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는 황제부터 꼬마들까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이동 수단이 되었다.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는 경호원들의 땀을 뻘뻘 흘리게 한 열혈 라이더이기도 했다. 차르 같은 전제군주에 대항한 사회주의자들도 자전거를 선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영국 버밍햄의 사회주의 단체 클라리온(Clarion)은 노동계급 회원들에게 자전거 이용을 권장했다.
이 단체가 만든 클럽의 이름은 자전거정찰대였다. 클럽에서는 노동자들에게 할인가로 자전거를 판매했다. 싸게 구매한 자전거를 손에 쥔 자전거정찰대 회원들은 페달을 밟아 주변의 농장 노동자들과 농촌 주민에게 달려갔다. 자전거 행렬이 농장과 마을에 도착하고, 노동자들과 마을 주민들이 이들을 둘러싸면 새로운 '전도'가 시작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도착한 사회주의자들은 막 확산되기 시작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복음을 전파했다. 자전거가 가져다준 놀라운 기동성은 외딴 마을 사람들에게도 다가가 공산주의의 유령이 유럽을 덮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 단체가 만든 클럽의 이름은 자전거정찰대였다. 클럽에서는 노동자들에게 할인가로 자전거를 판매했다. 싸게 구매한 자전거를 손에 쥔 자전거정찰대 회원들은 페달을 밟아 주변의 농장 노동자들과 농촌 주민에게 달려갔다. 자전거 행렬이 농장과 마을에 도착하고, 노동자들과 마을 주민들이 이들을 둘러싸면 새로운 '전도'가 시작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도착한 사회주의자들은 막 확산되기 시작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복음을 전파했다. 자전거가 가져다준 놀라운 기동성은 외딴 마을 사람들에게도 다가가 공산주의의 유령이 유럽을 덮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철도가 노동자의 단결을 이루는 중요한 수단이 될 것임을 예언했다. 그러나 철도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동반자가 필요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자전거였다. 철도가 자전거를 품을 때 둘의 시너지 효과는 더욱 커졌다. 런던을 중심으로 한 철도편이 늘어나자 덩달아 런던과 대도시 곳곳에 자리 잡은 신문과 잡지, 출판사들이 호황을 맞았다. 철도를 이용해 빠르게 전달되는 소식은 사람들이 세상에 더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신문을 통해 드러난 정치인들과 자본가들의 파렴치한 행태들은 노동자들을 행동에 나서게 했다. 철도역에 도착한 신문들은 각 지역의 보급소로 이송되어 신문 배달원들의 손에 전달되었다. 신문 배달원들에게 자전거는 맡은 구역을 손쉽게 책임질 수 있도록 하는 최고의 장비였다.
코레일에서는 자전거 인구가 늘어나자 열차를 이용한 자전거 라이딩 상품을 내놓았다. 강원도 정선이나 충북 영동 등 경치가 좋고 공기가 맑은 시골길 자전거 여행을 열차를 이용해서 즐기는 관광 상품이다. 이를 위해서 자전거 거치대가 장착된 전용 차량이 연결된다. 이렇게 자전거를 품은 열차는 1935년 미국에서 시작됐다. 미 동부의 보스턴-메인 철도회사는 보스턴의 라이더들을 위해 뉴햄프셔 주의 화이트 산맥까지 자전거 전용 열차를 운행했다. 자전거 라이더를 위한 철도가 호응을 얻자 1936년에는 뉴욕-뉴헤이븐-하트퍼드 철도가 '자전거 타고 자연으로(Bike to Nature)'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해 자전거 여행자들의 각광을 받았다. 자전거 열차는 오전 8시 맨해튼을 출발해 늦은 저녁 돌아왔다. 왕복 운임은 2달러였고 자전거 1대를 대여할 경우 1달러 50센트가 추가되었다. 첫 열차가 운행되던 날 200명이 넘는 자전거광들이 7개의 열차 칸을 가득 채웠다고 한다.
시간이 흘렀고, 자전거를 타는 일은 특이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전위적 행위가 아니게 됐다. 비로소 자전거의 시대가 도래했고 그 영광스러운 빛이 막 찬란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수백 개의 부품이 들어가는 첨단 기술이 적용된 도로 위의 왕자가 어느 덧 순한 양이 되어 쫓겨났다. 도로를 점령한 새 주인은 자동차라는 이름의 늑대였다. 마차보다 작은 엔진이 달린 소형 탈것의 등장은 순식간에 도로 교통의 패턴을 바꿔버렸다. 부유층은 더 이상 자전거를 사지 않았다. 1920년 연간 생산량 120만 대를 자랑하던 미국 자전거 기업 트러스트가 도산했다. 4분의 1로 떨어진 생산량으로는 더 이상 회사들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전거는 보통 사람들의 생활수단이 되었다. 부자들의 전유물이던 자전거가 어느덧 가난을 상징하는 탈것이 되었다.
가난한 안토니오의 자전거, 그리고 인류의 자전거
실업에 고통 받던 가장 안토니오는 찾아 헤매던 일자리를 드디어 갖게 되었다. 안토니오가 얻은 일은 로마 시내를 돌아다니며 영화 포스터를 붙이는 것이었다. 아내는 간직해둔 시트를 저당 잡히고 전당포에 맡겼던 자전거를 찾아온다. 기쁨에 겨운 안토니오는 꼬마 아들을 뒤에 태우고 거리를 달린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부자는 잠시 방심한 사이 자전거를 도둑맞는다. 실망에 빠져 거리를 걷던 아빠의 눈에 축구 경기장 앞에 늘어선 수백 대의 자전거가 들어온다. 아빠는 아이를 먼저 집으로 돌려보낸 뒤 경기장 밖에 서있던 자전거 한 대를 훔쳐 달아나다가 잡힌다. 흥분한 군중들은 아빠를 흠씬 두들겨 팬다. 이때 되돌아온 아들이 몰매를 맞아 만신창이가 된 아빠를 붙들고 하염없이 운다. 자전거를 소재로 한 영화 중 대표적 명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 비토리아 데 시카 감독의 1948년 작 <자전거 도둑>의 줄거리이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빵을 훔쳤던 이유가 굶주림 이었듯, 실업자 안토니오가 자전거 도둑이 된 이유도 지독한 가난 때문이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자전거가 유일한 생존수단이기도 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자동차의 나라 미국에서 어느덧 자전거는 어린아이들의 차지가 되었다. 자전거를 타는 어른은 가난한 집 아이들이거나 유색인종 이민자들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다보니 1980~1990년대에 유럽에 여행 온 미국의 아이들은 어른들이 도심에서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보고 "이 동네는 가난한 사람이 많은 가봐"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성인들이 다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지는 오래다. 자전거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전통적인 사이클에서부터 산악용, 그리고 둘의 장점을 살린 하이브리드, 거의 누운 채로 달리는 리컴번트 자전거까지, 라이더의 취향에 맞춰 선택해 탈 수 있다. 기능이나 소재의 혁신도 놀라울 정도로 이루어졌다.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던 20단이 넘는 기어가 장착되고 프레임은 강도가 높으면서도 가벼워졌다. 인류에게 자전거가 없는 삶은 더 이상 상상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아직 자전거의 혜택이 필요한 곳은 이 행성에 널려있다. "폭탄이 아닌 자전거를(Bikes Not Bombs)"이란 NGO단체는 부유한 나라에서 버려지는 자전거를 가난한 나라에 전달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말 그대로 폭탄보다 자전거가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에게 억 배는 더 필요한 물건이다.
철도의 장점을 말하자면, 입이 아프도록 나열해도 모자란다. 그러나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철도를 타기 위해서는 비교적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바로 올라탈 수 있는 자동차의 편리성을 따라잡을 수 없다. 이른바 도어 투 도어(Door to Door) 서비스가 안 되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철도라도 이용자는 일단 역으로 가야한다. 이때 역으로 가는 운송수단을 자동차로 할 것인지 자전거로 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그 사회의 성격과 역사성에 달려있다. 정치인들이 비타 500박스에 열광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위한 정책 마련에 심혈을 기울일 수 있다. 시민 친화적이며 사회적으로도 유용한 도로 건설과 교통정책이 지속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선진국들의 교통정책은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철도의 특성은 대중적이라는 점에 있다. 객실 한 칸을 수십 명이 공유한다. 때문에 뛰어난 수송능력을 보장하고, 이런 면에서 공공적 성격을 갖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통수단 중에 자가용이 없는 유일한 탈것이 바로 철도이다. 반면 자전거는 지극히 개인적인 교통수단이다. 자전거의 장점도 리스트를 만들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 자동차가 갈 수 없는 좁은 길도 다닐 수 있고 무엇보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화석연료를 연소시키지 않는다. 주차공간도 많이 차지하지 않기 때문에 복잡한 도심의 주력 교통수단으로 삼기에 더없이 좋은 탈것이다. 속도 측면에서도 꿀릴 게 없다.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자동차가 매우 빠른 교통수단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지난 1년간 322억 건의 시내 통행 차량 자료를 분석해 2015년 5월에 서울시가 발표한 '2014년 차량통행속도'는 시속 25.7킬로미터(km/h)로 중세시대 마차의 속도와 별 차이가 없었다. 도심은 더 느려 시속 17.4킬로미터를 기록했다. 2013년과 비교해보면 도심은 시속 1.3킬로미터, 그 밖의 도로는 시속 0.6킬로미터 느려졌다. 갈수록 속도가 떨어지는 추세다. 이런 현실을 볼 때 굳이 자동차를 무한정 우대하는 현재의 교통정책이 타당한 것인지 의문을 갖는 게 당연한 일 아닐까? 철도와 자전거의 결합은 온전히 대중적인 것과 완벽한 개인적인 것의 조화를 통해 시민들의 이동권을 제대로 보장하게 한다. 두 탈것은 완벽한 환경 친화적, 인간 친화적인 교통수단이다.
암스테르담, 런던, 스톡홀롬, 그리고 독일과 일본
나는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을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암스테르담 중앙역을 좋아하는데 한눈에 반할 정도로 크고 멋진 역이다. 네오-르네상스 양식을 따랐다는 이 역은 멀리서 보면 중세의 성당이나 성처럼 보인다. 외관을 장식하는 붉은 벽돌이 햇빛에 반짝일 때면 그 웅장한 아름다움은 더욱 빛난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은 일본 도쿄역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도쿄역을 그대로 본 딴 것이 경성역이었으므로 암스테르담 중앙역은 서울역과도 인연이 닿아 있는 곳이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는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파리, 브뤼셀, 취리히, 바르샤바, 프라하 등 동서유럽의 여러 곳으로 향하는 열차를 탈 수 있다. 남과 북의 철도가 연결되어 대륙으로의 문이 열리게 되면 서울역에서 암스테르담까지 연결되는 열차를 탈 수도 있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곳에 세계 최대의 주차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주차장의 주인공은 자동차가 아니라 자전거다. 중앙역 바로 옆 운하 위에 4층으로 지어진 주차장에는 수천 대의 자전거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그야말로 가장 멋진 탈것 두 가지, 열차와 자전거가 앙상블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네덜란드는 풍차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제대로 된 풍차를 보기 위해서는 관광지로 조성한 곳까지 찾아가야 한다. 네덜란드는 풍차의 나라라기보다는 자전거의 나라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을 나서는 사람이 제일 먼저 마주치는 것은 끊임없는 자전거 행렬이다. 만약 출퇴근 시간과 겹친다면 이곳 사람들이 일제히 자전거를 타고 시위에 나선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다. 중앙역 앞을 오가는 트렘들 사이를 뚫고 달리는 자전거의 모습은 이 도시가 이미 1930년대 40만 명의 자전거 통근자수를 기록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듯하다.
철도와 자전거가 이상적으로 결합한 또 하나의 현장은 런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영국 철도 시스템 조사차 들렀던 패딩턴 역 승강장에서 나는 눈을 의심했다. 통근 열차가 정차하는 승강장 가득 수백 대가 넘는 자전거가 들어차 있었다. 역이 아니라 자전거 폐차장이라고 불러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풍경이었다. 거치대에 자리잡지 못한 자전거들은 그대로 바닥에 겹쳐진 채로 누워있었다. 열차를 타고 온 승객들은 출입문이 열리면 바로 몇 걸음 앞에 있는 자전거 더미 속에서 자신의 자전거를 찾은 뒤 안장에 올라타 승강장을 빠져나갔다. 열차에서 내리는 승객들 중에는 가방 이외에도 신발주머니 같은 것에 둥근 바가지 모양의 물건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 주머니에 들어있는 것은 머리 보호용 헬멧이었다. 통근자들이 열차에 내리면서 헬멧을 머리에 쓰고 턱끈을 조이는 모습이 아주 자연스럽게 보였다. 아침마다 출근 전쟁에 투입되는 런더너들에게 열차와 자전거의 결합은 승리를 보장하는 최고의 무기였다.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지하철역을 나오면 출입구 바로 옆에 시에서 제공하는 자전거들이 주차되어 있다. 시민들은 자전거 이용카드를 인식 시킨 후 목적지를 향해 달리면 된다. 시내 곳곳에 위치한 공용 자전거 주차장은 굳이 이용한 자전거를 반납하기 위해 출발지로 돌아오는 수고를 덜게 해준다. 프랑스 파리 시내에서도 스마트 시스템을 이용한 공공자전거 대여 주차장 모습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독일은 아예 철도 공사가 나섰다. 독일의 철도역에서 광장으로 나오면 어디서든지 독일철도공사 마크인 DB의 이니셜이 선명하게 찍힌 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다. 유럽은 이미 미래 교통 정책의 중심이 철도여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적극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이렇게 철도의 역할이 증대될수록 자전거와의 조화로운 결합은 필수적이다. 자전거 전용 도로는 물론 역사와 열차의 설계에도 자전거를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점이 고려되고 있다.
자전거로 따지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나라가 있다. 바로 이웃나라 일본이다. 철도왕국이기도 한 일본은 자전거의 나라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자전거 이용률은 비가 오는 등, 궂은 날씨에는 현저하게 떨어진다. 그러나 일본은 웬만한 비 정도는 우산을 받친 채 자전거를 타고 회사를 가거나 등교를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조그만 유치원생을 뒤에 태우고 다니는 엄마의 모습은 아침이면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일본 철도역의 특성은 엄청난 자전거 주차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JR이 운행되는 역들은 도심이나 시골 역 할 것 없이 역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자전거 주차장을 갖고 있다. 도쿄를 방문하는 철도광들은 오미야에 있는 철도박물관을 꼭 방문한다. 여행자들은 고속전철 신간선이나 일반철도를 이용해 오미야 역에 도착해 이곳에서 3분 거리 정도의 박물관으로 향하는 경전철로 갈아타야 한다. 이 경전철 승강장은 고속전철이 다니는 오미야역 고가 구조물 아래에 있다. 이 승강장 건너편의 고가 구조물 아래를 보면, 자전거 전용 주차장으로 수천대의 자전거가 주차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억 명의 인구가 도시에 꾸역꾸역 몰려 사는 나라가 일본이다. 이런 일본의 도시들이라면 교통체증이 최소한 서울보다 심각해야 하는 데 막상 자동차를 이용해보면 생각보다 원활한 교통 흐름을 보여 놀랄 때가 있다. 원인은 철도와 지하철 같은 궤도교통이 상당한 수송 분담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철도와 연계된 자전거를 이용하는 통학 및 출퇴근이 일상화되어 있어 교통지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자전거족이여, 도로를 점령하라!
한국에서도 자전거 열풍은 뜨겁다. 최근 몇 년간 자전거 이용자들은 급증하고 있다. 전국 도시의 주요 하천변과 공원에도 잘 닦인 자전거 도로가 깔렸다. 4대강 사업을 추진했던 이명박 정권은 콘크리트 보를 쌓아올리는 것과 동시에 강변을 따라 자전거 도로를 만들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 자전거길이 국토사랑과 국민건강 증진에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라고 자랑했다. 그러나 한국의 자전거 도로는 근본적 한계를 갖고 있다. 생활수단으로서의 기능은 거부당한 채 철저하게 취미와 레저 용도로만 쓰이길 강요당하고 있다. 이는 한국 교통정책의 미천한 수준이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음을 방증한다. 자동차 산업 자본과 토건족들의 이해관계, 정책을 총괄하는 관료들의 철학 부재가 자전거가 창출할 수 있는 엄청난 사회적 유익을 차단하고 있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는 주로 강변이나 하천 둔치에 설치된 전용 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자전거 이용자가 자전거 전용도로를 빠져나와 일반 도로를 주행하기 위해서는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한다. 일반 도로의 주인공은 자동차들이기 때문에 자전거가 침입해 교통을 방해할 경우 자동차 운전자들은 꽤 불편해 한다. 심한 경우에는 자전거 운전자를 정상 세포에 침입한 바이러스처럼 취급해 위협을 가하기도 한다. 한국의 도시에서 자전거를 타고 일반 도로의 차선이나 갓길을 점유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처음부터 자전거를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진 도로 구조상 자전거 이용자는 생각보다 심각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자전거 운전자는 자동차에 의해 수시로 존재가 가려져 자동차 운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갑자기 돌출되는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오랫동안 자전거가 배재된 도로 환경이었기에 자동차 운전자의 의식 속에서도 자전거에 대한 배려나 주의를 할 수 있는 경험이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도로교통 정책에서 자동차 운행을 대폭 줄이고 자전거로 대체하는 혁명적인 대전환을 추진하지 않으면, 자전거 이용자는 일반도로 주행을 마음먹기 전에 생명보험부터 들어 두어야 한다. 지구 환경과 한국의 지속 가능성을 따져 봐도 자동차의 무한정한 확대를 조장하는 현재의 교통정책은 하루 빨리 바뀌어야 한다.
한국의 자전거 이용 문화도 문제가 있다. 암스테르담이든 런던이든 도쿄든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누가 보더라도 평범한 생활 자전거를 이용하고 있다. 자전거 이용자도 헬멧만 벗으면 그저 보통의 회사원이거나 학생이다. 반면 한국의 자전거 문화는 이상하게 왜곡되어 있다. 자전거를 타고 한강변을 달리다 쉼터라도 만나 쉬고 있으면, 보통 자전거 자랑대회가 열리는 거을 볼 수 있다. 초경량 카본 프레임에 신형 변속기, 외국 유명 제조사의 고가 부품들이 장착된 자전거를 내세우고 품평회를 열기도 한다. 자전거를 탄 이들의 복장들을 보면 지금 당장 투르 드 프랑스 대회에 출전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프로페셔널한 모양이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도 자전거 동호회가 결성되었는데 이들 중 일부는 소위 "업글병"을 심하게 앓고 있다. 수시로 자전거의 거의 모든 부품들, 타이어에서 속도계, 변속기, 브레이크, 프레임을 상위 등급으로 갈아치우고 있다. 자전거 한 대의 가격이 수 백 만원에 이르는 건 보통 수준이다.
자전거 문화도 이상하다. 고급 자전거를 가진 사람들 중 일부는 대놓고 싼 자건거를 타는 사람을 무시한다. 나는 철도 민영화의 문제를 다룬 글을 상당기간 써 왔는데 글의 특성상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것들은 아니었다. 이런 글들을 탁월한 편집과 구성능력으로 <철도의 눈물>이라는 수작으로 재탄생 시킨 <후마니타스> 출판사의 편집자 중 한 명이, 한강변에 자전거를 타고 놀러갔다가 봉변을 당했다고 한다. 자전거 주행 중 갑자기 대열을 이뤄 고속으로 달리는 일련의 그룹이 편집자의 자전거를 추월했다. 이 과정에서 편집자는 대열 중 한 명과 접촉사고가 일어나 넘어졌다. 사고 당사자가 쓰러진 편집자에게 다가와 건넨 말은 부상을 걱정하는 내용이 아니었다. 자신의 자전거 안장 값도 안 되는 자전거를 끌고 나와 주행로에서 얼쩡거리면 어쩔 거냐는 험담이었다. 상처 난 자신의 자전거 수리비를 변상하라는 압박도 있었다. 나 역시 한강 자전거도로를 이용해 30여 킬로미터가 넘는 출퇴근길을 달린 적이 종종 있는데 그룹주행자들이 호루라기를 불고 경광등을 휘두르며 위협적으로 추월해 나가는 모습을 적지 않게 경험했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자전거를 타고 싶은 기분이 싹 가시게 된다. 한국 사회 특유의 경쟁과 과시 문화가 취미 생활에도 깊게 침투해 있는 씁쓸한 현실이다.
이제 자전거는 강변턱을 넘어 도로를 점령해야 한다. 그동안 주인 행세를 하면서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했던 자동차들에게 권력을 이양받아야 한다. 여러 도로의 최종 차선은 버스 전용 차선처럼 자전거 전용으로 만들어야 한다. 공공대여 자전거가 도심 곳곳에 배치되어 시민들은 언제든지 편하게 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출퇴근 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전철노선에 있는 역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자전거 주차장이 들어서야 한다. 또 이런 철도역에는 공공대여 자전거를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자동차가 발생시키는 수많은 사회적 손실을 줄일 수 있다. 시민들의 건강이 증진되는 것은 덤이다.
사실 이동에 있어서 가장 보호받아야 할 대상은 보행자들이다. 그러나 도시의 많은 도로들은 보행자가 안심하고 다닐 수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 지방 국도는 아예 보행자의 이동을 고려하지 않는 도로가 널려있다. 자전거는커녕 걷는 사람들의 권리도 자동차에 빼앗긴 것인데 이런 현상이 오래 지속되다보니 당연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걷는 사람을 최우선으로 보호하는 안전한 보행 환경을 만들고 나아가 자전거를 안심하고 탈수 있는 사회로의 진화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철도가 자전거를 품고 서로의 장점을 극대화하게 될 때 우리 사회가 누릴 혜택들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을 벅차게 한다.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적지 않은 것들은 자본, 그리고 자본과 결탁한 관료, 전문가를 자처하는 학자들에 의해 강요당했던 것들이 의외로 많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공화국이 최고의 이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공공의 가치이다. 공공의 가치란 사회적으로 모아지는 자산이나 발생하는 가치들이 소수의 전유물이 되는 것을 막고 모두의 혜택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과연 정부나 정당들이 이런 공화국의 가치를 실현해왔는지 생각해 보면 회의적이다. 수없이 새로 등장하는 법령이나 규칙들이 교묘하게, 또는 노골적으로 소수 기득권자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을 볼 때면 가슴이 아프다.
우리가 조금씩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도, 아니 더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정부, 정당, 사회를 만들기 위해 민주공화국의 주인인 우리들이 더 힘을 쏟아야 한다. 모든 혁명은 도로를 점거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자전거 라이더들이 당당히 도로를 차지하고 주인으로 나설 때 진짜 교통혁명은 시작된다. 만약 한국 사회에서 도심 한복판을 달리는 주인공이 자전거가 된다면 상상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려도 전혀 두렵지 않은 사회, 부푼 가슴을 안고 서울역에서 파리행 열차표를 끊을 수 있는 희망찬 내일, 이를 위해 대한민국의 평범한 사람 모두가 민주주의의 기관차를 모는 기관사가 되어 힘찬 기적을 울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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