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발생 한 달 보름을 넘기면서 공포의 메르스 열차는 서서히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는 분위기다. 물론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다. 방심을 하면 언제든지 바이러스가 날뛸 수 있다.
우리의 나쁜 습성 가운데 하나는 뜨거운 열기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순식간에 차가운 냉기로 바뀌는 것이다. 아직 메르스의 열기가 우리들의 몸속 디엔에이(DNA) 속에 살아 있을 때 잘잘못을 묻고 따져야할 필요성이 그래서 있는 것이다.
메르스 방역 대응은 총체적 실패였다. 초기 대응뿐만 아니라 후속 대응도 완벽한 실패였다. 대한민국 수준의 나라에서 이렇게 실패하기도 쉽지 않다. 감염병 발생에 이처럼 무기력한 대응은 일찍이 없었다. 대한민국은 메르스와 관련한 한 세계에서 가장 후진적인 나라가 됐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우리보다 환자 발생수와 사망자 수가 많기는 하지만 그것은 4년 동안 있었던 결과다. 또 그곳은 바이러스 상시 전파원, 즉 낙타라는 바이러스 숙주가 도처에 있어 감염병이 풍토병처럼 늘 생길 수 있는 조건을 지녔다. 다른 중동 국가를 포함한 세계 모든 국가들은 대한민국의 메르스 대응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앞으로 메르스 방역 체계를 갖추게 될 것이다.
메르스 방역 실패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많은 매체를 통해 그 실태와 이유에 대해 눈과 귀가 따갑도록 이야기해왔다. 이를 재삼재사 이야기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오늘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위기 관리 관점에서 정부의 메르스 대응이 얼마나 한심했는가에 관한 것이다.
메르스는 관리 가능한 위험
위기 관리는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발생한 일에 대한 대응 처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위기 예방을 포함해 사전 사후 단계를 모두 통틀어 광범위한 조직 활동을 말한다.
오늘날 감염병은 한 지역 또는 국가에서 생기면 순식간에 국경을 넘어 퍼져나가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감염병 역사에서 그리 멀리까지 갈 것도 없이 2003년 사스 대유행, 2009년 신종플루(신종 인플루엔자 A) 지구 유행 때 우리는 이를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다. 2012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메르스란 신종 감염병이 출현했을 때도 그 이웃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들이 남의 일로 생각하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오토 러빈저(Otto Lerbinger), 찰스 허만(Charles F. Hermann) 교수와 김영욱(이화여대) 교수 등은 위기의 불가피성, 위기 관리 가능성, 불확실성과 시간 압력, 조직 시스템 실패, 공중 관계 유지 실패 등이 위기 상황의 근본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를 우리나라 메르스 사태와 관련해 적용해보면 중동 국가와 교류가 잦은 나라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메르스 환자 유입이라는 위기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또 다른 나라의 사례에서 보듯이 메르스는 얼마든지 관리 가능한 성격의 위험이었다.
장관-대통령 모두 위기 속성 이해하지 못해 비극 키워
하지만 우리는 조직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공중과의 관계도 실패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메르스 위기 관리 실패는 위기 관리자, 즉 방역 실무자 등 아래부터 질병관리본부장, 보건복지부장관, 총리(총리대행), 대통령 등 위까지 모두 위기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르스 발발, 즉 아웃브레이크에 이은 사태 확산 과정에서 시민들은 정부의 무능한 대응에 분노했다. 자신들이 알고 싶어 하는 정보를 술래잡기 놀이도 아닌데 꼭꼭 숨겼다. 사망과 중증 환자, 장기간 격리 등 심각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도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과 사과를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특히 국정의 최고 책임자는 사과는커녕 보여주기 식 홍보에 열중하니 공중은 분노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저명한 위험소통 전도사인 피터 샌드먼(Peter Sandman)은 일찍이 위험 요인에 분노가 더해지면 위험은 극대화된다(risk=hazard+outrage)고 설파했다. 분노가 치민 사람은 더는 다른 사람 또는 기관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그들이 아무리 옳은 이야기를 할지라도. 극도의 분노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은 경험을 다들 한두 번쯤은 가지고 있을 터이다.
메르스 병원 숨기기 등과 3차 감염은 없다, 환자와 2미터 이내에서 1시간 이상 접촉해야만 감염될 수 있다 등등 판에 박힌 정부의 이야기에 혐오증을 느끼지 않은 시민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분노가 메르스 바이러스 전파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퍼져나갔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타이레놀 독극물 위기 극복 존슨앤드존슨의 무기는 개방+진솔
위기 관리 교과서의 첫 장에 등장하는 위기 관리 성공 사례로 미국 존슨앤드존슨의 1982년 타이레놀 청산가리 독극물 사망 사건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존슨앤드존슨에는 위기 관리 매뉴얼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위기에 잘 대응했고 회사는 1000억 원이 넘는 손해를 보았지만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어 신뢰받는 기업으로 우뚝 섰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것이다.
존슨앤드존슨은 누군가의 소행으로 청산가리가 들어 있는 타이레놀을 복용하고 어린이를 포함해 5명이 숨지자 문제가 일어난 시카고 지역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의 타이레놀을 즉각 회수 조치했다. 천문학적인 손실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과감하게 이를 실천에 옮겼다.
이와 함께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언론, 소비자들과 사원들에게 알렸다. 존슨앤드존슨의 홍보책임자는 평소 언론과 신뢰관계를 돈독하게 쌓았다. 위기 관리에는 평소 이해관계자나 공중과 신뢰관계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다. 존슨앤드존슨은 바로 그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존슨앤드존슨이 그 엄청난 위기에 얼마나 잘 대응했는지는 위기 발생 12일 뒤에 <워싱턴포스트>가 1면에 쓴 글에서 잘 드러난다.
"존슨앤드존슨은 굴지의 기업이 어떤 방식으로 재난에 대처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 존슨앤드존슨은 잘못을 인정할 줄 알고, 개방적이고 진솔한 기업이며 생명의 살상을 가져온 원인을 밝혀내고 공중을 보호하는데 헌신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소비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대통령은 유체 이탈, 바이러스는 숙주 이탈
<워싱턴포스트>가 대한민국의 메르스 위기 사태를 평가한다면 어땠을까?
"대한민국은 한 국가가 재난에 어떻게 대처하면 위기를 겪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 대한민국은 잘못을 인정할 줄 몰랐고 폐쇄적이며 진솔하지 못한 나라이며 사태의 확산을 가져온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국민을 보호하는데 게을리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국민에게 전하고 있다."
위기에 대한 신속하고 효과적인 대응은 사전에 충분히 준비하고 훈련받은 조직에서만 가능하다. 실제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한다. 질병관리본부와 보건복지부, 청와대는 전혀 준비되지 않았으며 훈련을 하지 않았다. 위기 대응 실행 능력이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메르스가 터져 나오자 정부는 물론 의료 기관과 전문가마저 우왕좌왕하며 위기 관리의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것이다.
대통령이 유체 이탈 화법을 쓰며 메르스 사태를 남의 일처럼 대하니 메르스 바이러스는 마음 놓고 숙주 이탈을 해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마구 옮겨 다녔다. 위기 관리를 잘 하지 못하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늘 고달프게 마련이다. 메르스로 한 달 보름 넘게 고통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 사람 말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