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디젤 게이트'가 일파만파 번지고 있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디젤 자동차에 대한 불신으로 끝날까. 독일 제조업이 그간 쌓아둔 신뢰를 날려먹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독일 제품이 비슷한 품질의 중국 제품보다 높은 값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중국에 부족한 게 독일에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신뢰다. 그런데 그게 무너졌다.
신뢰도 자원이다. 현대 산업 문명은, 전통 사회보다 더 많은 신뢰 자원을 소비한다. 모든 일이 '분업'을 통해 이뤄지는 탓이다. 신뢰 없이는 분업도 없다. 남이 만든 부품을 믿으니까, 나는 조립에만 몰두한다. 그 믿음이 깨지면 공장이 멈춘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신뢰를 쌓는 방식은 전통 사회와 다르다. 서로 모르는 이들끼리의 분업, 그 과정에서의 신뢰를 보장하는 게 계약이다. 계약의 질이 신뢰 수준을 결정한다.
수준 높은 계약은 불신을 전제함으로써 높은 신뢰를 보장한다. 예컨대 빵을 제대로 자르려면, 칼을 든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한다. 잘린 빵 조각 가운데 어느 것을 먹을지, 그가 정할 수 없어야 한다. 그래야 칼자루 쥔 사람이 빵을 정확히 반으로 자른다.
여러 사람이 낸 돈을 모아 운영하는 주식회사라면, 이런 원리가 더욱 엄격하게 적용돼야 한다.
고양이에게 생선 맡긴 폭스바겐
폭스바겐이 벌인 사기극에서 정말 황당한 게 이 대목이다. 인간이 모인 조직이니, 사기 칠 수 있다. 문제는 대응인데, 보는 이의 눈을 의심하게 한다. 자본주의 선진국 맞나 싶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 등 외신에 따르면, 폭스바겐 그룹은 최근 최고재무책임자(CFO)인 한스 디터 푀치에게 이번 배기가스 조작 사태에 대한 내부 조사를 맡겼다. 그는 지난 2003년부터 줄곧 그룹 이사회의 일원으로 경영 전반에 간여해 왔다. 이번 조작 사건이 일어난 건, 2009년부터다. 이번 사건에 대해 책임이 있는 자에게 내부 조사를 맡긴 셈. 고양이에게 생선 맡긴 격이다. 아니, 한술 더 떴다. 그는 지주회사인 포르셰홀딩스의 이사회 의장에 내정된 상태다. 사태 책임자를 오히려 영전시킨 셈.
배기가스 조작 사태가 드러나자 물러났던 마르틴 빈터코른 전 회장 역시 건재하다. 그는 현재 폭스바겐 그룹의 지주회사인 포르셰홀딩스의 이사회 의장이다. 독일의 기업 지배 구조에서 이사회 의장의 권한은 막강하다.
마티아스 뮐러 신임 회장은 빈터코른 전 회장의 최측근이다. 요컨대 빈터코른 전 회장은 사태의 뒤치다꺼리를 만만한 사람에게 떠넘기고, 도피한 셈이다.
황당한 일은 더 있다. 이번 사태로 독일에서 10여 건의 형사 고발이 있었다. 하지만 독일 검찰은 경영진에 대한 공식 수사를 하지 않고 있다.
어차피 남의 나라 이야기다. 그래도 눈길이 자꾸 간다. 우리는 걸핏하면 '선진국 사례'를 모범으로 꼽곤 했다. 나부터도 그랬다.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한국 재벌 총수들이 폭스바겐을 모범 삼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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