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전진하는가 후퇴하는가? 인류 역사의 매우 오래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어렵지 않게 답이 내려졌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역사는 진보의 방향으로 전진한다는 것이 인류사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직진하는가 우회하는가?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질문이다. 여러 논란이 있었고 아직도 완결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단기적 후퇴를 포함해서 역사는 직진과 우회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2010년 8월 9일 사분위의 정상화 결정과 8월 30일의 교육부 행정 처분으로 새로운 상지대학교 이사회가 구성되었다. 구재단 추천인사 4명, 구성원 추천인사 2명, 교육부 추천인사 2명, 그리고 임시이사 1명 등 9명으로 구성되었다. 4월 29일 정이사 구성 비율을 결정하는 단계에서는 구재단에게 과반수인 5명을 배정했지만 결과에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사분위는 이사 선임 과정에서 구재단 몫 1명을 임시이사로 파견하는 변형된 결정을 내렸다. 상지대 사태의 폭발성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복잡한 결정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원칙적으로 구재단에게 상지대 운영권을 장악할 수 있는 과반수인 5명을 배정하되 정상화 초기의 불확실성을 감안하여 완충용으로 임시이사 1명을 파견한 후 상황이 호전되면 임시이사를 정이사로 바꿔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분위 결정에 의해 김문기 구재단은 상지대에 복귀한 것이며 사실상 이사회 운영권을 회복한 셈이다. 구재단 추천이 4명인데 반해 구성원 추천은 2명에 불과하고 정이사 2명과 임시이사 1명 등 3명은 교육부가 추천한 것이니 구재단이 이사회를 장악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옳다. 구재단이 상지대에 입성한 것이고 20년 민주 대학의 꿈은 무너진 것이다. 이것이 사분위가 추구한 상지대 정상화의 본질이다.
구재단 복귀, 본질 일깨우는 반면교사 역할
정상화 과정에서 김문기는 본인이 정이사로 참여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대학에 미칠 역효과를 우려한 사분위에 의해 거부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소탐대실을 보지 못하는 김문기의 욕심 때문에 사학 재단 전체의 이익이 침해받아서는 안된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대신 둘째 아들 김길남에게 정이사 자리를 주는 것으로 무마했다. 행정 처분 직후 구재단 추천 이석호 성신회계법인 대표가 이사 수락을 거부하여 변석조로 대체된 것 외에는 각본대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사분위 정상화가 결정되던 그 날 사분위 정상화에 결연하게 반대해온 구성원들은 사분위 결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부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했고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오는 즉시 이사장실과 상지학원 사무국을 점거한 후 무기한 농성 체제에 돌입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사분위는 상지대 정상화를 결정하면서 구재단과 구성원이 협력하여 대학을 정상화해 달라는 사분위의 의견을 피력했다. 매우 이례적인 일인데 정상화 과정에서 갈등이 폭발적으로 고조되었고 구성원의 저항이 맹렬했다는 사실을 감안한 행동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구성원 때문이 아니라 구재단 때문이었다. 구재단은 구성원과 협력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상지대 바깥에서는 협력적인 새로운 관계 구축의 가능성을 기대했을 수도 있다. 상지대 안에서도 일부 그런 희망사항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근거없는 기대와 추상적인 희망은 언제나 구체적인 현실에 배신당한다. 사분위 정상화로 구재단이 복귀한 것은 결과적으로 구재단의 본질을 일깨워주는 반면교사의 역할을 했다.
정이사로 선임된 이사들에 대한 신원 조회와 약간의 내부 조정을 거쳐 이사회는 2011년 1월부터 가동되기 시작했다. 교육부 추천 채영복 이사가 이사장을 맡았다. 대법원에 의해 정이사 체제가 붕괴된 지 3년 6개월만에 다시 정이사 체제가 들어서고 이사회가 가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사회 가동과 동시에 사분위 정상화가 결코 정상화일 수 없다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났다.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사회는 학교 안에서 개최되지 못했다.
상지대 정상화를 둘러싼 폭발적인 갈등이 구재단의 학원 복귀로 끝나고 새로운 이사회가 구성될 무렵 상지대 교수협의회는 차기 대표를 선출하는 정기 총회를 개최했다. 같은 시기에 나는 다음 해 연구년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상지대 교수로 부임해서 받은 첫 연구년을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활동에 사용해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두 번째 연구년은 제대로 보내려고 준비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교수협의회에 총회에서 연구년 준비중인 나를 교협 공동대표의 한 사람으로 선출해버렸다. 경영학과 김승탁 교수와 법학부 김명연 교수가 함께 선출되었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인 것일까? 결국 그 운명에 순응하고 말았다. 이 운명은 그 후 무수한 고소 고발, 지루한 조사와 긴 재판, 징계와 파면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 되었다. 이것이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이 될지, 아니면 폭탄을 안고 적진에 투입되는 것이 될지는 아직 모를 일이었다.
교수협의회 대표가 된 후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대학평의회 의장이 되고 개방이사추천위원회 위원장까지 맡았다. 관운이 구름처럼 밀려왔다. 일찍이 우리 가문에 이런 대단한 관운이 없었다. 그리고 즉시 임무가 주어졌다. 구재단이 상지학원 정관 개정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대학에서 그렇듯이 교수의 임면권은 이사장에게 있지만 재임용과 승진은 총장에게 위임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총장과 함께 일하는 대학의 주요 보직의 임면권은 대개 총장에게 부여된다.
그러나 구재단은 교수 인사권과 대학 본부의 보직 인사권 일체를 이사회로 이관하기 위한 정관 개정을 추진했다. 이사장과 다른 이사들도 구재단과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한 사분위 논리에 발목이 잡혀 정관 개정 작업에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교수협의회 총회와 전체교수회의를 잇달아 개최하여 의견을 수렴한 결과 정관 개정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압도적 다수의 반대 의견을 확인하고 그 결과를 이사장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이사회의 합리적인 판단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전체 교수들의 뜻을 이사회에 직접 전달하기로 했고 그 후 몇 차례 이사회에 갔다. 이사회는 양재교육문화회관(K-호텔)이나 팔래스호텔 등에서 열렸고 그 때마다 참석 여부를 둘러싸고 약간의 소란이 일었지만 우리는 이사회에 참석해서 정관 개정의 부당성을 차분하고 합리적으로 개진했다. 결국 서너 차례 이사회가 중단되었지만 팔래스호텔에서 열린 2011년 11월의 이사회에서 구재단 이사들의 농간으로 정관 개정안 일부가 처리되고 말았다.
그렇게 빨리 늑대 본성 드러낼 줄은…
이사장이 시급한 교원 충원 안건을 처리한다고 하여 학교 업무에 협조하는 차원에서 자리를 비워준 사이에 구재단의 요구로 안건 순서를 변경하여 정관 개정안 일부를 몰래 처리해버린 것이다. 이사회의 농간에 속았다고 생각하여 분개한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와 그날 즉시 이사장실을 다시 점거해버렸고 이사회는 우리를 업무 방해로 고소했다. 나를 포함한 교수협의회 공동대표 3명, 총학생회장과 부회장, 대학노조 지부장, 학생지원부장 등 7명은 2011년 구재단에 의해 11차례 고소 고발되었고 2012년 말까지 내내 경찰과 검찰 조사를 받았다.
구재단은 정관 개정과 동시에 '상지학원 정상화 방안'이라는 것을 추진했다. 김길남이 제안한 이 방안은 김문기에게 반대하는 교수협의회, 총학생회, 직원노조를 배제하고 다른 협조적인 유령 단체를 만든 후 협의 기구를 구성하여 대학 정상화를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교수협의회와 총학생회 등에 대해서는 협의에서 배제한 후 고소고발로 강력 대응한다는 방침도 정했다. 그러나 교수협의회와 총학생회를 배제하고 학원 정상화를 추진한다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았고 현실적으로도 가능하지 않은 방안이었으며 더욱이 상지대 상황에 적용할 수 없는 것이었기데 이를 둘러싸고 이사회 안에서 마찰이 일어났다. 그 결과 채영복 이사장을 중심으로 한 이사들과 김길남을 중심으로 한 구재단 이사들 간의 갈등 구조가 형성되었고 점차 뚜렷해졌다.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서 구재단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비리 재단을 복귀시키는 데 앞장섰던 사분위는 비리 재단에 대한 반대가 강한 상지대에서 예기치 못한 학내 분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구성원과 구재단 간의 화합을 강조했다. 채영복 이사장 등 교육부 추천이사들과 구성원 추천이사들도 이러한 화합에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상지대 역사를 모르고 구재단을 전혀 모르는 외부 이사들로서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재단은 사분위의 도움으로 학원에 복귀했지만 사분위가 당부한 화합 요구는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이들은 추호도 화합할 생각이 없었고 대학을 대학답게 운영할 생각도 없었다.
구재단 복귀 일성은 민주 대학의 상징인 상지학원 정관을 변경하는 것이었다. 정관을 변경하는 것은 대학 운영의 기조를 바꾼다는 것이자 민주 대학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구재단은 자신들을 반대하는 구성원을 배제한 구재단식 정상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저항하면 탄압하고 제거하겠다고 공공연하게 선전포고를 했다. 그런 한편으로는 교수협의회, 총학생회, 직원노조에 불만을 가진 일부 구성원들과 접촉하여 구성원 단체를 소수화하거나 소외시키기 위한 작전도 병행했다.
구재단 아닌 다른 이사들이 구재단의 이런 저급한 행태에 공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한 달에 한 번 꼴로 이사회에 참석하여 학교 사정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만큼 구재단의 음모를 포착하기 어려웠다.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학원 복귀와 장악이라는 목적으로 똘똘 뭉쳐 있는 구재단과는 달리 각기 개별화되어 있는 이사들로서는 달리 대응할 수단도 없었다. 더구나 이들 이사들은 구재단의 본질을 아직 접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사회를 원만히 운영하여 대학을 조속히 안정시키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갈등을 회피할 목적으로 구재단의 무리한 요구를 눈감아주거나 일부 요구를 수용하기도 했다. 구성원의 의사도 중요하지만 이사회 운영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구성원들의 저항적인 행동을 무리하다거나 무례하다며 비판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그러나 밀가루로 분칠하여 양으로 위장한 늑대의 모습은 오래 갈 수는 없는 법. 구재단은 초기부터 자신들의 의도를 애써 감추지 않았지만 그렇게도 빨리 늑대의 본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줄은 몰랐다. 이사회 안에서 학식과 덕망을 갖춘 이사들 간의 아름다운 화합과 협력에 대한 기대는 곧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갈등과 반목의 노골적인 투쟁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욕설과 인신공격과 고소 고발이 난무하는 가히 시정잡배만도 못한 이사회를 목도하게 되었다.
상지대 민주화 일기
(1) "봄 오는 길목, 제비 불러오는 길잡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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