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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조 실장'과 '배 기사'는 한 민족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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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조 실장'과 '배 기사'는 한 민족입니까?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실크로드 역사 단상 ⑥

사람들이 여러 계급으로 나뉜 사회에서 역사란 위험한 학문이다. '은수저'를 타고난 사람과 '흙수저'를 타고난 사람이 오늘에 이르는 역사를 보는 눈은 다를 수밖에 없건만, 그들이 속한 사회는 그렇게 다른 이들을 하나의 역사의식으로 묶으려 하기 때문이다. 영화 <베테랑>의 조 실장(유아인 분)과 배 기사(정웅인 분)가 똑같이 배달의 민족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리스를 여행할 때 그곳에 사는 분들은 한국과 그리스의 공통점을 강조하곤 했다. 비슷한 위도에 있고 면적도 비슷하며(그리스가 남한보다 약간 더 크다.) 무엇보다 둘 다 단일 민족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단일 민족이라는 말은 귀에 인이 박히게 들어 왔지만 그리스인이 단일 민족이라는 것은 생소했다. 그래서 그리스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는 드물게 국정 역사 교과서를 채택하고 있는 걸까?

단일 민족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국민 대부분이 단일한 역사 계승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뜻도 있을 것이다. 한국인은 늦어도 고려 때에는 단군왕검을 시조로 하는 동족 의식을 확립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와 비슷한 그리스인의 동족 의식은 언제 형성되었을까?

그리스 현지에서 들은 대답은 놀랍게도 알렉산드로스 대왕 때라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의 맹주를 자처하고 고대 그리스 문명을 계승하는 제국을 세웠다. 그 제국을 '헬레니즘 제국'이라 하는데, 이는 그리스인의 전설적 시조 헬렌에서 유래한 말이다. 헬렌의 자손을 뜻하는 '헬레네스'야말로 그리스인이 자신을 일컫는 말이니, 헬레니즘은 그리스의 사상과 문화를 가리킨다('그리스'는 로마인이 이 지역을 가리키던 '그레키아'에서 유래했다). 그렇게 보면 헬레네스의 제국을 세운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인을 단일민족으로 일으켜 세웠다는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고대 그리스인의 축제인 올림픽에도 초대받지 못하던 변방 마케도니아의 왕이었다. 그러니까 마케도니아는 본래 우리가 서양 문명의 젖줄이라고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의 일원도 아니었다. 그랬던 나라의 왕 알렉산드로스는 무력으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무릎 꿇리고 자신을 신으로 숭배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그리스인을 동원해 페르시아를 비롯한 아시아의 수많은 나라와 민족을 침략하고 살육했다.

이러한 알렉산드로스는 우리가 찬양하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침략 전쟁을 벌인 역사의 죄인이다. 고대 그리스가 창조한 가장 고귀한 정신을 파괴한 뒤에 전파한 호사스러운 '헬레니즘' 문명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정복욕에 눈이 멀어 수만, 수십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자를 민족의 상징으로 받드는 역사는 과연 누구를 위한 역사란 말인가?

▲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있는 알렉산드로스 상. 발을 고정시키는 등자가 없는 것이 당시 기술의 한계를 보여 준다. 기마 전술의 획기적 발전을 가져온 등자는 북아시아 유목민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물은 서기 4~5세기 중국의 무덤에서 처음 확인된다. ⓒ강응천

민족(民族)은 민의 족속이라는 뜻이다. 왕의 족속인 왕족이나 특권 계급의 족속인 귀족 따위와 달리 일반 민중을 구성원으로 하고 그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족속이라야 민족이라는 말에 값한다. 따라서 민족이 공유하는 역사, 즉 민족사는 일반 민중이 고루 공감할 수 있는 역사라야 한다. 알렉산드로스 같은 제왕, 정복자, 도살자를 떠받드는 역사는 그리스 민족의 역사일 수가 없다. 그것은 필시 일반 민중에게 자신의 의지를 제왕처럼 강요하려는 극소수 지배 계급이 민족사라는 이름 아래 유포하는 사이비 역사일 수밖에 없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모래 위에 지은 성처럼 급속히 허물어졌고 그리스는 곧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리고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2000년 동안 '헬레네스'를 내세운 나라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4세기 들어 로마 제국은 기독교 국가가 되었고, 헬레니즘적 다신교 전통에 푹 젖어 있던 로마 대신 그리스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겼다. 그때부터 그리스인의 정체성은 정교회(중세에 가톨릭과 분리된 동유럽의 기독교)를 믿는 로마인으로 굳어져 왔다. 15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때 그리스인은 정교회 신도이자 로마인으로서 그에 저항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에 압살 당했던 민주주의 그리스는 1830년 오스만 제국에 대한 독립 전쟁을 통해 왕국으로 독립한 뒤 일련의 과정을 거쳐 다시 태어났다. 이러한 독립 전쟁에는 서구 문명의 젖줄인 그리스를 이교도의 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키자는 서유럽 자유주의자들의 열렬한 응원도 한몫했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그리스 민족이 탄생한 것은 바로 이 과정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독립 전쟁은 민족의 역사가 곧 민중의 역사였던 매우 드문 한 순간이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역사는 제1차 세계 대전 후 대그리스주의를 내세워 터키를 침략한 그리스-터키 전쟁이나 민중 위에 군림한 왕정, 군사 독재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민중에게는 결코 자랑스럽지 않은 역사이다. 그러한 역사를 민족사의 영광스러운 한 순간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은 민족의 작은 일부가 나머지 대다수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인보다 단일 민족 의식이 더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 않은 한국인의 민족사는 어떨까? 우리에게도 민족을 하나로 만들어 주는 강렬한 역사의 기억이 있다. 일제 침략에 맞서 들고 일어난 3.1 운동과 국내외의 독립 운동은 우리를 근대적 민족으로 일으켜 세웠다. 그 이전에는 이처럼 우리 민족의 대다수를 점하는 민중이 주체로 진출한 역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우리에게는 알렉산드로스처럼 무지막지한 정복자는 없었지만, 고조선 이래 수천 년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한 줌의 지배자들이 민중을 핍박하던 역사였다. 그런 세월 속에도 페르시아 침략군을 물리친 아테네 전사들처럼 나라를 절멸의 위기로부터 구해내곤 하던 영웅들이 있었다. 동학농민운동처럼 민중이 스스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난 위대한 순간도 있었다. 우리가 발굴하고 자랑스러워해야 할 역사는 그런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민족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민중의 역사이다. 특히 우리처럼 민중의 삶을 위협하는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형성된 민족에게는 더욱 그렇다. 전제 왕정 시기 지배자들의 권력 투쟁이나 통치술 따위를 미화하고 현대 들어 자행된 독재와 민중 억압을 합리화하려는 어떤 시도도 올바른 민족사를 구성할 수 없다. 그런 태도는 궁극적으로 변형된 왕조사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새해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소수 엘리트의 눈으로가 아닌 자신의 눈으로 역사를 보고 미래를 개척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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