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국에서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는 중국에서도 공전의 히트를 쳤다. 중국인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으며 다시 한번 '한류'의 존재감을 보여줬다. 중국에서조차 '치맥' 바람이 불 정도였다.
여주인공 천송이(전지현)의 '모관 운동'도 회자되었는데, 모관 운동이란 모세혈관 운동의 줄인 말인데, 인체 모세 혈관의 70%가 모여 있는 손과 발에 가벼운 진동을 주는 운동법이다. 모관 운동은 바닥에 등을 대고 바르게 누운 뒤 팔과 다리를 하늘로 들어 올려 가볍게 흔들어 주는 운동이다. 몸 전체에서 발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중국 전통 사회가 모세혈관이 집중된 발을 꽁꽁 묶었던 '전족(纏足)'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중국인들이 전지현의 모관 운동을 좋아하는 것을 보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전족'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중국 민간에서는 전족과 관련하여 "작은 발 한 쌍을 묶는 것은 눈물이 한 항아리다"라는 말이 있다. 여자 아이들의 멀쩡한 발을 강제로 묶는 일이니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뜻이다. 전족을 시작하는 연령은 4, 5세부터 시작해 3~4년의 시간을 요한다. 그런 뒤 7~8세가 되어야 초보적인 전족의 모양이 만들어진다.
그 과정은 이렇다. 먼저 뜨거운 물에 발을 담가둔다. 발을 계속 뜨겁게 한 뒤 부드러워지면 먼저 엄지발가락을 안쪽으로 구부린다. 그런 뒤 남은 네 개의 발가락을 발바닥 밑으로 다시 억지로 구부려 밀어 넣는다. 그리고 천으로 강하게 압축하여 묶는다. 그렇게 오랜 기간 두면 발등이 활모양으로 둥글게 구부러진다. 그걸 감내해야 하는 여자 아이들의 고통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전족은 정상적인 발을 묶기 때문에 피가 잘 통하지 않아 필연적으로 염증이 생긴다. 염증을 피하기 위해 날씨가 선선해지기 시작하는 9월부터 전족 '작업'을 시작했다. 전족을 전문적으로 하는 아줌마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멀쩡한 발을 묶으니 피가 통하지 않고, 발이 부어 고통에 눈물로 밤을 지새운다. 딸의 고통에 어미들도 함께 울었다.
전족의 기원
그렇다면, 전족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중국 역사에서 남당(南唐)의 마지막 황제 이욱(李煜937~978년)이 궁녀들에게 전족을 지시했던 것이 그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전족이 금지된 것은 1911년 신해혁명 이후이니 약 950여 년간 지속된 폐습이다. 이후 중국 역사에서 전족은 '삼촌금련(三寸金蓮)'이라는 표현으로 찬양되었다. 이 표현은 원대(元代)에 처음 등장했는데, 여자 아이들이 발을 묶고 있는 것을 '연꽃(蓮)'에 비유한 것이다.
전족의 크기와 관련하여 등급이 있었다. 1촌(寸)은 3.3센티미터다. 따라서 5촌(寸)은 16.5센티미터로 전족을 한 여자 가운데 가장 낮은 등급으로 '쇠 연꽃(鐵蓮)'이라 불렀다. 4촌은 13.2센티미터로 '은 연꽃(銀蓮)'. 3촌은 9.9센티미터로 최고등급인 '금 연꽃(金蓮)'이라 일컬어졌다. 다 자란 발이 10센티미터정도였으니 상상을 해보시라!
이에 더해 전족이 된 이후 싣는 신발을 '삼촌궁혜(三寸弓鞋)'라고 했다. 발의 모양이 활처럼 휘었다는 의미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봉건 사대부들은 전족을 이른바 '교낭(嬌娘, 매력적인 여자)'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기괴한 미의 기준이었던 셈이다.
중국인들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중국 전통 사회에서는 여자 발이 작은 것이 미의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서양의 역사에도 여성의 잘록한 허리, 하이힐을 싣는 방식도 남성 중심의 미의 기준이었지만 그래도 장애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중국에서는 전족을 해야만 결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시집을 보내려면 반드시 이 기괴한 '악습'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전족을 한 발은 기형이 되어 걸음도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걸을 때 뒤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악습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다.
중국의 역사에서 한당(漢唐) 시대처럼 강력한 통치력을 갖고 있을 때는 이런 폐습이 잘 나타나지 않았다. 이 시기 서역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교류가 활발했다. 그러나 송대처럼 영토가 축소되고 북방의 강력한 민족들. 요, 금, 몽고 등에게 위협을 당하면서 한족 문화는 오히려 유가문화를 강조하게 되었다. 유가문화의 핵심은 남권과 황권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이른바 밖에서 당하고 안에서 큰소리치는 상황이 등장한 것이다.
송대의 남자들은 여자에 대해 극히 억압적이었다. 청조 시기 만주족이 한족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변발'을 강요하여 굴복시키자 한족의 전통이었던 '전족'은 만주족에 대한 저항의 의미까지 갖게 되었다. 절반의 노동력을 잃게 만드는 것임에도 말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전족은 성적 만족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전족 어떻게 없어졌나?
'전족'의 폐습을 타파하려는 시도는 없었을까?
명대 만력(萬曆, 1563~1620 재위) 황제 시대에 한동안 '전족'을 금지시킨 적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전족을 그만두게 한 것은 바로 청대의 강희제 시절이다. 강희제는 8살에 황제에 올랐다. 강희 3년(1664년)이던 11살 때에 전족을 금지시켰으니 그의 탁월함이 어린 시절부터 발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린 황제가 백성의 고통을 해소시킬 생각을 한 것이다.
그는 전족 금지법을 공포해 강희 원년(1654년) 이후에 태어난 여자 아이들에게 "법을 어기고 전족을 하는 자는 만약 그 아이의 아버지가 관리일 경우, 이부(吏部)와 병부(兵部)에 넘겨 처분하고 형부(刑部)에 보내 곤장 40대를 때리고 유배를 보낸다. 그래도 가장이 이 법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한 달 간 유배를 연장하고 곤장 40대를 추가한다"라고 공포했다.
이러한 엄격한 조치로 '전족을 푸는 관습'이 일세를 풍미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부녀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조치들은 오래 가지 못했다. 봉건 세력이 완고했기 때문이다. 강희 7년(1657년)에 예부에서 상소를 올린 뒤 전족의 악습은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희제의 백성에 대한 배려는 저평가할 수 없다. 실제로 한족은 전족을 했지만 만주족은 전족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악습은 강희제가 전족을 금지시킨 지 250여년이 지난 1911년 신해혁명 이후 비로소 끝날 수 있었다. 누습이란 이렇듯 개혁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만주족 여자들의 전족은 어떠했을까? 만주족 여자들은 전족은 하지 않았지만 화분혜(花粉鞋)라는 신발을 신었다. 신발 밑바닥에 5~10센티미터 정도의 높은 굽이 달린 신발을 신었다. 화분혜는 '고저혜(高底鞋)' 혹은 '말발굽 바닥 신발(馬蹄底鞋)'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신발은 14~16센티의 높은 것도 있었고, 가장 높은 것은 25센티미터까지 있었다. 만주족은 꽃수를 놓은 신발인 수화혜(繡花鞋)를 신었는데 밑바닥에 화분(花盆)을 붙인 것 같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신바닥에 나무를 덴 뒤 일반적으로 흰 천으로 싸고 그곳에 수를 놓았다. 그리고 위치는 발바닥의 중심에 오도록 했다. 청대의 궁중 생활 장면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 가끔 볼 수 있다. 청대 여자들이 미를 추구하는 하나의 방편이었고, 한족과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와 관련된 일화로, 청말 한국에 와 있던 원세개(袁世凱)가 한국을 떠날 때 고종황제가 자신의 부인인 안동 김 씨의 동생을 몸종 두 명과 함께 원세개와 동행시킨 이야기가 전해진다. 귀국한 원세개는 중화제국의 홍헌(洪憲) 황제가 되었고 이 조선의 세 여자는 그의 부인이 되었다. 원세개의 부인은 모두 아홉이었는데 그 중 세 명이 조선인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중국식으로 화분혜를 신어야 했다. 익숙하지 않아 뒤뚱거리는 모습이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고 전한다.
여성 스스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법을 찾는 것과 달리, 중국 전통 사회의 전족은 '악습'이었고 왜곡된 미의 추구였다. 따라서 전족은 중국의 흑역사이자 여성 잔혹사이다. 중국인들이 종종 한국 여성들이 겨울에도 미니스커트를 입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얘기하는데, 전족의 역사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미에 대한 추구는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 어떤 억압의 기제가 작동하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겠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