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가명·30) 씨의 첫 직장은 가전제품 조립회사였다. 회사에는 10개의 파견업체 소속 노동자들이 들어와 있었다. 유진 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첫 출근날을 잊지 못한다. 파견업체 소속 노동자들은 출근했다고 모두 일하는 게 아니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직원휴게소에 일렬로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러면 원청, 즉 조립회사 관리자가 나와서 그날 필요한 인원을 불렀다. '용접 4명, 도장 5명…'.
그러면 파견업체 관리자가 서로 손을 들면서 '우리가 할 수 있어요'라며 자신들이 데려온 파견업체 노동자들의 등을 떠밀었다. 노동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가락시장 배추 팔리듯 '팔려'나갔다. 팔려나가지 못한 노동자들은 고개를 숙인 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유진 씨는 첫 출근날 '운 좋게' 용접반으로 팔려나갔다.
그렇게 간 작업장에는 탈의실도 캐비닛도 없었다. 작업복을 갈아입기 위해 사람들이 안 보이는 곳을 애써 찾아야 했다. 개인함이 없으니 입고 온 옷은 비닐백에 대충 구겨 넣어야만 했다. 그런 웃지 못할 일을 겪은 뒤, 50명의 파견업체 노동자들이 일렬로 서서 작업을 준비했다. 하지만 작업복이 제각각이었다. 각자의 소속 파견업체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작업복이 작업장을 가득 메웠다.
그렇게 그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유진 씨가 처음 이곳을 올 때처럼, 매일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가 나갔다. 일거리가 많으면 더 많은 사람이 몰려왔고, 적으면 사람들이 사라졌다. 함께 일하는 노동자 이름을 물어볼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50명이 줄 서서 일하는 공간에 정직원은 2명뿐이었다. 열심히 일하면 정직원이 된다고 했지만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잔업을 마친 월요일 밤 9시였다. 파견업체 관리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로써 일하던 물량이 다 끝났다면서 '내일부터 출근할 필요없다'고 통보했다.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전화는 끊어졌다. 예상대로 정직원은 되지 못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마음의 상처가 컸다. 코 한 번 팽 풀고 버려지는 휴지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일해야 하나
두 번째 회사는 제약회사였다. 역시 파견노동자 신분으로 일했다. 노동 환경은 상대적으로 나았다. 하지만 정직원과의 처우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 그곳에서 유진 씨는 '어이, 용역'이라고 불렸다. 임금은 정직원의 절반에 불과했다.
정직원이 컨베이어에서 이동하는 박스 포장을 벗겨낸 뒤, 벗긴 박스를 뒤로 던지면 그 박스를 기어 다니면서 줍는 일을 했다. 정직원이 던지는 박스에 얻어맞기 일쑤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일해야 하나' 싶었다. 태어나서 가장 상스런 욕을 그때 입에 달고 다녔다.
어느 날은 작업조장이 유진 씨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노동부에서 근로감독이 나온다며 그 기간에는 출근하지 말라고 했다. 제조업에서는 노동자의 파견이 금지돼 있다. 유진 씨처럼 파견업체에 속한 노동자를 두고 '불법파견 노동자'라고 일컫는다. 회사에서는 유진 씨 같은 '불법파견 노동자'의 존재를 숨겨야 하기에 출근하지 말라고 한 것. 유진 씨는 자신의 처지를 새삼 깨닫게 됐다.
정직원이 되려고 노력도 많이 했다. 그래도 이 회사는 파견노동자도 회식에 끼워줬다. 함께 일하는 정직원 언니들이 유진 씨를 좋게 봤다. 정직원이 되는 팁이라며 회식 때 무조건 사장 옆에 앉으라고 했다. 앉아서 분위기도 맞추고 술도 따르라고 했다. 한 번이라도 눈에 띄어야 정직원을 시켜준다고 첨언했다.
회식 전에 그 말을 들을 때는 아무리 정직원이 좋다 해도 누가 그럴까 싶었다. 하지만 회식 때 분위기는 유진 씨 생각과 사뭇 달랐다. 파견노동자들은 서로 사장 옆에 앉으려 혈안이 됐다.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정직원이 돼야 하나 싶었다. 결국, 사장 옆에 앉지 못했다.
커피 공장에서 일하지만 정작 커피는 못 마셔
2차 노래방에서는 말 그대로 '끈적한' 분위기 속에서 '즐거운' 회식이 이어졌다. 사장의 손버릇이 나쁜 것은 익히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언니들은 촬영해서 신고해야 한다고 했다. 유진 씨 역시 무척 분개했다. 하지만 다음날 출근길에서 만난 사장을 향해 가장 존경하는 사람처럼 깍듯이 인사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다음은 커피 공장에서 일했다. 역시 불법파견노동자 신분이었다. 정직원은 고사하고 사내하청 노동자를 뽑는 곳도 거의 없었다. 현장 구석구석에 CCTV가 설치돼 있었다. 화장실을 자주 가면 작업반장이 쫓아와서 삿대질을 했다. 노동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커피 공장에서 일하지만 정작 커피 한 잔 마실 시간도 없었다. 어느 날은 커피가 너무 먹고 싶어 화장실 가는 길에 커피를 탄 뒤, 용변을 보면서 후루룩 마셨다. 그리고는 다시 작업장에 와서 일하기도 했다. 점심시간은 45분. 반찬을 한 곳에 밀어놓고 고추장에 밥을 비벼 허겁지겁 먹어야만 휴게실에 가서 겨우 몇 분 허리를 펼 수 있었다.
기름기 좔좔 흐르는 관리자들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최소한 인간의 품위만 지킬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하지만 여전히 유진 씨는 밟으면 꿈틀대지도 못하는 '지렁이' 신분이다.
불법파견의 온상이 된 반월공단
'구로공단'이 '구로디지털단지'로 변모했지만, 공장 속 여공1, 여공2는 빌딩숲 속 미생1, 미생2로 이름만 바뀌었다. 나이키 공장에서 일해도 나이키 운동화를 신을 수 없었던 어제의 그녀와 슬퍼도 웃어야만 하는 감정노동의 굴레에서 신음하는 오늘날의 그녀까지 40여 년을 아우르는 이들의 과거와 현재가 데칼코마니처럼 펼쳐진다.
구로공단 여공의 삶을 다룬 영화 <위로공단> 줄거리다. 유진 씨 삶도 <위로공단>에 나오는 1970년대 여공 삶과 다를 바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신분이 '비정규직'이라는 점이다.
8일 부좌현, 장하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심상정 정의당 의원 주최로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제조업 파견노동 현황 및 해법 찾기' 토론회에 참석한 유진 씨는 현재 안산 반월공단에서 '불법파견' 노동자 신분으로 일하고 있다.
반월공단은 1970년대 국가산업단지로 조성된 이후, 국내 최대 규모 산업단지로 성장한 공단이다. 지금은 불법파견의 온상이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를 거듭하면서 불법파견 노동자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고용노동부 자료를 보면 안산·시흥 지역에서 파견노동자가 존재하는 제조업체는 1739곳, 파견노동자 수는 2만4456명 정도다. 이 지역 전체 파견노동자의 93.2%가 제조업에 종사한다. 대부분이 불법파견인 셈이다. 현행법상 제조업 공정에는 파견노동자를 쓰지 못하도록 돼 있다.
근로감독관에게 연락 오면 '그만뒀다고 말하라'고 지침내리기도
이날 발제를 맡은 손정순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부소장은 "파견노동자 규모를 고용노동부의 ‘근로자파견사업보고서’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정하면, 2012년 기준으로 전체 파견노동자의 19.0%가 안산·시흥 스마트허브지역에서 파견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며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점은 6개월 미만의 초단기 파견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손 부소장은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자료를 통해 드러나는 파견노동의 규모는 과소 추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라며 "무엇보다도 불법·탈법적으로 무허가 파견업을 영위하는 직업소개소 및 사업체가 안산·시흥 스마트허브지역 인근에 다수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노동부의 근로감독은 허술하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안산 반월공단 노동자 현숙(가명‧30) 씨는 "노동부는 파견업체가 많아서 관리가 안 된다고 하지만, 민주노총에서 최근 27개 업체를 신고했지만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며 "근로감독에 대한 의지가 없다"라고 주장했다.
현숙 씨는 "설사 근로감독을 한다 해도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며 "근로감독관이 나오기 전부터 회사는 사전조치를 취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현숙 씨에 따르면 업체관리자는 근로감독이 있는 3일 동안 현숙 씨에게 휴가를 갈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불법파견 신분인 현숙 씨의 존재가 드러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근로감독관에게 연락오면 '00날 그만뒀다고 이야기하라'는 지침도 받았다.
현숙 씨는 "근로감독이 미리 '언제 감독을 하러 오겠다'고 통보하면 무슨 근로감독을 할 수 있느냐"며 "이렇다 보니 근로감독을 한다 해도 노동현장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지적했다.
김진숙 안산시 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 정책팀장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 상시적인 불법파견 감시신고센터 운영과 △ 지역 맞춤형 공공 취업서비스 확대 등을 제안했다.
김 정책팀장은 "안산·시흥지역 제조업 불법파견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구조화, 만연화 되어 있고 이제는 투자 없이도 손쉽게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사업으로 각광받으며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 차원의 법제도 정비와 더불어 문제의 진앙지인 안산·시흥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인 해법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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