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에버트 재단 한국사무소 사무실에서 플루크 전 독일 연방 하원 의원과 이삼열 전 숭실대 철학과 교수가 대담을 가졌다. 이 전 교수는 독일 괴팅겐게오르크아우구스트 대학에서 사회과학 박사를 취득하고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냈다. 최근에도 세계역사NGO 대표와 한국기독교사회발전협회 이사장을 맡아 동아시아의 역사 문제 해결과 화해협력을 위해 활동해오고 있다. 독일어로 진행된 이날 대담 통역은 한정숙 서울대 사학과 교수가 맡았다.
약 100분간 진행된 대담에서 플루크 전 의원은 유럽과 동아시아, 독일과 한반도를 비교하면서 한국이 격동의 동아시아에서 생존과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히 오늘날의 한국은 1960년대 서독 상황과 여러 가지로 흡사한 측면이 있다며, 서독이 엄혹한 60년대를 딛고 동독과의 화해협력과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서 한국이 교훈을 찾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다음은 대담의 주요 내용이다.
이삼열 : 플루크 의원님 대담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먼저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사민당 소속 의원으로서 독일 의회뿐만 아니라 유럽평의회 의원으로도 오랫동안 활동하셨는데, 정치인으로서 주된 관심사와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플루크 : 저는 최근 15년 동안 독일 사민당 외교위원으로 활동했고, 유럽평의회 의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아울러 나토 회원국 의원 연맹의 독일 의회 대표도 맡은 바 있습니다. 독일과 유럽, 그리고 나토 의원으로 주된 활동의 초점은 아시아에 있었습니다. 남아시아에서부터 동아시아를 망라했고, 특히 분단된 한반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는 독일 경험에 비춰볼 때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부상하고 있는 중국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고, 아울러 그 주변국인 일본과 몽골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연방 의원으로 재직하기 이전에는 19년간 주의회에서 활동했습니다. 경제, 과학기술, 행정 개혁이 주로 제가 맡은 분야였습니다. 주 의원 이전에는 약 20년간 엔지니어로 활동했습니다.
이삼열 : 이력이 이채롭습니다. 엔지니어로 계시다가 정치계에 입문하신 배경이 궁금한데요.
플루그 : 제가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할아버지 활동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공산당의 당원으로 나치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었습니다. 다행히 강제 수용소에 갇히지는 않았지만,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당해 박해를 당하시기도 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할아버지께서는 반핵평화운동에 투신했습니다. 1950년대 들어 발트해 연안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영국에 이어 프랑스도 핵무기를 보유하려고 했습니다. 미국은 서독에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했고요. 저도 이 때 할아버지를 따라 반전반핵 집회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12살 때였으니까 1956년의 일이었습니다.
20대였을 때에는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이 유럽에서도 크게 벌어졌습니다. 저도 반전 운동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에 관심 갖기 시작했습니다. 어쨌든 제가 직업으로서 정치를 선택하게 된 데에는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이삼열 : 플루크 의원께서는 독일 정계의 대표적인 한반도와 동아시아 전문가 가운데 한 분입니다. 동아시아 지역, 특히 남북한의 갈등 해결을 위해서도 많이 활동하셨는데, 그 점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반도와 동북아의 상황은 날로 악화되는 것 같습니다. 의원님께서는 한반도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플루크 : 1999년에 독일 의원들이 ‘하나의 한국’이 아니라 ‘두 개의 한국’이 있다고 보고 남한과 북한을 차례로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때 북한을 처음 방문했고, 그 이후에 10번 북한을 가봤습니다. 또한 6자회담 참가국 모두 방문하기도 했고요. 각국을 방문해서 얘기 나눠본 결과 상호간에 불신이 대단히 심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불신을 해소하려면 생산적인 대화가 필요한데, 각국의 동상이몽이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미국과 중국은 현상 유지에 관심이 많고 남북한의 통일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역사 문제도 대단히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북한과 중국, 러시아는 모두 일본의 침략에 대한 기억을 아직도 강하게 갖고 있습니다. 일본이 전쟁 책임에 대해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지 않는 한, 이 문제는 계속 남을 수밖에 없겠죠. 반면 일본은 북한 위협에 대처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입니다. 미국은 지정학적인 문제를 이유로 중국 견제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은 중국한테 북한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압박하고 있습니다. 남북관계는 아시다시피 대단히 좋지 않고요. 이런 상황이 악순환을 이루다 보니 문제 해결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역사 문제와 관련해 한 마디 덧붙이고 싶은데요. 일본은 북한이 일본인을 납치한 문제에 대해 강한 불만과 문제 해결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일본이 끌고 가서 강제로 성 노예로 삼은 많은 위안부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사죄하는 데에 인색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이삼열 : 의원님께서는 한국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의원님께서는 독일-중국 의원연맹에도 소속돼 중국도 많이 방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북한도 11차례나 방문하셨고요. 북·중 관계는 어떻게 보고 계신지요?
플루크 : 중국은 북한을 통해서 이익을 얻는 데 주력해왔고, 김일성 시대부터 김정일 시대까지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는 꼭두각시 정권을 수립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관철시키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북한도 중국을 불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북한의 붕괴를 우려해 이를 예방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북한과 중국은 서로 불신하면서도 필요한 관계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동독과 대화? 동독 가서 살아라"
이삼열 :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한국의 시민사회는 남북한의 화해협력과 진정한 한일관계 수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반도 분단극복과 평화로운 동아시아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어야 하는지, 특히 시민사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는지요? 독일의 경험에 비춰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플루크 : 현재 한국의 상황은 매우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상황은 1960년대 서독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당시 서독에서도 동독과 대화하고 교류하자고 하면 "공산주의자", "동독 가서 살아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서독 야당과 재야에서 활발한 논의가 있었고, 최소한 논의의 자유는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 엄혹한 상황을 돌파했습니다.
여기에 사민당 정권인 빌리 브란트 총리가 용기를 가지고 새로운 동방 정책 추진했습니다. 그의 역량 있는 참모인 에곤 바르는 두 가지 구호를 내세웠습니다. 하나는 "접근을 통한 변화"인데, 이건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죠. 또 하나는 "현상 타파를 원하거든 현상을 인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상이 비록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이를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선 더 나은 상태로의 현상 변경이 어렵다고 하는 정신이었죠.
그 당시 서독에는 할슈타인 원칙이 있었습니다. 제3국이 동독과 수교하면 서독은 그 나라와 단교한다는 것이었죠. 과거 한국에도 이런 원칙이 있었고, 오늘날 중국-타이완의 관계와도 흡사합니다. 이에 따라 동독과 교류·협력하자고 하면 배신자, 반역자로 공격당하기 일쑤였죠.
이삼열 : 그렇다면 독일은 그토록 엄혹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습니까?
플루크 : 1962년에 '슈피겔 사건'이 터집니다. 주간지 <슈피겔>이 서독의 안보정책에 문제가 있다는 나토 문건을 보도했는데요. 아데나워 정부는 여기에 국가기밀 누설죄를 적용해 <슈피겔>을 압수수색하고 기자를 체포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언론 자유에 대한 심각한 침해이자 불법 체포에 해당돼 그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졌습니다. 결국 아데나워 연정은 붕괴 일보 직전까지 갔고 대신 사회민주당이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독일 시민사회의 각성과 조직화가 일어나고 사민당 주도의 대연정이 성사되면서 동방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국내적 여건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대외적으로 보면 당시 서독 내에서도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미국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서독 내에서 고조되었었죠. 그러나 서독은 완전한 주권을 갖고 있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전승국에 의해 분할되었고, 서독의 안보는 주독미군을 비롯한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였죠. 반면 서독은 유렵의 일원이라는 정체성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체성 형성에는 오랜 적대국이었던 프랑스와 54년에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한 게 주효했죠. 미국에 의존하면서도 유럽 국가로서 동서독 문제와 유럽 전반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지향점도 갖고 있었습니다.
이삼열 : 플루크 의원님도 말씀하신 것처럼, 동방정책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서독 내부적으로는 할슈타인 원칙이 있었고, 미국에 의존한다는 국제적 제약도 있었습니다. 이걸 극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 바로 헬싱키 프로세스였다고 알고 있는데, 동방정책과 헬싱키 프로세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헬싱키 프로세스도 본격화되었습니다.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쳐 75년에는 헬싱키 최종의정서에도 합의했습니다. 정치군사 분야부터 경제와 환경, 그리고 인도주의 문제까지 망라하면서 동서 화해의 시대를 연 것이죠. 이 시기에 서독도 다수의 동유럽 국가와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를 통해 국경을 획정하고 상호체제 인정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국경을 확인하고 확정했다는 것은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닙니다. 독일-폴란드 사이의 국경, 즉 오데르-나이세가 2차 대전 직후 완전히 새롭게 형성되었는데, 서독이 이를 인정한 것입니다. 당시 서독의 개신교 연합이 일부의 반발에도 무릅쓰고 이를 인정한다고 발표해, 동방정책에 큰 힘을 실어주기도 했습니다.
이삼열 : 헬싱키 프로세스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무엇이었나요?
플루크 : 미국은 썩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헨리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은 "우리는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는 유럽 국가들이 사전에 많은 협의를 거친 것이 결실을 맺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알바니아를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들이 참여했습니다. 물론 소련도 참여했고, 북미 국가들인 미국과 캐나다도 참여했습니다. 헬싱키 프로세스의 결과 유럽안보협력회의(CSCE)가 만들어졌고, 이 회의체는 독일 통일과 미소 냉전 종식 이후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삼열 : 결국 독일 통일과 유럽 통합이 선순환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 과정에서 서독이 큰 역할을 했고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남북한 접근이나 대화를 시도만 해도 공산주의자, 종북주의자로 몰리기 십상입니다. 독일도 60년대는 그랬다고 하니 독일의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물론이고 국제사회에서도 북한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부정적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플루크 : 중요한 것은 북한이 관련 국가들 사이에서 예상 가능한 파트너로 여겨져야 하는데, 현재로써는 그렇지 않다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런 방향으로 북한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안보 구조를 만드는 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러한 안보 구조에서 북한이 안보 불안을 덜어내고 다른 나라와 정기적인 대화와 교류를 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관련국들의 북한에 대한 인식도 바뀔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한국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겠지요.
남북한이 협력하고 더 나아가 국가연합까지 간다면, 중국과 미국도 안보 상황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남북한 국민의 의사를 존중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입니다. 이게 있어야만 주변국의 지지와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독일과 한반도는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독일의 경험에 비춰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내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면서 국제적 지지와 협력을 이끌어낸 것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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