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일 트위터에 메르스를 언급한 글은 무려 37만 건이 넘었습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다음날인 4월 17일 세월호 언급량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입니다. 메르스를 언급한 글이 초당 4.4개나 유통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추세는 3일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해시태그 캠페인 등을 제외하면 일일 언급량으로는 빅데이터 관측사상 최대 규모입니다. 사실상 온국민이 메르스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봐도 될 정도입니다. 참고로 특정 키워드의 트위터 언급량이 하루 3만 건을 넘으면 거의 모든 언론의 톱뉴스가 됩니다. 10만 건 이상이면 매우 지배적인 뉴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국가재난 상황 수수방관하는 정부
그런데 정부와 청와대는 상대적으로 조용했습니다. 너무 조용했습니다. 확진환자가 속출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회법 개정에 따른 여의도 때리기에만 골몰했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지요. 박근혜 대통령은 마치 제3자인 듯한 어투로 "초기대응에 미숙한 점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유체이탈'이라는 말도 지겹습니다.
교육부가 일선학교에 보냈다는 공문은 점입가경이었습니다. 덜 익은 낙타고기를 먹지 말라고 했다지요. 그래서 나온 신조어가 어리둥절을 빗댄 '낙리둥절'입니다. 지난 1주일 동안 트위터에서 낙타는 15만 건, 낙리둥절은 5000건 이상 언급됐습니다. 이 또한 기이한 일입니다. @girin******님이 올린 "서울대공원 동물원 낙타 격리.jpg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몽골산 김치쌍봉낙타 낙리둥절 중"이라는 글은 5000회 이상 리트윗됐습니다. '낙무룩'이라는 신조어도 나왔습니다. @llap********님이 올린 "낙타 고기를 먹기는커녕 낙타라는 단어를 타이핑하는 게 거의 6개월 만이다. 유니콘 타고 명동가지 말란 소리 하고 있네 아"라고 한탄해 4000여회 리트윗을 기록했습니다. 이 밖에도 "진짜 정부가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끔찍하다 오늘도 낙타 타고 강남 갈 뻔했어" "여러분의 낙타에 대한 미움은 제가 다 짊어지고 가겠습낙타..." 같은 패러디 트윗이 타임라인을 가득 채웠습니다.
메르스 리더십, 카트리나 모멘트?
박근혜 대통령은 메르스 확진 환자가 발생한 지 무려 14일 만에 민관합동회의를 주재했습니다. 치사율이 매우 높은 감염병에 대해 2주일 동안 사실상 무정부 상태를 만든 셈입니다. 그동안 정부는 무책임한 대응으로 오히려 화를 키웠죠.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마스크가 필요없다고 했다가 이렇다 할 해명도 없이 마스크를 쓰고 나타나는 식이었습니다. 최경환 부총리는 괴담 유포자를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해외로 떠났습니다. 정부는 처음에 공기감염이 괴담이라고 했습니다. 질병관리본부도 공기감염은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런데 세계보건기구(WHO)에서 공기감염 여부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고 했습니다. 메르스 바이러스를 처음 발견한 알리 모하메드 자키 박사는 바이러스 입자들이 공기 중에 떠다닐 수 있고 특히 폐쇄된 공간에서는 공기전파가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에서 3차감염 환자가 발생한 뒤로 공기감염 가능성은 공포로 바뀌었습니다. 더 자세한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괴담은 SNS가 아니라 공기감염이 불가능하다던 정부가 퍼뜨린 셈이 된 겁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법 갖고 온갖 짜증을 내다가 여수에서 열린 창조경제 행사에 밝은 모습으로 참석했습니다. 감염자 숫자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 나라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카트리나 모멘트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레시안>의 박세열 기자가 '메르스 모멘트'라는 표현으로 박근혜 리더십을 걱정하는 기사를 썼죠. 2005년 8월말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해 25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대형 재난사건이 발생합니다. 부시 대통령은 4일이 지나서야 현장을 방문했고 이재민 캠프는 들르지도 않았습니다. 정부의 대응은 엉망진창이었죠. 당시 뉴올리언스는 살인과 성폭행, 폭력이 난무하는 무법천지로 바뀌었습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90퍼센트까지 치솟았던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은 38%까지 곤두박질칩니다. 부시 대통령의 이미지는 '정직'에서 '무능'으로 추락했고 2008년 대선에서 오바마에게 대패합니다.
카트리나 모멘트는 대형재난 같은 결정적 사건으로 지지율이 급락하는 사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반면 오바마 대통령은 2012년 10월 발생한 허리케인 샌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재선에 성공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10월 27일 선거 운동을 중단하고 백악관으로 복귀해 재난 대응을 지휘했습니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강력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부각한 것이죠. 물론 단지 허리케인 때문에 선거결과가 바뀌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똑같은 재난 앞에서 보인 두 대통령의 리더십은 사뭇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의 핵심은 생명에 대한 공감 여부입니다.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이 우러나와야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박 기자가 썼듯이 지난 2003년 4월 29일, 국내에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추정 환자가 처음 발생했을 때 노무현 정부의 대응도 침착했습니다. "고건 당시 국무총리는 다음날 김화중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사스 관련자의 격리, 치료를 위해 사스 집단치료 전담병원 및 연수시설 등 공공시설을 이용한 격리시설을 시도마다 1개씩 조속한 시일 내에 확보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번에는 손석희 앵커의 말을 빌려볼까요? "2009년 신종플루 유행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추정환자 발생 당일 중앙인플루엔자대책본부가 설치됐고 총리 교체시기였지만 한승수, 정운찬 총리가 일일이 상황을 점검하는 체계가 즉시 구축됐습니다." 이명박 정부도 재난 매뉴얼을 지켰습니다.
부시‧박근혜 "안보는 초특급, 재난은 완행"
그런데 이번 경우엔 확진환자가 발생한 뒤 2주일 만에 이른바 컨트롤타워가 만들어졌습니다. 세월호 참사 때는 청와대는 컨트롤타워가 아니라는 말까지 나왔으니 발전했다고 평가해야 할까요? 국민들은 이미 엄청난 공포에 빠졌습니다. 거리의 마스크들만 봐도 공포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아직도 휴교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은 박 대통령을 향해 "첫번째 환자가 죽는 날(20일) 청와대는 뭐했냐. 국회법을 못 받아들이겠다고 했다"며 "지금이야말로 당정청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메르스 확산 방지를 위해, 국민 불안 해소 등 종합적으로 해결해야 할 시기인데 청와대가 앞장서서 정쟁을 유발하는 발언이나 계속 쏟아내고 있다"고 맹비난했습니다. 정병국 의원은 '제2의 세월호 참사'라고 했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의원도 "메르스 사망자 2명으로. 또 골든타임 놓친 정권"이라며 "국민이 죽어가고 해외에선 한국이 그것밖에 안되냐는 비판 거센데 박근혜 정권은 반성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북한발 안보 이슈에 대해서는 광속으로 대응하면서 국민 생명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늑장대응으로 일관하는 것이 9.11테러엔 민감하면서 카트리나에는 무심했던 부시 대통령을 꼭 빼닮았습니다. 당시 부시 대통령도 "브라우니, 당신은 일을 아주 엉망으로 했어"라는 말을 해 브라운 연방재난관리청장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유체이탈' 화법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2005년 촘스키 교수는 한 칼럼에서 "시민의 희망과 시민을 위한 서비스는 홍수(카트리나)와 같이 묻혀버린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 우리 상황에 빗대 해석하자면 "국민의 생명과 국민을 위한 봉사는 바이러스와 함께 감염된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2005년 당시 카트리나를 다룬 영국의 한 TV방송 자막이 SNS를 타고 급속도로 퍼진 적이 있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는 가운데 '부시: 미국을 강타한 가장 큰 재난 중 하나'라는 자막이 뜬 것입니다. 물론, 부시 "(카트리나는) 미국을 강타한 가장 큰 재난 중 하나", 라는 뜻이었는데 따옴표가 빠져서 생긴 해프닝으로 밝혀졌지만 많은 여운을 남긴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는 박근혜 대통령이 메르스 사태를 잘 수습해서 국민들이 편안한 일상생활로 돌아가길 원하지 결코 대통령 자체가 재난이 되길 원하지 않습니다.
첨언: 새정치민주연합 워크숍은 적절했나
길어졌지만 한마디 덧붙이겠습니다.
6월 2,3일 새정치민주연합이 가나안농군학교에서 1박2일 동안 의원 워크숍을 다녀왔죠. 행사내용에 대해 왈가왈부 할 생각은 없지만, 아무리 당내 사정이 급하다고 해도 메르스 한복판에서 그런 워크숍을 강행해야 했을까요? 대통령 책임이 크긴 하지만 책임을 모두 대통령만 져야 하는 걸까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공포에 빠진 국민의 마음과 함께하면 안 되는 거였을까요?
국민의 관심이 클 때 감동적인 메시지가 나오는 법입니다. 또 잘 전파되죠. 그런데 세월호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그런 야당발 메시지는 없는 것 같습니다. 국민의 아픔을 공감하고 현장에서 그들과 함께해야 정부에 대한 비판도 더 호소력이 생기지 않을까요? 실제로 이기고 결과에서 졌던 엘 고어가 정치적으로 재기한 계기도 카트리나 때였습니다. 전직 부통령 명의로 구조헬기를 급파, 수백 명의 인명을 구조해 국민들에게 감동을 준 거죠.
국민의 아픔을 존중하고 함께 느끼는 공감능력, 여야를 떠나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이 키워야 할 시급한 덕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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