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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대는 이렇게 무너졌다

[상지대 민주화 일기⑤] 임원 간 분쟁과 구재단의 이사회 장악

2010년 사분위 정상화는 부패 권력과 부패 사학이 유착하여 저지른 반교육 쿠데타였다. 1980년대 이후 대학 민주화 과정에서 형성된 임시 이사 체제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사학 재단의 쿠데타였다. 말이 정상화였지 내용은 '비정상화'였으며 쫓겨난 사학 비리 주범들을 다시 학교에 복귀시키는 공작이었다. 그러나 복귀한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이사회 자체가 불완전한 구성일 수밖에 없었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불안정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상지대 정상화 이후 이사회의 변화를 추적해보자.

사분위 정상화 시점에서 이사회 구성은 구재단 4명, 구성원 2명, 교육부 2명, 임시 이사 1명의 분포였다. 구성원과 교육부가 협력하여 구재단 4, 비구재단 5의 구도가 만들어져 교육부가 추천한 채영복 이사가 이사장이 되었다. 상지대를 구재단에게 말아먹은 교육부가 다 말아먹은 후에 구성원과 협력한다는 것은 웃기는 이야기지만 추천된 이사들은 교육부도 아니고 구성원도 아니므로 일정한 협력이 가능했다. 더구나 학교 상황이 위태로운데다 구재단의 공세가 도를 넘는 비상식적인 행태를 보이는 형편이므로 교육부가 구재단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구재단을 지지할 경우 교육부의 친사학 본색이 드러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학교가 즉시 분규상황으로 빠져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위태롭고 절묘한 균형이 구성원 추천 이사의 배신으로 무너지게 되었다. 구성원의 추천을 받아 이사가 된 한이헌이 엉뚱하게도 김문기를 지지하고 나섰다. 한이헌은 김문기를 지지한 정도를 넘어 구재단보다 더 구재단스럽게 행동했다. 구성원을 대하는 태도는 말할 수 없이 싸늘했다. 김문기를 구속했던 문민 정부의 경제수석으로서 매우 유감스럽고 실망스러운 태도였다. 한이헌의 변심이 이사회 구도에 지각변동을 초래할 변수로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김문기 추천 이사인 이영수가 채영복 이사장을 지지하면서 이사회 구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 우리는 그 배경을 알지 못한다.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까? 그러나 확인하기 어려운 일이다. 마음속으로 짐작하고 그냥 묻어둘 뿐이다.

한이헌에 대해서는 하나의 기억이 있다. 내가 교수협의회 공동대표로 있을 때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이 우리 대학 총장에 선임되었다. 김성훈 총장이 음악을 전공하는 분을 추천해서 학과 회의를 거쳐 외래교수로 되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사람은 문민 정부 경제수석을 지낸 한이헌의 사위였고 김성훈 총장은 한이헌을 잘 알고 있었다. 그 후 사분위 정상화 과정에서 김성훈 총장의 제안으로 한이헌이 구성원 추천 정이사 명단에 들어갔다. 상지대 총장과 친분을 가진 사람이 정이사가 되어 김문기 편을 들면서 구성원을 소 닭보듯 홀대하니 억장이 무너질 지경이었다.

한이헌의 사위가 외래교수로 임용될 시점에 나는 학과장이었는데 어느날 그 사위가 나를 찾아왔다. 음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지만 학교 이야기나 수업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당시 한이헌은 기술보증보험 이사장이었다. 얼마 후 한이헌 이름으로 소포가 왔다. 잘 포장된 과일 상자였다. 나는 한이헌과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으므로 외래교수 임용과 관련된 성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록 소액이라고 해도 교협대표이자 학과장이 외래교수 임용 건으로 당사자의 선물을 받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었다. 돌려보낼까 하다가 과일 상자를 설립자 원홍묵 선생의 사모님이 운영하는 성애원에 전달하고 한이헌에게는 잘 받았고 요긴한 곳에 썼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 후 6년이 지난 시점에서 정관 개정 문제로 이사회에 들어가 다툴 때 처음으로 한이헌과 마주쳤고 이 기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 김문기 퇴출을 촉구하면 단식 농성을 벌이던 중 정대화 교수는 학생들에게 거리 강의를 진행했다. ⓒ상지대 비상대책위원회

하루가 멀다하고 이사장 괴롭히는 구재단

다시 이사회로 돌아가자. 2012년 하반기에 이영수는 다시 김문기 쪽으로 복귀했다. 한이헌은 변심한 상태를 그대로 유지했다. 이영수가 김문기에게 복귀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 그 사이에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에 확인할 수도 없다. 결국, 이사회 구조에 변화가 발생했다. 구재단이 4명에서 5명으로 늘고 비구재단이 5명에서 4명으로 줄어 구재단에 유리한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사회 의결에 약간의 지장을 줄 정도가 된 셈이다. 그러나 채영복 이사가 이사장을 맡고 있고 4명을 확보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상태가 오래 가지는 못했다. 우리가 2010년 사분위 정상화에 반대하여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시점에서 김문기 역시 자신이 이사로 선임되지 못한 것에 항의하여 소송을 제기했다. 2012년에는 사분위가 이종서 임시 이사를 선임한 것이 부당하다며 다시 소송(2012구합31922)을 제기하는 동시에 이에 대한 가처분 소송(서울행정법원 2012아3327) 및 그 항고(서울고등법원 2012루302)를 제기했는데 2012년 11월 15일 재판부가 이 가처분을 받아들이면서 이종서 임시 이사의 직무가 정지되었다. 구재단 몫은 그대로였지만 비구재단 몫의 이사가 1명 줄어들어 구재단 5, 비구재단 3의 불리한 이사회 구도가 형성되었다. 서울행정법원의 본안 판결 역시 2013년 2월 5일에 임시 이사 파견 무효로 결정되었다.

이 상황은 구재단에게 매우 유리한 구도였고 구재단은 이사장에 대한 압박을 통해서 학원 장악 의도를 관철하고자 했다. 이사회 의결도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이사장이 구재단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자 구재단은 이사장 사퇴로 전략을 전환한 후 쉴 새 없이 이사장 사퇴를 요구하며 강하게 압박했다. 이사장이 사퇴를 거부하자 이사회 안건 심의를 거부하거나, 이사회 참석을 거부하거나, 이사회 참석 후 집단으로 퇴장하는 등의 방법을 구사하며 이사회를 파행으로 몰아갔다. 급기야는 이사장을 배제하고 구재단 단독으로 이사회를 진행할 목적으로 이사회 소집 요구서를 교육부 장관에게 보내 승인을 요청했다.

이렇게만 했다면 매우 신사적인 편이다. 구재단은 채영복 이사장의 업무상 지출을 문제삼고 수하들을 동원하여 이사장을 고소 고발하는가 하면 이사장 집 앞에서 연일 시위를 벌이는 등 이사장을 개인적으로 괴롭혔다. 이사장을 지지하는 이사는 두 명뿐이었고 그나마도 이사회 회의에서나 만나는 정도였지만 구재단은 하루가 멀다않고 이사장을 괴롭혔다. 결국 이사회가 정상적으로 가동될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이사들은 만나기만 하면 싸움질이고, 이사회는 열리기만 하면 파행이었으며, 이사회에서 처리해야 할 안건은 하나도 처리되지 않았다. 그 결과 이사회 안건 처리가 지연되어 수십 건의 안건이 계속 표류했고 대학 운영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당시 이사회의 파행 상황은 뒤에 첨부한 표와 같다. 특히 2013년의 경우에는 이사회가 허구헌 날 싸움질한 것 외에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사회의 극단적인 파행 역시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2012년부터 시작된 임시 이사 선임 취소 소송에 대한 서울고등법원 항소심(2013누9139)이 2013년 12월 20일에 기각되고 교육부가 상고를 포기하면서 임시 이사 파견은 최종적으로 무효 확정되어 임시 이사 후임의 정이사를 선임해야 하는 상황이 왔고, 수많은 논란 끝에 2014년 3월 24일 사분위는 김문기가 추천한 삼일회계법인의 조영재를 정이사로 선임했다. 결국, 사분위 정상화 3년 7개월 동안 파행을 거듭하던 상지학원 이사회는 한이헌의 배신과 조영재의 정이사 선임으로 사분위가 의도했던 5 대 4의 구도를 넘어선 6대3의 구도로 바뀌었고, 조영재 선임 직후 개최된 6대 3의 이사회에서 구재단이 이사장에 대한 마지막 일격을 가하자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채영복 이사장과 임현진, 한송 이사가 3월 29일 전격적으로 사퇴서를 제출하면서 상황은 끝났다.

이사장 등 3인이 사퇴서를 제출하자 구재단 이사 6명은 3월 31일 즉시 이사회를 소집하여 이사 3인의 사퇴서를 수리하는 동시에 김문기의 둘째 아들 김길남을 이사장으로 선출했다. 2010년 사분위 정상화에서 추진했던 5대4의 과반수 구도는 정상화 4년이 채 안되어 구재단이 상지학원을 완전하게 장악하는 구도로 바뀌었고 사분위가 특별히 주문했던 구재단과 구성원의 협력은 불필요한 헛주문이 되어버렸다. 구재단 천하가 된 것이다. 대법원의 2007년 김황식 판결로 상지대 정이사 체제를 붕괴시키고 사학분쟁조정위원회를 발족하여 구재단 복귀를 추진한 지 7년만에 구재단 복귀의 거사가 완벽하게 성공했다.

상지대는 이렇게 무너졌다

그러나 4년에 걸친 이사회의 파행은 상지대 사태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구재단은 유재천 총장의 사퇴를 집요하게 요구하면서 총장의 업무 수행을 방해했다. 교원 신규 임용을 반복적으로 지연시키거나, 부결하거나, 요구한 인원보다 대폭 감축하여 교원 확보율을 현저하게 떨어뜨렸고 이것이 결국 2013년도에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에 선정되도록 하는 이유가 되었다. 한방병원장 승인 지연, 예산안의 반복적인 승인 지연, 대학 자치 활동에 대한 부당한 개입, 공공 기숙사 사업과 방과 후 학교 사업의 승인 지연으로 인한 사업 반납 등 대학 운영이 심각한 파행상태로 들어갔다. 이사회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싸움질을 하고, 이사회가 대학 운영을 방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고, 이사회와 대학의 모든 관심이 반교육적인 파행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에서 대학 평가가 좋은 점수를 받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에 불과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사분위 정상화 이후 이사회가 4년 내내 파행을 겪었고 대학 운영이 심각한 지장을 받았는데도 관할청인 교육부가 팔장만 낀 채 수수방관했다는 사실이다. 참다못해 유재천 총장이 직접 교육부 장관을 만나 감사 및 행정 지도를 요구했고, 교수협의회도 여러 차례 교육부에 시급한 행정 지도를 요구했고, 사립학교법상 이사회 업무를 감사하도록 되어 있는 노영록 법인 감사가 교육부 장관에게 공식적으로 감사 보고서를 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부는 강건너 불구경이었다. 교육부의 눈에는 상지대가 존재하지 않거나 상지대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보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우리는 그 기간 내내 교육부에 하소연했지만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교육부만 보았다. 저런 교육부가 왜 필요한지 궁금했다. 차라리 없는 편이 훨씬 나았다.

사분위 정상화 이후 이사회 파행으로 시작된 상지대 사태는 상지대가 조금도 정상화되지 못했고 사분위 정상화는 잘못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했다. 달리 말하면, 사분위는 정상화된 상지대를 고의적으로 비정상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사분위가 말하는 정상화란 교육의 정상화나 대학의 정상화가 아니라 구재단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상지대 정상화 과정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자 사분위는 "지난 1993년 문민 정부 시절 행해진 대학 입시부정 단속을 계기로 학교 비리가 단죄되고 사학이 상당히 건전해지고 투명화 됐기에 과거와 같은 비리가 다시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는 취지의 참고 자료를 발표했다. 자신들이 결정한 정상화를 두둔하기 위해 구재단을 옹호한 것이다. 사분위가 상지대에 대해서 지금도 이런 내용의 참고자료를 발표할 수 있을까?

아래 표에 정리되어 있는 것처럼, 구재단에 의한 이사회의 반복적이고 고의적인 장기 파행은 사립학교법 제20조의2에서 적시한 "임원 간 분쟁"에 해당한다. 또한 이사회의 파행에서 비롯된 공공 기숙사 등 국가 사업의 반납과 교원 임용 및 예산안의 지연 등은 이 법이 규정하고 있는 "현저한 부당"에 해당한다. "임원 간의 분쟁·회계 부정 및 현저한 부당 등으로 인하여 당해 학교 운영에 중대한 장애를 야기한 때"에는 임원 취임 승인을 취소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학사 행정에 관해서 총장의 권한을 침해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 정도면 이사 해임이 필요하고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4년간 상지대 유재천 총장, 상지학원 노영록 감사, 상지대 교수협의회가 지속적으로 문제를 지적하면서 요구하고 읍소하고 항의했지만 교육부는 오불관언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업무 태만도 이런 업무 태만이 없고 직무 유기도 이런 직무 유기가 없다. 그 결과 사분위가 선임한 정이사 체제가 일거에 무너지고 상지대는 구재단 일색의 공룡 백만 년 시대로 복귀했다. 1993년 4월 김문기가 퇴출된 지 21년 만에, 사분위 정상화 4년만에 김문기 구재단은 화려하게 복귀했고 민주 상지대는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사분위 정상화=구재단 복귀=구재단의 학원 장악=민주 대학의 붕괴라는 예정된 등식이 현실화된 것이다. 상지대는 이렇게 무너졌다.

그러나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이것은 붕괴의 끝이 아니었다. 구재단의 학원 장악은 상지대 사태의 시작과 민주 대학의 붕괴를 알리는 예고편이었고 이제 겨우 서론의 도입부를 지난 단계였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제2의 붕괴, 제3의 붕괴가 기다리고 있었고 구재단의 파격적인 선택은 상지대를 이 세상에서 가장 극단적인 파국 상황으로 몰고 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상지대 구성원들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지만 동시에 대한민국은 말로만 들었던 김문기 사학 비리 구재단의 전설을 목도하게 되었다.

죽을 때까지 신과 인간의 문제를 붙잡고 씨름했던 톨스토이는 1872년 그 고민의 일부를 "신은 진실을 알지만 때를 기다린다(God sees the truth, but waits)"라는 제목의 단편소설로 표현했다. 여기서 톨스토이는 신으로부터 연유하여 인간에게 다가오는 진실이 어떻게 현실로 나타나는 지를 감동적으로 서술했다. (만약 김문기에게 일말의 진실이 있다면) 김문기에게 진실은 무엇이고 김문기로 인해 연유된 상지대 사태의 진실은 무엇일까? 이런 점에서 2007년 상지대 대법원 판결, 사립학교법 개정과 사학분쟁조정위원회 발족, 2010년의 상지대 정상화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2014년에 이루어진 구재단의 완전 복귀는 이제 김문기와 상지대가 찾아가야 할 진실이 무엇인지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사학 다큐멘터리의 후반부에 해당한다.

상지대 민주화 일기


(1) "봄 오는 길목, 제비 불러오는 길잡이가 되었다"

(2)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3) 비리 재단에 학교를 헌납한 이상한 국가 기관?

(4) 밀가루 분칠해 양이 된 늑대가 본색을 드러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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