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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땅 노근리의 평화공원이 섬뜩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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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땅 노근리의 평화공원이 섬뜩한 이유는?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50> 한국전쟁, 2차 줄행랑 친 이승만

고위 각료 및 정부 핵심 인사들은 귀중품과 현금, 고가의 가구까지 챙겨서 서울 엑소더스에 나섰다. 군 역시 서울을 포기하고 육군본부를 한강 남쪽 시흥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군의 서울 철수를 비밀에 부치도록 명령했다.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가만히 있으라는 정부의 말을 믿었던 대다수의 서울 시민들은 6월 27일 오전 6시 라디오 뉴스로 정부의 수원 이전 소식을 들었다. 서울 시민들은 국군 제17연대가 북한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해주를 점령했으며 38선 전역에서 북진을 감행하고 있다는 방송을 듣고 안심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전선에서 돌아오는 부상병들과 피난민들의 모습, 북한 전투기의 공습과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포성소리에 전장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게 되었다. 해질녘이 되자 서울역에는 기차를 타려는 피난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열차를 기다리다 지친 피난민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거나 걸어서 남쪽으로 향했다. 한강 인도교는 후퇴하는 군경과 피난민들로 사람들의 바다를 이루었다.

국군은 인민군의 서울 진입을 막기 위해 미아동-종암동-상월곡동-묵동-태릉과 봉화산에 이르는 저지선을 형성했다. 28일 새벽 미아리 공동묘지 도로변 참호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국군병사들은 폭우로 호에 물이 차자 밖으로 나와 졸고 있다가 전차의 굉음에 놀라 잠을 깼다. 수유리를 지나 전진해온 인민군 탱크들은 미아 삼거리에 차량 수 십 대로 설치된 바리게이트를 단 몇 분 만에 밀어 젖히고 길음 교 쪽으로 전진해왔다. 현재 서울 지하철 4호선의 강북구 노선을 그대로 따라 진격한 북한 인민군 전차들은 삼선동 고개를 넘어 혜화동 로터리에서 창경궁과 청계천 방향으로 나누어 진격을 했다. 국방부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사>를 비롯한 여러 사료에는 28일 새벽 창경궁과 퇴계로 등으로 진격한 북한군 전차의 목격담들이 담겨있다.

미아리 전선이 붕괴되고 있던 시간 용산의 한강 백사장과 인도교 위에는 강을 넘으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한강 다리는 군의 통제아래 군 병력, 경찰, 공무원과 그 가족들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다리 밑 강 위에는 어떡해서든 남쪽으로 피하려는 민간인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이미 한강 인도교와 철교에 대한 폭파작업이 완료된 상태였고 공병대 장교들은 폭약과 연결된 기폭장치에 점화만 하면 되었다. 한강다리 북쪽 끝에는 북한강파출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헌병들이 명령 없이 후퇴하는 군 차량들을 저지하고 있었다. 중지도에서도 공병대의 경계분대가 통제에 나섰다. 그러나 후퇴하는 차량에 탑승한 장교들은 여러 가지 구실을 대고 헌병들의 저지를 뚫고 차량을 밀어 붙였다. 당연히 일대 혼란이 벌어지고 다리 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새벽 두시 경 북한군 전차의 시내 진입 보고를 받은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바로 한강에 있는 공병감에게 전화를 걸어 폭파지시를 내렸다. 채 총창은 전화를 끊자마자 육군본부를 나와 수원으로 향했다. 한강다리위에는 후퇴하는 병력과 피난민, 이들을 통제하는 헌병들이 뒤엉켜 있었다. 이런 가운데 공병장교들의 폭파작업이 진행됐다. 한강 경계부대에 점화신호가 전달되자 경계부대는 차량 통제에 나섰으나 밀려드는 차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헌병대는 위협사격까지 하면서 차량 통행을 막았다. 새벽 2시 25분 경 한강 인도교에서 이시영 부통령을 태운 차량과 이틈을 타고 뒤따른 10여대의 차량이 남쪽으로 넘어간 뒤 한강 철교 교각들에 설치된 폭약에 이어진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어둠속에서 오렌지색 섬광이 밤하늘을 밝혔다. 용산과 노량진을 철도로 잇는 3개의 철교에서 거대한 폭음과 함께 불꽃이 일었다. 이어서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었다. 다리위에 있던 40-50여대의 차량이 날아 가버렸다. 수를 알 수 없는 군인, 경찰, 피난민들이 한강물 속으로 곤두박질 쳐졌다.

서울시민들의 피난길은 막혀버렸다. 미아리 전선을 시찰한 이응준 5사단장은 아직 육군의 주력부대가 후퇴 명령도 못 받은 채 서울 북동부에서 고군분투 하고 있으니 주력부대의 철수 이후로 한강다리 폭파를 막아 달라는 내용을 가진 전령을 급히 보냈으나 이미 늦었다. 한강다리 폭파직후 주한미군사고문단(KMAG)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9만 8천이었던 국군 병력은 5만 4천으로 줄었다. 전쟁 발발 며칠 사이에 병력의 절반을 잃은 셈이다. 병력만 잃은 것이 아니었다. 중화기를 비롯한 주요 전략 물자들을 고스란히 남겨 두고 몸만 빠져나간 국군의 전투력은 고갈상태에 이르렀다. 6월 29일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는 전방지휘소의 처치 준장으로부터 한국군의 병력이 2만 5천에 불과하다는 보고를 받는다. 전쟁 발발초기 3/4의 병력이 소진된 셈이다. 무능한 군 수뇌부가 실책을 반복한 끝에 가져온 결과였다.

피난민 군인 죽인 한강다리 폭파, 이것이 국가였나

한강에는 철도용으로 모두 3개의 철교가 있었다. 여의도 방면 하류 쪽에는 1905년 완공된 경부 복선철교가 있고 그 옆에 한강 인도교 쪽으로 1900년과 1912년 완공된 두 개의 단선 철교가 경인선 상하행용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 철교들은 6월 28일 국군 공병대의 작전으로 폭파되었으나 이 중 경부 복선 하행과 경인선 상행철교는 폭파실패로 끊어지지 않았다. 6월 28일 새벽의 한강다리 폭파로 용산 일대는 더욱 큰 혼란이 일어났다. 사체들이 강물에 떠올랐고 강변은 부상자들의 신음소리로 뒤덮였다. 한강다리가 폭파되자 군 고위 장교들은 조각배를 구해 타고 철모로 물을 헤치면서 강을 넘었다.

군수국장이던 양국진 대령이 군수국 부하 장교들과 용산역으로 갔을 때는 새벽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철도 직원들은 상시적으로 철도의 상황을 분석하여 운행가능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 몸에 배어있다. 철교 폭파 직후에도 공작창과 기관구, 용산역의 철도원들은 교량 상태 파악에 나섰을 것이다. 용산역으로 온 양국진 대령은 아직 파괴되지 않은 철교가 남아있음을 알고 강을 건너는 기관차를 준비시켰다. 이미 전시운송체계로 전환된 철도는 군의 명령을 따랐다. 양대령 일행은 용산역에서 기관차를 타고 파괴되지 않은 철교를 이용해 강을 건넜다. 강변에서 남쪽으로의 도하를 고민하다가 기관차가 철교를 넘는 것을 본 군인들은 짚 차를 몰고 철교위로 올라섰다. 여러 대의 차량들이 뒤따랐고 그 뒤를 따라 많은 병사들이 도보로 철교를 넘었다. 결국 28일 먼동이 떠오를 때 용산역을 떠난 기관차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군대가 서울을 장악하기 전 마지막으로 떠난 대한민국의 열차였다.

6월 28일,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에는 인공기가 게양됐다. 정부도 군도 모두 떠난 자리에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시민들만 남았다. 6월 29일에는 북한군 도강 지연의 임무를 맡은 미군 B-26 경폭격기가 한강 철교를 공중 폭격했으나 절단에 실패했다. 일본의 미 극동공군 사령부가 6월 29일부로 한강의 모든 교량을 폭파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였다. 6월 30일에는 미공군 제19폭격전대 소속의 B-29 중폭격기 15대가 한강철교와 강변 북쪽에 집결한 인민군 머리위로 폭탄을 퍼부었다. 한강 철교는 미 공군이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뒤에 중요한 전략목표가 되어 수시로 폭격이 이루어졌다. 이런 가운데 B-29 9대가 동원된 8월 19일의 집중 폭격으로 한강철교가 끊어졌다. 6월 28일 극동공군 사령부는 미 공군의 폭격목표 우선순위를 지정했다. 1순위가 북한군의 탱크였고 2순위는 병력, 3순위가 열차가 다니는 철교를 포함한 모든 교량이었다.

개전 초기 북한 지상군의 일방적 공세로 북한군 지휘부가 희희낙락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평양은 공포와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전쟁 발생 4일 째인 6월 29일 평양 하늘에 나타난 극동공군산하 제3폭격전대의 B-29 편대가 근원이었다. 미 공군의 공중폭격은 한국전쟁에서 절대반지와도 같은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눈이 감겨진 거인인지라 인민군뿐만 아니라 유엔군과 국군, 피난민과 도시의 민간인들도 비행기가 나타나면 두려움에 떨어야했다.

서울을 점령한 북조선 인민군은 서울의 철도 시설을 접수한 후 관리했다. 철도 경성공장과 기관구 등이 몰려있는 용산은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남진을 계속하려면 한강철교를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용산역과 한강변 일대에는 인민군의 주력부대가 도하를 하기 위해 집결했다. 인민군 입장에서는 다행히 폭파되지 않은 한강 철교가 남아 있었고 이를 통해 노량진과 영등포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한강을 둘러싼 남북군대의 공방은 치열했다. 전쟁 초기 기선제압에 성공한 북한군은 기세를 그대로 이어나가길 바랐고 후퇴를 거듭하던 남한군은 적을 지연시키며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의 기회를 삼고자 했다. 큰 강은 그 자체로 천혜의 방어선이어서 국군은 한강 변 남쪽 곳곳에 방어진지를 만들었다.

인민군은 국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린 전차를 도하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7월 1일부터 끊기지 않은 한강 철교에 대한 보강 공사가 시작됐다. 인민군 공병대는 철교위에 두꺼운 목판을 깔아 탱크가 이동하기 쉽도록 했다. 7월 3일 새벽 4시, 보강작업이 완료된 철교위로 인민군 전차 4대가 한강을 넘었다. 국군의 한강 저지선이 무너졌다. 아침에는 선로복구를 완료한 또 하나의 철교가 이용됐다. 탱크 13대를 평판 화차에 올린 화물열차가 철교를 넘었다. 이 화물열차는 보병이 올라탄 전차를 실은 화차가 노량진 쪽을 향해 있었다. 기관차가 맨 뒤에 연결되어 용산 쪽에서 추진운전을 한 것이다. 국군 수도사단 8연대 3대대장 박태운 소령은 이 광경을 망원경으로 확인하고 곧 영등포 방어선도 무너지게 될 것을 직감했다.

인민군의 서울 공세가 시작되자 영등포와 안양, 수원을 잇는 경부선 역들에는 몰려든 피난민들로 커다란 혼잡을 빚었다. 이런 혼란은 국군의 후퇴가 계속될수록 남쪽으로 이어진 역들로 전이됐다. 철도역에서 열차가 출발할 것 같으면 기를 쓰고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열차가 수용할 수 있는 피난민의 수는 제한되어 있었다. 열차 이용은 일반시민이 아니라 기타로 구분된 신분의 피난민들에 우선적으로 허용됐다. 기타의 신분이란 군과 경찰, 공무원의 가족을 말했다. 피난민들은 열차 지붕을 가득 메웠다. 지붕에 자리를 잡지 못하는 사람들은 객차나 화차의 연결부위위에 널빤지와 이불 등으로 채우고 그 위에 올라앉았다. 열차가 달리기 시작하면 외부에 노출된 피난민들은 2중 3중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잠깐의 방심으로 달리는 열차에서 중심을 잃을 경우 바로 추락사의 운명을 겪게 된다. 열차의 앞쪽에서 굴을 발견한 피난민들은 목청껏 굴이 다가온다는 것을 뒤로 알려야 했다. 열차 지붕에서 몸을 숙이지 못하면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고통스런 피난 열차도 선택받은 자의 몫이었다. 대다수의 피난민들은 철길을 따라 걸어서 남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더위와 추위, 굶주림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주기적으로 피난민으로 가장한 간첩들을 잡겠다며 검문이 이루어졌고 그때마다 무고한 사람들이 간첩 혐의를 받고 죽어나갔다. 미군과 한국군, 정부당국은 피난민들이 작전에 방해되고 적 첩자의 진입을 막을 수 없다며 피난민의 도별 수용과 피난행렬의 통제에 나섰다. 사회부, 국방부, 내무부 합동으로 피난민에 대한 증명서가 교부되었는데 '사상의 온건성'이 확인 된 자에 한해서 발급되었다. 이 피난민 증명서는 생과사의 갈림길에서 운명을 결정하는 표식이 되었다. 피난민들을 수용한 수용소에서 피난민 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수시로 이루어지는 감시와 심사를 통과해야만 유효성을 인정받았다.

한국 전쟁당시 남한 시민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으로 여겨진 곳은 부산이었다. 부산에는 한국전쟁이 진행될수록 몰려드는 피난민들로 점점 포화상태가 되었다. 때문에 정부는 피난민을 일반시민과 기타로 나누어 기타로 분류된 피난민들 위주로 부산에 수용했다. 나머지 일반 피난민들은 전라도와 충청도 등 다른 시도로 유도 했는데 이 지역들은 북한군의 점령지역으로 되어버려 사실상 서울 탈출에 이은 사다리 걷어차기의 재판이었다. 부산의 피난민은 A부터 E등급으로 분류되었는데 군인가족, 경찰가족, 공무원가족 순으로 A,B,C등급으로 분류되었다.

일반 피난민들은 국가로부터 버림받았다. 노인과 아이들은 쉽게 병들어 죽었다. 건강한 사람들이라도 먹을 것은커녕 식수도 없는 상황에서 오랜 도보 이동과 길바닥 노숙이 반복되자 쉽게 병이 들었다. 굶어 죽는 사람들도 갈수록 늘어났다. 이런 상황속에서도 갑과 을은 천지 차이였다. 고위층들은 귀중품과 애완동물을 챙겨 자동차나 열차에 싣고 편안하게 피난대열을 지나쳐 피난민들의 원성을 샀다. 이진수의원이 51년 1월 17일 임시수도 부산에서 열린 국회에서 행한 발언을 통해 피난의 실태를 엿볼 수 있다. “나는 오산지방을 순회하고 와서 피난민이 기아에 떨고 있음을 보고 정부시책에 안심할 수 없었다. 피난민 구제 사업을 시급히 요하고 있다. 피아노와 개 까지 싣고 피난하는 권력층의 가족이 있었으니 이런 분자들은 단호히 숙청하여야 할 것이다.”

전쟁터 한 복판의 많은 피난민들은 전쟁과정에서 늘 상 벌어지는 어이없는 일들에 의해서 목숨을 잃었다. 전장을 피해 임진왜란도 피해갔다는 깊은 산속마을로 들어간 주민들을 군은 작전지역이라며 내몰았다. “작전지역내 민간인 소개”라는 명령에 따라 행해진 것이었다. 두메산골 속에서 전선 한복판으로 피난민이 내몰렸다. 각 사단과 군단의 명령은 전화선을 타고 오락가락했다. 한국전 초기에 투입된 미1기병사단은 피난민을 남쪽으로 내려 보내다가 다시 북쪽으로 보냈다. 이런 일들은 흔하게 일어났다. 마을에는 미군이 뿌린 전단이 날라 다녔다. 전투지역에 남아있는 민간인들은 적으로 간주할 터이니 떠나라는 것이었다. 집을 떠난 민간인들은 수시로 변하는 미군의 지시에 따라 탁구공처럼 이쪽, 저쪽으로 내몰렸다. 그래도 대다수의 민간인들은 남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런 상황에서 전선의 미군들에게는 아군의 저지선을 넘으려는 자는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1기병 사단 사령부도 남하하는 피난민을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자와 아이들은 재량에 맡긴 다고 했으나 인민군들이 여성과 아이들까지 이용한다며 모든 피난민을 적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퍼졌다.

▲노근리 평화공원 ⓒ박흥수

노근리의 비극, 섬뜩한 '평화공원', 그리고 철도

인민군이 피난민을 가장해 미군과 국군에 큰 피해를 준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게 과장됐다. 한국 전쟁 초기 거침없는 남진을 지속한 전투 양상을 볼 때 피난민을 가장한 인민군의 정보 확보나 후방 타격은 중요한 변수가 되지 않았다. 미군은 한국전에 최초로 참전하게 된 스미스 부대의 완패이후 계속 패하며 후퇴를 거듭하자 핑계가 필요했다. 일본에서 휴양소 같은 점령군 생활을 만끽하며 뱃살을 불리던 스미스 부대는 북한 인민군을 얕잡아봤다. 병법에서 필패로 이어진다는 자만심을 가득 안은 채 한국 전선에 첫발을 디딘 스미스 부대였다. 미군을 보자마자 도망갈 동양 원숭이들이라고 놀렸던 북한군의 전력이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되지만 정면대결에서 물러선다는 것은 미군의 체면이 안서는 일이었다. 세계최강 부대인 미군은 북한군의 비열한 전술로 고전한다는 명분을 만들어내야 했다.

경부선 영동역에서 부산행 열차가 출발하면 계속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막길을 달리게 된다. 산을 끼고 도는 선로라 최고속도는 시속 100킬로미터로 제한 받는 곳이 많다. 엔진출력을 최고로 해 약 7-8분여를 달리면 터널이 나오는데 이 터널을 지나면 고개 정상이다. 기관사들은 이곳에서 엔진출력을 낮추고 타력으로 내리막길을 달린다. 내리막길을 2-3분 달리다 보면 선로 밑으로 철도에 의해 나뉘어진 마을을 이어주는 쌍굴이 있다. 이 굴을 지날 때 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파란색 지붕의 “노근리 포도 집하장”이라고 쓴 창고가 보인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농촌의 평화로움을 담고 있다. 하지만 열차가 통과하는 철길 아래 쌍둥이 터널은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 까지 수많은 피난민이 미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생명을 잃은 상처를 안고 있는 곳, 노근리 이다.

미국 1기병사단 7연대 병력은 노근리 일대의 주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다며 이동시켰다. 하지만 속임수였다. 7연대 통신병은 전투기를 호출했고 제트 전투기 편대들이 피난민들 머리위로 기총을 난사했다. 피난민들은 경부선 철길아래 쌍 굴로 피해 들어갔다. 고립된 피난민을 향해 기관총을 동원한 미 7연대 병사들이 일제 사격을 가했다. 무고한 민간인들에 대한 사냥이 벌어졌다. 1999년 공개된 미국 기밀문서들과 학살에 가담한 병사들의 참회 증언이 사건에 끈질기게 달라붙은 기자들에 의해 AP통신에 보도되면서 오래 동안 봉인되었던 진실이 드러났다.

철길아래 굴로 대피한 사람들은 비무장 피난민들이었다. 여자와 어린아이도 다수 포함되어있었다. 인민군에 연전연패하며 밀리던 미군들은 이성을 잃고 피난민들을 향해 총공격을 퍼부었다. 이미 사단 사령부로부터 작전지역에서 발견되는 모든 민간인을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받은 뒤였다. 피난민들이 입었던 흰 옷들은 붉게 물들었다. 400여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전쟁만이 인간에게 시킬 수 있는 야만 행위였다.

노근리 경부선 하행 철길의 오른쪽에는 이 사건을 추모하는 평화공원이 들어서있다. 경부선 열차를 몰면서 지나쳤던 이 공원을 둘러보기 위해 봄이 막 무르익는 4월 초순 시간을 냈다. 홀로 가는 답사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중3짜리 딸을 회유했다. 학교에 체험학습 신청서를 제출하고 기차여행에 나선 딸은 학교를 빠지는 것보다 방과 후 학원을 안가도 되는 것에 더 시원해했다. 열차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봄의 향연을 보면서 음료수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중학생은 해방감을 만끽했다. 노근리에 가기위해 영동역에 내렸다. 영동역 앞 버스 정류장에서는 황간 행 버스를 타야했다. 30분을 기다려 탄 버스는 만원이었는데 버스 안에 탄 이들 중에 우리 일행이 최연소 승객이었다. 얼핏 보아도 65세 이상의 노인 분들이 좌석을 가득 채웠다. 중3짜리가 한국 사회의 고령화를 실감한다고 말을 뱉었을 때 기특하다는 생각과 농촌사회의 세대별 고립화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생각이 범벅이 되었다.

노근리 평화공원 정류장에서 내린 우리는 내리자마자 깜짝 놀랐다. 군인들이 노근리 평화 공원 일대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얼굴에 위장 크림을 바른 병사들이 엎드려 쏴 자세로 중기관총과 소총을 겨눈 채 사주를 경계하고 있었다. 맞다. 한국은 판문점체제 이래 아직 완전한 평화가 도래하지 않은 곳. 전정협상으로 잠시 전쟁이 유예된 곳이었다. 평화롭게만 보이는 산과 들의 세밀화 속에는 숨은 그림 찾기처럼 위장복을 입은 군인이 훈련을 지속해야 하는 곳이었다. 평화공원을 가기위해서는 이 군인들이 엎드려 있는 곳을 지나야만 했다. 군인들이 총구를 겨눈 채 앞을 응시하고 있는 바로 앞을, 카메라를 어깨에 맨 채로 감자 칩을 우적우적 씹으며 지나는 부녀의 풍경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노근리 평화공원 야외 전시장에는 당시 폭격 임무를 수행했던 미공군 제트 전투기 F-86을 비롯해 탱크와 군용 차량 등이 전시되어 있다. 희생자를 추모하는 공간에 희생자를 공격했던 살인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는 꼴이다. 게다가 전시되어 있는 M48A2C 전차는 노근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전시물이었다. 노근리 전투는커녕 한국전에 투입된 것도 아니었다. 1971년에 주한미군에서 인수해 한국군이 사용하다 퇴역한 장비를 가져다 놓았다. 안내문에는 1970년 당시 한국군의 귀중한 전력이 된 최신형 전차였다는 설명이 적혀있다. 굳이 이 장소에서 알려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전투기나 탱크들이 관광객들에게는 흥미 있는 전시물일지 몰라도 노근리에서 죽어간 영혼들에게는 끔직한 사슬과도 같은 것이다. 심지어는 전시물에 대한 설명도 사실과 다르게 되어 있었다. F86 전투기에 대한 설명에서 노근리 피난민을 공격한 전투기로 1952년 첫 비행을 했다고 안내판에 적혀있다. F86 전투기는 1949년에 시험비행에 성공한 이후 미 공군에 도입된 전투기였다. 1952년에 첫 비행을 한 전투기가 어떻게 1950년에 피난민을 공격할 수 있단 말인가? 노근리 평화기념관을 둘러본 후 2층의 기념관 사무실을 찾아 F86 전투기의 안내판 설명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니 영동군에서 예산이 나와야 바꿀 수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나와 중딩 딸은 얼른 군 예산이 책정되기를 기원하며 기념관 사무실을 나와 총탄자국이 남아있는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쌍굴 다리로 향했다. 노근리 평화 공원은 안보전시장이 아니다. 전쟁이란 비인간적 살상행위가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평화를 가르치고 염원하는 곳이어야 한다.

이승만의 2차 줄행랑, 어처구니 없는 역사들

다시 1950년의 시공간으로 돌아가 보자. 서울을 버린 정부는 대전에 임시수도를 정하고 자리를 잡았지만 들려오는 전황은 절망적이었다. 7월 1일 새벽 3시, 대통령 이승만은 비서 황규면이 깨우는 틈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란체스카의 일기에 따르면 국방장관과 해임된 채병덕을 대신한 정일권 육군참모총장도 있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의 피신이 결정된다. 서울을 버린 지 불과 4일 만에 대통령은 또 줄행랑을 친다.

대통령 일행은 지프 3대를 동원했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경호책임자 김장홍 총경이 한 차에 올랐다. 대통령 비서 황규면과 프란체스카의 비서 김옥자, 공보처장 이철언이 또 다른 지프에 올랐다. 나머지 한 대에는 경호경찰 4명이 탑승했다. 아무리 전시라도 한 나라의 대통령이 피신하는 모양새로서는 형편없는 꼴이었다. 행색으로 보아 대전 탈출 또한 비밀리에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폭우 속에 무작정 목포를 향해 달리던 대통령을 태운 지프는 험난한 도로사정으로 고전 끝에 아침 8시가 되어서야 지금은 익산역으로 이름이 바뀐 이리역에 도착했다. 그나마 경호관들을 태운 차는 고장으로 한 참 뒤에 쳐져 있었다.

대통령 비서 황규면이 이리역장에게 목포행 특별열차를 요구했다. 이리 역장은 전시이기 때문에 교통부장관 명령 없이는 열차를 준비할 수 없다고 버텼다. 황규면 비서는 대전의 교통부장관을 전화로 불러서야 이리역에서 목포행 피난열차를 구할 수 있었다. 간단한 요기를 마친 대통령 일행은 열차를 타고 목포로 향했고 오후 1시 40분경 목포역에 도착했다. 경호책임자 김장홍 총경은 목포경비사령부를 찾아가 사령관 정경모 대령을 만났다. 김 총경은 대통령을 부산으로 모셔야 하니 시급히 배를 내달라고 요구했다. 사전연락도 없이 갑자기 대통령을 모셔야 한다는 총경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정 사령관은 대통령과의 직접대면을 요구했다. 이런 해프닝만 보더라도 대통령의 피신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목포경비사령부에서 마련한 해군함정을 탄 이승만 일행은 7월 2일 오전 11시 30분, 최종 목적지였던 부산에 도착했다. 드라마틱한 탈출에 성공해 안전지대에 도착한 이승만은 비로소 안심을 했다.

새벽잠까지 설치며 나선 대전 탈출의 근거는 적이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는 첩보였는데 터무니없는 정보였다. 난국 속에 오합지졸이 된 정부는 난무 하는 소문과 정확한 정보를 거를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7월 1일은 아직 한강을 두고 방어선을 친 국군과 인민군이 공방을 벌이던 시기였다. 인민군이 7월 초에 대전까지 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음날 대통령이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된 대전의 주요 정부 요인들도 대통령을 따라서 도망쳤다. 그러나 아직 인민군이 멀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떠났던 정부 관계자들은 주섬주섬 다시 대전으로 복귀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오직 대통령 이승만만큼은 대전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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