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혜가 거듭되면 권리인줄 안다. 한국 재벌의 행태가 딱 이렇다. 지금 30대 재벌 대부분은, 이른바 '적산(敵産)'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본이 남기고 간 재산이라는 뜻이다. 해방 이후 미군정이 몰수했고,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민간인에게 헐값에 나눠줬다. 관료 또는 정치권에 끈이 있으면 누구나 한몫 크게 잡는다는 믿음은 이때 견고해졌다.
"특혜가 거듭되면 권리인줄 안다"
SK그룹 창업자 최종건은 일제 강점기 선경직물의 기술자였다. 선경직물은 일본 기업들인 '선만주단'과 '경도직물'이 합작해 설립한 회사였다. '최종건 평전간행위원회'가 펴낸 <공격 경영으로 정면 승부하라>에 따르면, 해방 직후 청년 최종건은 선경치안대를 조직해 선경직물의 일본인 간부들이 무사히 일본에 돌아가도록 도왔다. 이를 계기로 리더십을 인정받아 공장을 장악했고, 한국 정부는 1953년 최종건을 선경직물 대표로 공식 인정했다. '최종건 평전간행위원회'가 밝혔듯, 최종건이 총수가 될 수 있었던 건 '해방 정국의 혼란' 덕분이었다.
한화그룹 창업자 김종희는 일본이 한반도에 세운 군수 업체 조선화약 공판의 유일한 한국인 직원이었다. 일제 패망 이후, 김종희는 공장 재고를 팔아 큰돈을 벌었다. 이후 적산 불하 과정에서 그 돈으로 공장을 인수해서 한국화약을 세웠다.
다른 재벌 역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개 비슷하다. 두산 창업주는 소화기린맥주 지분 0.3%를 갖고 있었는데, 이를 근거로 회사 소유권을 주장했다. 결국 소유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이다. 소화기린맥주가 이름을 바꾼 동양맥주를 단독 입찰로 불하받았다.
원래 자기 소유가 아니었던 것을 '정경유착'으로 얻었다. 명백한 '특혜'였다. 그러나 일단 소유주가 된 뒤엔, 소유권을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어느덧 사람들은, 재벌이 소유한 게 원래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는 걸 잊어버렸다.
면세점 사업, 전형적인 기득권 경제
'적산 불하'로 시작된 기업 특혜 정책은 이후 다양한 형태로 변주됐다. 외국에서 들여온 차관을 나눠줄 때도, 각종 정책 금융에서도 '특혜'가 오갔다.
현대 창업주 정주영이 500원짜리 지폐에 있는 거북선 그림을 보여주고 투자를 유치해서 허허벌판에 조선소를 지었다고 한다. 정주영의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을 보여주는 일화라는 게다. 하지만 그 뒤에 있던 '특혜'에 대해선 다들 입을 다문다. 위험한 투자에 대해 보증을 선 건 한국 정부였다. 위험을 무릅쓰는 기업가 정신 뒤엔 종종 '특혜'로 보장하는 안전장치가 있었다. 이런 특혜는 아무나 누릴 수 없다. 권력과 끈이 닿는 이들이 독점하는 권리였다.
과거에 비하면, 정부가 기업에 나눠주는 특혜의 규모가 확실히 줄었다. 그래도 꽤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게 '면세점' 사업이다. 거래가 있고 이윤이 쌓이는데, 세금을 피한다는 건 명백한 특혜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등 재벌가 2~3세가 면세점 사업에 목을 매는 것도 그래서다. 기술을 개발하느라 머리 싸매지 않아도 된다. 변덕스런 소비자들을 쫓아다니느라 발품 팔 필요도 없다. 정부가 나눠주는 특혜를 따내기만 하면, 안정적인 수익이 보장된다. 권력과 교섭해서 특혜를 따내는 건, 누구보다 재벌이 잘한다. 재벌가 자제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싸움. 전형적인 지대 추구 경제다. 마치 부동산에서 세를 받는 것처럼, 이미 얻은 기득권에만 의지해서 수익을 얻는다는 뜻이다.
면세점 특혜에 대한 제약, 당연하다
재벌가 자제들의 면세점 이권 다툼이 거세지자, 국회가 법을 바꿨다. 홍종학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지난 2013년 발의해 통과된 관세법 개정안이다. 면세점 특허를 5년마다 재승인 하게끔 했다. 재벌가 자제들이 면세점 사업으로 사실상 영구적인 혜택을 누리는 데 제동을 걸자는 게 개정안의 취지였다. '경제 민주화' 열기가 아직 식지 않았을 때였다. 기득권 테두리 안에서 편한 돈벌이만 하려는 재벌가 자제들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높던 때였다. 관세법 개정안은, 그래서 큰 마찰 없이 통과됐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정경유착'으로 인한 '특혜' 확보가 가장 큰 경쟁력이었던 기업이 썩은 속살을 드러냈다. 롯데그룹 창업자 가족의 경영권 다툼이다. 평소 노골적으로 재벌 편을 들던 이들조차, 이 문제만큼은 거리를 뒀다. 그만큼 썩은 내가 심했다.
마침 롯데 면세점 두 곳이 올해 말 특허가 만료된다. 재승인 심사를 앞두고 있을 당시, 적어도 한 곳은 탈락하리라는 전망이 종종 나왔다.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롯데 그룹을 지배하는 건 일본인 주주들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사실상 일본 기업인데, 굳이 면세점 특혜까지 줘야 하느냐는 여론이 일었던 것. 이미 친일 꼬리표가 덕지덕지 붙은 현 정권이다. 굳이 꼬리표를 추가할 이유는 없다. '반(反)롯데' 정서를 따라가는 게 자연스럽다. 어차피 롯데는 지난 정부와 더 가까웠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롯데 면세점 소공점은 특허 재승인 심사를 통과했다. 그러나 롯데 면세점 잠실점(롯데월드타워점)은 탈락했다.
제2롯데월드 면세점 탈락
예상이 빗나간 건, 이 대목부터다. 상당수 언론이 갑자기 2013년 통과된 관세법 개정안을 문제 삼았다. 5년마다 특허 재승인 심사를 받도록 한 건 가혹하다는 게다. 예컨대 롯데 그룹은 잠실롯데월드에서 면세점을 운영했다. 그러다 지난해 제2롯데월드로 자리를 옮겼다. 그게 롯데월드타워점이다. 이 과정에서 약 3000억 원을 썼다고 한다. 면세점 재승인 심사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그 돈을 날리게 됐다. 일자리가 줄어들고, 협력 업체도 피해를 입는다. 이런 사실을 들어, 현행 관세법을 비판한다.
그런데 따져 보자. 굳이 3000억 원을 써가면서 면세점을 제2롯데월드로 옮긴 건, 롯데 그룹의 결정이었다. 제2롯데월드의 낮은 경제성을 보완하려는 시도였다. 애초 제2롯데월드 건설 역시 신격호 롯데 그룹 총괄회장의 고집에서 비롯됐다. 정부, 정치권, 시민 단체, 심지어 군까지 반대했다. 바로 옆에 공군 비행장이 있다. 조종사의 생명이 달린 문제다. 그런데도 롯데 그룹은 공사를 밀어 붙였다. 이 과정에서 이명박 정부와의 유착 의혹이 불거졌다.
제2롯데월드 경제성 악화, 롯데 총수 가족 책임이다
제2롯데월드에 입점한 롯데 면세점이 문을 닫는다면, 제2롯데월드 경제성 악화는 확연해진다. 그러나 이는 롯데 그룹이 책임질 일이다. 모두가 제2롯데월드 건설을 만류했다. 지금 경영권 다툼을 하는 신 총괄회장의 두 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지금과 같은 형태의 제2롯데월드 건설은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두 아들은 끝내 아버지를 말리지 못했다. 아버지의 고집이 너무 세서?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을 게다. 두 아들은 거의 같은 지분을 갖고 있다. 캐스팅 보트는 아버지 소유다. 그룹 경영권에 욕심내는 한, 아버지 뜻을 거스를 수 없다. 실제로 신동빈 롯데 그룹 회장은 반대 입장을 접고 제2롯데월드 공사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아버지의 어리석은 고집을 묵인한 배경에는, 그룹 경영권에 대한 아들들의 탐욕이 있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신동빈 회장이 지난 15일 입을 열었다. 면세점 특허 재승인 탈락에 대해 그는 "99% 제 책임"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당사자가 자기 책임이라는데, 언론이 왜 나서서 변호하는지 모르겠다. 재벌에게 준 특혜를 당연한 권리로 여기게끔 보도했던 역사 때문일까. 하긴, 언론 역시 꽤나 특혜에 익숙한 집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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