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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사의 시대, 그래서 더 빛나는 SK 김용희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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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사의 시대, 그래서 더 빛나는 SK 김용희의 ‘원칙’

[베이스볼 Lab.] SK 와이번스의 투수기용 7대 원칙

투수 혹사의 시대다. 1999년 이후 리그에서 사라졌던 ‘규정이닝 불펜투수’가 다시 등장했다. 중간계투와 마무리를 겸하는 ‘중무리’가 성행한다. 3일 연속 투구는 기본에 2연투 뒤 하루 쉬고 다시 연투하는 투수, 한 시리즈에 두 차례 선발등판하는 투수까지 나온다. 혹사는 ‘팀 사정상 어쩔 수 없다’거나 ‘다 비법이 있다’는 궤변으로 정당화된다. 연투 후 당연히 줘야 할 휴식도 무슨 대단한 결심을 한 것처럼 포장된다. 혹사가 성적을 낳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 탓인지, 아무도 혹사를 혹사라 하지 못하고 눈치들만 본다. 하지만 누가 뭐라든 혹사는 혹사다. 태풍과 지진을 그럴듯한 다른 말로 표현한다고 피해가 사라지는 게 아니듯, 혹사를 아무리 포장해도 피해는 고스란히 돌아온다. 선수와 팀과 나중에는 리그 전체에.


이렇게 혹사가 일상이 된 시대. 변칙이 원칙을 이기고, 비상식이 상식보다 나은 것처럼 포장하는 시대에 원칙을 지키며 야구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고약한 환경 속에서도, 시즌 4분의 1을 치른 지금까지 꿋꿋하게 처음의 원칙을 지켜가는 감독과 구단이 있다. 김용희 감독이 이끄는 SK 와이번스가 대표적이다.


김용희 감독은 취임 이후 줄곧 ‘시스템 야구’를 강조했다. 이를 위해 시즌 전 현장과 구단이 머리를 맞대고 선수단 운영 방향을 논의했고 선수 기용의 원칙을 세웠다. SK 시스템 야구는 투수 기용은 물론 야수 기용, 수비 훈련, 유망주 육성 등 거의 모든 영역을 망라한다. 그리고 이런 원칙을 통해 SK는 이번 시즌 성적은 물론 팀의 미래까지 함께 손에 넣고 있는 중이다. 이 중 가장 가시적인 성과로 드러나고 있는 투수 기용 원칙을 살펴보자.

▲SK의 시스템 야구를 이끄는 김용희 감독. ⓒSK와이번스

3연투는 없다


불펜투수에게 연투는 독이다. 야구계는 100년 넘는 역사 동안 숱한 시행착오 끝에 연투는 가급적 삼가야 한다는 것과, 연투 후에는 반드시 휴식이 주어져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특히 3일 연속 마운드에 오르는 ‘3연투’는 더 위험하다. 이 점에서 올 시즌 몇몇 팀이 3연투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는 건 크게 우려되는 대목이다.


SK 와이번스는 올 시즌 리그에서 가장 3연투가 적은 구단이다. 3연투는 단 한 차례, 전유수가 5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 연속 등판해 던진 기록이 유일하다. 당시 전유수는 8일 12구, 9일 15구, 10일 5구를 던졌다. 그리고 11일부터 13일까지 내리 사흘을 쉬었다. 이 단 한 차례를 제외하면, SK 불펜투수들은 이틀 연속 투구 후에는 반드시 하루 이상 휴식을 취하고 있다.

30구 이상 던지면 다음날은 쉰다


불펜투수는 짧은 이닝을 적은 투구수로 막아내는 게 임무다. 긴 이닝, 많은 공을 던지는 데 익숙치않다. 올 시즌 SK 불펜투수가 한 경기 30구 이상 투구한 건 총 18차례. 이 중 채병용(2회), 박종훈(2회), 백인식(2회), 고효준(4회)은 선발투수가 일찍 물러난 경기에서 긴 이닝을 책임지는 롱릴리프 역할이다. 그 외의 불펜투수들은 좀처럼 30구 이상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 전유수가 3차례, 윤길현이 2차례, 문광은-이재영-서진용이 각각 1차례씩 기록했다.


중요한 건 30구 이상 던진 다음날 마운드에 등판했는지 여부다. SK 불펜투수가 30구 이상 던지고 다음날 연투한 사례는 13일까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모두 하루 이상 휴식일을 받았다. 30구 이상 투구 후 SK 불펜진의 평균 휴식일은 4.36일에 달한다. 이 원칙은 백인식이 5월 13일 34구, 14일 35구를 던지면서 처음 엇나갔다. 13일과 14일은 SK 선발투수 윤희상과 김광현이 5회를 채우지 못하고 조기 강판된 경기다.

‘중무리’는 없다


중간계투와 마무리의 합성어인 ‘중무리’는 올해 KBO리그에서 트렌드가 됐다. 분명 보직은 마무리인데 9회가 아닌 7, 8회부터 마운드에 오른다. ‘불펜 에이스는 7, 8회 가장 중요한 상황에 올려야 한다’는 세이버메트리션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일까. 하지만 세이버쟁이들이 7회에 등판한 불펜 에이스를 9회에도 계속 올리라고 한 적은 없다. 가장 급한 상황을 에이스로 틀어막고, 9회 주자없는 세이브 상황에는 그보다 한 등급 낮은 투수로 막으면 된다는 주장이었다.


올 시즌 국내 마무리들은 7, 8회에 등판하는 게 일상이 됐다. 그 사이 팀의 추가득점으로 점수차가 4점 이상 벌어져도 9회에도 계속 던진다. 이렇게 이기는 건 감독 능력이 아니다. 가장 잘 하는 선수 외에는 활용할 줄 모르는 감독의 무능을 선수의 능력으로 가려준 것에 가깝다. 마무리투수에게 '아웃카운트 4개 이상 세이브'는 큰 부담이다. 많은 공을 던지는 육체적 부담도 크지만, 위기를 막은 뒤 새로운 이닝을 다시 막는다는 게 정신적으로 큰 부담을 준다. 1이닝 세 타자를 하나-둘-셋 잡아내고 경기를 끝내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중무리 파격 기용은 말 그대로 ‘파격’에서 끝내야 한다. 일상이 되서는 곤란하다.


SK 와이번스는 중무리가 없는 팀이다. SK 불펜에서 가장 뛰어난 투수는 마무리 윤길현과 셋업맨 정우람. 정말 1경기를 꼭 이기고 싶다면 정우람을 6회에 투입해 2이닝을 막고, 윤길현을 8회 올려 마무리하면 된다. 그러면 당장 1승은 할 수 있다. SK 김용희 감독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한 번 이기면, 나중에는 투수들에게 큰 부담으로 돌아온다. 눈앞의 1승 올리려다 나중에 더 많은 경기를 놓치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SK는 윤길현과 정우람의 투구이닝을 철저하게 조절하고 있다. 두 투수가 올 시즌 한 경기에서 잡은 아웃카운트는 4개가 최다. 윤길현과 정우람은 아직 1.1이닝 초과투구가 한 번도 없다. 정우람은 5년전인 2010년 75번 등판 중 31번이나 1.2이닝 이상을 던졌던 투수다.

불펜투구도 투구다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와 던지면 기록이 남는다. 하지만 불펜에서 몸을 푼 사실은 따로 기록이 남지 않는다. 타자를 앞에 두고 던지는 것만 힘든 일이 아니다. 불펜에서 장시간 대기하면서 몸을 풀고, 불펜피칭을 하고, 어깨를 식혔다 다시 팔을 풀고, 언제 등판해야 할지 마음 졸이며 기다리는 것도 만만찮은 피로를 준다. 누적되면 큰 부담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표면적인 기록만 보면 불펜투수가 실제로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정확한 지표가 나와있지는 않지만, 올 시즌 SK 경기를 지켜보면 투수의 불펜 피칭도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우선 투수가 경기 초반부터 불펜에서 대기하는 일이 거의 없다. 혹시라도 경기 초반 몸을 푼 투수는 경기 후반까지 불펜에 두지 않는다. 한 번 몸을 푼 투수가 다시 몸을 풀면, 그날은 반드시 등판하거나 아예 불펜에서 빠지게 한다. SK 불펜을 유심히 살펴봤다면, 불펜에서 계속 대기하다 막상 경기에는 나오지 않은 투수는 다음날 경기에도 등판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경기 시작부터 스파이크를 신은 채 불펜에서 대기하면서 여러 차례 몸을 풀게 하는 일부 팀과는 정반대다.

연패에도 무리수는 없다


원칙은 종종 현실 앞에 힘을 잃는다. 원칙을 지키고 싶어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1승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자칫 연패의 늪에라도 빠지면 구단 고위층의 압박과 매스컴의 질타, 팬들의 비난이 곧았던 원칙을 구부리고 분지른다. 어떤 상황에도 올곧은 소신은 감독의 능력 부족, 승부사 기질 결여라고 쉽게 폄하된다.


SK도 고비가 없었던 건 아니다. 지난 4월 21일부터 28일 사이, SK는 7경기에서 2승 5패에 그치는 심각한 부진을 겪었다. 특히 24일 한화전부터 28일 NC전까지는 4연패를 당하며 개막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보통은 이런 경우 투수를 당겨쓰거나, 선발을 불펜에 기용하는 식의 무리수가 나오기 쉽다. 불펜투수의 연투나 긴 이닝 투구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유혹에 빠질 가능성도 커진다. 이렇게 일시적인 위기를 모면하겠다고 급전을 당겨 쓰면, 나중에는 이자 폭탄으로 돌아온다.


팀이 부진한 기간에도 SK의 투수기용 원칙은 흔들리지 않았다. 선발투수는 로테이션을 로테이션을 지켰고, 불펜의 3연투나 불펜 에이스의 긴 이닝 투구도 없었다. 4연패 고비에 놓인 28일 NC전에서도 SK는 정우람을 마지막까지 아끼다 마운드에 올렸다. 당장의 1승을 위해 원칙을 버리고 무리수를 남발하는 일은 없었다. 결국 SK는 30일 마지막 날 경기에서 연패를 끊는데 성공했다. 9-3에서 NC가 7회 9-6까지 바짝 추격해왔지만, 정우람-윤길현의 조기 등판은 없었다. 이날 정우람은 1.1이닝 동안 10구를, 윤길현은 0.2이닝 동안 5구를 던지고 경기를 끝냈다.


5월 들어 SK는 10경기에서 7승 3패로 다시 질주하고 있다. 어느 팀이나 시즌을 치르다 보면 나쁠 때도 있고, 좋을 때도 있는 법이다.

선발투수는 100구 제한


SK의 투수 관리는 불펜투수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선발투수들도 철저한 관리 속에 보호받고 있다. 올 시즌 SK 선발투수가 한 경기 100구 이상 투구한 경기는 단 6경기 뿐. 에이스 김광현이 4차례 100구를 넘겼고 켈리와 채병용이 각각 1차례씩 기록했다. 한 경기 최다투구수는 5월 8일 경기에서 던진 114구로, 이날 김광현은 삼성을 상대로 7이닝 3피안타 1볼넷 무실점으로 시즌 최고 호투를 펼쳤다. SK 팀내 경기당 투구수 1위인 김광현-켈리는 평균 97개로 리그 전체에서 20위다. 리그 1위는 평균 112.3구를 던진 롯데 린드블럼이다.


혹시 SK 선발진이 형편없이 약해서 평균투구수가 적은 건 아닐까. 메릴 켈리는 6경기에서 평균자책 3.03으로 리그 5위에 올라 있고, 김광현과 윤희상도 각각 4.17과 4.43으로 평균자책점 15위와 16위다. 아직 규정이닝에는 들지 못했지만 채병용도 3.54로 좋은 평균자책점을 기록 중이다. 그럼 SK 김용희 감독이 ‘퀵 후크’를 즐기는, 선발을 못 믿는 감독이기 때문은 아닐까. 켈리는 6경기에서 평균 6.1이닝을 던지고 있으며 김광현도 평균 5.2이닝을, 채병용은 5.1이닝을 던지고 있다. SK 선발투수의 평균 투구이닝은 5.1이닝으로 리그 평균 수준에 속한다.


5일 휴식 선발등판은 기본


사실 올해 현재까지 SK의 선발투수진 사정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다. 메릴 켈리와 김광현이 좋은 피칭을 이어가고 있지만, 밴와트는 시즌 초반 부진과 부상 속에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윤희상이 최근 부상으로 1군에서 빠졌고, 5선발 자리는 아직도 테스트가 진행되는 중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로테이션을 조정해서, 에이스를 4일 휴식 후 선발로 다시 내는 유혹에 굴복할 만도 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SK 선발투수들은 철저한 5일 휴식 후 등판을 보장받고 있다.


14일 경기까지 SK에서 선발투수가 4일 쉬고 등판한 사례는 딱 3차례. 4월 7일과 12일에 등판한 김광현, 4월 21일과 26일에 등판한 켈리, 5월 5일과 10일에 나온 채병용이 전부다. 모두 로테이션을 당겨쓴 기용이 아닌, 화요일 경기 선발이 일요일에 다시 선발등판한 사례에 속한다. 여기서 가장 많은 공을 던진 건 김광현으로 4월 7일 101구를 던진 뒤 12일에는 100구를 던졌다. 잘 던지는 투수라고 계속해서 4일 휴식 등판을 시키다가 망가뜨리거나, 한 시리즈에 두 번 선발등판하는 기용은 SK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SK는 혹사 없이도 좋은 성적을 만들어 가고 있다. ⓒSK와이번스

올 시즌 투수 혹사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혹사를 옹호하는 쪽에서는 ‘팀마다 사정이 다르다’ ‘팀 사정상 어쩔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SK 와이번스라고 사정이 넉넉하고 팀 성적 부담이 없어서 원칙을 지키고 있는 건 아니다. 김용희 감독은 15년만에 현역에 복귀한 1년차 감독이다. 당연히 첫 시즌에 좋은 성적을 내야 할 이유가 있다. 또 SK 구단도 최근 2년간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기에, 이번 시즌에는 상위권에 들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는 팀이다. 지난 겨울 팀내 FA 선수들 잔류에 거액을 투자했고, 외국인 선수 영입에도 적지 않은 금액을 투자했기에 우승후보로 거론되는 상황. 시즌 초반부터 좋은 성적이 나지 않으면 초조한 게 당연하다. 야구에서 사정 없는 팀이나 감독은 없다. 핑계 없는 혹사도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SK와 김용희 감독은 시즌 전 세운 원칙을 흔들림 없이 지켜가고 있다. 혹사가 정당화되는 시대에도 철저하게 투수들을 보호하고 관리하며, 144경기 장기 레이스와 팀의 미래까지 생각하는 운영을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답은 현장과 프런트의 조화에 있다. SK 김용희 감독은 과거 롯데와 삼성 감독 시절에도 자율야구와 투수 분업화를 시도했다. 임창용을 처음으로 혹사하지 않고 관리하며 기용한 사령탑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지도자가 원칙과 소신이 있어도, 구단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과거 김용희 감독이 겪은 시행착오도 당장의 성적을 요구하는 구단의 압력, 선수단에 대한 지원 부족, 감독의 철학에 대한 이해 부재가 원인이었다. 반대로 아무리 구단에서 미래를 보고 장기적인 운영을 하려 해도, 현장에서 80년대식 기용으로 선수들을 혹사하면 풀 한 포기 남지 않는 폐허가 되기 마련이다.


지금 SK는 프런트가 앞장서서 김용희 감독의 야구관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현장과 구단이 충분한 대화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선수단 운영과 팀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함께 수립해서 실행에 옮기고 있다. 현장은 선수를 보호하고 싶은데 구단에서 흔들거나, 구단은 미래를 보려고 하는데 현장이 오늘만 보고 운영하는 엇박자는 볼 수 없다. 현장과 프런트가 같은 곳을 바라보며 힘을 합치는 이상적인 구단의 모습이다.


투수 혹사는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 아니다. 착한 혹사는 없다. 혹사에는 장사가 없다. 그리고 감독의 의지와 구단의 방향만 있다면, 혹사 없이도 얼마든지 좋은 성적을 내고 강한 팀을 꾸려갈 수 있다. KBO리그에서도 혹사 없는 투수진 운영이 가능하다. 이 당연한 사실을 올 시즌 SK 와이번스와 김용희 감독은 결과를 통해 증명해 가고 있다.


기록출처: www.baseball-la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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