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중국 수도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항일 전쟁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을 기념하는 전승절에 참석한 이후 한국의 외교적 위상이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특히 북한의 최룡해 당 비서와는 달리 박 대통령이 특별 대우를 받으면서 달라진 한중, 북·중 관계를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외교에 공짜는 없다. 박 대통령이 중국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은, 뒤집어 보면 중국이 우리로부터 받아내고 싶은 것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중국은 한국이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배치를 하지 않거나 최소한 연기하는 것을 목표로 박 대통령에 공을 들였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의 전승절 참석은 적지 않은 외교적 성과를 가져왔다. 정 전 장관은 "이번 행보를 통해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일종의 등거리외교를 하는 것으로 비춰지게 됐다"면서 "우리를 필요로 하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미국에 확실하게 인식시켰다는 측면에서 이번 행보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제는 이렇게 높아진 외교적 위상을 북핵 문제 해결에 활용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정 전 장관은 북한이 비핵화를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미국을 움직이는 이른바 '한국 역할론'이 필요한 때라고 지적했다. 그는 "박 대통령이 10월에 있을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선행동을 끌어낼 수 있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 미국의 선행동을 끌어낼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한편 지난 8월 25일 남북 고위급접촉 합의를 이행할 수 있을지에 대해 정 전 장관은 "대북 전단 문제를 이전처럼 방치하면 당국 회담은 열기 어렵다. 박근혜 대통령이 전단 날리는 박상학 대표를 이기지 못하면 북한은 남북 합의의 진정성에 의문을 갖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지난해 10월에도 고위급접촉이 불발된 이유가 전단 문제 때문이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전단을 막지 않으면 당국 회담도 성사되기 어렵다"고 전망했다.
인터뷰는 지난 4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프레시안 : 올해 들어 박근혜 정부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가입한 데 이어 박근혜 대통령이 항일 전쟁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을 기념하는 전승절에도 참석하는 등 미국 일변도의 외교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세현 :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이 될 수 있으면 안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일을 한 겁니다. 다만 AIIB 가입보다는 전승절에 참석한 것이 미국으로서는 더 불편했을 겁니다.
AIIB는 미국 중심의 경제 질서를 상징하는 월드뱅크(WB)·국제통화기금(IMF)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미국의 동맹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이나 독일도 미국의 뜻과는 다르게 AIIB에 가입했기 때문에 우리가 가입하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AIIB는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一帶一路)와 연결돼있습니다. 우리가 AIIB에 일정 정도 지분을 가지고 있어야 개발 사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에게 국가적으로 큰 이익이 되기 때문에 미국이 덮어놓고 가입하지 말라고 하기도 곤란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승절 참석은 좀 다릅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이 '대국굴기'(大國屈起)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전승절에 한국이 참석하는 것이 불편했을 겁니다. 중국은 아시아의 주인이 되려고 할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 차원에서도 이른바 '신형대국관계'(新型大國關係)를 언급하며 미국과 일대일로 맞먹자고 이야기합니다. 미국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미·일 동맹을 강화하는 동시에 한미동맹과 이를 연결시키려고 합니다. 미국 생각에는 한국이 미국 중심의 반(反)중국 전선에 오른쪽 날개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여기에서 쏙 빠져나와서 박 대통령이 텐안먼(天安門) 성루 위에 서 있었으니 조금 속상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중국 전승절에 참석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되는 나라입니다. 다른 미국의 동맹국들과 다릅니다. 중국이 항일 전쟁 승리를 이번 전승절의 주제로 잡았기 때문에 유럽 정상들은 사실 올 필요가 없습니다. 일본은 애초에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없는 국가입니다.
박 대통령이 이번 전승절 참석이 국제정치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정확히 인지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행보를 통해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일종의 등거리외교를 하는 것으로 비춰지게 됐습니다. 우리가 미국에 무조건 따라가지만은 않는다는 메시지를 보낸 겁니다. 미국이 눈만 치켜떠도 벌벌 떠는 나라가 아니라는, 우리를 필요로 하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미국에 확실하게 인식시켰다는 측면에서 이번 행보는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러한 방식의 외교를 펼쳐가는 출발점이 됐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대목입니다.
이렇다 보니 앞으로 군사·외교적으로 미국의 보복이 뒤따르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가 절묘하기 때문에 미국의 보복 행위가 자유롭게 전개되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이런 절묘함을 북한이 한껏 누리고 있는 측면도 있는데, 만약 미국이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에 대해 불이익을 주거나 압박을 가해오면 중국은 이때를 노려 회유책을 쓰면서 이들 국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할 것입니다. 미국의 운신 폭이 넓어지기 힘든 구조입니다.
우리가 국제 정치 영역에서 소위 '몸값'이 높아지는 시발점이 됐다는 측면을 고려해서 앞으로 이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옛 친구를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옛 친구와 새 친구 모두와의 관계를 심화시켜 나가면서 북핵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진전을 이뤄낼 수 있는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프레시안 : 이번에 텐안먼 성루에 있었던 박 대통령과 북한 최룡해 당 비서의 모습이 대비되면서 남한의 외교적 위상이 북한과 비교도 안되게 커진 것 아니냐는 평가도 나오고 있습니다. 향후 북·중 관계가 여전히 냉랭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는데요.
정세현 : 텐안먼 성루 사진이 상징하는 바가 상당히 큽니다. 한국이 중국에게 매우 긴요한 나라가 됐다는 것만큼은 틀림없습니다. 그렇다고 북한이 중국한테 쓸모없는 나라가 됐기 때문에 박 대통령을 극진히 대접한 것은 아닙니다.
중국이 박 대통령에 대해 특별한 신경을 쓴 이유는 우선 미국에게 보여주기 위한 측면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한국으로부터 받아낼 수 있는 반대급부가 크다는 점도 있습니다. 바로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문제입니다.
박 대통령은 오는 10월 한미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입니다. 정상회담 전에 사드에 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은 한국이 사드 배치를 받지 않거나 최소한 연기하는 것을 목표로 박 대통령에 공을 들였다고 봅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한국 내 사드 배치는 상당한 타격입니다. 만약 배치가 결정되면 한국에 대한 경제적 보복을 시도할 겁니다. 중국이 경제적 보복을 하면 우리 경제가 무너질 가능성이 큽니다. 전승절 기간 중에 화려하고 멋진 장면들이 많이 찍혔지만 그 속에서 박 대통령은 많은 고민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중국은 지난해 7월 시진핑(習近平) 주석을 시작으로 추궈홍(邱國洪) 주한 중국대사, 올해 2월에는 창완취엔(常萬全) 국방부장까지 지속적으로 사드 배치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혀왔습니다. 중국이 전승절에 참석한 귀빈들 30명 가운데 유일하게 박 대통령과 오찬회담을 한 이유를 여기서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특별한 대접을 받은 것일 수도 있지만 뒤집어 보면 유일하게 이야기할 거리가 있으니까 오찬을 한 것 아니겠습니까?
일부에서는 중국이 손님을 모셔놓고 밥 먹으면서 불편한 이야기를 했겠냐고 하던데, 원래 긴요한 이야기는 밥을 사면서 하는 겁니다. 우리도 보통 간절하게 해결할 문제가 있으면 밥을 사지 않습니까? 박 대통령과 시 주석의 회담이 오찬으로 이어진다고 하길래 '아 시 주석이 박 대통령을 잘 대접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압박을 가하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룡해 당 비서에 대한 대우 문제도 달리 생각해볼 측면이 있습니다. 최룡해가 텐안먼 성루에서 맨 앞줄 끝에 앉았다면서 중국이 북한을 무시한 것이라는 평가를 하는데, 사실 의전 서열상 거기 세워준 것만 해도 중국은 북한을 상당히 배려한 겁니다. 최룡해가 국가 원수급도 아니지 않습니까? 최 비서의 북한 내부 서열로 보면 사실 뒷줄에 가서 서야 하는데 앞줄 끝에 있는 것은 나름 대접받은 겁니다. 중국이 그래도 아직은 북한을 버리지는 못하고 일정 정도 체면을 세워줬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지난 5월 러시아에서 열린 전승절에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참석했는데, 이번에 최 비서가 참석한 것은 다소 격이 떨어지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하지만 최 비서는 1937년 6월 보천보 전투를 승리로 이끈 빨치산 대장 중 한 명인 최현의 아들입니다. 더군다나 최 비서는 지난 2013년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특사로 시 주석과 만난 적도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면, 최 비서는 이번 중국 전승절에 참석하기에 딱 좋은 인물입니다.
지난 2013년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처형된 이후 그가 추진하던 중국과 경제협력 프로젝트가 사실상 전부 끝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는데, 최근에 북한과 중국 접경지역을 다녀와 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황금평 개발이 원활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6층 짜리 건물이 하나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건물은 중국 정부가 투자해서 짓고 있는 국경사무소였습니다. 중국이 황금평 개발을 완전히 포기하기로 했다면 국경사무소를 왜 짓겠습니까? 앞으로 북한을 끌어안는다는 차원에서 중국이 돈을 대고 거기서 나오는 이득은 나눠 갖는 식의 프로젝트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최 비서가 이번에 중국을 방문했을 때 장성택 부위원장과 했던 프로젝트를 이어서 하자고 제안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한편으로는 중국이 박 대통령을 이처럼 융숭하게 대접했기 때문에 북한이 보는 반사 이익도 일정 부분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초라해진 북한이 섭섭하게 느낄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중국은 전승절 행사 이후 북·중 관계를 관리하려고 할 것입니다. 유엔 안보리의 제재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정치·외교적으로 완전한 관계 개선은 어려울 수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북한에 실익이 돌아가는 식의 움직임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중국이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도, 북한이 오는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맞이해서 장거리 로켓 발사와 같은 행위를 하게 되면 북·중 관계는 더 악화될 것 같은데요. 실제 북한이 이를 감행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정세현 : 북한 입장에서는 이른바 '축포'를 쏘아 올리지 않고 10.10을 그냥 넘기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말로는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장거리 로켓이라고 설명하지만, 바로 군사적으로 전용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 아닙니까? 우주개발 강국이 되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군사 강국을 지향하는 행동인데, 군사적으로 강국이 됐다고 선언하는 체제 홍보 차원에서라도 축포를 쏘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가져올 불이익, 악영향이 너무 크다는 것을 북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막상 발사하기는 쉽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북한이 장거리 로켓 발사를 감행하면 일단 말씀하신대로 북·중 관계는 회복되기 어려워집니다. 또 지난 8월 25일 남북 고위급접촉 때 합의했던 것들이 물거품이 됩니다.
게다가 북한은 지금 유엔 안보리 제재를 받고 있습니다. 물론 중국과 러시아가 제재에는 동참하면서 뒤로는 사실상 경제적 문호를 열어두고 있기 때문에 안보리 제재가 유명무실한 상황이긴 하지만, 이 제재가 더 강화되는 방향으로 갈 경우에는 얘기가 달라집니다. 그렇게 되면 북한 경제 운영이 더 어려워집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대목입니다.
외부에서 물자가 많이 들어오거나 남측에서 쌀, 비료 등의 지원이 들어가면 하늘로 축포를 쏘는 것이 아니라 인민들의 입속으로 축포를 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으나 지금으로써는 사실상 불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물론 우리 대신 중국이 지원을 해주면 북한도 다른 선택을 할 여지는 있습니다. 중국 입장에서도 북한이 장거리 로켓을 쏘면 한반도 내 사드 배치가 정당화되니까 이를 막기 위해서 북한에 물자 지원을 하는 방법을 고려해볼만 합니다.
북한 선행동론을 넘어, 한국 역할론으로
프레시안 : 박 대통령의 이번 전승절 참석이 한국 외교의 위상이 그만큼 올라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 높아진 위상을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활용할 수는 없을까요? 지금보다 선도적으로 북핵 문제 해결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준 것 아닌가요?
이번에 박 대통령과 시 주석은 6자회담의 재개 필요성에 대해 의견을 같이 했다고 밝혔습니다. 겉으로는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속내는 다릅니다. 박 대통령은 북한의 선행동과 중국의 역할을 의중에 둔 6자회담 재개를, 시 주석은 북한의 선행동을 이끌 수 있는 미국의 선행동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정말 외교적 위상이 높아졌다는 판단을 한다면 10월에 있을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선행동을 끌어낼 수 있는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미국의 선행동을 끌어낼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프레시안 : 미국의 현재 상황을 보더라도 북핵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설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란 핵 협정 비준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임기도 1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미국을 끌어낼 가능성이 있을까요?
정세현 : 미국을 북핵 문제 해결에 나서게 할 수 있는 유인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미국의 소위 '아시아 재균형' 정책은 아시아 내에서 중국의 국제·정치·외교·군사적 영향력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권을 형성하는 것인데,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중요한 명분이 북한의 핵이나 미사일입니다. 그래서 미국 입장에서는 북핵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미국의 차기 정부를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어 보입니다. 다음 정부가 클린턴 정부 또는 부시 정부 말년처럼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북핵 문제를 풀겠다고 하는 식의 대북 정책 기조를 가지고 나오길 기대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국이 6자회담에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계속해주는 작업은 필요합니다.
한편으로는 유력한 대권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기대해볼 만한 측면도 있습니다. 힐러리는 2009년 국무장관 재임 당시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대가로 미·북 수교,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 체결, 대북 경제지원을 교환할 뜻이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2005년 9.19 공동성명의 4항이었던 평화협정 문제를 협의의 우선순위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겁니다.
미국은 그해 12월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북한으로 파견해서 평화협정 문제를 우선적으로 다루자고 하면서 북한을 6자회담에 끌어내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비핵·개방·3000' 정책을 고수하면서 이같은 미국의 접근에 반대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러다 보니 미국은 "한국 정부가 나서지 않는데 우리가 나설 필요 있겠느냐"는 명분으로 전략적 인내 정책으로 돌아서게 됐습니다.
북핵 문제를 푸는 이른바 '힐러리 해법'을 가동해본 적이 있는 힐러리 클린턴은 이같은 접근 방식을 다시 시도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려는 것보다는 키신저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중국과 공존하는 아시아 정책을 채택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 북한을 악마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미국이 떠오르는 중국과 관계를 협조관계로 바꾸고 아시아가 아닌 다른 곳에서 국제정치적 역량을 키울 여지를 찾아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초강대국이었던 소련이 망한 이유는 군비 경쟁 때문이었습니다. 인민 경제와 군사 경제, 두 축으로 끌고 가다가 군사 경제 중심으로 가다 보니 인민의 경제가 주저앉은 겁니다.
군산복합체 중심으로 경제가 돌아가는 미국도 이러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군산복합체의 무기가 팔리려면 미국에게는 '악마'가 필요합니다. 마치 아시아에서의 북한처럼 말입니다. 이 악마를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무기 수요가 창출되고, 이를 통해 군산복합체가 돈을 버는 방식이 지금까지 미국 경제를 이끌어 온 힘입니다.
그런데 2차 대전 직후 세계 평화를 지키는 경찰로서의 미국의 역할을 더 이상 없는 것 같습니다. 어딘가에는 악마를 만들어놓고 그 핑계로 경제를 굴려야 하는 상황에서 중국과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의문이지만, 더 이상 이런 방식이 통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미국이 인지할 필요도 있습니다.
박근혜, 박상학 눌러야 한다
프레시안 : 결국 우리가 주도해서 실질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부분은 남북관계인데요. 지난 8월 25일 남북 고위급접촉 합의 이후 남한에서는 대규모 합동화력시험을 했고 김정은 참수작전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이렇다 보니 박근혜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 의지가 있는지, 그저 국내용으로 북한과 합의를 이끌어 낸 것인지 의문입니다.
정세현 : 일단 참수작전을 언급한 것은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의 지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자기 딴에는 북한이 확성기 방송에 벌벌 떠는 것 보고 이런 식의 이야기를 공개하면 더 고분고분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을 겁니다.
한편으로는 이명박 정부 이후에 대북 강경론, 북한 붕괴론 쪽으로 대북정책의 중심이 움직이면서 한미 동맹을 숭배하는 사람들, 주변에 있는 소위 무기 중개상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남북 합의가 달갑지 않습니다.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미·중 관계나 미·러 관계 개선을 좋아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경우입니다.
이렇게 우리 쪽에서도 남북 합의가 깨지길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의 언행으로 북한이 반발하고 합의가 깨지면 대북 강경론이 다시 득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방 예산을 늘려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군의 일부지만 일종의 항명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남북 화해 국면의 판을 깨려고 작심하고 참수작전과 작계 5015 등을 언급한 것이죠. 만약 정부가 남북 합의를 잘 이끌어나갈 생각이 있다면 군의 이런 행태를 엄중히 다뤄야 합니다. 그를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합의를 이행해나가려 한다는 점을 북한에 입증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이산가족 상봉도 제대로 진행될 겁니다.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가 남북 합의로 당면한 남북관계를 잘 관리했고 전승절도 나름대로 미·중 사이에서 균형 있는 입장을 잡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게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추진한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정세현 : 박근혜 정부의 확고한 기조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합니다. 일단 이산가족 상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난 8월 25일 공동 보도문 1항에 나와 있는 당국 회담을 열어야 할 겁니다. 이산가족 상봉을 계속 진행하려면 틀을 짜야 하는데 이것은 당국 회담에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6항에 명시된 교류 활성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5.24조치에 대해 논의해야 하기 때문에 당국 회담은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대북 전단 문제를 이전처럼 방치하면 당국 회담은 열기 어렵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전단 날리는 박상학 대표를 이기지 못하면 북한은 남북 합의 진정성에 의문을 갖게 될 겁니다. 지난해 10월에도 고위급접촉이 불발된 이유가 전단 문제 때문이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전단을 막지 않으면 당국 회담도 성사되기 어려울 겁니다.
북한 정권 창건일인 9월 9일 이전에 박 대통령과 시 주석이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을 DVD에 담아서 전단과 함께 날린다고 합니다. 임의의 시각에, 임의의 장소에서 뿌리겠다고 했는데 이걸 막지 못하면 이산가족 상봉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이 지난 8월 25일 합의 이후 남북관계를 가늠해볼 수 있는 시금석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북한도 기존과는 달라야 합니다. '북한이 달라졌네? 역시 박 대통령이 원칙을 지키니까 북한이 달라졌구나'라고 우리 사회의 보수 세력이 생각할 정도가 돼야 합니다. 지금처럼 자꾸 시비 걸면 안됩니다. 외교 석상에서 나온 이야기를 가지고 "무엄하다"는 식의 표현을 쓰면 되겠습니까?
남쪽의 행보에 대해 일희일비하는 식으로 계속 시비 걸고 나오지 말고 통 크게, 대범하게, 남북합의에 이르던 당시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남쪽의 움직임을 좀 진득하게 지켜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우리 정부가 북한에 잘할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주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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