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시작 때의 대응도 중요하지만 끝마무리도 중요하다. 끝이 곧 시작이기 때문이다. 시작과 끝은 직선의 양 끝이 아니라 원에서 서로 맞닿아 있다. 메르스 위기도 여기에 해당한다. 대한민국은 메르스 시작 때 말 그대로 형편없는 대응을 했다.
그런데 마무리 시점에 다다른 요즘 시작 때 범했던 우를 다시 범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메르스 재난을 한 발짝 떨어져 살펴보던 전문가들이다.
임진왜란 시대를 살지 않았던 우리 후손들은 선조들이 겪었던 처절한 모습과 볼썽사나운 행태, 그리고 영웅적인 살신성인 등을 당시 위대한 선조들이 있는 그대로 남겨놓은 <난중일기>와 <징비록> 등을 통해 교훈을 얻고 있다.
흔히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잘잘못을 가리지 않고 낱낱이 민낯으로 피를 토하며 써내려간 이런 역사 기록 덕분에 우리는 감동을 받으며 그 기록들을 바탕으로 만든 영웅전과 영화와 드라마를 오늘날 보고 또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메르스란 국가 재난을 완전하게 극복하지도 못했는데 벌써 '대한민국 메르스 징비록' 편찬 작업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언론이 전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사실들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라는 그야말로 황당한 이유를 든다. 지금 이 시각 아직 상당수의 메르스 환자가 병상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도 말이다.
메르스 백서 서두를 일 아냐
어떤 일은 서둘러 마무리를 해야 하고 어떤 일은 시간 여유를 갖고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메르스와 같은 감염병이나 폭발 사고, 화재 등의 재난은 서둘러 진압해야 하는 일이지만 이들 재난에 대한 평가나 관련 백서 편찬은 결코 서두를 일이 못 된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자신의 잘못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그래도 공인이라면, 또 정부나 정부 기관, 나아가 민간 기업이라 할지라도 사회에 파문을 일으킨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허둥거린 장본인이라면 치부를 숨겨서는 안 된다.
부끄러운 곳을 가리는 당사자나 기관은 자신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결코 반성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세월이 적당히 흐르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그들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다시 국민과 소비자 위에 군림하려 든다.
광복 70년을 맞은 우리는 나치 부역자를 처단한 프랑스 앞에만 서면 고개를 숙이며 국제 사회에서 당당하지 못한 언행을 하게 된다. 일제 부역자와 친일파를 프랑스처럼 처리하지 못한 부끄럽고도 부끄러운 역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백서에는 처절한 반성과 고백 담겨야
나라를 빼앗긴 것과 같은 거대한 역사는 아니지만 메르스 재난은 우리 감염병 역사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일대사건이다. 그리고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현재 진행형으로 있다. 메르스 종식 선언도 하지 못한 지금 본격적인 백서 발간 작업을 벌이겠다는 것은 한마디로 처절한 반성과 고백은 내용에서 빼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메르스 백서는 언제 어떤 일이 있었다는 단순 사실만을 기록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단순 문서철에 지나지 않는다. 백서가 후손들에게, 아니 머지않아 다시 감염병 유행을 겪게 될 지금의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려면 기록과 함께 평가, 그것도 혹독한 평가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위로는 대통령에서부터 아래로는 일선 역학 조사관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나태함과 무능함과 안이함과 판단착오 때문에 메르스로 숨져간 많은 피해자와 그 유가족 등에게 사죄를 구하는 심정으로 고백해야 한다. 메르스 백서는 그 고백을 담을 수 있어야 하고 그런 고백과 그에 대한 비판이 없다면 그 백서는 유체가 이탈된 육신에 지나지 않는다. 변태가 끝나 나방이 되어 날아간 뒤 남은 허물에 다름 아니다.
껍질만 남은 백서는 감동과 교훈을 주기는커녕 국민의 울화만 더 키울 뿐이다. 정부가 백서 작업을 서두르는 모습을 보면서 혹여나 약간의 반성(초기 방역 미흡과 판단 착오)을 양념으로 섞어 메르스 극복을 위해 영웅적인 노력을 기울인 주요리를 내놓기 위함이 아닐까하는 의구심까지 든다.
메르스 사태와 관련해 감사원이 감사를 벌인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또 뿔난 시민들이 메르스 사태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평택시장과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을 직무 유기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해 수사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수사 내용과 결과에 큰 기대를 거는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메르스와 관련해 여러 일들이 현재 진행형인데 이를 과거형으로 돌리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가습기 살균제 백서> 만들었지만 국민 몰라
나는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리고 아직 보상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피해자들이 회사 등과 법적 소송 공방을 벌이고 있는 <가습기 살균제 건강 피해 사건 백서>의 발간 편집책임자가 되어 올해 초 책을 펴낸바 있다.
이 백서는 질병관리본부가 국민 세금으로 펴낸 것이지만 백서 가운데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이 일부 있어서였는지 인쇄 직전에 질병관리본부 이름으로 내는 것을 거부해 우여곡절 끝에 폐손상조사위원회(공동위원장 :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최보율 한양대 의대 교수) 이름으로 겨우 세상에 나왔다.
정부 이름으로 내지 않고 발간 당시 이미 사라진 기구에서 백서를 내다보니 백서 홍보 등 후속조치가 사실상 전무했다. 이 때문에 이 분야의 전문가는 물론이고 전직 질병관리본부장 등도 이 백서를 구경조차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진통 끝에 옥동자를 만들어내고도 누구한테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백서는 서둘러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느냐가 중요하다. 백서에는 왜 우리가 메르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는지, 왜 컨트롤 타워가 오락가락 했는지, 왜 병원을 공개하지 않았는지, 왜 대통령은 대면 보고도 받지 않고 관심을 별로 두지 않았는지, 정부에 자문을 한 전문가들의 역할은 어떠했는지가 소상히 들어 있어야 한다.
제3의 시민위원회가 백서 작업해야
정부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기가 께름칙하다면 제3의 기관이나 조직에서 발간작업을 맡아 하는 것도 좋은 대안이다. 메르스 사태를 지켜보다 답답증을 느낀 시민 단체, 소비자 단체, 보건의료 단체 등이 뭉쳐 만든 메르스극복국민연대 준비위원회에서도 메르스진상조사시민위원회를 꾸려 이 위원회가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메르스 백서를 낼 것을 정부에 강력 제안했다.
이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까닭은 아마 메르스 사태와 관련해 누구의 책임을 추궁하기보다는 진정으로 메르스 발생과 그 대처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왜 많은 시민들이 억울하게 죽게 됐는지, 1만6000명이 넘는 시민들이 보름간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해야만 했는지 시민·소비자의 처지에서 이번 사태를 바라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한다. 친일행각을 하거나 친일 부역을 한 사람들을 단죄하지 못하고 일제 잔재를 뿌리 뽑지 못해 해 우리 사회 많은 시민들이 오늘날까지 자괴감을 느끼고 역사 앞에 떳떳하지 못한 것처럼 메르스 대응의 민낯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국가에게 진정한 감염병 대응책이 나올 수 없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그렇고 그런 또 하나의 요식행위와 같은 메르스 백서가 아니라 500여 년 전 용기 있고 지혜로운 선조들이 남겨놓았던 것과 같은 '메르스 징비록'과 '메르스 난중일기'이다.
(안종주 사회안전소통센터장은 녹색건강연대 공동대표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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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주 박사는 <한겨레> 보건복지 전문기자를 지냈으며,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안종주의 위험 사회' '안종주의 건강 사회' '안종주의 위험과 소통' 연재 칼럼을 써왔다. 석면,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 등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보건 및 환경 보건 위험에 관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석면, 침묵의 살인자> <위험 증폭 사회> 등 다수가 있으며,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해 <코로나 전쟁, 인간과 인간의 싸움> <코로나19와 감염병 보도 비평>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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