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프레시안 : 유신 쿠데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박정희 측은 대만(장제스), 스페인(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총통제 등을 연구했다. 총통제 구상은 1971년 대선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유신 체제와 당시 대만 및 스페인의 총통제, 이 셋 모두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비롯해 공통점이 많은 건 분명하다. 그렇지만 다른 점도 꽤 있는 것 같다.
서중석 : 1972년 10.17쿠데타를 통해 만들어진 유신 체제는 대만, 스페인에서 총통제가 형성된 것과 그 성립 과정 등에서 다른 점이 있다. 유신 쿠데타 같은 것이 일어나리라고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10.17쿠데타가 발생해 유신 체제가 만들어졌다는 점을 전에 살펴보지 않았나. 바로 이런 것이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 대만의 장개석(장제스) 독재와 유신 체제의 큰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대만이나 스페인에서는 '독재 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상당수가 그런 쪽으로 몰고 가는, 또는 파시즘 운동을 비롯한 여러 운동이 일어나는 속에서 장개석 총통 정권, 프랑코 독재 정권이 출현하게 된다. 대만과 스페인에서 총통제 정권이 성립하는 과정을 보면 유신 체제가 만들어진 과정과 어떻게 달랐는지를 알 수 있다.
함께 이주한 대륙 출신을 기반으로 일당 독재를 구축한 장제스
서중석 : 장개석 대만 정권의 성립 과정을 되짚어보자. 다 알다시피 2차 세계대전 후 국부군은 국공내전에서 모택동(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군에게 패하며 존립의 위기에 내몰리지 않나. 대륙을 거의 다 잃으면서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문제가 국민당 정부 내에서 제기된다. 그러면서 대만으로 나가는 방법을 강구하게 된다. 그에 따라, 패색이 짙던 1949년 5월에 이미 대만에 계엄을 선포했다. 1949년 12월에 대만으로 수많은 군대, 어떤 데는 80만 명으로도 나오는데 하여튼 수십만 명의 국부군은 물론이고 대륙에 그대로 있으면 큰일 날 사람들이 대만으로 대거 가게 된다. 그로부터 석 달 후인 1950년 3월 장개석이 총통으로 복귀한다. 1949년 1월 국공내전 상황 등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의미로 장개석이 총통에서 물러나고 이종인(리쭝런)이 그걸 대행했는데, 1년 2개월 만에 이종인이 물러나고 장개석이 다시 총통이 된 것이다.
당시 대만 인구가 680만 명 정도였는데 그중에서 이 무렵 대륙에서 건너온 이주민이 약 160만 명이었다고 한 책에 쓰여 있다. 국민당 정권은 대만인, 이 대만인이라는 말이 정확히 어디까지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참 이야기하기 힘들긴 하지만 여기서는 이 시기에 대륙에서 이주한 약 160만 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말하는데 어쨌건 이 대만인들의 반응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대륙에서 겪은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통치, 비상 통치를 구사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이 시기에 대륙에서 온 군과 이주민 사이에 일정하게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대만의 인구 구성을 살펴보면 그 구조가 상당히 복잡하다. 일반적으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할 무렵 대만으로 건너온 대륙 출신을 외성인(外省人), 그전부터 대만에 거주하던 한족을 본성인(本省人)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외성인을 제외한 나머지 대만 거주자들만 놓고 보더라도, 이들은 하나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이 아니다. 우선 한족의 경우 민남인과 객가인으로 나뉜다. 민남인은 명나라와 청나라 때 주로 푸젠성에서, 객가인은 주로 광둥성에서 대만으로 건너왔다. 그에 더해 대만에 한족만 사는 것도 아니다. 한족이 이주하기 전부터 대만에서 살아온 원주민이 있다. 원주민은 그 족(族)이 10여 개에 이른다.
정리하면 외성인, 민남인, 객가인, 원주민이 오늘날 대만 사회의 4대 종족 집단을 이루고 있으며 이 중 최대 집단은 인구의 약 70퍼센트를 차지하는 민남인이다. 4대 종족 집단은 각기 다른 언어를 쓰는 등 문화적 정체성이 서로 다르다. 대만 인구 전체에서 소수 중의 소수인 원주민, 그리고 본성인 중 소수인 객가인은 1980년대 이후 각각 원주민 운동, 객가 운동이라는 정체성 찾기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처럼 대만의 정체성 문제는 '통일이냐 독립이냐'로 대표되는 사안, 즉 대륙 중국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사안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문제는 본성인-외성인, 한족-원주민, 민남인-객가인 등의 구도로 드러나는 대만 내부 종족 집단 간의 정체성 갈등과 맞물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만의 정체성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청일전쟁에 패하며 1895년 대만을 일본에 뺏긴 중국은 1945년 대만을 되찾는다. 그 후 국민당 세력이 대만을 장악하는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점령군을 연상케 하는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며 차별 대우를 해 현지 주민들과 갈등을 빚는다. 다시 말해, 1949년 대만으로 정부를 옮기기 전에 이미 국민당 정권과 대만 현지 주민들의 관계는 원만함과는 거리가 멀지 않았나.
서중석 : 그걸 상징하는 것이 바로 2.28사건이다. 장개석이 정부를 옮겨 가기 전인 1947년에 2.28사건이 큰 규모로 발생해 상당히 많은 대만 사람이 국부군(국민당 정부군) 등에게 죽지 않았나. 2.28사건 당시 대만 사람들은 언론과 집회 및 시위의 자유는 물론이고 주요 보직에 대만 출신을 임명할 것 등 광범위한 정치 개혁을 요구했는데, 이 시기에 일부에서는 독립 움직임까지 있었다고 한다. (2.28사건은 대만 현대사 최대의 비극으로 꼽힌다.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지만, 백색 테러가 빈번했던 국민당 일당 독재 시기에는 침묵을 강요당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수십만 명이 학살됐는데도 1960년 4월혁명 이전 이승만 집권기, 1961년 5.16쿠데타부터 1987년 6월항쟁에 이르는 시기에는 학살 피해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힘들었던 한국과 마찬가지였다. 2.28사건 진상 규명 문제는 1987년 계엄 해제 이후 본격적으로 제기된다. 1990년대에 들어와 대만 정부는 4년에 걸친 조사 끝에, 당시 1만8000∼2만8000명(대륙에서 이주한 사람 700∼800명 포함)이 사망했다는 내용을 담은 2.28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를 발표한다. 유가족과 야당은 '정부가 피해 규모를 축소했다'고 비난했다. 이들의 주장대로 사건 당시 피해 규모가 정부 발표보다 컸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만, 현재로서는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편집자>)
이러한 분위기에서 약 160만 명으로 전체를 지배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회를 아주 철저하게 통제해야 한다고 봤던 것이다. 그래서 1949년 12월 대만으로 장개석과 군인들, 대륙 이주민들이 대거 갈 때 당국(Party-State) 체제, 즉 당과 국가가 일원화된 일당 독재 체제를 만들고 '당금'(黨禁) 정책, 그러니까 다른 당의 설립을 금지하는 정책을 폈다. 야당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보금'(報禁), 즉 보도를 금지하는 정책을 통해 일정한 것을 제외하면 언론사 개설을 금지했다. 장개석이 총통으로 복귀하기 전부터 대만에서 그런 식으로 억압 체제를 구축해나갔다. 그렇게 해서 대륙 출신들이 정치, 군사를 장악하긴 했지만 그전부터 대만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저항 움직임이 만만치 않지 않았나. 그런 상황에서 소수 집단이던 대륙 출신들로서는 군사, 정보, 특무, 경찰 등을 통해 대만인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갈 수밖에 없던 면이 있었다.
그리고 장개석은 월등히 많은 군대를 가지고 대륙을 지배하다가 공산군한테 패한 가장 큰 요인이 부패, 기강 해이라고 봤다. 장개석은 부패하고 무능한 국민당을 철저히 개조해야 한다고 하면서 1950년 7월부터, 즉 총통으로 복귀한 지 불과 넉 달 후부터 전면적인 국민당 개조 작업에 들어갔다. 1952년 10월 국민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라는 걸 열 때까지 새로운 영도 기구를 구성하고 기층 조직도 재건하면서 조직과 기율을 강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부정부패를 용납하지 않고 철저히 단속하겠다는 태도를 취한다.
이처럼 이전부터 대만에 거주하던 사람들로서는 자신들을 탄압하는 장개석의 독재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로서는 '장개석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야 한다', 이런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던 면이 강했다. 장개석이 대만에서 새롭게 구축한 총통제는 박정희가 한 것처럼 하루아침에 갑자기, 아무도 모르게 준비해서 10.17쿠데타를 일으켜 유신 체제를 만들어내는 식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내전을 거치며 이질적인 여러 집단의 확고한 지지를 확보한 프랑코
서중석 : 거기는 과정이 더 달랐다. 스페인의 경우는 훨씬 더 복잡하고, 파시즘 운동이라든가 가톨릭의 반인민전선 활동 같은 것들이 모두 나중에 프랑코 총통 권력으로 집중되는 현상을 보여줬다.
스페인에서는 1936년 인민전선 내각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극우 세력 또는 우익과 좌익 간에 아주 심한 갈등이 있었고, 그러면서 심한 혼란이 계속됐다. 예컨대 1902년에서 1923년 사이에 내각이 33번이나 바뀌었고, 존속 기간이 6개월 이하인 단명 내각도 23번이나 나타났다. 그러니까 우익 가운데에는 '강력한 정권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이들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런 속에서 극우인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1923년 9월 쿠데타를 일으켜 자유주의 정부하고 의회 제도를 모두 붕괴시키고 193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파시즘적인 철권통치를 했다. 이탈리아에서 베니토 무솔리니를 정점으로 한 파시스트들이 로마로 진군해 권력을 잡은 때가 1922년 아닌가. 이탈리아와 비슷한 시기에 스페인에서도 극우 세력이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면 스페인 파시즘 운동을 이끌어가게 되는 것이 팔랑헤당인데, 우리말로 동지당으로도 번역되는 이 당은 1933년 리베라 장군 이 사람의 아들이 결성한 것이다.
어쨌건 그런 상황에서 1931년 제2공화국이 수립됐다. 겉모습으로만 보면 1939년까지 제2공화국이 가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1936년 2월 선거에서 표차가 별로 안 나는 아슬아슬한 승리를 거두며 인민전선 내각이 출범하게 된다. 그런데 인민전선 내각은 여러 세력 간의 내부 갈등이 아주 심했다. 대표적인 것이 아나키즘 세력과 공산당 사이의 갈등일 텐데, 거기에다가 분리 독립 문제도 있었다. 바스크 쪽이라든가 바르셀로나가 있는 카탈루냐 쪽에서는 상당수가 분리 독립을 주장했는데, 이 세력에는 아나키스트도 들어 있었고 여러 진보 세력이 섞여 있었다. 당시 인민전선 내각은 공공질서를 유지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한다. 한 스페인 역사가는 "겁에 질린 채 길거리에 나가 있는 정권"이라고 평가했다.
그런 가운데 프랑코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1936년 봄부터 반란 음모에 가담한 장교들의 마음속에는 군부 반란이 합법 정부, 즉 인민전선 정부에 대한 단순한 군사 반란이 아니라 모든 통치권을 상실한 정부에 맞서 국가를 방어하는 것이라는 식의 사고가 있었다. 국가를 지키려면 저 정부를 때려 부수고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반란에 대해 이들은 아나키스트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키는 혁명의 혼돈 속에서 국가를 구원하는 일종의 국가 구조를 위한 결단이라고 생각했다. 이들 장교들은 국가 통합과 공공질서 문제에서는 프랑코보다 더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1936년 7월 18일 장교단이 드디어 반란을 일으킨다. 그 후 1939년까지 32개월 동안 어니스트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 같은 사람도 참여하는 그 유명한 스페인 내전이 벌어지게 된다.
프레시안 : 잘 알려진 것처럼 스페인 내전은 안타깝게도 프랑코 반란 세력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서중석 : 프랑코가 총통 자리에 오른 건 이러한 내전의 산물이었다. 또 프랑코가 권력을 잡기 전부터 팔랑헤당이 파시즘 운동을 펴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스페인의 국민전선, 즉 반란군 측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장개석도 히틀러의 지원을 한때 받긴 했지만,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프랑코를 지원한 규모는 그보다 훨씬 컸다. 그리고 소련이 인민전선을 지원한 것보다 월등 일찍, 더 큰 규모로 지원했다.
프랑코는 1937년 4월 팔랑헤당원과 카를로스 왕당파 당원의 통합을 지시했다. 카를로스 왕당파는 말 그대로 공화국이 아니라 왕국으로 다시 가야 한다는 세력인데, 프랑코의 지시대로 이 왕당파 당과 팔랑헤당이 합쳐 국민운동당이 됐다. 이게 국민전선 측의 유일당, 다시 말해 장개석의 국민당과 같은 유일당이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프랑코는 1939년 내전에서 인민전선 정부를 무너뜨리고 승리했을 때 정치적, 군사적으로 절대적인 최고 지도자가 돼 있었다. 박정희처럼 어느 날 갑자기 유신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 권력을 바로 휘두른 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프랑코가 권좌에 오르기 전 공화국 정부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추진했다. 가톨릭교회의 종교 교육을 의무화했던 것도 폐지하고, 이혼도 허용하고, 예수회도 해체해버렸다. 아울러 인민전선 쪽에서는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불태워버렸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에서는 '인민전선 정부를 반드시 없애야 한다. 절대악이다', 이런 생각을 강하게 가지면서 프랑코를 지지했다. 스페인에서는 팔랑헤당보다도 이 가톨릭교회가 더 영향력이 강했다고 볼 수 있지 않나. 이에 부응해 프랑코는 집권 후 바로 교회의 권리를 옹호하고 가톨릭이 과거에 했던 역할을 다시 수행하게 된다.
이처럼 프랑코는 국민전선 측의 유일당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았고, 스페인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가톨릭으로부터도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장교들도 혁명의 혼돈에서 유일하게 국가를 구할 수 있는 프랑크 아래에서 단결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했다. 보수적인 스페인의 장교 집단에서는 프랑코가 중심이 돼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 프랑코는 군사적으로도 절대적인 최고 지도자가 됐다.
그러니까 내전 기간에 팔랑헤당원, 전통주의자, 가톨릭교도 등 이질적인 여러 집단이 프랑코 아래 통합된 것이다. 그런 속에서 고급 장교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장교가 프랑코의 입장 또는 지도자론에 동조하고 있었다. 스페인 역사가들이 쓴 글을 보면, 당시 사관생도들은 '스페인의 단결'을 가슴 깊이 간직했고 그들에게 조국이라는 어휘는 단순한 수사학적 표현 이상의 것이었다고 돼 있다. 그런 것들을 바탕으로 프랑코주의는 한 독재자의 개인적 이즘(ism), 이상을 초월해 보수 집단의 통합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기능을 한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를 놓고 볼 때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 대만의 장개석 정권은 박정희의 유신 체제와 겉모습은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성립 과정 등에서 많이 달랐다. 프랑코는 1939년부터 1975년까지만 따져도 36년간 집권했다. 내전을 일으킨 때부터 따지면 그보다 더 길다. 장개석은 총통으로 복귀한 1950년부터 따지면 1975년까지 25년간 대만을 통치했다. 그 아들인 장경국(장징궈)이 1987년 계엄을 해제할 때까지 따지면 국민당 정권의 일당 통치 기간은 그보다 훨씬 길다. 거듭 말하지만 유신 체제는 대만의 장개석 정권,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과 성립 과정이 많이 다르다. 그뿐 아니라 대만, 스페인과 유신 쿠데타가 일어나던 시기 한국의 상황에 크게 다른 점이 또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프랑코와 장제스 독재의 유산을 하나씩 청산해온 스페인과 대만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뭐냐 하면 한국에서는 민주주의 체제를 상당 기간 맛봤다는 것이다. 어쨌건 1945년부터 1972년 사이에는 극우 반공적인 성격이 대단히 강했다고는 하더라도 제도적 민주주의가 일정하게 존재했다. 제3공화국 시기도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정치적 민주주의가 제도화돼 있는 생활을 하다가 유신 쿠데타로 인해 갑자기 극단적인 정치 체제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 점에서도 스페인, 대만과는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유신 쿠데타가 일어난 지 1년쯤 지난 후부터 스페인, 대만과는 달리 데모가 격화된다. 물론 스페인, 대만에서도 끊임없이 소요가 있긴 했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한국과는 상황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대만이나 스페인에서 권력을 유지한 방식과 달리 박정희는 긴급 조치라는 특이한 형태로 유신 체제를 존립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에도 말했듯이 1972년은 대만의 경우 민주화 쪽으로 방향을 트는 시점이었다. 장경국이 여러 가지를 개혁하는 시점이었는데, 그때 한국은 거꾸로 간 것이다. 대만이 굉장한 위기에 처했을 때인데도 오히려 그런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대만을 더 튼튼하게 가게 했다는 점을 박정희 유신 정권과 비교해 살펴봐야 한다.
정권 말기의 모습을 봐도, 프랑코 정권은 박정희 정권과 차이가 난다. 프랑코가 죽기 직전인 1974년에 아리아스 나바로 내각이 출범했는데, 그때 개방 쪽으로 방향을 튼다. 사실 그때쯤 되면 분리주의 운동이 바스크 지방에서 아주 세게 일어나고 바르셀로나 지방에서도 일어나면서 폭탄이 도처에서 터지고 그랬다. 프랑코를 지지했던 가톨릭도 1960년대에 들어서면 상당히 많이 변한다. 한국 가톨릭처럼 정의 구현을 하려는 쪽으로 갔다. 거기에도 굉장한 주교가 있었는데, 그분이 중심이 돼서 프랑코 반대 운동을 꽤 크게 벌인다. 그런 상황에서 출범한 나바로 내각은 개방을 외치면서 국가 주도주의의 종식을 선언한다. 그러면서 관광객이 몰려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75년 프랑코는 세상을 떠나는데, 대만의 장개석도 같은 해에 죽는다.
프레시안 : 스페인과 대만에서는 프랑코와 장개석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서중석 : 프랑코와 장개석이 세상을 떠난 해인 1975년부터 박정희 유신 체제는 반공, 반북 운동을 벌이면서 오히려 훨씬 더 극단적인 유신 수호 운동을 하지 않나. 그런 것과 대조적으로, 프랑코가 죽은 지 불과 100일밖에 안 지났을 때 스페인에서 프랑코 시대는 까마득한 옛날과 같았다고 스페인 역사가들이 쓴 책에 나온다. 프랑코에 대한 이러한 침묵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대다수 여론은 프랑코에 대한 추억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1976년 11월에 보통 선거에 입각한 양원제 국회를 설립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정치 개혁법이 통과됨으로써 프랑코주의의 기반이 결정적으로 무너지게 된다. 이 정치 개혁법은 국민 투표에서 94퍼센트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통과됐다. 그 후 분리주의 운동이 전개되던 카탈루냐 지역에서 민족 축제 개최를 허가받는 등 변화가 이뤄졌고, 융통성이 없던 그 지독한 프랑코주의 중앙 집권 정권은 그렇게 종말을 고했다.
내가 스페인에 몇 번 갔는데 그중 한 번은 바로 이 프랑코 때문에도 갔다. 프랑코 묘지에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이자는 자기 묘지를 엄청 크게 만들었는데, 놀랍게도 스페인 내전 때 죽은 좌익과 우익 수만 명을 양쪽에 같이 묻는 형태를 취했다(전몰자의 계곡). 그리고 그 위에 거대한 십자가를 세웠다. 프랑코는 굉장히 경건한 가톨릭 신자였다. 여자관계도 깨끗한 편이었고, 나쁜 짓을 참 많이 하긴 했지만 상당히 청렴했던 것 같다.
2005년경 스페인에 갔을 때 프랑코의 딸을 만난 적이 있다. 그때 프랑코의 딸은 조그만 방에서 자기 아버지의 사진이 들어 있는 물건을 건네면서 "난 아버지가 천당에 가기를 계속해서 이렇게 빌고 있다"고 그러더라. 그전에 스페인에 갔을 때 프랑코 독재 시기에는 꿈꿀 수 없었던 모습, 아주 자유스러운 모습을 보고 놀랐는데 이때는 프랑코의 딸, 그 노파가 자기 아버지가 지옥이 아니라 천당에 가기를 비는 모습을 접할 수 있었다. 박정희의 딸과는 다른 모습이어서 인상적이었다.
스페인에서 프랑코는 완전히 잊혀야 할 인물로 여겨지고 있었다. 프랑코에 대한 추억을 말끔히 지우려는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그건 대만도 마찬가지다. 2.28사건 50주년을 맞아 1997년에 처음으로 대만에 갔는데, 그때 타이베이 중심가의 한 사원에서 장개석을 강하게 비난하는 모습을 봤다. 그때는 장경국 인기가 그렇게 좋더라. 장개석은 잊힌 인물 정도가 아니라 악당으로 여겨졌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한국 사회 일부에서 박정희에 대해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프랑코에 대해 스페인 사람들이 보여줬고, 프랑코 딸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1970년대에 박정희가 너무나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스페인과 대만의 1970년대를 이야기한 것이다.
(프랑코 집권기 동안 각 부문에 켜켜이 쌓인 독재의 유산을 극복하는 것은 1975년 이후 스페인 사회의 핵심 과제 중 하나였다. 물론 21세기에 들어서도 프랑코 집권기를 옹호하는 이들이 스페인 사회 일각에 여전히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내전 시기는 물론이고 프랑코 집권기에 자행된 숱한 인권 유린 범죄의 실상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프랑코를 옹호하는 목소리는 점점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프랑코의 고향 마을에서조차 프랑코와 그 가족에게 부여했던 명예 칭호를 박탈하고 프랑코 일가와 관련이 있는 학교 이름까지 바꾸는 결의안을 통과시킬 정도다.
한편 프랑코의 딸인 카르멘 프랑코가 관계한 프랑코재단이 프랑코 동상 철거를 반대하거나, 프랑코의 유해를 발굴·이장하는 방안에 딸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등의 소식이 국내에도 전해진 적이 있다. 그렇지만 이는 프랑코의 딸이 자기 아버지의 집권기에 있었던 인권 유린 범죄를 적극적으로 부정하거나 눈감은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와 관련,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도 2012년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프랑코의 딸이 보여준 인상적인 모습을 이야기한 바 있다. 당시 인터뷰에서 김 전 관장은 10여 년 전 스페인에서 프랑코의 딸을 만났는데, 그때 프랑코의 딸이 아버지가 국민들에게 잘못한 부분에 대해 참회하는 심정으로 아버지의 과오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편집자>)
대만·스페인 경우뿐만 아니라 5.16쿠데타와도 달랐던 유신 쿠데타
서중석 : 종합해서 이야기하면, 10.17쿠데타는 대만, 스페인과 다를 뿐만 아니라 5.16쿠데타와도 또 다르다. 중남미나 중동, 태국의 군부 쿠데타와도 다르다. 그런 점에서 10.17쿠데타는 특이한 면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16쿠데타가 날 때만 해도, 윤보선 대통령이 "올 것이 왔다"고 이야기했다지만, 일부 사람들은 올 게 왔다고 했다. 그런데 유신 쿠데타 때는 그렇지가 않았다. 극심한 경제적 혼란이나 심각한 좌우 대립 같은 게 있을 때 군부가 큰 정변, 변란을 일으키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나. 또는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유럽처럼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대중적 회의가 있을 때 파시스트들의 반의회 운동 혹은 반민주주의 운동 같은 게 일어나는 것 아닌가.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그런 게 아니었다. 1971년 선거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아주 강하게 나타나지 않았나. 대선이건 총선이건 그렇게 역동적인 때가 없었다고 이야기할 만한 시점이었는데, 그다음 해에 유신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대다수의 정치인은 물론이고 언론인이나 지식인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1972년 10월 17일에 일어난 것이다. 지난번에 이야기한 것처럼, 궁정동 안가 밀실에서 은밀히 유신 쿠데타 준비 작업을 한 소수를 제외하면 중앙정보부의 대다수 고위 간부들조차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1971년 대선, 총선이 역대 선거 중 가장 뚜렷하게 유권자의 민주주의 의식을 보여준 선거였고, 한국에는 파시즘적 정치 운동이라고 할 만한 게 그 시기에 전혀 없었으며, 1972년 시점에는 사회적, 정치적 혼란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한국에서 제일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남북 갈등도 1960년대 후반기에는 심각했지만, "1972년에는 수년 내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무력 침투에 관한 보고가 한 건도 없었다"고 1973년 미국 국무부 백서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위기라고 볼 수 있는 큰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게 1972년에는 한 건도 없었다. 다시 말해 휴전 협정 이후 제일 평온한 해가 1972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도무지 쿠데타가 일어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중앙정보부의 대다수 고위 간부들조차 예측을 못했던 것이다.
경제적 문제, 사회적 문제는 어느 시기든 있는 것이다. 핵심은 유신 쿠데타 같은 큰 변란이 일어날 만한 경제적 문제, 사회적 문제였는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밀실에서 박정희가 몇 명의 핵심 추종자들을 데리고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번에 이야기한 농촌 공화당원도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나', 이런 식으로 일기장에 써놓은 것이다. 유신 쿠데타 일주일 전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10.17쿠데타 계획을 들은 중앙정보부 국장들이 어안이 벙벙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10월 17일 당일 오전에 박정희가 쿠데타를 선언하는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보여줬을 때 청와대 특보들과 비서진도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나. 한마디로 상상하기 어려운 사건이, 그러니까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박정희의 정치 이념이나 성향이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그와 함께 헌법을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짓밟아도, 그래서 평지풍파를 일으켜 1인 독재 체제를 수립해도 아무도 그걸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박정희한테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10.17쿠데타가 일어나게 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스물다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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