었다. 만주족은 직업을 세습하는데 화신의 집안은 대대로 경차병(輕車兵)이었다. 이후 아버지 상보(常保)가 승진하여 복건 도통(都統)이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복건성의 군사 책임자였다. 이런 배경으로 북경 자금성 안의 함안궁(咸安宮)에 있는 귀족 자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불행이 시작되었다. 세 살이 되었을 때 모친이 동생을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 9살 때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천애고아가 되었지만 그는 낙담하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이 학교에는 좋은 선생님들이 많았다. 주로 학문이 뛰어난 한림(翰林)들이 귀족자제들을 가르쳤고, 전문가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봉건 사회에서는 부모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귀족 관료들에게는 3처 4첩이 있었다. 따라서 화신은 계속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화신은 유가 경전을 열심히 공부했고, 티베트어와 위구르어 등을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 만주족들은 과거 시험을 잘 치지 않았다. 과거 시험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만주족으로 진사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청대 전체를 통틀어 10명 내외였다. 그들은 통치 계급이었기 때문에 과거를 보지 않아도 관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화신은 과거 시험에 응시했다. 그러나 화신은 너무 잡학에 몰두한 나머지 '팔고문' 형식의 과거 시험에 계속 낙방했다.
화신은 과거를 포기하고 황실 의장대에 들어갔다. 황실 의장대는 인물이 좋아야 채용되었는데, 화신은 인물이 준수했다. 그는 황제와 마주칠 기회를 학수고대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어느 날 행차 중의 건륭제가 <논어> 이야기를 꺼냈는데, 의장대로 수행하던 화신이 그 <논어> 이야기를 받았다. 건륭제는 의장대에 이런 인재가 있음에 놀라 그를 가까이 두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화신은 든든한 배경을 잡게 되었고 마침내 건륭제의 총신이 되었다.
가장 존경받는 황제 밑에 있던 최고의 부패 신하
건륭제가 누구인가? 중국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황제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건륭제는 집권 초기부터 만주족과 한족의 반목을 막고, 관료들의 붕당과 황족의 결당을 금지하는 등 내치에 성공한 황제였다. 대외적으로 준가르, 위구르, 타이완, 미얀마, 네팔 등의 평정을 통해 많은 무공을 세웠다. 외적들과 열 번 싸워 열 번을 모두 이긴 '십전노인(十全老人)'이었다.
문화적으로는 건륭제 자신이 지은 시만 4만여 수에 달했다. 황실 도서관의 류서들을 정리하여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하는 등 저술 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건륭제는 내치와 외치에 완벽한 황제였다. 오죽하면 한족들이 야사에서 만주족인 건륭제의 어머니가 한족이었다고 주장할까? 그러나 위대한 황제도 측근의 발호에는 눈이 멀었다.
건륭제는 조부인 강희제가 61년간 황제 직위에 있었기에 손자인 자신은 할아버지보다 더 황제 노릇을 할 수 없다는 논리로 황제 재위 60년 만에 스스로 은퇴하고 아들 가경제(嘉慶帝)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권력 사회에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건륭제의 총신 화신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태상황과 현임황제의 사이에서 화신은 태상황 건륭제의 측근이었다. 당연히 현임 황제인 가경제는 눈에 가시인 화신을 손 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799년 정월 건륭제가 89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이때가 가경 4년이다. 가경제는 당일 화신의 죄목으로 20가지를 단죄하고 전 재산을 몰수했다. 몰수 재산은 백은 11억 량에 달했다.
화신이 축재한 재산의 가치는 어느 정도였을까? 청대 태평성대였던 건륭제 시기 매년 세수입은 7000만 량이었다. 화신의 재산은 당시 청조 정부의 15년간의 국고 수입과 맞먹는 액수였던 것이다. 당시 백은의 가치를 현재의 가치로 추산하면 66조 원에 달하는 정도라고 하니, 페이스북 회장인 마크 저커버그의 재산(약 51조 정도로 추산)을 앞지른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는 “화신이 죽자, 가경제는 배가 터졌다”라는 말이 유행했다. 국가 재정이 갑자기 늘었다는 말이다.
그의 부패 내용을 살펴보자. 그는 3000칸의 저택을 보유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대신이 보유할 수 있는 집의 크기가 99칸이었으니 30배가 넘는 큰 집이었다. 토지가 8000경(頃)으로 1경이 6.66666헥타르다. 따라서 5만2800헥타르로 1헥타르가 1만 제곱미터이니, 5억8600만 제곱미터이다. 이것을 평수로 계산해 보면, 1억8000만 평에 이른다.
화신은 청조의 재정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은행이었던 은포(銀鋪) 42곳, 전당포 75곳을 보유하고 있었다. 금이 6만 량, 큰 금괴인 대금원보(大金元寶)가 10만 량이었고, 작은 은괴인 소은수색원보(小銀搜索元寶)가 566만 량이었다. 은 덩어리인 은정(银锭)이 900만 개, 서양돈(洋錢)이 5만8000원이었고, 동전(銅錢)이 150만 문(文)이었다. 그 밖에 길림산 인삼이 600근, 옥여의(玉如意)가 1200병(柄), 진주목걸이 230개, 계원(桂圓)진주 10알, 대형 루비 10알, 대형 사파이어 40알, 은그릇 40세트, 1미터 크기의 진주나무 11개, 능라주단이 1만4300필, 울과 면직 의류가 2만 벌, 여우털이 550장, 담비털이 850장, 호피 등 동물 가죽이 5만6000장, 동기와 주석 기물이 36만1000건, 유명 도자기가 10만 개, 고급 침대가 24개, 서양 시계가 460개, 사계절 최고품 의류가 7000벌이었다. 화신의 저택에 근무하는 사람만 606명이었고, 부녀자들이 600명이었다. 그가 거느린 식솔들만 1206명이었다.
화신이 이렇게 큰 불법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제도에 있었다. 그가 담당한 직책은 청대 주요 권력인 내각수석대학사, 영반군기대신(領班軍機大臣), 이부상서, 호부상서, 형부상서, 이번원상서(理藩院上書)에 더하여 내무부총관, 한림원장원학사, <사고전서>총편관, 영대위내대신(領待衛內大臣), 보군통령(步軍統領) 등 권력 핵심의 보직을 한 손아귀에 장악하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배경에는 건륭제의 과도한 신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부패 관료가 돈을 긁어모은 방법들
그렇다면, 그는 어떤 방법으로 돈을 긁어모았을까?
첫째, 수뢰(受賂)였다. 수뢰는 직접 뇌물을 받는 것을 말한다. 관료의 승진과 관련된 뇌물을 받았다. 매관매직이다.
이와 관련하여 국태(國泰)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산동성의 사음현(泗陰縣)의 말단 현관이었다. 그는 승진하고 싶었다. 이 소식을 접한 화신은 1780년 건륭제가 5차 남순하는 정보를 흘렸다. 건륭제가 태산에 들러 제천의식을 하고 공자묘를 방문할 테니 그에게 준비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국태는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마침내 건륭제가 산동의 사음현을 방문하자 길옆에 눈에 띠는 큰 건물이 서 있었다. 세외도원(世外桃園)이 아닌가?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건륭제는 관심을 보였다. 건물을 지은 인물이 누구인지를 하문했다. 화신의 소개로 국태는 황제를 접견할 수 있었다. 황제의 질문에 답변도 잘했다. 마침내 말단 현관에서 바로 도대(道臺)의 직책을 하사받았다. 도대는 지금의 시장직이었다. 화신은 국태로부터 뇌물을 20만 량을 받았다.
두 번째 방법은 독직(瀆職)이다. 직권 남용을 의미한다. 화신은 28세에 호부상서가 되어 49세까지 21년간 직책을 담당한다. 21년간 청나라의 재정을 완전하게 장악했다. 사실상 화신의 부패는 중국 정사 <청사고(淸史稿)>에는 기록된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누구도 감히 그의 비행을 기록할 수 없었다.
과거 북경성에 들어올 때는 세금을 납부해야했다. 이른바 세관이 있었다. 그곳은 숭무문(崇武門)에서만 징수했다. 이곳의 책임자도 화신이었다. 세금을 어떻게 받는가? 주로 대상인, 관리, 과거 응시자들로부터 징수했다. 과거 시험에는 성급 시험에 합격한 거인(擧人)들이 매 3년마다 진사가 되기 위해 북경성에 들어온다. 이때 세금을 징수했다. 화신은 궁궐 내의 물자출납의 책임자인 내무부의 총관이었다. 궁궐에 필요한 모든 물자의 출납을 책임지는 곳이었다. 이러한 직책을 통해 뇌물을 받았다.
세 번째는 관료들을 협박하는 방법으로 뇌물을 챙겼다. 화신은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겸직하고 있었다. 이부란 인사와 관료 조직의 책임자였다. 관료 승진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청조 당시는 25개성이 있었고 손사의(孫士毅)는 안남총독이었다. 그가 황제를 접견하러 북경에 왔다. 그는 보기 드문 청관이었다. 그래도 황제를 접견하는 것이니 선물은 하나 가져왔다. 진주로 만든 비연호(鼻煙壺)였다. 화신이 이를 탐내했다. 손사의가 거절했다. 이후 군기처를 방문한 손사의는 화신이 자기가 황제에게 준 선물을 갖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이후 관료들은 황제와 화신에게 줄 선물을 같은 것을 갖고 와서 화신이 먼저 고르게 했다.
네 번째, 합법적인 경영을 통해 치부했다. 중국은 주나라 이후 사농공상이라는 계급이 있었다. 상인은 가장 낮은 신분이었다. 사대부들은 장사를 해서 치부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화신은 달랐다. 그는 온갖 사업체를 합법적으로 운영했다. 그리하여 전당포, 양곡상회, 골동품, 차 판매, 비단 장사, 가구점, 활과 화살 파는 집, 마차운송업, 탄광 등 취급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기와까지 파는 가게를 운영하기도 했다. 현대적 의미의 상업은 모두 취급했다. 여기에 더하여 토지 매매업까지 손을 대었다. 건륭 말년 백련교 봉기가 나자 지주들은 현지의 토지들을 팔고 북경으로 모여들었다. 이런 헐값의 토지를 사서 모두 챙겼다.
화신은 건륭의 6차 남순 때 또 돈을 벌 계획을 한다. 양주의 염상 왕여룡(汪如龍)과 내통하여 서신을 보냈다. 그리고 건륭제가 양주를 방문하는 일정을 알려주고 준비를 시켰다. 와여룡에게 미인을 준비시키라고 했다. 원래 건륭은 위구르 지역의 회부(回部)의 용비(容妃)를 사랑했다. 이 미인이 몸에 향기가 난다고 해서 향비(香妃)라 불렀다.
그런데 그의 친정인 회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향비는 마음이 불편해 시름시름하다 세상을 떠났다. 화신은 건륭제의 마음을 얻기 위해 왕여룡에게 미인을 대령했다. 결국 왕여룡은 염상의 최고지위인 양회염정(兩淮鹽政)의 직책을 내리도록 했다. 그러자 왕여룡은 화신에게 뇌물 20만 량을 보냈다. 그러자 화신은 뇌물을 돌려보냈다. 이 직책을 어찌 20만 량 정도로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왕여룡은 다시 두루마리 그림 한 점을 보냈다. 그림 안에 수표 한 장을 넣었다. 그 수표가 얼마짜리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중국의 시진핑 체제는 왜 그토록 관료 부패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일까? 관료 부패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정권의 존립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료의 부패 문제는 뿌리가 너무도 깊다. 중국 역사 이래 관료 부패는 고질병이었다.
그 원인은 제도에 있다. 역사 문화적으로 관료가 되는 것이 치부의 수단이었다. 현직에 있을 때도 관료는 부패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은퇴하면 고향으로 돌아가 고리대금업으로 치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죽어서도 누구의 자손이라는 프리미엄을 누렸다. 이처럼 관료는 현직, 은퇴,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특권을 누렸다.
중국공산당 초기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민족학 학자로 유명한 왕아남(王亞南)은 이를 '삼위일체의 특권'이라 했다. 한번 관료는 평생 동안 꿩 먹고 알 먹는 자리였다. 관료 사회의 부패는 결국 최고 지도자의 엄격함이 결여될 때 반드시 발생한다. 화신으로 대표되는 중국 관료 부패의 모습은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다. 권력을 배경으로 사욕을 채우는 관료가 어디 화신 한사람이겠는가?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