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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국정원, 애국심, 성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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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근혜, 국정원, 애국심, 성공적

[기자의 눈] 대통령과 정보기관의 '숙명'과 '착각'

1.

최근 열애설의 주인공이 됐던 배우 이민호. 무명에 가까웠던 그를 스타덤에 올렸던 드라마 <꽃보다 남자> (2009) 속에서, 그가 연기했던 '구준표'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미안하다는 말로 다 되면, 법은 왜 있고 경찰은 왜 있냐?"

이 말을 들려주고 싶은 이들이 있다. 2015년 7월 19일 늦은 밤, 국가정보원은 굉장히 이례적으로 '직원 일동' 명의의 입장을 발표한다.

"(자살한) 직원은 유서에서 '정말 내국인에 대한, 선거에 대한 사찰은 전혀 없었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고인의 죽음으로 증언한 이 유서 내용은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을 정치적 공세를 이어가는 소재로 삼는 개탄스런 현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구준표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사찰 없었다는 말로 다 되면, 삼권분립은 왜 하고, 대의민주제와 언론은 왜 있나?"

2.

자살한 직원 임모 씨가 얼마나 "업무에 헌신적이고 충성스럽고 유능한 직원"이었는지는, 그가 했던 일이 '내국인·선거에 대한 사찰인지'를 규명하는 것과 전혀 별개다. 최고 정보기관이라는 국정원이 이제는 이런 기본적인 사리분별조차 못 하게 된 걸까?

'국정원 직원 일동'의 감정 상태는 이런 것으로 짐작된다. '이럴 수가. 내가 나라를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데 나를 나쁜 사람으로 몰다니!' 이는 검찰이나 세무기구 등 다른 권력기관과 비교할 때, 유독 국정원 직원들이 사건에 휘말렸을 때 극단적인 선택을 많이 하는 이유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유우성 사건에서 증거 조작 혐의를 받았던 국정원 직원, 안기부 X파일 사건 당시의 국정원 2차장, 북풍 사건 당시의 권영해 안기부장 등이 모두 자살했거나 자살을 기도했었다.

'국정원 직원 일동' 성명에는 이런 감정 상태가 곳곳에서 보인다. '직원 일동'은 "(고인은) 유서에 나와 있는 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해 왔는데 이런 상황이 벌어진 데 대해 '자기가 잘못해서 국정원에 누가 되지 않았나' 노심초사 했던 것으로 주변 동료들이 말하고 있다"고 했다. 또 유서의 '국정원의 위상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혹시나 대테러·대북 공작활동에 오해를 일으킨 지원했던 자료를 삭제했다'는 부분을 언급하며 "이 유서 대목에서 국정원 직원 일동은 국정원에 대한 고인의 깊은 애정을 감지하고 애통해하고 있다"고도 했다.

이를 지켜봐야만 하는 시민들도 정확히 같은 부분에서, 같은 이유로 애통하다. '국정원의 위상'이 민주적 기본질서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할 만큼 고인이 국정원에 대해 '깊은 애정'을 품었다는 것이 애통하다. 그가 자신의 목숨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연합체로서의 국가 대한민국보다 국정원을 더 사랑했다는 것이 애통하다. 그래서 우리도 "국정원에 대한 고인의 깊은 애정을 감지하고 애통해하고 있다."

이들 '직원 일동'과 유사한 감정 상태를 공유하는 정치인도 있다. "정치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국민을 위한 일에 앞장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거 정부에서도 통과시키지 못한 (국회법) 개정안을 다시 시도하는 저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던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의 이런 태도는 한두 번 지적된 게 아니다. 집권 초의 정부조직법 사태 때부터 무수한 비판을 받았다. (☞관련 기사 : '앵그리' 박근혜…"도대체 왜 저러지?")

박 대통령과 국정원의 논리는 '나만 애국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나'는 나라를 사랑하고, 애국심으로 움직이며, 국민을 중심에 두고 정치를(또는 임무수행을) 하고 있다. 이런 '나'의 헌신을 방해하고 비판하는 것은 애국적인 행동이 아니다, 이런 논리다. 물론 이는 당연히 틀린 얘기다. 나는 애국하는데 너는 애국심이 없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모두가 나름의 방식으로 나라와 국민, 또는 공동체와 시민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나 국정원은 깜짝 놀랄지 몰라도, 야당 정치인들도 애국심을 갖고 정치를 한다. (심지어는 히틀러도 나름대로 조국과 (아리아) 민족을 위해 살았다.)

각자의 방식으로 나라를 위하는 가운데, 어떤 방식이 더 합당하고 효율적인지를 정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요체다. 이번 사건에서라면, 개인의 인권 보호와 정보기관의 정보수집 역량 강화 가운데 어떤 가치를 더 우선해야 하냐는 질문이 제기된다. 뭐가 더 우선해야 할까? 한 야당 정치인의 말이 적절한 답이 될 것 같다.

"국가의 역할은 국민의 정보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면서 국가의 안위를 지키는 것이다. 그 경계가 어디인지에 대한 '정답'은 없다. 국민의 약속이 있을 뿐이다. 그것을 우리는 '헌법'이라고 한다." (안철수 의원, 19일 새정치연합 '국민정보지키기위원회' 기자간담회에서)

따라서 '진정성'은 자신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상대방도 당연히 갖고 있는 시민으로서의 기본 사양임을 인정해야 민주주의 정치가 가능하다. 이를테면 '국정원 직원 일동'은 성명에서 정치권의 해킹 관련 정보 요구에 대해 "근거 없는 의혹을 입증하기 위해 국정원이 더 이상 정보기관이기를 포기하라는 요구와 같다. 국가 안보에 어떤 해악이 미치는지에 대한 고려는 없다"며 "북한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 엄혹한 현실을 도외시하고, 외교적 부작용이 발생해도 국정원이 약화돼도 상관 없다는 위험하고 무책임한 발상"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정치권이 제기한 의혹이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 그게 안보에 해악을 미치는지 안 미치는지는 '직원 일동'들께서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각자의 다양한 주장이 있을 수 있는 것이고, 결정은 주권자인 시민이나 그 합법적 위임을 받은 기구에서 할 일이다.

자기들만 나라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니, 이제는 심지어 "국정원 직원도 민간인 사찰의 엄중함을 야당 의원들 이상으로 절감하고 있으며, 새로운 국정원법으로 내부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며 '우리가 알아서 잘 하고 있다'고 대놓고 야당을 윽박지르기까지 한다. 아무리 내부에서 '절감'을 해도, 권한 남용은 당연히 제3자가 더 민감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문제인데도 말이다.

3.

국정원이 '직원 일동'의 성명 발표를 허가해 준 이례적인 사태도 여론의 도마에 오를 수밖에 없다. 공식 논의체계를 통해 숙의된 입장을 대변인을 통해 밝힌 것도 아니고, '직원 일동'의 입장 표명을 허가할 만큼 국정원이 자유로운 조직인 것을 이번에 처음 안 시민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게다가 사실상 국정원이 앞장서서 정치적 논란의 한가운데로 뛰어든 것인데, 이는 다행히 지난 2013년 '남북정상회담록 무단공개' 사건 때 이미 한 번 겪은 일인 탓에 크게 놀랐을 시민은 별로 없을 듯하다.

이번 성명에 나타난 '직원 일동'의 의견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앞에서 지적한 '나만 애국한다'는 시민적 소양 부족과 함께 '왜 내가 힘든 걸 몰라주냐'는 투정이다. 성명을 보면, 이들은 "이 직원은 본인이 실무자로서 도입한 프로그램이 민간인 사찰용으로 사용되었다는 정치권과 일부 언론의 무차별적 매도에 분노하고 있었다"며 "순수하고 유능한 사이버 기술자였던 그가 졸지에 우리 국민을 사찰한 감시자로 내몰린 상황을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정보기관을 경외시하고 감시할 게 아니라 '너희들 애국심이 정말 대단하다'고 손뼉을 쳐 줘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니 훌륭한 직원이 분노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냐는 투다. 그런데 일반 시민들이 국정원에 바라는 게 과연 이런 것일까? 과도하게 조직에 대한 충성에 몰입하지 말고, 법과 규칙에 따라 주어진 임무를 하고, 설사 상관의 명령이라도 부당하면 시민적 양심을 지켜 달라는 것이 국정원에 대한 많은 유권자들의 요구다. 이제 하다 못해 시민들이 국정원에 사탕이라도 물려주며 달래야 하나?

국정원은 성명에서 "해킹팀 사(社)로부터 같은 프로그램을 35개국 97개 기관이 구입했으나 이들 기관들은 모두 '노 코멘트' 한 마디로 대응하고, 이런 대응이 아무런 논란 없이 받아들여졌다"고 주장하면서 "10일 넘게 백해무익한 논란이 지속되면서 국정원은 불가피하게 해명에 나서야 했고, 그 과정에서 정보역량이 크게 훼손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정원 역시 '노 코멘트'로 일관했어도 된다. 한국 국정원이 고작 '10일의 논란'을 참지 못해 논란 한가운데로 스스로 뛰어들고 '직원 일동' 명의의 성명까지 낼 만큼 엉덩이가 가벼운 기관임을 자백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심정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19일자 <중앙일보> 칼럼 일부를 소개한다.

국가정보원은 비밀정보기관이다. 성공한 공작이라고 해서 자랑해서는 안 되고, 실패가 부각된다 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게 숙명이다. 게다가 국내 정치 개입과 불법 사찰, 불법 도청 같은 과거의 업보가 여전히 멍에로 남아 있지 않은가. 최근 불거진 해킹 프로그램 구매사건이 사회적 논란으로 증폭되는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일수록 국정원이 가야 하는 최선의 길은 음지에서 법과 원칙에 충실하며 묵묵히 할 일을 해 나가는 것이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 '음지가 정보기관의 숙명이다'

마지막으로, 이 '직원 일동' 성명에서 가장 문제 삼아야 할 대목은 임 씨의 죽음을 영웅시하는 태도다. "국정원을 보호하기 위해 '무명으로 헌신'한 직원"이라든가, "그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지키고자 했던 국가안보의 가치를 더 이상 욕되게 해서는 안 될 것", "국정원이 보호해야 할 기밀이 훼손되고 노출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자기 희생으로 막아보고자 했던 것"이라는 등의 표현에서는 흡사 목숨으로 책임을 지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전근대적 일본 제국주의의 유산마저 느껴진다.

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 씨의 죽음과, 국정원 '직원 일동'의 성명 발표를 기점으로 이번 의혹 사태는 분기점을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나만 애국한다'는 입장을 강변하는 것이 진정성과 애국심으로 둔갑하고, '왜 내가 힘든 걸 몰라주냐'는 아마추어적 투정이 음지에서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영화에서 봤던) 정보기관 요원들에 대한 동정론으로 번진다면, 해킹 의혹에 대해 진상 규명을 요구했던 여론은 급속히 사그라들 것이다.

그게 이런 주장을 폈던 이들이 원래 의도했던 바라면, 이들의 의도는 이번에도 성공할 확률이 높아 보인다. 슬프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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