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타이어 광주공장에서 지게차로 타이어 원료를 나르는 비정규직 노동자 서경일(50) 씨는 세계노동절 125주년을 앞두고 법원으로부터 큰 선물을 하나 받았습니다. 금호타이어에서 생산직으로 일하는 노동자는 모두 금호타이어 정규직이라는 판결입니다.
지난 24일 광주고등법원 민사1부(재판장 최수환)는 금호타이어 사내하청 노동자 132명이 금호타이어를 상대로 낸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에서 사내하청 고용이 합법 도급이 아니라 불법 파견이라고 판결했습니다. 타이어 원재료를 하역하는 작업부터 생산한 타이어를 검사하고 포장하는 업무까지, 모든 공정이 '불법 파견'이라고 판결했습니다.
재판부가 금호타이어 사내하청의 업무가 도급이 아니라 파견이라고 판단한 근거는 "독자적으로 진행·완성시켜야 하는 '일'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기보다 세부작업에 필요한 단순한 '노무의 제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는 판단입니다.
법원은 금호타이어가 하청노동자들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업무수행 자체에 관하여 상당한 지휘·명령을 하였다고 봄이 상당하다"며 "작업 장소가 정규직의 작업 장소와 공간적으로 다소 떨어져있다는 사정만으로 이를 뒤집기 어렵다"고 명시했습니다.
재판부는 사내하청 노동자 132명이 일하고 있는 공정을 상세하고 꼼꼼하게 살펴 본 후 "협력업체가 독자적으로 작업을 진행할 여지가 거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2012년 7월 26일 광주지방법원은 정규직과 뒤섞여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요 근거로 합법적인 도급이라고 판결했는데, 2년9개월 만에 이를 바로잡은 것입니다.
금호타이어 생산직 = 불법파견 = 정규직
첫째, 금호타이어 판결은 자동차 부품회사의 첫 불법파견 판결입니다. 2010년 7월22일 현대차 사내하청은 정규직이라는 대법원 판결 이후 기아차, 한국GM, 쌍용차 등 완성차 4사에서 잇따라 불법파견 판결이 나왔지만, 자동차 부품사에서는 금호타이어를 제외하고는 소송이 제기된 적이 없었습니다.
둘째, 이번 판결은 현대와 기아차에 이어 대규모 사업장의 집단소송에서 전원이 불법파견을 인정받은 중요한 판결입니다. 2010년 7월 22일 현대차 사내하청은 정규직이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지만 사용자들은 '개인 판결'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이에 대해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014년 9월 18~19일 현대차 1179명, 9월 25일 기아차 468명 모두 불법파견이라고 판결해 사용자들의 주장을 일갈했습니다. 이어 7개월 만에 다시 금호타이어에서 대규모 인원에 대해 모두 정규직 인정 판결이 나온 것입니다.
셋째,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는 비판이 빗발치면서 판결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10년 11월 1940명이 소송을 제기해 4년 9개월 만에 1심 판결을 받았습니다. 소송 인원이 많고 추가 소송자가 늘어나면서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지만, 거의 5년 만에 1심 판결이 나오면서 회사의 회유 등으로 소송을 포기한 노동자가 800명에 이르렀습니다.
법원 판결이 나오자 현대자동차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누가 승소할지 누구도 장담 못하는 상황"이라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홀렸습니다. 현대차는 근무 경력을 인정하고 체불 임금을 지급하라는 비정규직노조의 요구를 거부하고, 불법 신규채용을 강행하면서 10년도 넘게 걸리는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지 말고, 빨리 실속을 챙기라고 말합니다.
금호타이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11년 6월 소송을 제기해 1년 만인 2012년 7월 26일 1심 판결이 났고, 다시 2년9개월 만에 고등법원 판결을 받았습니다. 법조계에서는 지난 2월 26일 현대차 아산공장에서 엔진서브 공정까지 모두 불법파견이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기 때문에 판결의 속도는 더 빨라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올해에만 금호타이어, 현대차 아산공장, 남해화학까지 세 번의 불법파견 판결이 나왔고, 조만간 쌍용차와 포스코의 고등법원 판결과 현대제철(옛 현대하이스코)의 1심 판결이 선고될 예정입니다.
자동차 부품사 첫 불법파견 인정, 빨라지는 판결
완성차 4사와 부품사인 금호타이어의 생산직 노동자는 하청노동자를 쓸 수 없고, 모두 정규직으로 채용해야 한다는 판결이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큽니다. 한 완성차 업체에 대략 1000개의 부품사가 딸려 있습니다. 2012년 기준 자동차산업 종사자는 정비, 튜닝 등 유관산업까지 180만 명에 달합니다.
2013년 매출액 규모 10대 자동차부품사의 고용 현황 자료를 보면 현대모비스는 간접고용 노동자가 6179명으로 정규직보다 많습니다. 사무직, 관리직, 연구직을 빼면 생산직 노동자의 70% 이상이 사내하청 노동자입니다. 현대위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출액과 순이익이 매년 크게 증가한 국내 1, 2위 부품사의 생산직 노동자는 소수의 정규직과 다수의 사내하청으로 운영되고 있는 '나쁜 일자리'입니다. 타이어회사 중에서는 1위 업체인 한국타이어가 비정규직을 제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8대 부품사의 간접고용 노동자는 1만2107명입니다. 이 중 식당, 경비, 청소, 시설 등을 뺀 생산직 사내하청 노동자 1만 여명은 금호타이어 불법파견 판결로 법원에서 정규직으로 인정받을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8대 부품사 1만 명 불법파견 가능성 높아
금호타이어 판결은 공교롭게도 해고를 손쉽게 하고, 비정규직을 마구 늘리는 '박근혜 비정규직 종합대책'에 맞서 민주노총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인 날 나왔습니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생산현장에 16.9% 사용하도록 회사에 합의해주고, 정규직노조에 비정규직 가입을 세 차례나 부결시키고, 불법 신규채용을 합의해준 현대차 정규직노조가 빠졌지만, 많은 노동자들이 구속과 해고와 임금손실을 각오하고 파업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파업은 매국적 행위"라며 "노사정 대타협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노조가 임금체계 개편 등 핵심 쟁점에서 양보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노동계는 어떤 길이 청년과 국민, 우리 경제를 위한 길인지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고 대화를 통해 해법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국정원 댓글에서부터 성완종 리스트까지, 정당성을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든 정권과 집권여당이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4년으로 연장하고 손쉬운 해고를 가능하게 하는 '일반해고 가이드라인 마련'을 강행하면서 민주노총을 비난하고 나선 것입니다.
높은 연봉을 받는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을 깎고 해고를 쉽게 하면 청년들 일자리가 늘어나게 될까요?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4년으로 늘리고, 파견 노동자를 늘리면 '장그래'의 삶이 나아질까요? 청년과 국민을 위한 길이 무엇일까요?
'국민을 위한 길'이 정규직 해고를 쉽게 하고 비정규직 늘리기?
민주노총 총파업과 금호타이어 판결 다음날인 25일 오후 3시, 민주노총 광주본부에 70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모였습니다. 현대위아 광주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입니다. 2년의 준비 끝에 마침내 '금속노조 광주자동차부품사비정규직지회'를 만들었습니다. 하루 만에 가입 대상 350명 중 100명이 넘게 가입했습니다.
2009년 부품이 단종될 때 한꺼번에 해고됐던 아픈 기억이 있는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드는 일은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기아차와 가까이에 있는 부품사 금호타이어의 불법파견 판결에 용기를 냈습니다.
정준현 노조지회장은 "모든 제조업 사내하청은 불법파견 판결에 현대위아도 예외는 아니"라며 "금속노조 없이 소송은 불가하고, 소송 없이 정규직화는 힘들며, 단결투쟁 없이 소송마저 끝내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침묵하고 고개 숙이고 살아가던 '장그래'들이 일어서고 있습니다. 대법원에서 지방법원까지 모든 법원이 제조업 사내하청은 불법이기 때문에 정규직화해야 하다고 판결하면서 용기를 내고 있습니다. 이들이 박근혜 정부에게 묻습니다.
'장그래'를 살리기 위한 노사정 최우선 논의는 불법파견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 아닙니까? '노동시장 구조개혁'의 1순위가 바로 불법 사내하청을 없애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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