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프레시안 : 1972년 유신 쿠데타가 발생한 후 한동안 눈에 띄는 저항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서중석 : 유신 쿠데타가 일어날 만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 또는 남북 관계에서 특이점이 없었는데도 쿠데타를 했다면 그런 명분 없는 쿠데타에 대해 왜 저항이 없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전에 누가 그러더라. 잘 알 만한 사람이 "10.17쿠데타에 아무런 저항이 없었던 것으로 봐서 당시 한국인들은 그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강하지 않았던 것 아니냐"고 하더라. 그때 난 "그것하고는 생각이 많이 다르다. 그건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꼭 일치해서 생각할 일은 아니다",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유신 쿠데타 일으켜도 저항 없을 것', 박정희는 자신감을 가졌다
프레시안 :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뭐냐 하면 계엄을 선포하고 군인들이 탱크로 밀고 들어오고 집총하고 거리로 나오는 상황에서 그런 군인과 직접 맞서 싸우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극우 수구 세력하고 진보 세력이 혈전을 벌이고 있는데 군대가 나왔다고 하면 상황이 다를 수 있다. 또 남미처럼 아주 강력한 노조가 존재할 경우 조직적으로 대항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조직적인 세력이 없는 경우에는 군인들의 쿠데타나 계엄 사태에 직접 대항하기가 어렵다.
헝가리, 체코에서는 다르지 않았느냐고 할 수도 있는데 그건 케이스가 전혀 다르다. 1968년 체코 같은 경우 공산당 제1서기 알렉산드르 둡체크가 집권해서 개혁을 한창 하고 있는데 그걸 가로막기 위해 소련이 탱크를 몰고 들어온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둡체크 집권 세력도 부분적으로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고, 시민들도 분노해서 바로 저항할 수 있는 것이었다. 체코 내 반대 세력이 탱크를 몰고 나온 게 아니라 소련이 밀고 들어왔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둡체크가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개혁을 하고 있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러니까 그것에 대해 길게 저항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상당한 저항이 있었던 건 당연하기도 하고, 그럴 수 있던 여러 조건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56년 헝가리에서도 임레 나지가 개혁을 추진하다가 소련의 무력 개입에 의해 쫓겨나자 분노한 시민들이 저항하지 않았나.
한국의 경우 유신 쿠데타에 왜 저항이 없었느냐. 우선 이런 부분을 생각해볼 수는 있다. 거듭 말하지만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경우 그 무력에 직접 저항하는 건 쉽지 않다. 집권 세력을 타도하기 위한 쿠데타라면 집권 세력이 그것에 대항해 싸울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닐 경우에는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1964년 6.3운동 때 박정희 정권이 선포한 계엄령을 비롯해 한국에서 일어난 여러 계엄 사태를 봐도 그러한 계엄에 학생, 시민이 직접 대항해 싸운 경우는 찾기가 쉽지 않다. 1980년 광주의 경우는 케이스가 다르다.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광주항쟁에 가서 설명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유신 쿠데타에 왜 저항이 없었느냐 하는 문제는 그것대로 충분히 논의해볼 수 있다. 도대체가 해방 이후로 따지면 27년이 되고 정부 수립으로 따지면 24년이 되던 때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짓밟고 1인 유일 독재 체제를 만들려고 했는데 왜 저항이 없었는가는 논의할 수 있다. 그것과 직접 상관된 이야기지만, 박정희가 1972년 10월 17일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공화국 헌법을 짓밟고 1인 독재 체제를 수립해도 저항 세력이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충분히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법부 파동 거치며 옥죄임 당한 법원, 유신 쿠데타 후 무력한 존재로 전락
프레시안 : 박정희가 그렇게 여긴 근거는 무엇인가.
서중석 : 어떻게 해서 그런 자신감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는가, 그리고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쿠데타인데도 그것에 저항하고 투쟁할 수 있는 세력이 왜 없을 것이라고 봤느냐. 이것을 여러 부문으로 나눠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건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먼저 사법부를 살펴보자. 1971년에 일어난 사회적, 경제적 사건을 다룰 때 사법부 파동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사법부가 10.17쿠데타에 직접 저항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재판을 통해 일정하게 그런 역할을 할 수도 있는 부분이 있긴 하다. 사법부의 경우 1950년대에도, 1960년대에도 자율성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 않나. 그에 비해 입법부는 어떻게 보면 그야말로 '통법부'(通法府), 즉 권력이 요구하는 대로 다 통과시키는 거수기 아니냐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좀 심한 이야기겠지만 그 시기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게 사실이다. 그런 입법부와 달리 사법부는 1950∼1960년대에 여러 판결을 통해 '그래도 좀 살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1961년 5.16쿠데타 후 이른바 '혁명 검찰부', '혁명 재판부'에서 말도 안 되는 여러 재판을 통해 사건을 처리할 때 판사들을 비롯한 법조계 인사들이 많이 차출돼 활동했는데, 그때 하등의 저항이 없었던 건 사실이다. 소위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재판을 하고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를 비롯한 여러 사람한테 사형 판결을 내려 사형장까지 가게 했는데, 그것에 저항한 판사가 있었나? 이처럼 이른바 '혁명 재판'에 차출된 판사들이 저항하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후 사법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예컨대 1964년 5월 20일 학생들이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하지 않았나. 이 일과 관련된 학생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양헌 판사가 기각해버렸다. 이것도 아주 유명한 사건인데, 왜 그렇게 유명하게 됐느냐. 이 자체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구속영장이 기각된 후 얼마 안 지난 시점인 5월 21일 새벽에 공수 부대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카빈총, 권총을 휴대하고 법원에 들어가버렸기 때문이다. 유명한 무장 군인들의 법원 난입 사건이다. 이때 대법원은 신성불가침과 법원의 독립성을 저해하는 이런 사태가 또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정부에 요청했다.
또 1967년에 동백림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에 대한 대법원 판결도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968년 7월 대법원에서는 동백림 사건 재판에서 간첩죄, 잠입죄를 적용한 건 법을 잘못 적용한 것이며 또 증거 없이 사실을 인정했거나 양형 부당의 잘못이 있다고 판시하고, 서울고법에 파기 환송했다. 같은 날 대법원은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재판에서 황성모, 김중태 등의 이적 단체 구성 예비 음모죄에 대해 파기 환송을 했다. 예비 음모죄, 이건 당시 시위 학생 등을 괴롭힌 참 무서운 죄목이었다. 황성모, 김중태 등도 2심에서는 이것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대법원에서 '이들이 예비 음모를 했다는 소명이 공소장에 없다'고 하면서 유죄 부분을 떼고 이것도 서울고법에 환송한 것이다. 그러자 바로 애국시민회라는 단체에서 "김일성 앞잡이 처단하라", "북괴의 복마전인 사법부 갈아내자"고 하면서 벽보를 붙이고 전단을 뿌리며 사법부를 위협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때는 언론조차 '대법원 판결이 너무하다'는 식으로 나오기도 했다.
프레시안 : 정체가 불분명한 극우 단체가 법원을 위협하는 박정희 집권기 풍경은 이승만 집권기인 1958년 7월 진보당 사건 1심 판결에 불만을 품은 이른바 반공 청년들이 법원에 난입했던 일을 연상시킨다. 법관이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하기 어려웠던 점에서도 이승만 집권기와 박정희 집권기는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돌아오면, 사법부가 정치 권력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사안은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동백림 사건, 민비연 사건만이 아니지 않나.
서중석 : 사법부 파동을 다룰 때 이야기한 것처럼 1971년 대법원은 '위헌심권을 제한한 법원조직법 중 일부가 위헌이다', 이렇게 판결해 입법부와 행정부가 사법부에 가했던 제약 요소를 제거하는 조치를 취했다. 또한 서울대생들이 대선 직후 신민당사 농성 사건을 벌이자 검찰은 관련자 10명한테 실형을 구형했지만, 서울형사지법은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김대중 대통령 후보 쪽과 관련이 있었던 <다리>라는 잡지 필화 사건 관련자들이 무죄 판결을 받는 일도 일어났다. 이런 것들에 대한 보복으로 검찰이 이범열 부장판사 등 3명에 대한 구속 영장을 신청하면서 사법부 파동이 일어나지 않나.
사법부 파동은 서울형사지법과 서울민사지법의 판사가 거의 전부 사표를 쓸 만큼 '사법부에 기개가 있다'는 걸 보여준 사건이고, 그래서 대통령이 검찰의 조치를 일단 백지화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파동 이후 사법부는 크게 옥죄임을 당하고, 유신 헌법이 만들어진 후에는 더욱더 무력한 존재가 된다. 사법부 파동 당시 사법부를 수호하기 위해 앞장서서 싸웠던 송명관 서울형사지법원장이나 홍성우 판사 같은 사람들이 사표를 내지 않을 수 없었고 또 대법원 판사 9명과 고법, 지법의 판사들 중 상당수가 사표를 내거나 1973년 재임용에서 탈락했다고 지난번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에 더해 중앙정보부가 판사들을 어느 때보다도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감시하면서 '사법부라는 것이 정말 독립성이 있느냐. 권력에 종속된 존재 아니냐'는 비판을 듣게 된다. 민복기 대법원장 때만 그런 비난을 들은 게 아니라 유신 체제 내내 대법원은 계속 그런 비난을 들었다. 그러면서 긴급 조치 재판과 같은, 있을 수 없는 재판을 민간인 판사들도 하게 된다. 정리하면, 사법부는 10.17쿠데타에 저항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그 후 유신 체제에서 재판을 통해 일정하게 그런 역할을 하는 모습도 보여주지 못했다.
공화당 4인 체제 붕괴로 이어진 1971년 10.2 항명 파동
프레시안 : 정치권은 어땠나. 국회의원들 중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강한 이들만이 아니라 그런 신념이 그리 강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유신 쿠데타에 반발할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유신 쿠데타로 국회를 해산하고 국회의원들의 권한을 박탈하는 상황에서 정치인이 반발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1971년 5.25총선을 통해 국회의원이 된 지 1년 반도 되지 않은 때에 유신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점에서 더 그러하다.
서중석 : 사법부는 재판을 빼놓고는 자신들이 싸울 수 있는 수단이 없다고 하지만 정치계는 정말 자기들의 명운이 직접 걸린 쿠데타가 10월 17일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최소한의 저항은 했어야 할 것 아닌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도 실제로 가능하지 않았다.
우선 여당인 공화당이 10.17쿠데타 같은 것에 대해 문제를 삼는다든가 하는 건 못할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과거의 4인 체제 또는 김종필 주류 체제 식으로 공화당이 존재했더라면 박정희가 그런 쿠데타를 그렇게 자신 있게 했겠느냐 하는 점도 조금은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때쯤 되면 공화당은 이미 많이 변한 상태였다. 중간 보스가 완전히 사라지고 박정희가 공화당 의원들 또는 당 자체를 직접 장악하는 이른바 친정(親政) 체제로 공화당은 가 있었다. 김종필 주류계는 1969년 3선 개헌이 있을 때까지는 나름대로 주류 또는 구주류로 불리긴 했지만, 김종필의 힘은 그 이전에 벌써 거세된 상태였다. 그리고 3선 개헌 과정에서 김종필계의 주류 또는 구주류는 완전히 와해됐다고 이야기들을 한다. 3선 개헌을 이끌어가고 국회에서 그걸 통과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김성곤, 백남억, 길재호, 김진만의 4인 체제였다고 이야기한다. 4인 체제는 3선 개헌 과정에서도 강력했지만, 3선 개헌 이후에는 당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공화당 내에서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4인 체제가 1971년 10월 2일에 있었던 유명한 항명 파동을 계기로 완전히 무너지고 거세된다.
그해 9월 30일 신민당에서 오치성 내무부 장관 등 3명의 장관을 해임하라는 건의안을 제출했다. 이 중 오치성 장관에게는 실미도 사건, 광주 대단지 사건 등으로 치안 공백 상태를 노정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해임 건의안을 냈다. 그런데 이 해임 건의 안이 재석 203명 중 찬성 107표, 반대 90표, 무효 6표로 재적 과반수인 103표를 넘기며 통과돼버렸다. 투표에 앞서 박정희 대통령은 이 문제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공화당 의원 중 어느 누구도 이 해임 건의안에 동조하면 안 된다고 엄명을 내렸다. 그런데도 공화당 의원 중 20명 이상이 대통령의 엄명을 따르지 않으면서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말하자면 4인 체제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김성곤 쪽이 중심이 돼서 '오치성을 가만둘 수 없다'고 하면서 움직였고 그 결과가 해임 건의안 통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게 항명 파동 사태를 불러왔다.
프레시안 : 김성곤을 중심으로 한 4인 체제에서 오치성에게 앙심을 품은 주요 계기는 무엇인가.
서중석 : 내무부 장관이 됐을 때 오치성은 경찰서장들을 갈아 치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 때나 공화당 정권 때 경찰서장이라는 건 요즘 경찰서장과는 달랐다. 지방에서 굉장히 힘이 셌다. 그런 경찰서장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여당 국회의원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50년대에 자유당 의원들이 그렇게 힘이 셌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경찰서장을 임명할 때 대개 자유당 의원들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었다. 지역구 경찰서장에 그 지역 의원이 자기 심복을 앉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야 다음 선거에서 당선되는 데 유리하니까 당에서, 정권에서 그런 식의 관계를 맺도록 해놓은 것이다. 특히 실력자의 경우 더더군다나 그랬다. 자기 심복을 경찰서장 자리에 심는 걸 너무나도 당연한 일로 여겼다. 공화당도 자유당처럼 그렇게 했는데 특히 4인 체제의 네 사람이 있던 지역, 그중에서도 김성곤의 지역구이던 달성·고령의 경찰서장이라든가 길재호의 지역이던 금산의 경찰서장은 직속상관인 치안국장이나 내무부 장관도 우습게 안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오치성이 경찰서장들을 갈아 치우려 한 것에는 사실상 4인 체제에 대한 선전 포고라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단순히 경찰서장 문제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런 사정은 당시 누구나 알던 현상이었는데, 오치성이 칼을 빼든 건 그만큼 칼을 빼드는 것을 지지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 아니냐고 볼 수 있다.
오치성은 김종필과 육사 8기 동기로 5.16쿠데타의 주역 중 하나인데, 쿠데타 후에는 김종필하고 사이가 아주 나빴다. 그런데 이때는 김종필의 수족이 다 잘린 시점인데 김종필 쪽에 붙었다. 장경순 국회 부의장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는 반김종필계 핵심 인물이었는데, 이때쯤엔 4인 체제에 맞서기 위해 김종필 쪽과도 손을 잡는 모습을 보였다. 하여튼 오치성은 박 대통령한테 '경찰을 개혁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박 대통령은 '그래, 네 뜻대로 해라', 이렇게 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런데 박정희가 김성곤 쪽을, 즉 4인 체제를 손보겠다고 한 것은 크게 봐서는 중간 보스 같은 걸 없애고 당 전체를 자기 손아귀에 넣어 친정 체제로 가겠다는 의욕을 드러낸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성곤에 대해서는 '이건 너무한다. 가만둘 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김성곤이 박정희 눈 밖에 난 이유
서중석 : 3선 개헌을 할 때도 김성곤은 기본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1975년까지 대통령을 하는 것이다. 그다음에는 내각 책임제로 가서 의회 민주주의를 해야 하지 않느냐', 이런 얘기를 하고 다녔다고 돼 있다. 그러니까 김성곤은 박정희와는 상반된 입장에서 3선 개헌에 앞장선 것이다.
어쨌건 이때 김성곤이 야당 공세에 말려들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박정희가 명확한 승인을 해주지도 않았는데 김성곤계에서는 '1977년부터 지방 자치제를 실시해보겠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했다. 심지어 1971년 9월 23일에는, 10.2 항명 파동이 일어나기 꼭 9일 전인데, '1977년부터 지방 자치제를 한다'는 걸 당무 회의에서 당론으로 확정해버렸다. 이건 박정희의 생각과는 아주 동떨어진 것이었다. 박정희는 모든 권력을 자기 손아귀에 집어넣으려고 하지 않았나. 그런 박정희에게 지방 자치제 같은 건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한국 사회 전체가 명령일하에 움직이는 이른바 생산적인 정치, 능률을 극대화한 정치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김성곤 쪽에서 그렇게 나온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김성곤은 직접 박정희한테 "1975년 이후를 대비하셔야 합니다. 대통령 권한을 축소한 절충식 내각 책임제로 개헌해야겠습니다. 각하께서 권한이 약화된 대통령으로 남아 있고 이제 국회가 정치의 본산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생각과 달라도 너무나 다른 주장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김성곤처럼 자기 딴에는 대단한 정치가라고 생각한 사람도 박정희가 뭘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가 '경찰 제도를 새롭게 확립하라'고 하니까, 오치성은 칼을 들고 주로 4인 체제 계통 서장들의 비위 같은 것을 문제 삼아 사표를 받거나 벽지로 좌천시켰다. (오치성은 이때 경찰 간부들뿐만 아니라 시장, 군수 등 일반 행정 관료들 중에서 4인 체제와 닿아 있던 이들에 대해서도 인사 조치를 취했다. 이처럼 내무부 조직에서 4인 체제의 손발 노릇을 하던 간부들을 대거 정리하기 전에도, 4인 체제와 오치성은 불편한 관계였다. 그 이전에 공화당 사무총장 자리를 놓고도 양측은 힘겨루기를 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3선 개헌 파동 때 길재호가 공화당 사무총장에서 물러나고 오치성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3선 개헌안 통과 후 4인은 다시 힘을 합쳐 오치성을 공화당 사무총장 자리에서 밀어냈다. 공화당 사무총장 자리는 다시 길재호의 손에 넘어갔다. 그 후 오치성이 내무부 장관으로 기용되면서 양측은 다시 맞부딪치게 된다. <편집자>) 그러자 김성곤이 자기 힘을 믿고 '오치성, 가만 안 두겠다'고 하면서 해임 건의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생으로 무엇을 쌌다", 혹심하게 당한 공화당 의원들
프레시안 : 오치성 장관 해임안 가결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해임안이 가결됐다는 보고를 들은 박정희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직접 호출했다. 처리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았겠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보안사 병력 차출을 요구했다. (김형욱의 증언과 달리, 이때 중앙정보부 요원들만 투입했다는 주장도 있다. <편집자>) 김성곤 같은 사람들을 무섭게 다루려면 중앙정보부 직원으로는 안 된다고 본 것 아니겠나. 어쨌건 보안사 행동대원들을 공화당 중앙위원회 의장이던 김성곤, 그리고 사무총장을 오랫동안 했고 이때는 공화당 서열 2위로 돼 있던 정책위원회 의장이던 길재호의 집에 보내 이들을 붙잡아오라고 했다.
그 시절 나도 중앙정보부와 보안사, 양쪽에서 다 맞아봤는데 보안사 쪽은 정말 무지막지한 자들이었다. 보안사 쪽은 대개 젊더라. 20대들이더라. 그에 비해 중앙정보부 쪽은 30대, 40대, 50대로 노련한 자들이었고 고문을 해도 방법이 달랐다. 하여튼 그런 무시무시한 보안사 행동대원들이 왔을 때 김성곤은 집에 숨어 있었다. 보안사 행동대원들, 이자들은 정말 무시무시한 자들이었는데 그런 김성곤을 끌어내 몽둥이찜질을 하고 콧수염도 뽑아버리고 하면서 질질 끌고 갔다고 한다. 육사 8기로 5.16쿠데타 주역 중 하나인 길재호는 자신을 체포하러 온 자들에게 덤벼든 모양이다. 그러다가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고, 머리가 터져서 선혈이 낭자한 채 끌려갔다고 그런다. 그러고 나서 중앙정보부에서 또 되게 당하지 않았겠나.
이때 이 두 사람만 당한 게 아니다. 공화당 국회의원들 중 23명이나 끌려갔다. 그중 대부분은 김성곤을 따라서 해임안 가결에 찬성했을 것이라고 본 자들일 텐데, 여기에는 박정희 부인 육영수의 오빠인 육인수도 들어가 있었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면 얼마나 당하는지는 다들 알고 있었던 것 아닌가. 그래서 육영수가 이후락한테 직접 항의도 하고 그랬다고 한다. 하여튼 그렇게 끌려간 의원들 중 일부는 혹심하게 구타를 당하는 등 23명 모두 심하게 당했다고 그런다. 중앙정보부에서 구속영장도 없이 10월 6일까지 나흘 동안 아주 가혹하게 고문하고 무섭게 닦달했다고 한다. 국회의원들은 헌법 기관인데도 그랬다. 그리고 그런 걸 따지지 않더라도 이런 식으로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이게 무슨 권력이냐. 정상적으로 있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권력이 10.2 항명 파동에서 나타난 것 아니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서중석 : 본뜻은 분명한 것 아닌가. 대통령이 엄명을 내렸는데 그 말을 안 들었다, 그것 아닌가. 그리고 붙잡아다 고문한 걸 공표할 일이 있나. 그야말로 막된 세상이었던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방식으로 처리한 것이다.
프레시안 : 국회의원, 그것도 힘이 있다는 여당 국회의원들을 그런 식으로 짓밟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건 참 무서운 일이다. 여당 의원들에 대해 이 정도였으니 다수의 힘없는 시민들에게는 어땠을까 싶다. 그리고 3선 개헌에 앞장선 것은 물론이고 박정희의 형과도 인연이 있던 김성곤이 이런 식으로 당했다는 것도 여러모로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다.
서중석 : 당시 야당 의원으로 여당 비판을 많이 하던 김한수가 국회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김성곤, 길재호 두 선배는 (…) 모 기관 철권에 의해 아주 타살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뽑아준 3000만 국민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의원직을 상실했습니다. (…) 이것은 의회 민주주의를 박탈하려는 민주 반역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는지, 이것에 대해서 총리의 분명한 답변을 바랍니다. (…) 김성곤, 길재호 의원 등 9명은 검은 보자기를 씌우고 발길로 마구 차는 등 갖은 고문을 다 당한 것으로 세상에 알려지고 있습니다. (…) 몽둥이로 얼마나 치고 때렸는지, 참 표현할 말이 없어서 도리가 없습니다만, 생으로 무엇을 쌌다는 이야기입니다."
김성곤은 자유당 간부를 했던 자다. <동양통신>을 가지고 있어서 언론계에서도 힘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쌍용양회를 중심으로 한 쌍용 재벌의 총수였다. 1960년대는 다른 산업이 별로 없던 때였기 때문에 재계에서도 아주 힘이 센 사람이었는데, 특히 공화당의 돈줄로 불렸다. 공화당 정치 자금을 거둬오는 통로가 청와대 비서실장이 거둬오는 것, 중앙정보부장이 거둬오는 것 등 여러 갈래가 있었다고 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김성곤이 제일 많은 돈을 관리했던 것 같다. 이 사람은 공화당 재정위원장도 오랫동안 맡았다.
김성곤은 무엇보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김종필의 장인)와 경북 지방에서 같이 활동했던 사람이다. 얼마나 친한 관계였는지는 김성곤 쪽이 입을 열지 않아 정확히 알 수가 없는데, 하여튼 박상희의 활동을 보면 깊은 관계가 아니었겠나 싶다. 왜냐하면 김성곤은 남로당에도 들어가고, 그전에도 인민위원회에만 들어간 게 아니라 좌파 활동을 상당히 강하게 했다. 이건 최근 <중앙일보>에 실린 김종필 회고에도 나와 있더라. 하여튼 박정희의 형하고도 가까운 사이이고 하니 '박정희가 설마 나한테 그렇게까지 할 수 있겠느냐',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자유당, 공화당의 쓴맛, 단맛을 다 봤지만 진짜 권력 맛은 못 봤던 사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사람은 항명 파동 후 얼마 못 가 죽었다. 이 사건 후 미국에 있던 딸 집에 가 있기도 했다고도 하는데, 아무튼 오래 못 살았다. 정신적 충격이 워낙 컸기 때문에, 김한수가 이야기한 타살에 실질적으로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이 난 지 4년 후인 1975년에 62세라는 한창 나이에 죽었다. 길재호도 오래 살지 못했다. 역시 62세이던 1985년에 죽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10.2 항명 파동 거치며 공화당 친정 체제 구축한 박정희
프레시안 : 10.2 항명 파동은 공화당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서중석 : 이 파동을 거치며 4인 체제가 완전히 붕괴했고, 중간 보스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박 대통령이 10.2 항명 파동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지 않았나. 그렇기 때문에 이제 공화당에서 중간 보스 노릇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명령일하에 군대처럼 움직이는 조직으로 공화당이 가는 것 아니냐, 그야말로 친정 체제로 가게 된다고 이야기들을 한다.
그런데 권력을 유지하는 데 친정 체제가 과연 좋은 것인가, 유신 체제 같은 1인 유일 독재 체제라고 하더라도 사실은 받쳐주는 중간 세력이 여럿 있는 것이 그 권력을 영속시키는 데 더 도움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문제는 여러 각도에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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