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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 진정한 대화가 이뤄지려면?

[프레시안 books] 자본주의 이후 <5> 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더 이상 소개가 필요 없을 것 같은 책 하나를 오늘은 소개하려 한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 1961년에 나온 이 책은 그 직후에 역사학 공부를 시작한 우리 세대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상당한 영향력을 지키고 있다.

이 책을 새로 소개할 필요를 느끼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이 영향력에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도 강조한 내용의 하나가 역사를 보는 관점이 보는 사람에게 주어진 시대적-사회적 조건에 크게 좌우된다는 것이다. '역사'에는 과거에 있었던 일이란 뜻도 있고 그것을 공부하는 활동을 가리키는 뜻도(이쪽은 '역사학'이라고도 함) 있다. 카가 일차적으로 염두에 둔 '역사'는 앞쪽 의미였지만, 뒤쪽 의미, 즉 '역사학'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카(1892∼1982)는 이 책을 낸 지 21년 후에 죽었는데, 그전에 이 책의 개정판을 낼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죽은 후 그의 서재에서 발견된 개정판 원고는 서문뿐이었다. 20년을 지내면서 뭔가 고칠 필요를 스스로 느꼈지만 고칠 필요가 너무 컸기 때문에 작업을 진척시키지 못한 것 아닐까. 그로부터 30여 년이 더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 필요가 더욱 커졌을 것이다. 카가 무엇을 이야기했느냐보다 무엇을 이야기하지 못했느냐를 생각해 봐야겠다.

제1장 "역사가와 사실"에서 카는 19세기 역사학계, 특히 영국 역사학계에서 역사철학에 관한 논의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 무관심의 원인이 문명의 '진보'에 대한 자신감과 낙관주의에 있었다고 설명했다. 20세기에 들어와 이탈리아의 베네디토 크로체(1866∼1952)가 비로소 본격적 역사철학을 제기한 것은 문명의 장래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된 결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2장 "사회와 개인"에서는 독일의 프리드리히 마이네케(1862∼1954)의 생애를 통한 관점 변화를 지적했다. 그의 대표작 <세계 시민주의와 민족국가>(1907), <국가적 이상의 개념>(1925), <역사주의의 성립>(1936)과 <독일의 파국>(1946)에서 보여준 관점이 모두 그 시점에서 독일이 처한 상황에 영향 받았다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역사가의 관점 변화는 당연한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사실 과거 50년간 천지가 뒤바뀔 만한 사건을 겪어 왔으면서도 자신의 견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고 진실로 주장하는 역사가가 있다 해도 저는 그 사람을 부러워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역사가의 연구가,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사회를 얼마나 정확히 반영해 낼 것인지 보여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사회적 흐름 속에 있는 것은 비단 사건만이 아닙니다. 역사가 자신도 그 흐름 속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역사책을 집어들 때 표지에 인쇄된 저자의 이름을 찾아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출간일자나 집필 시기를 아울러 눈여겨봐야 합니다.

여기서 "과거 50년간"이란 20세기 초부터 카가 이 말을 할 때까지의 기간을 말하는 것이다. 유럽인에게는 그 사이의 두 차례 세계대전이 "천지가 뒤바뀔 만한" 사건이었다. 그 과정에서 세계패권을 상실한 영국 시민에게는 그 변화가 더욱 크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1910년에 한국은 식민지가 되었고, 1945년 '해방'을 맞았지만 식민지가 되던 당시와 상황의 큰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민족국가를 회복하지 못했고,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에 대한 압력은 해방 전 일본의 압력보다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1910년에서 1960년 사이의 50년은 한국인에게 그 앞의 50년보다 훨씬 변화가 작은 시기였다.

같은 50년의 기간이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크기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류사회 전체를 놓고 본다면 <역사가 무엇인가?>가 나온 후의 50년 동안 그전의 50년에 비해 훨씬 더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나는 본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1963)을 계기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사람들의 의식에 떠오르게 되었다. 계몽주의시대 이래 처음 일어난 일이다. 이에 따라 문명과 역사의 의미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카는 19세기에 중세사 연구가 활발하지 않았던 사실도 지적했다. 중세의 미신적 신앙과 야만성에 관해 생각하기조차 싫어했다는 것은 진보에 대한 낙관 때문이었다며 그런 터무니없는 낙관에서 벗어난 것을 카는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이제, 과연 카가 그 터무니없는 낙관에서 제대로 벗어난 것이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왜 '대화'를 말했나?

ⓒ아름다운날
이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이 말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끝없는 대화"란 말. 그런데 이 말의 뜻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지금 펼쳐놓고 있는 번역본에도 "끝없는" 대화가 아니라 "끊임없는 대화"로 되어 있다.

카가 쓴 말은 "unending dialogue"다. 완결될 수 없는 성격의 대화라는 뜻이다. 그에 앞서서 "continuous process"란 말도 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가 중점을 둔 뜻은 대화의 연속성이 아니라 그 비완결성, 과정으로서의 성격에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중 유럽에서 틀을 잡은 '근대역사학'에 이 대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근대인의 오만'이 대화를 거부하거나 소홀히 하게 만들었다.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 때문에 더 많이 진보한 현재가 덜 진보한 과거를 깔보게 된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도 의미 있는 대화가 이뤄지려면 서로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은가? 현재가 과거를 깔보는 자세로는 대화에 한계를 피할 수 없다.

카가 '대화'를 내세운 것은 근대역사학의 '불통'을 반성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 반성이 진지한 것이었다고 인정한다. 이 말을 한 것은 19세기 중엽 이래 근대역사학을 지배해 온 실증주의(positivism) 비판의 맥락에서였다. "과거의 사실이 스스로 말하게 한다"는 실증주의는 오늘의 역사가가 역사적 사실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어느 역사가도 역사적 사실의 인식에서 주관을 벗어날 수 없다고 인정한 카의 입장에는 오만에 대한 반성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반성의 의미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과거와의 대화에 나서는 '현재'의 의미에 대해 제4장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끝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러분에게 그동안 써 왔던 보잘것없는 속임수 하나를 솔직히 고백하겠습니다. (...) 저는 지금까지 "과거"와 "현재"라는 편리한 말을 끊임없이 사용해 왔습니다. 주지하다시피 "현재"란 과거와 미래를 갈라놓는 가공의 선이라는 관념적인 존재에 불과합니다.

현재를 운운하면서도 저는 이미 현재와는 다른 시간적인 차원을 논의 속에 몰래 집어넣어 왔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모두 동일한 시간개념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과거에 대한 관심과 미래에 대한 관심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카는 시간을 직선으로 보는 뉴튼적(Newtonian) 시간관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간관에서 과거와 미래는 길이를 가진 선분이지만 현재는 길이가 없는 하나의 점일 뿐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현재는 과거와 대화 상대가 되지 못한다. 카가 생각한 대화는 사실 과거와 미래 사이의 대화였고, 현재의 역사가가 미래를 대표한다는 것이었다.

현재가 과거를 '지배'하던 19세기 역사학을 반성한다며 '대화'를 내세웠지만, 카의 본심은 과거를 내려다보던 위치에 그대로 있었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19세기의 신앙이 씻겨 내려가는 1961년 시점에서 카는 19세기인의 "순진한" 세계관을 비웃으면서도 사실은 그 세계관의 정수를 지키려고 버티는 입장이었다.

제3장 "역사와 과학과 도덕"에서 카는 역사학이 과학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제4장 "역사에서의 인과관계"에서는 역사학이 우연성을 무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제6장 "진보로서의 역사"에서는 역사도 진보하고 역사학도 진보한다는 믿음을 보였다. 그는 투철한 진보주의자였다. 다만 1961년 시점에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수정판 진보사관을 그려낸 것이었다.

카가 생각한 '과학'이란?

<역사는 무엇인가?>는 역사철학을 논한 책인데도 저자는 엄격한 논리를 회피하는 태도를 종종 보인다. 제3장에서 역사학이 과학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도 그 주장의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는 대신 반대 주장, 즉 역사학이 과학이 아니라고 보는 주장의 근거를 반박하는 형식을 취한다. 그가 반박하는 대상은 이런 명제들이다.

(1) 역사는 주로 특수한 것을 다루고, 과학은 일반적인 것을 다룬다.
(2) 역사는 어떤 교훈도 가르치지 않는다.
(3) 역사는 예견할 수 없다.
(4) 역사는 인간이 인간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다.
(5) 역사는 과학과 달리 종교 및 도덕상의 문제를 내포한다.

이 명제들의 반박 중에는 납득이 되는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반박이 유효하다 해도 역사학이 과학이어야 한다는 카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애매하다. 이 논의의 말미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구제책은 우리 역사의 수준을 높이는 것입니다. 즉 역사를 더욱 과학적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요구를 더 엄격히 하는 것입니다.

역사학의 연구방법을 엄밀하게 할 필요를 주장한다 해서 거기에 '과학'이란 이름을 꼭 붙일 필요가 있는가? 엄밀성의 기준 외에 '과학'의 정의를 그가 분명히 제시하는 것이 없다. 존 베리(1861∼1927)가 1903년에 "역사는 과학이며,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말한 것을 놓고 카는 이렇게 말했다.

이 시기(1930년대)에 베리의 의견은 조롱할 때나 쓰일 뿐 거의 인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역사가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과학 자체도 급격한 혁명을 겪었기 때문에 베리의 견해는 비록 틀렸다 해도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옳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1903년이면 과학에 대한 신앙이 아직 굳건할 때였다. 그때의 역사학자는 아무 불안감 없이 자신이 과학자라고 말했다. 1930년대에는 이것이 조롱거리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1961년 시점에서 카는 은근히 베리를 두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근거로 과학 자체가 큰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을 제시하지만, 베리가 생각한 과학과 자기가 생각하는 과학의 차이를 명확히 보여주지는 않는다. 19세기 사람들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인류 최고의 활동"으로 생각하던 과학의 개념이 카에게는 그대로 지켜지고 있었던 것이다.

카가 당시 영국 역사학계의 주류 인사가 아니었다는 점이 이 책의 논조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외교관과 언론인으로 많이 활동했고, 중년의 학술활동도 역사학보다 국제관계학 쪽이었다. 환갑 무렵부터 <소련사> 연구에 몰두하면서 '역사학자'를 표방하게 되었고, 이 책에서도 '인문학'에 대한 깊은 반감을 보여준다. 역사학을 과학으로 규정해야 하는 근본적 동기가 여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논의는 인문학과 과학을 구별하려는 낡아빠진 편견이 반영된 것입니다. 이 편견에 따르면 인문학은 지배계급의 폭넓은 고양을 일컫는 것이며, 과학은 상위 계급의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기술자의 기능을 일컫는다는 것입니다. (...)

역사가 과학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 제가 이렇게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른바 '두 분화' 사이의 틈새를 정당화하고 영구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틈새는 영국 사회의 계급적 구조에 기초한 낡은 편견의 산물입니다.

포퍼와 벌린을 반박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있다고 주장한 제4장에서 카는 두 가지 비유를 크게 활용했다. 그 하나는 스미스 씨의 이상한 태도에 관한 것이다.

여러분이 하루의 일과를 시작할 때 종종 스미스와 만난다고 가정해봅시다. 여러분은 아마 날씨나 대학생활 등에 대해 상냥하긴 하지만 별 의미 없는 말로 스미스에게 인사를 건넬 것입니다. 스미스도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부드럽지만 별 의미 없는 말로 인사에 응하겠지요.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스미스가 보통 때처럼 여러분의 인사를 받는 대신 여러분의 외모나 성격에 대해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놀란 표정을 짓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이거야말로 스미스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확실한 증거군"이라거나, "인간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확실한 증거지"라는 식으로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 여러분은 스미스의 그런 행동에는 분명 무슨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스미스의 근거 없어 보이는 행동의 원인을 진단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 비유가 내게는 별로 와 닿지 않는다. 스미스 씨 정도의 해괴한 행태는 시정의 갑남을녀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재계와 정치계의 거물들도 일상적으로 보여주는 것 아닌가? 저런 인간들도 있나보다, 접어놓고 살아야지, 그런 행동의 원인을 다 이해하려 들다가는 머리에 쥐가 날 것이다. 칼 포퍼(1902∼1994)나 아이사야 벌린(1909∼1997) 같은 역사학자들이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입장을 취한 것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태를 너무 많이 본 결과였을 것 같다. 그런데 카는 그런 입장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는 여러분의 그런(행동의 원인을 진단하려는) 노력이 아이사야 벌린 경의 분노를 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벌린 경의 말대로라면, 여러분은 스미스의 행동을 인과적으로 설명함으로써 헤겔과 마르크스의 결정론적 전제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셈이 되었으며, 결국에 가서는 스미스를 비열한 인간이라고 비난해야 할 여러분의 의무를 게을리 한 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이런 식의 견해를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고 또 결정론인가, 도덕적 책임인가 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아무도 없을 것이라니? 나부터 그렇고 안 그러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 비유의 약점이다. 카가 1961년의 영국에서 기대한 청중의 반응을 2015년의 세상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사건의 여러 주변조건 중에서 '진정한' 원인을 가려내는 기준이 '일반화'가 가능한지 여부에 있다는 주장을 담은 또 하나의 비유는 훨씬 설득력이 있다. 존스 씨가 모는 차에 로빈슨 씨가 치어 죽은 사건을 예시한 것이다. 로빈슨 씨는 밤중에 담배 사러 나온 길이었고, 존스 씨는 술에 취해 있었으며, 존스 씨의 차는 브레이크에 결함이 있었고, 사고 장소는 길이 급하게 구부러진 곳이었다고 한다.

음주운전 단속을 강화하고 차량정비 점검을 엄격하게 하고 위험한 도로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이런 사고를 막기 위한 적절한 조치이지, 담배의 야간 판매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고 카는 지적한다. 담배 사러 가는 길이었다는 것은 이 사고의 진정한 원인이 아니라 '우연'한 요소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되는 비유다.

하지만 비유의 힘에 기대어 논리의 허점을 얼버무리는 문제가 있다. 담뱃가게가 위험한 장소에만 위치해 있고, 오후 늦게 배달을 받아 밤중에만 품종이 제대로 갖춰져 있다면? 담배 판매방법을 개선하는 것도 로빈슨 씨와 같은 사고를 줄이기 위해 효과적인 대책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원인의 일반화는 특정한 맥락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 맥락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과신이다.

카가 질색을 하는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탐구다. 어떤 대상이나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이해도 탐구방법의 엄밀성을 통해 늘릴 수 있다. 그러나 적극적 탐구방법이 확보할 길이 없는 엄밀성에까지 집착한다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소극적 탐구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이해에도 미치지 못할 수 있다.

카가 생각하는 '과학'이란 적극적 탐구방법을 말하는 것 같다. 모든 인간사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가정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 인과관계를 인간의 이성으로 모두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이와 다른 것이다. 카가 이 교통사고의 비유에 덧붙인 말에서 포퍼와 벌린을 어떻게든 반박하려 하는 그의 의지를 알아볼 수 있다.

우리가 이처럼 실제적인 문제를 분분하게 논의하고 있는 곳으로 두 명의 저명한 신사가 (이름은 필요도 없을 것 같군요.) 뛰어 들어와서 "로빈슨이 담배만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길을 건너지 않았음은 물론 차에 치어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로빈슨의 담배에 대한 욕구가 그의 사망 원인이다. 이 원인을 무시한 조사는 시간 낭비이며, 여기서 나온 결론도 무의미하고 무익하다."는 식으로 우리를 향해 조리 있는 웅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가능한 한 신속히 이들의 조리 있는 웅변을 가로막고는 정중하고도 단호한 태도로 문 쪽으로 끌고 가 이 사람들을 두 번 다시 들여놓지 말라고 경비에게 당부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조사를 계속하겠지요.

[프레시안 북스 지난 호 바로 가기]

역사의 진보에 대한 카의 믿음

앞에서 카의 관점을 "수정판 진보사관"이라고 했다. 제6장에서 카는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거침없이 보여준다.

과거 200년 동안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역사가 일정한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 방향이 전적으로 옳은 것이며, 인류는 나쁜 상태에서 좋은 상태로, 낮은 상태에서 높은 상태로 진보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

이리하여 '존재'와 '당위', 그리고 '사실'과 '가치' 사이의 대립은 해소되었습니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압도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시대의 산물인 낙관적인 견해였습니다. 휘그당원이나 자유당 당원, 헤겔파나 마르크스파, 신학자나 합리주의자들 모두가 확고하고 명백하게 이런 견해를 받아들였습니다.

지난 200년 동안 위와 같은 견해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공인된, 절대적인 답변으로 통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불안과 비관주의라는 현세적 분위기와 함께 이러한 대답에 대한 반발이 나타났고, 그 결과 역사의 의미를 역사 밖에서 구하는 신학자들이나, 역사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회의주의자들에게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존재'와 '당위'의 대립은 절대적이라든가, 해소될 수 없는 것이라든가, '가치'는 '사실'에서 도출될 수 없다는 식의 주장들이 여기저기서 지나치게 강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카는 1961년 당시 진보에 대한 믿음이 흐려진 "불안과 비관주의"를 일시적인 병리현상으로 보았고, 그 현상에 사로잡힌 포퍼와 벌린에게 경멸과 분노를 느꼈던 것이다. 낙관주의적 미래관이 건강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르네상스는 인간 중심의 세계와 이성의 우위와 같은 고전적인 관점을 회복했습니다. 게다가 고전적인 비관주의적 미래관을 버리는 대신 유대교적-기독교적 전통에서 나온 낙관주의적 미래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적대적이고 유해한 것으로 여겨지던 시간이 이제는 친근하고 창조적인 것으로 변했습니다. (...)

그 뒤를 이어서 근대 역사기술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계몽시대의 합리주의자들은 유대교적-기독교적인 목적론을 그대로 지켜가는 한편 그 목표를 세속화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역사적 과정 자체의 합리적인 성격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역사는 지상에서 인간 모습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진보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건강한 자세를 지켜나간다면 역사만이 아니라 역사학도 무한한 진보의 주체가 된다고 카는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퍼나 벌린처럼 "불안과 비관주의"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저는 지금 역사가가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해 단정적인 해답을 제시할 만한 위치에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1920년대의 역사가가 1880년대의 역사가보다는 비교적 더 객관적인 판단에 접근했을 것이라는 것, 오늘날의 역사가가 1920년대의 역사가보다는 더 객관적인 판단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는 것, 또한 2000년대의 역사가는 오늘날의 역사가보다 더 객관적인 판단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역사에서 객관성이 우리의 눈앞에 있는 어떤 고정불변의 판단 기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며, 또 그렇게 될 수도 없고, 오히려 미래 속에 있다가 역사의 과정이 진전함에 따라 전개되는 기준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미래가 우리 편"이라는 믿음을 가진 역사가는, 지금 당장은 만족할 만한 해답을 손에 넣지 못하고 있더라도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역사가의 판단에 객관성이 늘어나 왔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는다. 그래서 제1장에서 제시한 '대화'의 주체도 현재가 아닌 미래가 된다.

이런(지속적인 자세로 완전성과 객관성을 갖추고 역사를 쓰는) 역사가들은 과거와 미래를 장기적인 안목으로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역사가들은 과거를 다룰지라도 미래에 대한 이해에 접근해야만 비로소 진정한 역사를 다룰 수 있는 객관성에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번 강연에서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말씀드렸지만, 오히려 역사는 과거의 각종 사건들과 점진적으로 일어날 미래의 여러 가지 목적들과의 대화라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도,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을 골라내는 역사가의 선택도 새로운 목표가 점진적으로 나타남에 따라 진화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 카에게는 역사가의 중요한 자격인 것이다. 카 자신은 미래를 어떻게 내다보았는가?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변화의 추세를 읽는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안경을 쓰고 있다. 서로 다른 안경을 통해 서로 다른 미래를 바라보고 그 정당성을 주장한다면 역사 공부가 갈등을 줄여주기보다 늘려주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카 자신이 제2장 "사회와 개인"에서 "개인화의 증대"를 문명 발달의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읽은 데 나는 많은 불만을 느낀다.

인류학자들은 문명인에 비해서 원시인이 훨씬 더 사회적 존재로, 완전히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말합니다. (...) 복잡하고 발달된 사회에 비해 단순한 사회 쪽이 더 획일적입니다. 개인의 기술이나 직업의 다양성을 요구하는 정도가 적으며, 그런 기회도 훨씬 적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개인화의 증대란 발달된 현대 사회의 불가피한 산물입니다. 이러한 개인화 문제는 사회활동에 구석구석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

'소박한 개인주의'는 인간을 진보하게 한 기조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특정한 역사적 시기의 이데올로기를 매우 적절하게 분석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서 밝히고 싶은 것은 현대 사회의 발전에 수반되었던 개인화의 증대는, 문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정상적으로 나타나는 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근대사회에서 획일성이 크게 늘어났다고 본다. 1961년의 독자들은 몰라도 지금의 독자들 중에는 내 관점에 동의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고 믿는다. 생산 활동만을 놓고 보더라도 직업의 종류는 크게 늘어났지만, 직업에 종사하는 방식이 전형화되지 않았는가. 생활양식에 있어서도 인구의 대다수가 아파트에 거주하며 몇몇 가지 형태의 업소에서 소비생활의 대부분을 영위하는 세상이 되어 있지 않은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내용이 제한된 수의 매체에 지배당하는 상황도 "개인화의 증대"로 인정할 수 없다.

도덕성의 문명과 진보성의 문명

카가 역사학의 과학성을 주장한 또 하나의 논점은 도덕성이 역사서술의 기준에서 배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도덕관은 그가 속한 시간과 장소에 따라 빚어지는 것이므로 일반화의 기준이 될 만한 객관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잣대로 과거를 재단해서 안 된다는 것은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역사서술도 일종의 서술이므로 가치기준이 없을 수 없다. 카는 도덕성 대신 진보성을 기준으로 삼아야 과학적 역사학이 성립된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의 평가를 예로 들었다. 서방의 과학기술을 도입해서 농업국가 소련을 산업국가로 만드는 것이 스탈린 당시의 소련에게 진보의 과제였다고 본다면, 이 과제를 성취하기 위해 스탈린이 저지른 어떤 짓도 지도자로서 그의 위대성에 흠이 되지 않는다고 카는 주장했다. 20세기 초반의 중국에서도 공산화가 진보의 과제였기 때문에 공산혁명의 성공에 기여했는가 여부에 따라 그전의 모든 일을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카가 이런 말을 한 30년 후에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이 붕괴했다. 그때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을 말한 것은 이뤄질 진보가 모두 이뤄졌다는 뜻이었다. 후쿠야마가 생각한 진보는 카가 생각했던 진보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후쿠야마가 생각한 진보도 지금 사람들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이 되어 있다.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변해도 바뀌지 않는 진보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

카가 개정판 서문을 쓴 것은 공산권 붕괴의 10년 전이었다. 이 글에서 그는 진보에 대한 믿음이 흐려져 가는 현실을 개탄했다.

파괴와 붕괴만을 미래에서 바라보며 진보에 대한 믿음이나 인류의 향후 발전에 대한 전망을 잘못된 것이라고 치워 버리는 오늘날 회의감과 절망감의 풍조는 일종의 엘리티즘이라는 것이 내 결론이다. 이 위기 속에서 안정된 위치와 특권을 위협받는 사회적 엘리트집단과 과거에 다른 지역들을 당당하게 지배하던 위상이 무너지고 있는 엘리트국가들이 일으키는 풍조일 뿐이다. (위키피디아 "What is History"에서 재인용)

▲ E. H. 카.
카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도덕성에 대한 보통사람들의 태도와 성격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도덕성이 쇠퇴하는 현실 속에서도 도덕적 인간은 도덕성의 실현에 역사의 목적이 있다고 보는 것처럼 진보적 인간은 진보의 이념이 버림받는 현실 속에서도 궁극적 진보의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카에게는 진보에 대한 헌신이 바로 도덕성이었던 것이다. 각자가 속한 시간과 공간에 따라 내용이 좌우된다는 것은 진보나 도덕성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고 과연 도덕성에는 불변의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일까? 공자는 최고의 도덕적 가치로 자신이 받드는 '인(仁)'이 무엇인지 질문을 받았을 때 "차마 못하는 마음(不忍之心)"이라고 대답했다. 인간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갖추고 있는 자연스러운 품성을 내놓은 것은 최소한의 표현으로 최대한의 보편성을 확보하려는 뜻이다. 거의 모든 사람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낮은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의 어느 구성원도 벗어나지 못하는 도덕성의 그물을 만들려 한 것이다. 시간과 공간에 좌우되지 않는 보편적 도덕성의 확립이 그의 가르침이었다.

공자가 산정(刪定)한 <춘추(春秋)>를 모델로 한 유교사회의 역사서술은 도덕성의 관리에 첫 번째 목적을 두었다. "공자가 <춘추>를 산정하매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두려워 떨었다"는 말을 하고 '춘추필법(筆法)'이란 말도 한다. "작은 말에 큰 뜻을 담는다(微言大義)"는 말은 사실의 담백한 서술에도 도덕적 평가를 함축한다는 뜻이다.

과거사를 반추하는 일은 역사학이 학문의 모습을 갖추기 훨씬 전, 문명 초기부터 인간의 중요한 활동이었다. 문자 발생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부족사회에서 주술사의 푸닥거리는 부족이 겪어온 일, 부족이 배출한 뛰어난 인물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구성원의 결속력을 늘려주었다. 문자 발생 후에도 비슷한 목적을 위해 역사서술이 발전했다.

원시적 역사서술은 주관적 기준에 따랐다. 도덕성의 기준이 가변적이라고 카 같은 근대 서양인이 본 것은 이런 단계를 지목한 것이다. 그러나 공자 이후 중국의 역사서술은 보편성을 추구하는 원리를 채택했고, 그런 의미에서 학문이 된 것이다. 보편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근대역사학과 유교사회의 역사학이 같은 성격을 가진 것이다.

차이는 보편성 구현의 실체로 도덕성을 설정하느냐 진보성을 설정하느냐에 있고, 그것은 배경 문명의 성격에 달린 일이다. 중국문명이 도덕성을 중시한 것은 질서와 안정을 추구하는 자세가 일찍부터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 속에 나타나는 여러 형태 권력의 자의적 발동을 도덕성의 원리로 억제하는 데 중국문명의 지속성의 근거가 있었다.

서양 근대문명은 이와 달리 발전과 변화를 추구하는 경향이기 때문에 도덕성을 배척하고 진보성을 내세운 것이었다. 힘을 가진 세력이 질서의 원리에 제약받지 않고 변화를 추동해 나가도록 풀어주고 밀어주는 것이 진보주의 이념이었다. 역사의 추동력을 가진 세력을 자본가로 보느냐, 프롤레타리아로 보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자의적 판단에 달린 일이었다.

도덕성은 인간의 본성을 기준으로 설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합의는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노력을 기울이는 데 따라 수렴의 힘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반면 진보성에는 방향 설정의 확실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서로 다른 방향의 진보성을 추구하는 노력이 늘어날수록 사회의 갈등이 격화하게 되어 있다. 근대역사학이 분쟁의 심화나 강자 입장의 정당화에 쉽게 이용되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명의 안정성을 위한 인문학의 역할

19세기에 유럽에서 형성된 근대산업문명과 그를 배경으로 한 근대역사학이 20세기 세계를 풍미한 것을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으로 볼 수 있다.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룬 서유럽 열강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세계를 휩쓸자 여타 문명권의 학술과 사상까지 유럽의 '과학' 앞에 굴복한 것이다.

역사학의 전통을 비롯한 풍부한 학술과 사상의 자산을 가진 중국문명권의 항복은 군사력과 경제력의 열세 때문이었다. 20세기로 넘어오는 시점에서 의화단사건으로 청나라의 위기가 극대화되었을 때 중국 학술계에서는 '의고(疑古)'의 학풍이 일어났다. 상고시대에 관한 경전의 기록을 엄격한 비판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이 학풍은 전통적 학술과 사상을 포기하고 서양식 학문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뒤이어 중국 사상계를 휩쓴 신문화운동은 전통의 가치를 부정하는 풍조가 더욱 확장된 현상이었다.

서세동점 현상이 퇴조하고 있는 지금 전통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본다. 백 년 전 침략의 위기에 쫓기며 내버린 전통 중에 재활용이 필요한 것은 없을까?

서세동점의 물결이 일어나고 가라앉는 이치부터 살펴본다. 18세기까지 동아시아문명은 물질 측면에서도 유럽보다 우위를 지키고 있었다. 농업생산력도 우월하고 제조업 기술 수준도 앞서 있었다. 그런데 유럽인은 16세기 이후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미개 지역을 정복하고 천연자원과 노동력을 대거 수탈하면서 경제적 변화의 큰 흐름을 만들었다. 그 흐름이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대량생산 체제를 구축하는 산업혁명을 가져왔다.

산업혁명의 과정을 통해 '변화'를 무조건 숭상하고 '정체(停滯)'를 무조건 폄하하는 진보주의가 유럽을 풍미하게 되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는 데는 19세기 초에 나온 원자론이 도움이 되었다. 모든 물질의 근본 원리를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면 어떤 변화를 통해 마주치게 될 어떤 상황도 겁낼 필요가 없었다. 원자론은 또한 고립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본성을 억눌러줌으로써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유행에도 공헌했다.

물리학에서 운동량은 질량과 속도에 비례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문명의 변화 속도가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에 19세기의 '문명의 충돌'에서는 질량이 더 큰 문명도 유럽문명의 기세에 밀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19세기에 유럽문명이 보인 변화의 속도는 오래 유지될 수 없는 것이었다. 결정적 한계가 1970년대 이후 환경과 자원의 벽으로 확인되어 왔다. 그동안 유럽문명은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그리고 일본까지 끌어들여 '서양문명'으로 자라났으니 질량은 늘어난 셈이지만, 이제 변화의 속도가 너무 떨어져 운동량의 하락 국면에 들어섰다. (일본을 서양문명의 구성원으로 볼 것인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인종차별 시대의 남아프리카에서 일본인을 '백인'으로 분류한 것은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성공이 아니겠는가.)

서세동점 현상의 퇴조는 유럽-서양문명의 운동량 하락에 따른 것이다. 지난 3세기 동안 세계의 변화를 주도해 온 힘이 물러서고 나면 이제 세계의 진로를 어떻게 가늠할 것인가?

'과거와의 대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장면이다. 인간 이성의 궁극적 승리를 믿는 유럽-서양문명에서는 현재보다 덜 진보된 과거를 멸시하며 과거의 경험을 경시했다. 그 결과 인간 본성에서 벗어나는 행태가 만연해서 지금의 위기에 이른 것이다.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생각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 상황이라고 하지만 그 구성 요소가 모두 전에 없던 것은 아니다. 인류가 역사를 통해 겪어 온 온갖 상황에서 나타났던 여러 구성 요소들을 새로운 방법으로 조합함으로써 닥치는 상황의 대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거의 경험에서 교훈을 찾되 현재의 조건에 따른 약간의 조정을 가하는 것이 현명한 대응방법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안정된 시각이 필요하다. 아직도 근대문명에 절대적 가치를 두고 있는 뉴라이트는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한다. 뉴라이트가 옹호하는 신자유주의 노선에 끼워 맞춘 관점인데, 그런 편협한 관점으로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에 대한 안정적 시각이 불가능하다.

'인문학'이란 이름을 붙이든 말든 인간성의 고찰은 모든 고등문명에서 중요한 지적 활동이었다. 인간의 속성에 대한 광범위한 합의를 위한 노력 없이는 문명의 안정성을 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20세기의 유럽-서양문명에서 이 노력이 소홀했던 것은 농업문명에서 산업문명으로 옮겨가는 이행기의 특수한 조건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변화가 빠른 시기이기 때문에 안정성을 경시할 수 있었지만, 그런 특수조건은 오래 가지 않는다.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효과적 비판으로서 세계체제론이 1970년대에 제기된 것도 그 시점에 '문명의 위기'가 부각된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체제론의 핵심 이론가 중 하나인 죠반니 아리기(1937∼2009)는 마지막 역작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강진아 옮김, 길 펴냄)에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다음 단계에서 중국의 문명전통이 큰 역할을 맡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동아시아의 전통 역사학을 '복고주의'라 하여 진취적이지 못함을 흠잡곤 했다. 과거에만 매달려 미래를 내다볼 줄 모른다면 물론 학문의 역할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된 오늘의 위치에 자만심을 품고 옛사람들의 경험과 지혜를 무시하는 근대역사학의 오만으로는 '과거와의 대화'가 어렵다. 문명의 안정성에 공헌하는 역사학의 역할도 이뤄질 수 없다. 조그만 사건 하나를 놓고 "역사의 종말"을 외치는 경망도 이런 오만에서 나오는 것이다.

역사 공부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읽은 책의 하나가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였고 그의 현란한 논설에 마음이 사로잡혔다. 얼마 후 중국사를 전공으로 잡고 많은 중국 역사서를 읽으면서도 카가 말한 과학적 역사학에 이르지 못한 미숙한 서술이라고 낮춰보는 마음이 바닥에 깔려있었다. 40여 년이 지난 이제야 카에게 넘겨받은 편견으로 인해 인문학의 마음을 여는 데 장애를 겪었음을 반성한다. 새로운 눈으로 중국 역사서를 다시 읽으면서 인문학적 역사서술의 길을 다시 찾아보려 한다.

끝으로 번역에 대해 한마디. 이번 세밀한 검토를 위해 지교철 옮김, 아름다운날 펴냄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택한 것은 최근의 번역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무난한 번역이지만 깊은 의미를 옮기는 데서 다소 아쉬움을 느꼈다. 다른 번역본과 비교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독자들에게 권할 만한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고, 따라서 인용하는 대목에도 쪽수로 표시하지 않고 원서의 장 표시만 했다. 작은 책이기 때문에 어느 판본을 보더라도 장만 알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역자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내 생각에 따라 인용 내용을 바꾼 곳도 더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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