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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백혈병, 시간이 흐르면 삼성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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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백혈병, 시간이 흐르면 삼성만 웃는다

[안종주의 위험과 소통] 삼성반도체 직업병

"민·형사상 이의 제기 못해" 합의서, 27년 전 원진레이온 때도…

10월 22일 한 장의 문서가 공개됐다. 삼성전자가 백혈병 등 직업병 피해를 입은 반도체 사업장 퇴직자에게 지급한 피해 보상금 '수령 확인증'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은수미 의원이 공개한 확인증의 내용을 보는 순간 27년 전의 원진레이온 직업병 사건이 떠올랐다.

"합의서와 관련한 모든 사실을 일체 비밀로 유지"해야 하고 "삼성전자 등과 관련 전·현직 임직원 대해 일체의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을 확약한다"는 내용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여기에다 덧붙여 합의서에다 "합의서 내용 위배 시 회사로부터 수령한 금액을 반환"한다고 적어놓았다.


1988년 7월 나는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중독 직업병 피해자들을 취재하면서도 똑같은 것을 보았다. 이황화탄소 중독 직업병 판정을 1987년에 받은 3명의 원진레이온 퇴직 노동자는 날이 갈수록 건강이 악화되고 쥐꼬리 같은 산재 보상으로 생계가 곤란해지자 자신들의 처지를 노동 단체 등에 호소했다. 이를 우연하게 알게 된 나는 이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이들을 만났다.

하지만 이들은 처음에는 취재를 거부했다. 자신들의 직업병과 관련해 일체의 내용을 비밀로 하고 회사에 대해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을 확약한다는 확인서(각서)를 원진레이온 쪽에 써주고 며칠 후 당시 돈으로 600만 원(지금의 돈 가치로 따지자면 적어도 6000만 원가량은 될 것으로 봄)을 회사로부터 받기로 했다는 것이 취재 거부 이유였다.

다행히도 피해자 가족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허락을 얻어 사진 촬영을 하고 증언을 받아 7월 22일자 <한겨레신문>을 통해 세상에 이를 알릴 수 있었다. 600만 원이 아니라 적어도 6000만 원을 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는 설득이 주효했다. 실제로 나중에 당시 노사가 서명한 합의문에는 최고 1억 원의 피해 보상을 해주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지금의 10억 원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기업들의 행태는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삼성전자의 행태에 대해 돈으로 입막음을 하고 진실과 사실이 널리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돈을 미끼로 여전히 '갑질'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삼성전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와 사망자 가족들을 대상으로 돈으로 입막음을 하려 한 전력이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직업병 사건이 사회적 문제로 불거지기 전에 고 황유미 씨의 부친 황상기 씨에 대해 한 행태가 이를 잘 보여주지 않았는가.

삼성의 사회적 보상 기구 거부, 원진레이온 사건에서 교훈 얻은 듯

삼성전자가 최근 직업병 사건을 마무리하기 위해 벌이고 있는 행태를 보면 역시 정부 기업은 민간 기업, 아니 정확하게는 삼성을 결코 못 따라간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당시 정부 기업이었던 원진레이온과 노태우 정부는 삼성전자와 이씨 일가의 삼성에 견주면 오히려 순진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순수했다고까지 해야 하나. 이런 표현까지 해야 하는 현실이 정말로 '웃프다.'

삼성은 직업병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대상으로 군대식 각개격파 작전을 펼치고 있다. 그들이 뭉칠수록 좋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피해자 가족들이 '반올림' 등 피해자 문제에 오랫동안 천착해온 단체와 끈끈한 연결고리를 갖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독립적인 사회적 보상 기구'를 꾸리라는 조정위원회의 권고안을 따르지 않고 개별 보상 신청을 받아 매우 신속하게 1차로 퇴직자 30명과 보상 합의를 했다고 21일 발표한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삼성전자의 이런 전략과 행태는 1988년 사건이 불거져 5년 넘게 엄청난 파장을 우리 사회에서 일으킨 끝에 회사 폐업으로 마무리된 원진레이온에서 교훈을 얻어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27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원진레이온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 최대의 직업병 사건이란 측면도 있지만 당시 노동자들이 피땀 흘려 쟁취한 결정체인 원진직업병관리재단과 원진녹색병원, 원진노동건강환경연구소 등이 건재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재단과 병원, 연구소가 존재하는 한 원진레이온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삼성은 바로 이런 점을 가장 두려워한 것이리라. 사회적 보상 기구가 꾸려지고 이를 중심으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삼성반도체 직업병 피해와 관련한 왕성한 활동을 하면 할수록 삼성전자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직업병 피해 사건과 삼성의 부도덕한 치부 등이 도돌이표처럼 되살아나 삼성의 기업 이미지가 좋을 리가 없다고 판단한 게 틀림없다.

삼성반도체 직업병 참사는 세계적 사건


최근 벌어지고 있는 장면들을 보면 삼성이 예측한 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피해와 관련해 목돈을 받게 되면 더는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대부분의 피해자 가족들은 회사를 상대로 투쟁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또 합의서에 따라 소송을 할 수도 없으니 약간의 시간만 흐르고 나면 신문 지면이나 방송 화면에서도 삼성전자 직업병 사건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원진레이온 직업병 사건은 폭발의 뇌관 구실을 한 7월 22일이라는 기념일을 지니고 있다. 삼성전자 직업병 사건은 그런 확실한 기념일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삼성전자 직업병 사건은 원진레이온 못지않게 대한민국 산재직업병사에서 매우 중요한 일대사건이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려고 만들려는 삼성의 전략에 맞서 어떤 식으로든지 사람들의 기억에서 반도체 직업병 사건을 각인시키는 전략을 펼쳐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모래알처럼 흩어지려 하는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다시 끌어 모을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산재·직업병 사건에서 피해자와 그 가족이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은 운동의 실패를 뜻한다. 하루빨리 이들이 모이는 구심점을 만들어야 한다. 시간은 결코 지금까지 온몸과 마음을 바쳐 삼성과 싸워온 사람들의 편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은 삼성 편이다. 이를 명심 또 명심해야 한다.

삼성전자 직업병 참사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자리매김하기보다는 지구에서 벌어진 세계적 사건이란 말이 더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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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주 박사는 <한겨레> 보건복지 전문기자를 지냈으며,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안종주의 위험 사회' '안종주의 건강 사회' '안종주의 위험과 소통' 연재 칼럼을 써왔다. 석면,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 등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보건 및 환경 보건 위험에 관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석면, 침묵의 살인자> <위험 증폭 사회> 등 다수가 있으며,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해 <코로나 전쟁, 인간과 인간의 싸움> <코로나19와 감염병 보도 비평>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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