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세종대왕이 있다면 중국 역사에는 강희제와 같은 성군이 있었다. 세종대왕이 조선시대의 과학 발전에 큰 공헌을 했던 것처럼, 강희제도 과학에 관심이 컸다.
강희제는 서양 선교사로부터 천문, 수학, 지리를 배웠고, 라틴어까지 학습했던 호학의 군주였다. 강희제는 수학을 풀거나 방정식을 풀 때 미지수(元), 차(次), 해답(根 혹은 解) 등의 개념을 사용했다. 이러한 수학 용어를 중국어로 만든 이가 강희제였다.
그는 벨기에 출신의 선교사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1623~1688년, 중국명 南懷仁)를 스승으로 삼아 천문, 수학, 지리, 라틴어 등을 공부했다. 호학하는 황제였지만 서양 선교사가 설명하는 강의는 너무도 어려웠다. 왜냐하면 페르비스트의 중국어와 만주어 실력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상 회화는 가능해도 깊이 있는 과학 지식을 설명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문제 해결을 위한 강희제의 탐구 정신
강희제는 각고의 노력으로 인내심을 갖고 열심히 탐구했다. 한 번 듣고 이해를 못하면 재차 설명을 부탁하고 이해할 때까지 계속했다.
수학의 방정식을 설명하는 페르비스트의 설명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아 여러 날 동안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강희제는 여러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그는 방정식의 미지수의 값을 '원(元)'으로, 최고차수를 '차(次)'(방정식에 한정)라고 번역하고, 방정식 좌우변을 동등하게 하는 미지수를 '근'으로 번역하자고 페르비스트에게 제안했다.
이에 대해 페르비스트는 진지하게 기록을 해 두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학술 용어를 자신이 원래 사용하던 번잡한 용어 대신 '이원일차방정식' 근이라고 표현했다. 이렇게 되자 많은 장애를 해결할 수 있었다. 강희제의 새로운 수학 용어 제안에 페르비스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예의를 갖추고 "제가 공부하고 가르친 지가 수십 년이지만 선생이든 학생이든 간에 황제처럼 골똘하게 생각하는 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강희제가 창안한 수학 용어들은 오늘날까지도 중국에서 사용되어 오고 있다.
강희제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년)로부터 계산기를 선물 받았다. 사연은 이렇다. 1673년 라이프니츠는 계산기의 원리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그의 고민을 해결해준 것은 의외로 중국의 팔괘(八卦)였다.
강희제는 서양 선교사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당시 강희제의 측근에는 조아심 부베(Joachim Bouvet, 1656~1730년, 중국명 白晉)라는 인물이 있었다. 부베는 프랑스의 예수회 선교사였다. 기독교 포교를 위하여 1687년 중국으로 왔다. 이후 그는 강희제의 시강(侍講)이 되어 천문역수(天文曆數), 의학, 화학, 약학 등을 가르쳤다.
부베는 계산기 원리에 몰두하고 있던 독일인 라이프니츠에게 서신을 보냈다. 편지에 중국의 고대의 <팔괘도(八卦圖)>를 동봉했다. 라이프니츠는 이 기괴한 그림을 보고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팔괘는 <주역>에서 나왔다. 팔괘는 아주 기묘한 숫자를 세는 원리를 담고 있다. 팔괘를 보고 라이프니츠는 이진법(二進法, binary)을 창안했다. 이진법은 두 개의 숫자만을 이용하는 수 체계이다. 관습적으로 0과 1의 기호를 쓴다. 이들로 이루어진 수를 이진수라고 한다. 십진법의 1은 이진법에서는 1, 십진법의 2는 이진법에서는 10, 십진법의 3은 이진법에서는 11이 되는 원리다.
컴퓨터에서는 논리의 조립이 간단하고 내부에 사용되는 소자의 특성상 이진법이 편리하기 때문에 이진법을 사용한다. 디지털 신호는 기본적으로 이진법 수들의 나열이다. 컴퓨터에서 처리하는 숫자는 기본적으로 이진법을 이용하기 때문에 컴퓨터가 널리 쓰이는 현대에 그 중요성이 커졌다.
팔괘에서 이진법의 힌트를 얻은 라이프니츠는 역사상 최초로 이진법을 기반으로 한 계산기를 만들게 되었다. 너무도 감격한 라이프니츠는 특별히 강희제에게 감사 편지를 한 장 썼다. 그리고 팔괘를 연구한 자신의 수학 논문을 동봉했다. 서양의 수학자와 동양의 황제가 서신을 통해 만나는 극적인 장면이다. 라이프니츠는 강희제에게 자신이 발명한 곱셈 계산기 복제품도 하나 선물했다. 이른바 컴퓨터의 전신인 셈이다.
중국의 벼농사 발전에 공헌한 강희제
강희제는 중국 벼 재배의 발전에도 크게 공헌했다. 송덕선(宋德宣)이란 학자는 <심양농학원학보(瀋陽農學院學報)>에 발표한 논문에서 강희제가 재위 기간 동안 벼농사 기술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고 기록한다.
강희제는 실험을 위해 특별히 자금성 내의 풍택원(豊澤園, 중난하이에 있음)에 벼 재배를 위한 논을 마련했다. 그로부터 280여 년 지난 뒤 풍택원의 '택'자가 모택동의 '택'자와 같다는 이유로 모택동은 그곳에 거처를 마련하기도 했다. 모택동은 이곳 풍택원의 국향서옥(菊香書屋) 자운헌(紫雲軒)에서 18년간 살았다.
강희 10년(1664년) 이후에 중국에서는 대체로 수전(穗傳)의 방법을 이용하여 조생종 벼인 이른바 '어도종(御稻種)'을 생산했다. 강희제는 남순을 했을 때 강남의 향도(香稻)를 베이징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어답종과 비교 테스트를 했다. 여러 해 실험을 통해 어답종이 확실히 생장 기간이 짧고 생산량이 비교적 많고 품질이 우수한 조생종 벼라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자 강희제는 점차 어답종을 강소, 절강, 안휘 및 양회(兩淮, 지금의 강소성 북부와 안휘성 북부 지역)와 강서 지역으로 전파하도록 지시했다.
강희제는 새로운 조생종 벼를 키우는 동시에 이를 이모작에도 적용시켰다. 과거 복건과 양광(광동, 광서)의 이모작 벼는 찹쌀과 일반미를 번갈아 파종했었다. 찹쌀은 소출이 적다. 더 많은 쌀을 생산하기 위해 강희제 때부터 일반미를 연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1703년(강희 42년) 어답종을 북방의 열하(熱河) 승덕(承德)의 피서산장(避暑山莊)에서 재배하는데 성공했다.
이때로부터 중국의 벼 재배 지역이 북위 40도에 이르게 되었고 이후 북위 41도까지 확대할 수 있었다. 이는 중국 벼 재배 역사에 중대한 공헌이었다. 강희제가 갖고 있던 백성들의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과 과학적인 실사구시의 정신은 지도자가 무엇에 역점을 두고 정치를 펼쳐야 하는지, 우리에게 좋은 깨달음을 준다.
전통 봉건 왕조 시대에는 황제의 희로애락이 백성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황제는 만인의 위에 군림하고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그런 시대였음에도 강희제는 개방적인 자세로 백성의 어려움을 보살피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했다. 제도도 중요하지만 그 제도의 본질을 실현할 수 있는 지도자의 자질도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지도자에게 봉건 사회의 강희제처럼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지도자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과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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