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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당, 무엇을 반성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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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당, 무엇을 반성해야 하나?

[민교협의 정치시평] 현실 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위한 고민

한국의 진보운동은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으며, 한국 진보운동의 낡은 패러다임과 운동양식에 대한 냉철한 반성과 근본적인 비판을 통해 한국의 진보운동과 진보정치를 혁신해야 한다는 말은 그 동안 수도 없이 들어 왔다. 그러나 그 혁신의 해법을 기존의 틀보다 온건한 방식에 입각한 정책을 제안하거나 추진할 경우, 사실상 기존의 틀에 입각한 원칙론적인 비판이 가해지며, '현 체제를 공고화하는' 공범으로 규정되고 만다. 현실 정치에 참가해 이론과 다른 실제 현실과 마주하며 몸부림치는 진보정당들 역시 늘 혁신을 부르짖으며 다양한 연대를 주장하고 있지만, 이렇게 한쪽 방향으로의 혁신 방안이 늘 똑같은 논리에 의해 폄하되는 구도 속에서 언제나 이론상으로 논리적 우위를 점해 온 원론적 입장에 의거한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

비판을 위한 비판? 진보 정당은 '순수 결정체'가 아니다

이들은 언제나 진보정당들의 모습은 새롭지도 신선하지도 않으며, 노동 대중들에게 그 어떤 감동도 주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 어떤 혁신의 모습도 곧바로 체제 타협적 개량주의로의 변절, 의회주의로의 투항이라거나 대중영합적인 후퇴이거나 출세주의자들의 도구로 전락했다고 폄하되곤 했다. 뻔한 사이클 속에서의 뻔한 결과를 너무나 잘 알면서도 선거만 치르고 나면, 뻔한 논쟁 속에서 진보정당들은 실력이 없으며,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데에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는 비판을 가한다. 그런데 진보정당이 해야 하는 반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진정 새롭지 않고, 신선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진보정당들이 노동대중들에게 대안을 제시하지 못 하는 진정한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용어나 수식어는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어 내용은 다양하게 보이지만, 사실 이러한 원론주의적 관념에 입각한 이들의 비판의 기본 기조는 매우 단순하다. 즉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극복 의지가 보이지 않을 경우 오히려 그것이 구태의연한 것이고, 새롭지 않은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적 평가도 없는 상태에서 함부로 사회주의를 논한다거나 근본적 체제변혁은 숙고해야 한다는 입장은 너무나도 쉽게 체제 타협적 개량주의자, 투항자나 변절자적 입장으로 규정되어버린다. 누가 요즘 그렇게까지 생각하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용어는 세련되어지고 바꾸어 사용할지언정 이런 식의 논리에 입각한 공격에는 변함이 없다.

모든 것을 그대로 모방하자는 것도 아닌데도 우경화 혹은 신자유주의화된 서구 사회민주주의 정치세력, 때로는 브라질 PT 정부 등 비서구 지역 좌파 집권 정당들에 이르기까지 혁명을 외치지 않는 많은 좌파 세력들은 이러한 공격을 위해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이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권은 물론, 최근의 그리스 급진좌파 시리자 정권에 대해서조차 체제 근본 변혁을 추구하지 않는다며 벌써 '우경화'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리스 시리자 이상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스페인의 포데모스에 대해서도 벌써부터 우경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최소한 진보정당들은 강령 상으로나마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겠다는 것과 유사한 강령들이 있기 때문에 덜 하지만, 시민사회단체들에 대한 비판은 한층 더 신랄하다. 마찬가지로 얼핏 그 비판의 내용은 다양해 보이지만, 요점은 간단하다. 즉 시민사회단체들의 이론적 지향과는 달리, 실제로는 기존 권력 메커니즘 속에서 성장주의나 시장주의에 입각한 신자유주의 혹은 자본주의체제를 공고화해 주고 있으며, 진보정당이나 노동운동과는 거리를 두는 반면, 자유주의 보수 야당과는 협의를 통해 정책 형성 과정에 개입하는 데에 더 집중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특히 이들 시민사회 비판 세력들이 자유주의자들의 집권 시 신자유주의 정책의 공모자들이었다는 공격은 한층 더 강력하다. 이들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이명박근혜' 정권이 이어받았을 뿐이라며,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화의 원조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이었음을 밝히고, 여당과 야당과의 차이가 없음을 강조한다. 이들 중 일부는 신자유주의화의 주범이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고, 영국의 대처 전 수상이 사망했을 때에는 그녀와 한국의 독재자들을 비교한 논자들에 대해 반박하며 한국의 신자유주의 아버지는 김대중-노무현이라고 논박하기도 했다. 신자유주의화에 책임이 있는 보수 야당에 대한 증오는 물론, 여전히 이들과 제도 정치 하에서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고, 사실상 자유주의적 가치 이상을 넘지 못 한 채 보수화되어 사실상 신자유주의나 현 체제를 강화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 사회에서 유행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 운동, 마을만들기 등과 같은 사회적 경제론 역시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 비판과 결합되지 않으면 기존 체제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비판도 신랄하다. 즉 사실상 자본주의식 이윤 논리 하에서 작동하는 사회적 경제는 시장의 사회화로 나아가지 못 하고, 사적 경제에 압도된 채 그 아주 작은 일부로서 보완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사회적 경제는 경제 영역에서 사회적인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국가와 시장이 아닌 시민사회가 경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시민의 요구를 반영한다고는 하나 이는 다른 한 편으로는 국가의 의무를 시민사회에 넘기는 것이며, 시민사회 내부로의 '경제'의 도입으로 인해 사회 운동적 외연이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논리가 도입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진보정당에서 시민사회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비판들은 어구 상으로는 틀린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매우 사변적이며 비현실적이다. 이러한 비판을 하는 이들은 늘 한국 좌파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이론이 부족해서 현실사회주의 몰락이라는 충격을 이겨낼 수 없었고, 그래서 쉽게 변절하거나 전향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과연 이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이론이 부족해서 전향하거나 변절한 것일까? 적어도 완전한 변절이 아니라면, 지금까지의 운동들, 특히 계급정치나 사회주의정치에 대해 과거와 같은 내용을 가지고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 운동가의 모습일 것이다. 대안을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장과 국가에 대해 과거와 같은 잣대로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따라서 급진적인 것을 주장하지 않고 계급과 사회주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과거의 자신들의 운동을 부정하거나 현재의 급진적 운동 자체를 적대시하거나 시대착오적이라고 모든 이들을 싸그리 비난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허구적 경계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과연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는 쉽게 허구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현실 사회주의체제 이전이라면 가능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그 이후라면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아래와 위를 잇는 연대에 더 많은 노력해야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가 가져 오는 폐해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알고 있고 누구나 다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것의 즉각적인 폐절이나 근본적인 극복을 이야기하지 못 하고 있을까? 그것이 단순히 진보적 인사들조차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여전히 그 근본적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그 대안을 제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해야하기 때문에 쉽게 원론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때로는 어디까지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것이고 어디까지가 시장경제체제에 대한 것이며 어디까지가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것인지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저들은 너무 쉽게 그 근본적 극복을 이야기하지 않는 진영에 대해 비난을 가하고 있다.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들과는 다른 집단을 만들어내고 그들은 무슨 주의자라고 규정하면서 사민주의 경향의 정치 세력이나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사회적 경제 운동을 하는 등의 집단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신자유주의'나 '선한 자본주의'를 위한 운동을 하는 자들이라고 폄하하지만, 정작 계급정치를 이야기하고 급진적 변혁을 추구한다는 자신들에게 원론적 원칙 외에는 현실적 대안은 없다. 일당 국가나 국유화가 사회주의라는 주장은 하지 않지만, 여전히 모든 국가의 단위의 계획 과정에서 노동 대중들의 토론과 참여가 있어야 한다는 매우 원론적인 원칙 외에는 구체적 대안은 제시하지 못 하고 있다.

이런 추상적 논의보다는 비록 근본적 변혁과는 거리가 멀더라도, 제도권 보수 야당이나 이들의 집권 시기 정책에 대한 비판 이상으로 정당 정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우리 사회의 각종 기득권 집단들의 지배 메커니즘을 폭로하고 공격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운동권적 도덕률에서 언제나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소수의 원칙론에 입각한 관념 좌파들의 입김 하에서 오히려 진보정당이 앞에 열거한 이유로 시민사회단체와 거리를 두고 있는 현실을 타파해야 한다. 이러한 편협한 자세를 버리고, 그리스나 스페인과 같은 유럽 주변부와 베네수엘라와 같은 중남미 등지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열린 자세로 광범위한 연대를 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 정당들 간의 옆으로의 조직적 통합과 같은 결집보다는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갖는다 하더라도 아래(시민사회와 노동대중)와 위(정치사회)를 잇는 연대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직접 민주주의의 확장이 대의제 민주주의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듯, 현재의 사회적 경제에 대한 논의들이 시장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확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사회와 경제를 통제하는 일당 국가, 사적 소유와 시장이 제거된 국유 경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면, 원론적인 주장이나 그에 근거한 급진적 변혁이 아닌 것들에 대한 과도한 비판은 불필요하다는 것 역시 직시해야 한다.

사적 소유와 시장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이 부재한 현재적 상황에서 시민사회와 사회경제가 결합되어 새로운 공동체와 사회적 경제를 형성하여 국가와 시장을 넘어 직접, 참여 민주주의와 공공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은 가장 급진주의적이고 진보적인 대안이다. 공공의 정치적 통제를 받지 않는 사기업들이 민중의 생존까지도 위협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리고 있는 현재의 세계화된 상황에서 유일한 대안은 생산 과정의 직접적 사회화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국유화가 아닌 전 사회적인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실험은 성공한 적이 없기에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따라서 근본적인 체제적 한계를 들이대기보다는 이러한 실험들이 지속되는 데에 방해가 되는 다른 요인들을 찾아 한계를 최소화하는 노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 가령 이러한 실험들이 성공하기 위한 절대적 조건은 이해당사자 다수의 참여이고, 그러한 참여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참여의 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게 노동 시간이 단축되어야 하며, 그 단축을 충분히 보상해 줄 수 있는 보편적 복지 제도 없이는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따라서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을 포함한 각종 고용노동자들 뿐 아니라, 야간에도 영업을 하는 영세 자영업, 비공식 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한, 그리고 지금과 같은 한국의 열악한 복지 수준에서는 사회적 경제도 기본소득 실험도 처음부터 좌초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직시하고 자신의 영역만의 연구나 실험을 넘어 다양한 연대에 기초한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

이제 대중들에게 특정 개인의 문제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며 가하고 있는 특정 정권과 집권 정당 중심의 비판은 지양해야 한다. 다당제 정당 정치를 인정하는 한 정당의 역할정당 중심의 논의를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보다 우리는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지배 권력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 또한 시장 경제를 전면으로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무에게나 신자유주의자라는 혐의를 씌우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따라서 가장 급진적인 좌파가 정권을 잡았다고 해도 시장을 전적으로 철폐할 수는 없을 것인데, 그럴 경우 이들에게도 원론적 원칙에 따라서 얼마든지 신자유주의자네, 뭐네, 하는 아주 오래되고 낡은 비판은 영원히 반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비판하는 이들의 관념적 만족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현실을 사는 노동 대중들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사변적 논의일 뿐이다. 시장체제에 대한 철저한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 현재,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 가지 조건이 부족한 비중심부 지역 국가에서는 설사 제안 단계라 할지라도 그 정책 실험의 대상이 물건이나 기계가 아니라 인간인 만큼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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