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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왜 '하나회 대부'를 청와대에 고발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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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전두환은 왜 '하나회 대부'를 청와대에 고발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7> 유신 쿠데타, 스무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프레시안 : 유신 쿠데타를 전후한 시기에 군부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유신 체제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군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느냐. 박정희가 쿠데타도 일으키고 참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는데, 군이 조국을 위해 이런 헌법 유린 행위에 대항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이런 생각은 우리나라에서는 꿈도 안 꾸는 것이지만 다른 나라 같은 경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나.

박정희 대통령은 군이야말로 유신 체제를 지키는 데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봤다. 감시와 탄압의 임무를 맡은 중앙정보부와 더불어 군부, 이 양대 세력을 기반으로 하고 특정 지역의 지지를 발판으로 해서 유신 체제를 유지, 수호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사람 아닌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신념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군을 통제, 특별 관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민간인 정치가와도 다르게 박 대통령은 그런 문제에 예민하게 대처했다. 군이 유신 독재 체제에 절대 충성할 수 있도록 만드는 방식이 여러 가지 있었다.

군 출신 권력자 박정희의 군부 관리법

프레시안 : 어떤 것들이 있었나.

서중석 : 제일 중요한 건 보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보직을 주느냐, 비중 있는 자리를 누구에게 주느냐, 이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예컨대, 뭐니 뭐니 해도 대통령이 있는 데를 직접 지키는 곳이 아주 중요한 자리다. 그게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 아닌가. 그러니 누가 수경사령관이 되느냐, 이게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에 더해 누가 보안사령관이 되느냐,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부대를 지휘하는 사단장은 누구로 하느냐 하는 문제도 중요했다. 이러한 중요 보직을 누구에게 맡길 건가 하는 문제에 박정희는 아주 예민하게 대처했다. 누구를 참모총장에 앉힐 건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참모총장 자리도 굉장히 중요한 자리 아닌가.

진급 문제 같은 것도 굉장히 중요했다. 별을 단다는 건 군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 아닌가. 원 스타가 된 후 소장, 중장으로 올라가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진급은 모든 군인의 관심사이지만, 특히 장성 같은 경우 진급 하나하나에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군을 통제하는 데 그런 부분도 활용했는데, 그러면서 하나회 같은 데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이들이 진급하는 데에도, 보직을 맡는 데에도 그랬다. 그와 함께 '내가 너를 특별히 신임한다'는 표시로 여러 가지 하사품을 내리기도 한다. 군도(軍刀)나 지휘봉을 주거나 촌지라고도 하는 하사금을 내리기도 했다. 주목할 점은 박정희가 보직, 진급 같은 문제에서 특별히 신경 쓴 지역이 경상도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특정 지역의 지지를 발판으로 유신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고 앞에서 이야기하지 않았나. 경상도 출신 장교들에게 요직을 많이 맡긴 것도 그런 차원이었고, 또 그래서 하나회 구성원이 많은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것들과 더불어 박정희는 군의 요직을 맡은 이들 사이에 갈등 관계를 만들어 자신에게 절대 충성하게 하는 방식을 택하기도 했다. 예컨대 수경사령관과 보안사령관을 계통이 다른 사람으로 임명해 서로 견제하고 감시하도록 한다든가 또는 아주 중요한 부대인 특전단의 여단장을 비롯한 각 단계별 지휘관들을 각각 다른 계통에서 임명해 서로 견제하게 하는 식이었다.

이런 여러 방식을 활용해 군이 절대 충성을 하도록 만들고, 박정희가 유사시라고 판단하면 언제든 계엄 같은 것을 내려 군을 동원할 수 있는 상태로 해둔 것이다. 실제로 유신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 날(1972년 10월 18일) 전군 지휘관 회의를 열어서 '군이 절대 충성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나. 그리고 긴급 조치를 봐도, 처음에 긴급 조치 1호(1974년 1월 8일)와 4호(1974년 4월 3일)를 발동할 때에는 위반자들을 군사 재판에 회부했다. 별 두 개, 세 개짜리로 비상고등군법회의, 비상보통군법회의라는 걸 구성하게 해가지고 긴급 조치 위반자들을 다스리게 했다. 그만큼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1979년 10월 부마항쟁이 났을 때도 비상 계엄령, 위수령을 내리지 않나. 이때도 일각에서는 '꼭 군이 나서지 않더라도 처리할 수 있다'고 얘기했지만, 박정희는 비상 계엄을 선포하고 위수령을 내려 군을 동원했다. '유신 체제에 저항하려 하거나 유신 정권을 비판하는 세력은 철저히 응징한다. 그런 세력은 군이 용납하지 않는다', 이걸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군에 대해 절대 충성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 군이 그야말로 청와대의 눈치만 보게 만드는 사건이 하나 터졌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기세등등하던 군 실력자의 몰락, 윤필용 사건


프레시안 : 그게 무엇인가.

서중석 : 유명한 윤필용 사건이다. 유신 쿠데타가 난 지 불과 5개월밖에 안 지난 때인 1973년 3월, 박정희는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 '윤필용 수경사령관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윤필용과 강창성은 육사 8기 동기였다. 강창성은 1971년 8월 보안사령관에 임명됐는데, 그때 박 대통령이 임명장을 주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JP(김종필)와 수도권 부대를 각별히 챙겨봐라." 그것에 유념해 보안사 활동을 전개하라는 것이었다. 김종필은 이때 총리이긴 했지만 실권은 별로 없다고들 생각하던 때였는데도, 박정희는 이런 지시를 내렸다. 어딘가에서 자신을 대체해 누군가를 내세우려 할 때 여전히 김종필을 생각하지 않겠느냐고 박정희가 봤거나, 당장은 김종필이 아무리 힘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여튼 박정희 자신을 위협하는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무섭게 지시를 내린 것 아니겠나.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식으로 강창성에게 '김종필을 각별히 챙겨라'라고 한 것 같다. 그리고 수도권 부대라고 하면 1차적인 건 수경사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신망을 가장 많이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던 윤필용이 수경사령관이었는데도, 이렇게 수도권 부대를 각별히 챙기라고 한 것이었다. 그만큼 서로 경쟁시키고 견제하게 한 것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

박정희는 1973년 3월 강창성을 불러서 '너 이러이러한 얘기 들었느냐'고 하면서 윤필용을 수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연유에 대해서는 여러 자료에 비슷하게 나오는데, 뭐냐 하면 박정희가 강창성을 부르기 얼마 전 윤필용이 이후락과 술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윤필용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형님"이라고 불렀다고 그런다. "각하가 연만하셔서 노쇠하기 전에 청와대에서 물러나도록 해 영원한 대통령이 되도록 모셔야 한다"고 하면서 '형님이 후계자가 돼야 한다'는 뜻으로 얘기를 했다는 것이다. 물론 윤필용은 이후락을 형님이라고 부른 적은 있지만 다른 이야기를 한 사실은 없다면서 강창성한테 펄펄 뛰었다.

그런데 윤필용이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하면 그건 수경사령관 자리에 적합하지 않은 발언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니 그 직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예편하게 하면 되는 것일 텐데, 박 대통령은 강창성에게 그런 뜻으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엄명을 내린 것이고, 강창성은 대통령의 엄명이 떨어졌으니까 수사를 하게 됐다.

프레시안 : 윤필용은 어떤 사람이었나.

서중석 : 윤필용은 당시 군 최고 실력자라는 이야기를 듣던 사람이다. 당시 군에 있던 나도 졸병이긴 했지만 그렇게 들었고, 여기저기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이 사람은 1961년 5.16쿠데타 전부터 박정희를 오랫동안 직접 모셨고, 5.16쿠데타 후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을 할 때는 비서실장 대리도 했다. (한국전쟁 후 박정희가 5사단장으로 부임했을 때 윤필용은 그 밑에서 대대장을 맡고 있었다. 박정희는 윤필용을 사단 군수 참모로 기용했다. 그 후 박정희가 다른 여러 보직으로 이동할 때 윤필용도 박정희를 따라 수차례 자리를 옮겼다. 5.16쿠데타에 적극 가담해 공을 세운 건 아니었지만, 박정희와 오랫동안 인연을 맺은 것을 자산으로 삼아 윤필용은 세력을 키워간다. 한편 박정희가 5사단장, 윤필용이 5사단 군수 참모일 때 참모장은 다름 아닌 김재규였다. <편집자>) 그리고 1965년 육군 방첩부대장이 된 후 언론에 대한 아주 심한 테러를 많이 했다. 그런 점에서도 참 못된 자인데, 박정희 대통령한테 충성심을 보이려고 그렇게 하지 않았겠나. 그 후 베트남에 일선 사단장으로 나갔다가, 박 대통령이 1970년에 수경사령관으로 임명해 제3대 수경사령관이 됐다. 핵심 요직에 오른 것이다. 또 한때는 박 대통령이 군 진급 문제 등에 대해 윤필용에게 의견을 물어보기도 한 모양이다. (군 정보 기관인 방첩부대의 전신은 이승만 정권 시절 특무대(특무 부대)다. 이승만의 신임을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다 살해된 김창룡이 한동안 이끌었던 바로 그 부대다. 특무대는 1960년 4월혁명 후 방첩부대로 개편된다. 1960년대 말 방첩부대는 보안사로 다시 바뀐다. 1990년 10월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광범위한 민간인 사찰 실태를 폭로한 것을 계기로, 1991년 보안사는 기무사로 바뀐다. <편집자>)

그리고 김재규가 강창성 전에 보안사령관을 했는데, 그때 수경사령관을 감청하다가 윤필용하고 대판 붙은 적이 있다. 거기서 윤필용이 이겼다. 김재규도 박 대통령의 특별 신임을 받던 사람 아닌가. 그런 김재규보다 윤필용이 더 힘이 세다는 게 이런 일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자 문 모 대장을 포함해 군 수뇌급들이 1972년, 1973년 신정 때 하급자인 윤필용 집에 가서 세배를 했다고 그런다. 윤필용의 힘이 이렇게 세서, 수경사령부 본부가 있는 곳을 사람들이 '필동 육본'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정계, 재계 인물들이 윤필용을 찾아온 건 물론이고 군 선배들도 술자리에서 윤필용을 상석에 앉혔다. 공식 행사장에서도 윤필용이 앞줄에, 선배들이 그 뒤에 앉을 정도였다. 이런 일들이 있을 정도로 윤필용이 실력자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런 윤필용이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추락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이후락하고 술을 마시면서 이후락한테 아첨 좀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건데, 이후락과 경쟁하는 처지이던 박종규 경호실장 쪽을 통해 그런 이야기가 박 대통령 귀에 들어간 것이다. 박정희가 그것에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결국 강창성이 수사를 하게 된 것이다. 윤필용은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되는데, 실제로는 쿠데타를 하려는 어떤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러한 윤필용 사건은 몇 가지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난 본다.

▲ 1973년 4월 29일 재판정에 선 윤필용 사건 관련자들(앞줄 오른쪽 끝이 윤필용, 그 바로 옆이 손영길). ⓒ연합뉴스


하나회 친 강창성, 하나회 감싼 박정희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그 중 하나가 하나회 문제다. 그전에 한 가지를 먼저 살펴보면, 윤필용을 조사하던 강창성에게 박정희는 "이후락도 조사해", 이렇게까지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참 무서운 사람 아닌가. 그래서 강창성이 '그걸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느냐'고 했고 김정렴 비서실장도 '이후락까지 조사하는 건 사건을 너무 크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만류했다고 한다.

이후락은 1973년 12월 중앙정보부장을 그만두게 되는데, 그 직후 해외로 도피한다. 그렇게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몇 달 전에 윤필용 사건을 보지 않았나. 윤필용이 어떤 식으로 당했는지를 잘 알지 않았나. 그래서 줄행랑친 이후락은 '안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청와대로부터 받은 후 1974년 2월에야 귀국한다.

하여튼 강창성은 윤필용 사건을 조사하던 중 하나회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보안사 조사팀은 하나회에 대해 '이건 있을 수가 없는 것 아닌가', 이렇게 판단했다. 그렇지 않나. 군 내부에 사적 특수 조직이 있고 그자들끼리 서로 편의를 봐주면서 요직을 차지하려 한다는 건 심각한 문제 아닌가. 그건 한 나라의 국방 체계를 병들게 하는 수준을 넘어서 군 자체를 문란하게 하는 동시에 큰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것 아닌가.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다수가 들어가 있는 군 내부 사조직이라는 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이유 때문에 보안사 수사관들이 '이건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강창성도 그걸 철저히 조사하라고 하지 않았겠나. 그래서 수사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 하나회의 주요 인물들 중 상당수가 윤필용 막하에 있었다. 그러니까 윤필용이 하나회 대부라는 이야기는 틀림없는 것이었다.

프레시안 : 이 사건 당시 윤필용 밑에 하나회 구성원들이 어느 정도 있었나.

서중석 : 예컨대 수경사 장교들을 보면 참모장 손영길 준장을 비롯해 정보 참모, 작전 참모, 군수 참모, 30대대장, 30대대 부대대장, 33대대장, 33대대 부대대장, 5헌병대장, 5헌병대 부대대장, 방공포 대대장, 그리고 수경사 본부 사령과 비서실장, 전속 부관까지 전부 하나회였다. 이 중 몇 사람만 살펴보자. 30대대는 청와대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부대라는 점에서 아주 중요했는데, 30대대장이던 이종구 중령 이 사람은 12.12쿠데타(1979년), 5.17쿠데타(1980년) 때 역할을 하면서 나중에 참모총장, 국방부 장관까지 올라간다. 30대대 부대대장이던 안현태 소령은 전두환 정권 때 대통령 경호실장을 맡는 하나회의 핵심 인물 중 하나다. 어쨌건 이처럼 수경사의 거의 모든 요직을 하나회에서 차지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윤필용이 이런 방식을 통해 하나회 쪽을 장악하려 했고 박정희는 그것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은 해볼 수 있다. 박정희 자신이 특별한 관심을 쏟으며 하나회를 키우고 있는데, 윤필용이 하나회에 대해 똑같이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하나회가 당시 요직을 쥐고 있던 곳은 수경사만이 아니었다. 손영길과 육사 11기 동기인 전두환 준장은 중요 보직 중 하나인 제1공수여단장을 맡고 있었다. 역시 육사 11기이고 훗날 신군부 정권에서 힘이 아주 센 인물이 되는 권익현 대령은 연대장이었고, 노태우 대령도 전방 연대장을 맡고 있었다. 보안사 안에도 하나회가 많이 들어와 있었다. 그것도 수경사를 관장하는 자리인 보안사 506보안대장이던 정동철 대령, 또 나중에 12.12쿠데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보안사의 허화평·허삼수 소령, 이 사람들도 다 하나회였다. 강창성은 자신이 506보안대장으로 중용했던 정동철 대령이 바로 하나회라는 사실을 수사 과정에서 알게 된다. 이처럼 군에서 가장 좋은 보직들 중 상당수를 하나회에서 차지하고 있었다.

강창성은 손영길 준장, 권익현 대령 등 장교 10명을 횡령, 수뢰, 직권 남용, 군무 이탈죄 등으로 구속했다. 아울러 506보안대장이던 정동철 대령을 포함해 장교 31명의 군복을 벗겨버렸다. 강창성은 윤필용 조사를 끝내고 박정희 대통령한테 보고하는데, 이때 보안사에서 파악한 육사 11기에서 14기까지 하나회 핵심 20여 명의 명단을 내놨다. 그랬더니만 박 대통령은 '그냥 두고 가라', 이런 태도를 취했다. 그래서 강창성은 '도대체 이럴 수 있느냐. 이건 이상하다', 이렇게 느꼈다고 한다. 강창성이 그렇게까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몰랐을까 싶기도 한데, 달리 생각하면 박 대통령이 뒷배를 봐주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하나회를 함부로 못 건드렸을 것이다. 강창성이 하나회를 친 걸 보면 그걸 잘 몰랐던 것 같다.

강창성은 하나회 회장이자 제1공수여단장이던 전두환을 직접 소환해 조사했다. 그런데 사실 전두환은 '윤필용이 전횡하고 있다. 이것에 대처해야 한다', 이걸 박종규 경호실장한테 제일 먼저 제보한 사람이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전두환을 불렀는데, 박정희 앞에서도 전두환은 '윤필용을 제거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진급 축하 파티 열어주고 하사품 내리고…박정희 비호 아래 세력 키운 하나회

ⓒ오월의봄
프레시안 : 하나회 대부로 통하던 윤필용을 쳐내야 한다고 하나회 회장인 전두환이 주장한 사실을 어떻게 봐야 하나. 하나회 구성원 중 상당수가 윤필용 사건에 연루돼 곤욕을 치렀는데, 정작 회장인 전두환은 멀쩡했다는 점도 눈에 들어온다.

서중석 : 그것에 대해 여러 평이 있다. 제 대부까지도 고자질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평도 있고, 그게 아니라 전두환이 선을 대고 있던 줄하고 손영길 쪽 줄하고 계통이 달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손영길은 전두환하고 막상막하였고 동기들 중에서 준장으로 제일 먼저 진급했던 사람인데, 후자의 설명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러니까 '손영길은 윤필용한테 선을 댄 그쪽 직계였고 전두환은 박종규 쪽이었다. 나중에 차지철이 경호실장이 됐을 때에도 전두환은 차지철 쪽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박정희는 하나회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나회 관계자들이 지휘관으로 나가면 군도, 지휘봉 같은 걸 기념으로 줬을 뿐만 아니라, 진급자들을 위해 축하 파티도 열어주고 승용차라든가 금일봉도 선물했다. 하나회 관계자들도 자신들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나회에 대해서는 나중에 12.12쿠데타를 다룰 때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하나회 멤버가 이때 장성부터 중위까지 무려 220여 명에 달했다고 돼 있다. 그 하나회 멤버 중에서도 전두환에 대해서는 박정희가 잘 알고 있었다. 전두환이 장군으로 진급할 때 박정희는 축하 파티를 열어주고 고급 승용차도 선물로 줬다. 그러면서 공수여단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위치에 있던 제1공수여단장 자리를 딱 안겨줬다. (전두환은 5.16쿠데타 당시 육사 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데모를 조직하면서 박정희의 눈에 들었다. 그 후 '박정희의 양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편집자>)

그랬던 건데 강창성이 결과적으로 잘못 건드린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를 강창성은 잘 몰랐던 것 같다. 그에 더해 강창성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쪽으로부터 반격을 받게 된다. 강창성을 겨냥한 그 반격에 대해서도 박정희는 '그 내용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엄명을 내린다. 강창성을 앞세워 윤필용을 중심으로 한 큰 세력을 무너뜨렸으니 이제 강창성을 칠 때가 됐다고 본 것 아니겠나. 이이제이라고 할까.

프레시안 : 강창성은 어떤 반격을 받았나.

서중석 : 당시 군인들이 판공비 같은 걸로 자신이 쓸 돈을 마련하기 위한 제일 쉬운 방법은 군용 휘발유를 파는 것이었다. 이때뿐만 아니라 1950년대, 1960년대에도 모두 그랬고 이건 세상이 많이 알고 있던 비밀이었다. 강창성도 보안사령관으로서 휘발유를 팔아 정보 수사비로 썼다고 한다. 이걸 중앙정보부 쪽에서 잡아가지고 반격에 들어갔고 박 대통령이 '철저히 수사하라', 그렇게 한 것이다. 육군 범죄수사단에서 이걸 맡아 수사했는데, 거기에 끌려간 보안사 요원들이 지독하게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휘발유 건으로 보안사를 공격하는 일에 중앙정보부뿐만 아니라 하나회 쪽도 관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편집자>)

그해 8월 강창성은 박 대통령한테 불려갔다. "강 장군 때문에 경상도 장교들 씨가 마르겠다고 그래." 대통령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은 다음 날 강창성은 3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됐다는 통고를 받게 된다.

그런데 이 윤필용 사건에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있다. 이 사건에서 재판을 진행하고 판결을 내리는 것 등을 보면, 어떻게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느냐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윤필용 등 장성 3명을 비롯해 10여 명이 업무상 횡령 등 8개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다. 이 중 한 명은 전 육군 범죄수사단장 지성한 대령인데, 1971년 10월 고려대에 수경사 병력을 끌고 들어가서 학생들을 마구 때리고 잡아가고 교내에서 최루탄을 터트리는 짓 등을 했던 자다. 그런데 이 사건에 걸려들더라. 아무튼 윤필용은 징역 15년, 벌금 2000만 원, 추징금 590만 원을 받았다.

내가 그때 군 복무 말기였는데, <전우신문>(오늘날 <국방일보>)에 적힌 윤필용의 범죄 내용을 읽었을 때 '매장시킨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이런 식으로까지 할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막말로 사람을 갈아버린다고 하지 않나. 그런 말이 떠오를 정도였다.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분명 윤필용은 나쁜 짓을 참 많이 한 사람이다. 1971년 10월 고려대에서 수경사 병력이 얼마나 학생들을 구타하고 못된 짓을 많이 했나. 윤필용이 방첩대장을 할 때 언론인 테러도 정말 많이 하지 않았나. 박 대통령한테 충성을 다하기 위한 조치로 여기고 그렇게 했겠지만, 그런 소행을 생각하면 '이후락과 술 마시던 자리에서 한 말로 걸려들어 쫓겨난 건 잘된 일이다',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표현 같은 게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뭐냐 하면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고 치부, 엽색 행각 같은 게 말할 수 없이 심했다'는 식으로 윤필용을 단죄하는 내용이었는데, 그걸 표현한 문구 같은 것이 '어떻게 이런 문구를 써가면서 재판을 한다고 하는 것인지, 이건 해도 너무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권력이라는 게 참 잔인하고 무섭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런 식으로 당한 유사한 사례가 다른 나라에도 있었다는 얘기를 책에서 본 기억이 있었는데, 윤필용 사건에서 그런 게 바로 나타난 것을 보니 놀랍더라.

<동아일보>가 사설에 이렇게 썼더라.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차마 눈으로 볼 수도 없으며 입으로 차마 말할 수도 없는 내용과 그 소행들이 판결에 점철돼 있다." 이 사건을 이런 식으로 처리한 건, 신문에도 나오고 했으니 군만 겨냥한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무엇보다 특히 군에 경각심을 불어넣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유일 체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그리고 다른 생각을 품으면 어떤 식으로 당할 수 있는지를 '윤필용처럼 힘센 사람도 이렇게 당했다'는 것을 통해 보여주려 한 것 아니겠나. 난 그 생각밖에 안 들더라. 그래도 어떻게 치정 관계 같은 걸 중심으로 인간을 그런 식으로 비하하는 말투를 쓴 것인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회 수사한 '죄'로 신군부에게 호되게 보복당한 강창성

프레시안 : 강창성이 보안사령관에서 물러나게 된 과정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인생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그 후에도 큰 영향을 받게 되지 않나.

서중석 : 강창성은 나중에 인생무상을 여러 번 느끼게 된다. 강창성이 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그렇게 닦달했던 하나회가 12.12쿠데타, 5.17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지 않나. 그러면서 강창성은 끌려가게 되는데, 그것도 하필이면 서빙고 분실로 잡혀갔다. 바로 보안사의 핵심 수사 장소 아닌가. 거기서 지독하게 당하지 않았겠나. 12.12쿠데타 후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도 보안사에 끌려가 정말 심하게 당했다고 하지 않나. 그 젊은 보안사 병력들한테 고문당하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나. 그자들은 참 무섭게 했다.

그런데 강창성이 잡혀 들어간 그곳에 김상현도 또 잡혀 들어와 있었다고 한다. 5.17쿠데타가 나고 나서 참 많이들 잡혀가지 않았나. 그때 나도 잡혀가서 며칠간 두들겨 맞았는데, 하여튼 그렇게 만난 강창성과 김상현이 서로 뭐라고 할 수 있었겠나. 유신 쿠데타 후 김상현을 잡아넣은 게 다름 아닌 강창성 아니었나.

강창성은 여기서도 인생무상을 느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생무상을 그보다 더 심하게 느끼게 된다. 그 무렵 강창성은 지독하게 당하면서 당뇨병도 얻고 몸무게가 25킬로그램이나 줄어들고 건강이 극도로 악화됐다고 한다. 그런데 병보석으로 나오기는커녕 이번엔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이른바 순화 교육을 시킨다는 명목으로 전두환 신군부 정권이 많은 사람을 삼청교육대에 집어넣지 않았나. 보안사령관을 지낸 예비역 장성 강창성도 거기에 집어넣고 순화 교육을 네 차례나 받게 했다고 한다. 삼청교육대 하면 많이 나오는 사진 있지 않나. 목봉이라고 불리는 큰 나무를 한쪽 어깨에 멨다가 다른 쪽 어깨로 넘기는 그 사진. 강창성은 바로 그것도 해야 했고, 그것 말고도 훈련이라는 훈련은 다 받아야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인생이라는 게 참 이렇구나 하는 걸 느낀 것이다. 이 사람은 그 후 나와서 책을 한 권 쓴다. 일본과 한국의 군벌 정치를 비교한 것으로, 1936년 일본에서 발생한 2.26사건과 하나회 문제를 연결해 생각해보려 한 책이었다.

▲ 이른바 목봉 체조를 하는 삼청교육대원들의 모습. 하나회를 수사했던 강창성도 신군부 집권 후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목봉 체조를 비롯한 온갖 '순화 교육'을 받아야 했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윤필용 사건은 군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서중석 : 윤필용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이 군을 얼마나 무섭게 관리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줬다. 이 사건 이후 군은 그야말로 청와대의 눈치만 볼 수밖에 없게 됐다. 더군다나 차지철이 경호실장이 된 이후에는 다들 전전긍긍하며 박정희에 대해 절대적인 충성 경쟁을 하게 되지 않나. 그러면서도 하나회의 고급 장교들, 예컨대 박정희가 그렇게 총애했던 전두환조차 '유신 체제 말기에 박정희가 참 문제가 있다고 봤다'는 주장을 나중에 또 하지 않나. 그런 걸 보면 여기서도 인생무상을 느낄 수 있다.

하나 덧붙이면, 박정희가 하나회를 특별히 키워준 건 자신의 복심 부대, 충성 부대를 만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중에 12.12쿠데타를 다룰 때 자세히 이야기하게 될 텐데, 말하자면 사적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자는 사적으로 자신에게 충성하는 부대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유신 체제를 보면 사적인 국가 운영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개인의 절대 명령으로 모든 걸 움직이려고 한 것인데, 거기에 어디 공적인 게 있었나. 그런 때에는 사적인 충성을 할 수 있는 군 특수 조직을 필요로 한 것 아닌가 싶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스물여덟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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