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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 20년의 경험, 이제 북한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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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 20년의 경험, 이제 북한을 향한다

[김상수 칼럼] 독일문화원 라이문트 뵈르테만 원장과의 대화

올해 2010년은 독일 통일 20년이 되는 해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만해도 통일독일이 그렇게 빨리 이루어지리라고는 당시 많은 사람들이 내다보지 못했다. 통일 과정은 5년에서 10년 정도 걸릴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1990년 10월 3일. 동독의 다섯 주가 서독으로 편입되면서 41년간 분단되었던 독일은 통일이 되었다.

89년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되기까지 시간은 329일밖에 안 걸렸다. 이 329일 동안 동독 지역은 자유선거가 있었고 서독은 새 동독 지도부와 통일협상을 숨 가쁘게 진행시켰다. 수도이전, 독일의 나토가입과 통일 독일의 군사력 협상, 화폐교환문제, 법원, 경제, 교육, 행정과 경찰의 통합문제가 동서독간에 논의됐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2010년 오늘, 통일독일은 유럽통합의 기틀이 되었고 독일은 독일사회의 내적 통합의 과제를 진행하고 있다.

여기에 비추어 지난 10년간 햇볕정책 또는 포용정책으로 남북간 화해협력의 길을 열어오던 한국은 이명박정부 하에서 대북정책은 일대 파행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지금 남북간의 갈등과 경색국면은 근 10여년 만에 극심한 위기와 긴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독일통일 20년의 역사적 교훈은 우리 한국인들에게 여러 가지로 의미를 둘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현실은 너무나 어둡다. 오늘의 한국인들이 통일 희망의 씨앗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분단의 고통을 계속 이어간다면, 이는 남북한을 포함한 전체 한국인들의 공동체에 점점 치유하기 어려운 갈등과 긴장의 고난만 더해질 것이다. 통일의 희망과 흐름을 만들어내는 성찰과 탐구가 너무나 절실한 이때다. 남북한 어떤 정권도 통일에 반하는 책동을 한다는 건 민족과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다.

괴테-인스티투트(독일문화원)는 독일연방공화국의 문화기관으로 해외에서 독일을 알리고 국제문화협력 활동을 지원하면서 독일의 문화, 사회, 정치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포괄적인 독일의 모습을 소개하는 기관으로 정치적인 영향을 받지 않으며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표방한다.

서울(주한독일문화원)은 1968년 설립되었고, 올해는 개관 42주년이 됐다. 올해에 들어서서 괴테-인스티투트 본부(뮌헨)가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으로는 북한프로젝트가 있다. 이미 2004년부터 실행되고 있는 북한프로젝트는 주한독일문화원의 문화 교류 사업으로 북한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기초 작업을 지금 진행 중이며, 그 일환으로 조만간 평양에 괴테-인스티투트를 설치하는 문제를 북한 측과 협의하기 위해 독일 관계자들이 평양을 방문할 예정이란다. 3월 23일 오후, 괴테-인스티투트 서울(독일문화원)원장 라이문트 뵈르테만(Raimund Wördemann)을 시내 남산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필자>


통일 20년 독일, 북한과의 본격적인 교류를 계획한다.

김상수: 괴테-인스티투트의 북한 프로젝트는 2004년부터 2009년까지 괴테-인스티투트 평양정보센터를 개설한바 있습니다.

라이문트 뵈르테만: 그렇습니다. 이제 북한과의 교류도 단계를 높일 때라고 생각합니다. 아시겠지만 우리 괴테-인스티투트는 전 세계인들의 상호 '우정'을 최우선적으로 염두에 두는 독일 연방 기구입니다. 정치색이나 정치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독일문화와 상대국의 문화 교류를 통해 서로의 나은 가치를 발견하고 인간애를 쌓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북한도 그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김상수: 괴테-인스티투트 평양 정보센터는 서방측의 문화기관으로는 유일한 첫 번째 기관이며 괴테-인스티투트가 전 세계에 설립한 문화정보센터 중에 57번째의 시설이라고 하더군요. 그동안 북한 주민들은 평양 정보센터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나요?

라이문트 뵈르테만: 괴테-인스티투트는 북한의 파트너인 조선도이칠란드친선협회와 함께 괴테-인스티투트 정보센터를 평양의 중심에 위치한 천리마 문화회관에 설립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평양 주민들이 보다 자유롭게 정보센터를 출입할 수 있도록 여러 실질적인 조치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번 독일관계자들이 평양을 방문하는 것도 주민들의 접근성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것이면서, 내용적으로도 이제 보다 더 본격적인 문화교류를 위해 단계 높은 협상을 곧 진행할 계획입니다.

김상수: 이번 북한과의 협상은 언제부터 시작됩니까?

라이문트 뵈르테만: 2주후인 4월 초순경에 독일 측 관계자들이 북한으로 들어갑니다.

▲ 라이문트 뵈르테만 괴테-인스티투트 서울(독일문화원) 원장 ⓒ김상수

42년간의 주한독일문화원의 성과

김상수: 서울 주한독일문화원이 40년이 넘었습니다. 짧은 시간은 아니지요. 그동안 독일문화원은 한국과 독일의 많은 문화교류와 활동을 주선했고 큰 성과들도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서울의 독일문화원은 그간 어떤 성과가 있었다고 평가하나요?

라이문트 뵈르테만: 우리 문화원이 한국과 독일의 문화교류를 위해 어떠한 일을 하였는지 그리고 독일문화원이 컨텍 포인트로서 독일과 독일어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 특히 한국의 젊은이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되돌아보았습니다. 예술 문화교류는 그동안 수없이 많았습니다. 일단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독일어 학습에 대해서 보자면, 저희 문화원에 교육협력파트는 한국의 교육 관청과 한국의 여러 언어 교육 기관들의 자문에 응하여 도움을 주었습니다.

아울러 한국 파트너와 협력해서 어학 수업을 주제로 한 워크숍, 세미나,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독일어 수업의 전문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연간 3천명 이상의 한국인 수강생들이 독일문화원 어학 과정에서 독일어를 배웁니다. 40년 동안이니 약 120만 명이 넘는 숫자의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독일어 학습을 위해서 여기 문화원을 거쳐 갔습니다.

김상수: 많은 숫자군요. 연간 3천 명에, 그동안 120만 명이 넘는 숫자가 독일어 학습을 수강했다면.

라이문트 뵈르테만: 그렇습니다. 그만큼 독일과 한국은 밀접한 사이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괴테-인스티투트의 비전

김상수: 오늘 2010년, 세계는 점점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여기의 문제가 세계의 문제가 되고, 독일의 문제가 또 세계 도처의 문제가 되는 시대입니다. 신자유주의의 폐단도 동시에 경험하고 있고요. 문화원의 역할이나 개념도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괴테-인스티투트의 새로운 비전은 무엇입니까?

라이문트 뵈르테만: 말씀처럼 세상은 글로벌리즘이라고 할까요, 빠르게 동시적으로 변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각 나라의 정체성이 또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방성과 세계성의 균형이 중요한 문제가 되는 시기입니다.

우리 괴테-인스티투트도 이런 문제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국제적인 문화교류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조류에 머물지는 않습니다. 문화현상을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합니다.

그동안 괴테-인스티투트의 주목할만한 변화로는, 오랫동안 괴테-인스티투트가 독일어를 소개하고 교육하는 차원이 중심이었다면, 20년 전부터는 주재국이 있는 그 나라에서 대화를 하고, 프로젝트를 개발하고, 문화적으로 예술적으로 관심사를 어떻게 같이 다룰 것인가를 고민하는, 그런 프로젝트를 많이 개발하고자 노력했습니다.

2009년, 10년, 11년, 3년간의 괴테-인스티투트의 주제는 '음악과 권력', '젊은이들', '종교와 사회, 그리고 예술'입니다. 그리고 이런 3개의 주제를 놓고 각 나라의 문화원에서 어떻게 주제를 토론의 장으로 이끌고, 그에 맞는 부대행사를 하는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김상수: 주제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라이문트 뵈르테만: 말씀드린 3개의 주제인 '음악과 권력', '젊은이들', '종교와 사회, 그리고 예술', 이 세 개의 기둥에서 그 핵심은 세계인들이 같이 우정을 나누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이 주제는 우리가 평양에 북한주민들에게도 교류와 우정을 나누는 테마로 삼고 있습니다.

독일문화원이 북한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유에는 정치적인 것보다는 북한 사람들과 북한의 문화와 독일 문화에 대한 관심사를 서로 나누는 것에 있습니다. 북한을 살펴볼 때 정치적인 것들을 떠나서도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역사, 문화, 예술, 젊은이들의 삶, 이런 주제들은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테마입니다.

김상수: 통일 20년 오늘의 독일은 세계에서 목소리를 계속 높여가고 있습니다. 내가 작년에 베를린에 있을 때인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미 의회 연설에서 "12월 기후변화 협상 타결을 위해 독일과 미국이 다른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하더군요. 이산화탄소(CO₂) 배출량 감축 약속에 미온적인 미국에게 독일의 노선(2020년까지 CO₂배출량 20% 이상 감축)을 따르라는 주장으로 들렸습니다. 미 의원들은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10여 차례 기립박수를 치더군요. 국제 환경에 관해서는 국제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나라가 미국이 아니라 독일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미국의 눈치를 보던 독일이었는데요.(웃음)

라이문트 뵈르테만: (웃음) 아직 독일은 더 많이, 더 제대로, 세계의 환경문제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문을 세계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독일 통일을 촉발시킨 촛불시위

김상수: 독일 통일에서 시민들의 촛불시위 경험은 한국에도 시사(示唆)하는 바가 많습니다. 1980년대 말 동구의 사회주의권은 이미 해체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소련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라 했고, 헝가리는 1989년 봄 국경 봉쇄를 풀었으며, 체코와 폴란드는 체제를 변화시켜 자유화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동독의 집권세력만이 강압 정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교회는 이미 1980년대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5시 평화 기도회로 특히 유명했습니다. 1989년 10월9일은 월요일이었고 니콜라이 교회도 평화 기도회를 위해 열려 있었습니다. 동독 권력의 핵심부는 모든 시위에 대한 강경 진압을 명령했고, 도시는 포위됐으며 군대와 경찰은 모두 무장했습니다. 병원들은 유혈 사태의 부상자에 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공포는 도시전체에 퍼져나갔습니다.

기도회가 끝났을 땐 7만 명이 교회 밖에 모였습니다. 개혁 세력과 공산당 대표들 사이에서 중재를 통해 마련된 비폭력 선언이 낭독됐습니다. 이어진 촛불시위에선 비폭력, 자유, 그리고 총을 쏘지 마라, 우리는 인민이다, 등의 슬로건이 나왔습니다. 총은 한 발도 발사되지 않았지요. 긴장과 공포의 상황에서도 비폭력은 집단 저항의 유일한 현실적 수단이었다는 위와같은 기록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 독일시민들의 경험은 한국의 시민들에게도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라이문트 뵈르테만: 저도 서울시민들의 촛불시위를 봤습니다. 참, 그 당시에 드레스덴에서 촛불 시위를 조직하고 움직였던 사람으로 헤르베르트 바그너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통일 이후에 그는 드레스덴 시장이 됐습니다. 이처럼 독일 통일 당시에는 여러 사람들이 통일을 위한 노력들이 있었고, 서독 지역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는 대중가수도 통일을 주장하고 노래했습니다.

김상수: 볼프 비어만이란 시인이자 가수 말인가요?

라이문트 뵈르테만: 아, 서독에서 동독으로 자기 발로 갔다가 동독에서도 추방된 그 가수도 유명하지요. 그 가수말고도 서독지역에서는 우도 린덴베르그라는 가수가 있었어요. 이 가수는 지금도 활동 중입니다.

주) 볼프 비어만(Wolf Biermann): 1935년에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1953년 17살에 스스로 동독으로 이주했다. 1959년경부터 시와 노래를 쓰기 시작, 그의 첫 시집은 '철사줄 하프'가 1965년에 발표됐고 1976년 동독 집권당을 비판하는 그의 예술활동이 문제가 되어 동독에서 추방당한 반체제 가수이자 시인.

1976년 동독 정부는 서독에서 공연 중이었던 비어만의 재입국을 불허하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그의 시민권을 박탈한다. 그 사건을 계기로 동, 서독의 많은 문화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항의를 했고 동독의 예술가들은 이 사건 이후 동독정부의 정책을 옹호하는 다수의 '정부파'와 소수의 '저항파'로 갈라지게 되면서 표면적으로 유지되었던 지식인들의 통합된 모습이 처음으로 균열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볼프 비어만(Wolf Biermann) - Commandante Che Guevara


우도 린덴베르그(Udo lindengerg) : 1946년 그로우나우에서 태어났다. 독일의 락 뮤지션과 작곡가. 그는 사회 민주주의 신념을 고백하는 노래 말로 유명하며 1986년 동독지역에 어려운 초청을 받아 음악회를 개최했다.

이후 베를린 장벽 철폐와 독일 통일을 위한 노래들을 작곡하고 불렀다. 독일의 50, 60년대 대중음악인 팝과 록은 미국의 것이 그대로 수입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는데, 60년대 말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대변되는 신마르크스주의의 영향으로 독일의 대중음악은 새로운 경향으로 흐른다. 이 시대의 음악을 가리켜 German Rock이라고 부르고 우도 인덴베르그는 이 음악의 경향을 대표한다. 네오나치에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여 강한 정치성을 보여주는 그의 음악은, 최근까지 미국의 이라크 참전에 반대하는 등, 반전 평화의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Nena and Udo Lindenberg - Jetzt bist du weg


김상수: 원장께서는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라이문트 뵈르테만: 쾰른대학에서 논문을 쓰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비극적인 철학이라고 할까요, 하이데거 철학 등, 20년 30년대 독일의 시대정신과 배경을 연구하고 있었지요. 왜 독일이 나치즘을 수용했고 철저하게 독일 사회가 파괴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파헤쳐보고 싶었습니다.

김상수: 흥미롭군요. 하이데거와 나치즘(Heidegger et le Nazisme)이 1987년에 프랑스에서 출간되어 프랑스 지성계에 돌풍을 몰고 온 후, 전세계적으로 하이데거의 나치 참여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이 논쟁은 하이데거 철학의 본고장인 독일로 전해졌고 미국에까지 전해진바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나치 참여라는 문제는 이제 하나의 중요한 철학적 테마가 될 정도인데요. 그 동안 쏟아져 나온 문헌만 해도 많지요?

라이문트 뵈르테만: 비단 하이데거 문제만은 아닙니다. 제가 논문을 쓸 때 중요 관심은 한 시대가 어떤 시대변화와 경로를 통해서 사회정치적 행로가 정해지는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지식인으로서 시대적 배경을 연구하는 노력은 그 시대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

열정이 문을 두드리고 문을 열게 한다

김상수: 2주 후에 있을 괴테-인스티투트 독일 측 관계자들이 북한으로 들어갈 때 어떤 사람들이 들어가나요? 이번에 원장도 같이 가십니까?

라이문트 뵈르테만: 괴테-인스티투트 본부사람들하고 일본 도쿄 원장이 이번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독일연방국회 의원들도 같이 들어갑니다. 저는 이번엔 안갑니다.

김상수: 서울 원장인 당신은 평양에는 몇 번이나 갔습니까?

라이문트 뵈르테만: 그동안 2번 갔습니다.

김상수: 어떻습니까? 가서 보시니까?

라이문트 뵈르테만: 북한 주민들이 갖는 독일 문화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습니다. 아시겠지만 괴테-인스티투트는 문화적 다양성이 재산으로 인정되고 상호 이해로 이루어지는, 보다 인간다운, 세상에 필요한 세계 공통의 가치를 추구합니다. 북한도 이런 바람에 호응한다는 열의를 느꼈습니다.

김상수: 너무 외교적인 수사네요.(웃음)

라이문트 뵈르테만: (웃음) 아니에요. 하루아침에 뭔가 정상적인 교류가 진행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열의가 있다면, 그런 열정이 있다면, 문을 두드리고 또 문을 열게 합니다.

(☞바로 가기 : 필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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