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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칙서의 반도 못 되는 것들이 무슨 놈의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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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칙서의 반도 못 되는 것들이 무슨 놈의 보수?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실크로드 역사 단상 ②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진보와 보수, 좌와 우의 편 가르기는 불편하다. 통합을 강조하자는 게 아니라 근대 이래 세계 어느 곳에서나 있어 온 보수-진보의 일반적인 양상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일반적인 보수의 범주에 걸맞은 세력은 김구, 장준하로 이어지는 애국적인 민족 지도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 그리고 '보수 야당'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애국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보수를 자임하며 무분별한 좌파 사냥에 나서는 바람에 이들마저도 용공 친북 좌파로 내몰리고 있다.

진보와 보수의 개념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니까 거두절미하고 실크로드에서 만난 한 '보수' 정객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겠다. 그 정객의 이름은 청나라 때 '아편 금연 대업'으로 유명한 임칙서(林則徐)로, 그를 왜 보수라고 하는지는 그의 행적을 조금만 들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실크로드 단상 중에 하필 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단지 여행 중 접한 소재여서가 아니라 누구든 보수라고 주장하려면 최소한 그의 절반이라도 닮으려 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임칙서를 해상 실크로드의 출발점인 광저우에서, 그리고 육상 실크로드의 출발점인 시안에서, 나아가 실크로드의 결절점인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잇따라 만날 수 있다.

고도 시안의 문화적 위용을 보여 주는 비림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유물이 석대효경(石臺孝敬), 즉 돌에 새긴 효경이다. '개원의 치'를 이룩한 당 현종이 큰 글씨는 예서체로, 작은 글씨는 해서체로 쓴 것을 높이 6미터의 비석에 새겨 넣었다. 그 석대효경을 모셔 둔 비정(碑亭)에는 '碑林(비림)'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그런데 이 편액의 두 글자를 쓴 이가 임칙서라는 설이 있다. 신장 지역으로 좌천되어 가던 임칙서가 시안에 머물던 중 편액의 글씨를 썼다는 것이다.

그런데 편액의 '비(碑)' 자에는 일반적인 서법과 달리 삐침이 없다. 어떤 이들은 임칙서가 일부러 삐침을 쓰지 않고 언젠가 돌아와 글자를 완성하겠노라고 했다는 말도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러한 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본래 당나라까지는 '碑' 자를 쓸 때 삐침을 적지 않는 일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송나라 때 활판 인쇄가 성행하면서 삐침이 들어가는 활자로 고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정의 편액을 임칙서가 쓴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비림에서 임칙서가 쓴 석편이 발견되었는데 그 석편에 쓰인 '碑林' 글자와 편액의 글자가 유사하기 때문이다. 또 이 편액의 서체는 당나라 서예가인 구양순의 것인데, 임칙서야말로 알아주는 구양순 서체의 대가였다는 것이다.

▲ 시안 비정의 '비림' 편액. ⓒ강응천

그렇다면, 임칙서는 왜 신장으로 쫓겨 가게 되었을까? 1839년, 도광제는 그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광저우에 파견했다. 50대 중반의 강직한 관리 임칙서는 부임 즉시 아편 금연 대업에 나섰다. 그는 호광(湖廣) 총독 시절 전국에 만연한 아편으로 인해 '10년 안에 나라가 망할 지경'이란 상소를 올려 구국의 대임을 맡게 된 인물이었다.

왜 아편 때문에 중국이 망한다고 했을까? 엄청난 양의 아편 밀수 대금으로 은이 빠져 나가면서 은값이 올랐고, 그러자 은을 기준으로 세금을 내던 농민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 왕조의 입장에서는 아편 밀수의 철폐가 국운을 건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임칙서는 우선 관가에서부터 아편 중독자를 색출하기 위해 모든 관리들을 청사에 소집했다. 아편을 피우는 자가 있으면 고백하라고 해도 나서는 자가 없자, 그들을 모두 여섯 시간 동안 한자리에 세워 놓았다. 그러자 손발을 떨면서 픽픽 쓰러지는 자가 사방에서 속출했다. 곧이어 임칙서는 관청과 결탁한 중국인 밀매 조직을 적발하고, 광저우에 주재하는 영국인 상관(商館)과 영국 상선인 튜나 호가 아편 밀매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상황은 급박했다. 그는 동인도회사 소속인 튜나 호가 광저우를 떠나지 못하도록 억류하고 영국인 상관을 포위하는 강력한 무력시위를 벌였다. 아편을 모두 내놓으면 풀어 주겠다고 해도 영국인이 막무가내로 버티자, 임칙서는 상관으로 들어가는 물과 음식을 차단했다. 극약 처방이었다. 영국인 신부가 그를 방문해 비인도적인 처사라며 항의했지만 임칙서는 아편을 내놓기 전에는 지시를 철회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영국인 신부가 단식으로 저항하겠다고 위협하자 임칙서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들이 하루 단식하면 나도 하루 단식하겠소. 그렇게 명분 없는 단식을 계속하다 죽으면 내 기꺼이 그 죽음을 축하해 주리다."

영국 정부도 공식적으로는 아편의 밀무역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통상 대사 찰스 엘리엇을 파견해 튜나 호가 숨긴 아편 2만여 상자를 내주도록 하고 선원들을 철수시켰다. 임칙서는 이렇게 압수한 아편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임칙서는 영국에서도 인기인이 되어 일간지에 그의 경력이 자세하게 소개되었다. 스물을 갓 넘긴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그에 관한 보고를 받고 이렇게 말했다.

"나도 중국인이었으면 임칙서처럼 했을 겁니다."

그러나 800만 파운드에 이르는 손실을 입은 밀매업자와 통상 기지를 상실한 무역 관료는 여왕과 의회를 상대로 중국과 전쟁을 벌일 것을 집요하게 설득했다.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반대도 적지 않았지만, 결국 의회는 271대262로 전쟁을 의결했다. 중국인이 아니었으므로 임칙서가 될 수 없었던 빅토리아 여왕은 이렇게 전쟁에 지지를 표명했다.

"영국인의 안전도, 800만 파운드의 손실도 문제가 아닙니다. 자유 무역에 대한 거부가 다른 나라에까지 파급되면 대영제국은 1년 만에 멸망합니다. 동방의 마지막 땅인 중국을 소유하면 19세기를 소유하는 겁니다."

이 말은 영국이 안팎의 비난을 무릅쓰고 하필 '아편' 문제로 개전한 이유를 그럴듯하게 합리화했음을 보여 준다. 그 때 아편 무역은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나아가 중국에서 아편을 밀매해 얻은 은은 세계 무역의 결제 수단으로 쓰이고 있었다. 즉 영국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에서 아편의 '자유 무역'을 수호할 수밖에 없었다.

또 1825년 과잉 생산으로 인해 발생한 세계 최초의 공황 이래 중국 시장의 개방은 영국 경제의 절실한 과제였다. "4억 중국인의 셔츠가 1인치만 늘어나도 영국의 공장들이 30년 가동된다"라는 유행어가 나돌 정도였다. 그래서 영국은 끊임없이 중국 시장의 개방을 추진했으나, 청 왕조는 중국이 '지대물박(地大物博)'해서 무역이 필요 없으니 조공이나 하라며 일축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중국의 무역 제한을 철폐시키고 무역과 군사상의 이권을 선점하는 일은 '아편'의 비도덕성 때문에 늦추거나 꺼릴 수 없는 사활의 문제였다.

그 해 6월 '신의 보복'이란 뜻을 가진 철갑선 네메시스 호를 앞세우고 나타난 48척의 영국 함대는 임칙서가 버티고 있는 광저우를 우회해 북상했다. 함포를 앞세운 영국군이 톈진 등을 유린하면서 계속 베이징을 압박해 들어가자 청 왕조 내에서는 점차 협상론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지나친 강경책으로 전쟁을 유발했다는 이유로 임칙서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중국이 스스로 망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베이징으로 소환된 임칙서는 결국 파직당하고 신장으로 쫓겨 가게 되었다. 그 길에 시안에 들른 임칙서는 훗날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도 좌우명처럼 소개할 정도로 유명한 구절이 들어 있는 고별의 시를 남겼다.

苟利国家生死以,岂因祸福避趋之?
국가에 이롭다면 목숨도 아깝지 않으니
어찌 내 몸에 해가 된다고 피하겠는가?

봉건적인 애국 정신이 물씬 풍기는 시이다. 그래서 우리는 임칙서를 봉건 왕조의 몰락을 막아 보려던 구시대의 애국지사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패한 아편 금연 대업이 임칙서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빙 둘러싸고 있는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예상치 못했던 임칙서의 자취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실크로드 연변에는 오아시스가 있다. 인근 산에서 흘러내린 생명의 물로 이루어진 오아시스가 없었다면 실크로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막에 살던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오아시스에만 기대고 있지 않았다. 때로는 멀리 떨어진 산에서 지하수를 퍼내 인공의 관개수로를 만들어 생존을 도모했다. 그런 노력을 눈물겹게 보여주는 것이 신장위구르자치구 동쪽 사막 한가운데 움푹 파인 투루판 분지의 카레즈(坎儿井)이다. '우물'을 뜻하는 카레즈는 사마천의 <사기>에도 '정거(井渠)'라는 이름으로 소개될 만큼 오래된 특수 관개 시설이다.

카레즈는 천산산맥의 지하수를 뽑아 올려 인공 수로를 따라 투루판 분지까지 흐르게 해서 열사의 땅에 포도밭을 일구게 한 인간 승리의 증거이다. 만리장성, 대운하와 더불어 중국 고대 3대 공정으로 불린다. 무슨 지하 관개 수로가 만리장성과 비교되겠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러한 카레즈가 무려 1100곳에 이르고 전체 길이가 약 5000킬로미터나 된다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경부고속도로의 10배가 넘는 지하수로가 인간의 힘으로 천산산맥과 열사의 분지를 거미줄 같이 잇고 있다.

▲ 지하수로 '카레즈'. ⓒ강응천

놀라운 것은 19세기 들어 이 카레즈의 확대 증설에 크게 기여한 이가 임칙서라는 사실이다. 1841년 이리에 도착해 신장 생활을 시작한 임칙서는 1845년 1월 처음 투루판을 방문해 카레즈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해 2월 도광제의 명을 받고 다시 투루판으로 간 그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래바람과 뜨거운 햇볕을 이겨내며 개간 사업을 지휘했다. 국가는 그를 버렸지만 그는 버림받은 곳에서도 인민과 함께 했다. 애국이라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여준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임칙서의 역정은 감동적이지만 충군애민 사상에 충실한 봉건 관료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임칙서는 세상이 변하는 줄 모르고 낡은 중화주의에 집착하는 무모한 존재가 아니었다.

아편 금연 대업을 위해 광저우에 갔던 임칙서는 1839년 3월부터 1840년 11월까지 서방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번역 집단을 조직했다. 임칙서 자신도 영어와 포르투갈어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영국인이 간행한 <광저우주보(Canton Press)>, 스위스인 바텔의 저서<국제법> 등을 번역하고, 영국인 머리가 세계 30여국의 역사, 지리, 정치 등을 정리한 <세계지리대전(Cyclopaedia of Geography)>을 번역해 <사주지>를 펴냈다.

청 말의 사상가 위원(魏源)이 펴낸 <해국도지(海國圖志)>는 이러한 임칙서의 번역 성과를 묶어 낸 세계 역사 지리서였다. 동아시아 근대 사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 책은 청 말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영향을 미쳤다. 위원은 21세 때 임칙서와 교류하기 시작해 중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지사로서 깊은 관계를 맺었다. 광저우에서 파직되어 신장으로 떠나던 임칙서는 도중에 위원을 만나 <사주지>를 비롯한 번역 자료들을 건네주었다. 임칙서는 앞뒤가 꽉 막힌 봉건 관료가 아니라 개방적인 태도로 변화의 추세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면서 기존의 가치를 지키려 했던 애국자였다.

1850년 임칙서는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고 임지로 가던 도중 병에 걸려 죽었다. 그가 태평천국의 민중과 충돌하지 않은 채 생을 마감한 것은, 실크로드에서 그에게 좋은 인상을 받은 나로서는 천만다행이다. 그가 살아서 전장으로 갔으면 반란군을 잔인하게 진압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 따위는 꿈도 꾸지 않았을 '보수 정객'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는 '민중'이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수많은 자칭 보수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는 임칙서의 결연한 애국심도, 국민에 대한 사랑도, 세상의 변화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찾아보기 어렵다. 임칙서를 보수라고 한다면 그를 파면시킨 비겁한 황제와 관리들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임칙서의 반이라도 닮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는 '보수'가 아니라 그러한 황제, 그러한 수구 관료들에나 어울리는 범주에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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