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주인 없는 방이지만, 여전히 주인의 이름으로 불리는 방들이 있다. 쓰던 물건들은 정리된 채 그대로 남아 있지만, 정작 주인은 그 방에 없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을 것만 같은 방 안의 물건들이, 누군가 이 방에 있었음을 증명한다.
"집회 참가자 여러분, 사랑하는 가족 품으로 돌아가십시오."
'국민 304명'의 1주기 기일, 캡사이신 최루액을 쏘아대며 해산을 명령했던 종로경찰서 경비과장의 훈수대로라면, 유족들이 돌아갈 '가족 품'이란 결국 이곳, 아이들의 빈 방이다.
스캐너 두 대가 부지런히 움직인다. 아이들의 사진과 일기장을, 장난처럼 쓴 '버킷리스트'를 디지털 파일로 저장한다. 한켠에선 카메라 셔터 소리가 이어진다. 그새 녹이 슬어버린 캐리어와 바닷물에 누렇게 삭아버린 교복을, 흐릿하게 체취가 남아 있을 베개와 옷가지를 찍는다.
벽에 붙여 놓은 메모지, 필기와 낙서가 가득한 교과서, 풋풋한 연애편지, 연습장 한 구석의 우스꽝스러운 그림까지. 아이가 살아있었다면 사소했을 물건들이, 하나하나 기록으로 남는다.
"시간이 많이 흐르면, 사람들이 이 참사를 기억하는 방식도 저마다 다를 텐데…그런데 아이들의 얘기를, '저들'의 방식과 '저들'의 역사로만 기록되도록 놔둘 수는 없으니까요."
5시간을 훌쩍 넘긴 기록 작업을 끝내며, 권용찬(36) 4.16 기억저장소 기록관리팀장이 방 주인의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는 활동가들 앞에 꺼내놓은 아이의 물건들을 다시 차곡차곡 정리한다. 물건들은 다시 방 안,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아이의 방과 물건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 그건 이 방의 주인이 '정말로'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다시 확인받는 일이기에 오랫동안 망설였을 엄마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아이들 중 3분의2 가량은 아직 사망 신고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매번 작업을 끝내면, 엄마들은 다시 엷게 웃어 보인다. 낯선 이들에게 아이의 방문을 열어주는 것을 오랫동안 망설였다는 엄마는, "우리 애 얘기를 남겨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배는 침몰했지만, 기억은 침몰하지 않게
안산 단원구 고잔동의 작은 상가 건물 3층. 아담한 연립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조용한 동네에 작은 전시관이 문을 열었다. 지난 2일 개관한 4.16 기억저장소 2호관이다.
개관전인 '아이들의 방' 사진전은 지난해 12월 말부터 기억저장소 활동가들과 사진작가들이 4개월간 기록한 작업의 결과물이다.
4인 1조로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집을 방문해, 아이들의 물건과 그 물건에 깃든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한 명은 사진과 편지, 노트 등을 스캔해 디지털 파일로 만들고, 다른 한 명은 사진을 찍고, 기록 작가는 그 물건에 담긴 부모님의 이야기를 구술 작업 하는 식이다. 지난 4개월 동안 집집마다 방문해 수집한 개인 기록만 해도 100명을 훌쩍 넘는다.
의자에 걸린 교복, 벽면을 채운 아이돌 가수의 사진, 침대 위에 놓인 인형. 사람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사진들이 묻는다. 흔적만을 남기고, 이 방의 주인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1년 전 침몰하는 세월호를 보며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이 참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고작 열일곱, 열여덟인 아이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어요. 시간이 흘러도, 잊어서는 안 되잖아요. 이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는 것은 대한민국 사회를 바꿔내는 시작이기도 해요.
'아이들의 방' 사진전도, 희생된 단원고 2학년 아이들만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꿈도 많고, 하고 싶었던 것도 많고, 사춘기에 방황도 있었고…어떻게 보면 바로 오늘,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모습 그대로인 아이들이죠. 아무개의 방이지만, 그 또래 아이들 모두의 방이기도 하고, 미래의 내 아이의 방일 수도 있어요. 아이들이 부재한 그 공간을 보고 사람들이 애도하지만, 슬퍼하는 것과 동시에 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걸 그 사진들이 보여주고 있는 거죠."
전시관 개관 다음날인 지난 3일, 안산시 상록구에 마련된 기억저장소 4호관 '서고'에서 권용찬 팀장을 다시 만났다.
30평 남짓의 서고는 여러 기록물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작업으로 분주했다. 단원고 학생들의 마지막 수학여행에 함께한 캐리어와 유품, 팽목항과 서울광장에 붙었던 추모객들의 노란 리본, 희생자 가족들의 도보 행진 때 함께했던 현수막과 조끼, 각종 유인물과 활동 기록들이 체계적으로 분류돼 보관돼 있다.
권 팀장은 대학원에서 기록학 석박사 과정을 밟은 기록 전문가다. 박사 과정을 수료한 뒤 연구소에서 일하다가, 세월호 참사 이후 평범한 연구자로서의 삶이 달라졌다.
참사 직후인 지난해 5월, 진도체육관 한켠에 기록학자들의 천막이 세워졌다. 묵묵하게 유족들에게 힘이 되어준 자원봉사자들의 구술부터 시작해, 팽목항에 내걸린 기다림의 편지들, 전국에서 보내온 응원의 글들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 국내 손꼽히는 기록학자인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가 권 팀장을 진도로 호출했다. 그게 시작이 됐다.
그렇게 이 참사를 기록으로 남기자는 사람들이 모여, 지난해 9월 안산 고잔동에 '4.16 기억저장소'가 문을 열었다. 제대로 손 써보지도 못한 채 허무하게 304명을 잃었지만, 그 기억까지 잃어버리진 말자는 뜻이 모였다.
모여든 활동가들과 자원봉사자들의 이력도 각각 다양하다. 지역의 시민사회 활동가부터 시작해 주부, 연극배우, 사진학과 대학생, 자신의 작업도 제쳐두고 안산으로 달려온 미술작가까지.
권 팀장 역시 지난 1월, 서울의 살던 집을 정리하고 안산으로 아예 이사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시작한 일이다.
304명…숫자가 아니라, 사람
이들에겐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기록이다. 단원고 아이들의 집을 방문해 사진을 찍고 부모님의 육성을 듣는 것은, 여러 갈래의 기록물 수집 중 하나다.
"세월호와 관련해선 크게 네 가지 기록물들이 있어요. 우선 이 참사를 직접적으로 증거하고 규명하는 자료들이 있어요. 해경이나 VTS 자료들, 참사의 원인을 규명할 이런 자료들은 주로 4.16가족협의회 내 진상규명분과에서 다루고 있어요.
저희는 그런 자료보다는 크게 세 가지 범위의 기록물을 다뤄요. 먼저 가족들의 활동에 대한 증거 기록물들. 부모님들이 농성을 하며 덮었던 이불 역시도 가족들의 힘겨운 싸움을 보여주는 소중한 기록물입니다. 또 참사와 관련한 시민들의 수많은 추모 기록들이 있어요.
단원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수집하는 것은, 희생자 한 명 한 명을 기억하고자 하는 개인 기록입니다. 희생자 명단의 숫자가 아니라, 각자가 꿈을 갖고 있던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하는 거죠."
희생 학생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은 여러모로 힘겨운 작업이었다. 프레시안 취재진이 고작 3주간 이들과 동행하면서 목격한 모습이 그랬다.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떠날 때까지. 그 모든 순간들을 떠올리며 엄마도 울고, 그 얘기를 듣고 받아 적는 활동가들도 울었다. 그렇게 울고 또 울면서 하루에 두 가구 씩 10시간 가까이 수집을 했다. 그럼에도 좀처럼 끝나지 않는 작업이었다.
"학교 다녀오면 맨날 라면 끓여달라고 했어요.", "아직 저 방 책상 앞에서 그림 그리고 있을 것 같은데…". 아이의 사소한 습관을 말하며 미소를 짓다가도 이내 무너지는 엄마 아빠의 모습보다, '2014년 4월'로 시간이 멈춰 있는 방 안의 달력보다, '희생자 304명'이란 압도적인 숫자가 더 무겁고, 힘겹다.
매일매일 강행군을 해도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작업.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한 순간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몸의 통증으로 새삼 실감한다. 그럼에도 권 팀장은 용기를 내 방문을 열어준 부모님들께 "감사하다"고 했다. 실제로 만나본 적 없는 아이들이지만, "이젠 아이들과 가까워져서, 지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가족 총회에서 부모님들께 먼저 설명을 드렸어요. 다들 이렇게 아이들이 잊히는 것에 대해서 걱정을 많이 하시니까,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 아이 이야기를 남겨야 한다는 부모님들이 다들 동의를 해주셨죠.
그래도 막상, 찾아뵙겠다고 하면 힘들어 하는 분들이 많아요. 약속을 잡았다가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됐다고 날짜를 미루는 분들도 있고…아무래도 저희가 찾아가기 전엔, 아이 방을 다시 한 번 더듬어야 하고, 아이 물건을 정리하면서 그 날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우리가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울고 계시는 분들도 있고요. 어떻게 보면, 부모님들이 가장 큰 용기를 내고 있는 거죠.
이젠 지나가다 부모님들과 만나면, '다음엔 누구네 집 가?' 이렇게 물어봐주시기도 하고, 처음엔 애들 얘기 꺼내는 걸 힘겨워했던 부모님들이 고맙다고, 고생한다고 인사 건네주시기도 하고…너무 감사하면서도 한편에선 부담감이 커요. 아이들과 가까워 졌는데, 지치지 말아야죠."
어떤 이들을 묻는다. 이제 와서 기록으로 남긴들 무슨 의미가 있냐고. 그런다고 애가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닌데.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이 사회가 지난해 4월16일,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단원고 아이들의 흔적을 담은 기록물들은 하나의 추모 기록임과 동시에 가장 강렬한 사회 고발물이기도 하다. 빈 방, 주인의 부재가 보는 이들에게 '슬픔' 이상의 숙제를 던진다. 왜 우리는, 지금 이 방에 없냐고 그 방의 주인들이 묻는다.
'그들의 역사'를 대체할 기록
기억의 힘은 강하지 않다. 주관적이고, 쉽게 가위질되기도 한다. 1년 전 배가 침몰되는 현장을 생중계로 목격하며 비탄의 눈물을 흘렸던 이들이, 시간이 다소 흐른 후에는 거리에서 목소리를 내는 유족들을 향해 '지겨운데 이제 그만 좀 하지'라고 말한다. 그 감정은 유족들이 거액의 보상금을 받는다는 '믿음'에 이르렀을 때 혐오로 바뀐다. 불과 1년 안에 일어났던 일들이다.
그래서 "잊지 않겠다"는 말은, 단순한 애도와 추모의 행위에서 더 나아가 망각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일종의 '기억 투쟁'이 되어야 한다고 기억저장소 활동가들은 믿는다. 그 기억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한꺼번에 304명의 생명을 앗아간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시간이 흐른 뒤 이 사건을 덮으려 했던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을 멋대로 편집해 역사로 남기려고 할 때, 그것을 반박할 '시민 주체의 기록'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기록'이 가진 힘이다.
아이들의 방이 묻는다
'아이들의 방' 전시관 한 가운데엔 이불더미가 쌓여 있다. 지난해 4월16일 진도체육관에서부터 시작해 국회와 광화문, 청운동 농성장에서 부모와 함께했던 이불들이다. 지난 1년간, 부모들의 눈물과 땀에 젖었을 싸움의 증거물들이다. 시간이 멈춘 아이들의 방을, 아직 '현재진행형'인 부모들의 이불이 감싼다.
"엄마, 오래오래 죽을 때까지 같이 살자." -2반 김주희
"세상에서 나는 가족이 제일 좋아요. 엄마, 내가 평생 애인이 되어줄게." -4반 강혁
"아빠 쿨피스~ 난 쿨피스 자두맛이 제일 좋아." -4반 최성호
"엄마가 아프지만 않으면 나는 다 괜찮아"-8반 조찬민
벽면엔 부모들이 구술한 아이들의 이야기가 적혔다. 다정하고 따뜻했던 일상의 순간들은 사라지고, 이제 그 방엔 '진실을 인양하라'고 쓰인 피켓과 같은, 부모들의 싸움의 흔적만이 새로 쌓일 것이다.
지난 11일, 전시관 천장엔 도기로 만든 '기억함'이 걸렸다. 도예가와 건축가들이 기꺼이 팔을 걷고 나서 설계와 시공을 담당했다. 부모들도 종종 전시관을 찾아 '내 아이의 기억함'이라며 편지나 사진을 놓고 간다. 현재까지 120개의 기억함이 올랐고, 앞으로 희생자 304명을 상징하는 기억함 304개가 모두 걸릴 예정이다.
참사 1주기를 맞아 지난 3월부터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희생 학생들의 기억과 기록의 현장을 둘러보는 '4.16 기억 순례'를 매주 열고 있다. 기억저장소에서 시작해 단원고 교실과 서고, 분향소 등을 걷는 여정이다.
첫 전시엔 희생자 54명의 방이 열렸지만, 기억저장소는 희생자 304명 전원의 기록 수집을 목표로 계속 이들의 흔적을 찾아갈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그저 불운한 '교통사고'였다고, 참사의 진실보다는 '돈'이 먼저라고 세상이 시끄럽게 떠드는 동안, 아이들의 고요한 방이 열렸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쓰는 역사를 꾸짖는, 또 다른 아이들의 방이 이 공간에 열릴 것이다.
- 세월호 1주기 특별기획, 고잔동에서 온 편지1부. 아이들의 빈 방<2> "월요일 점심 카레라이스 기다리던 소녀는 왜…"
<3> "교복 입은 긴 머리 소녀 보면 숨도 못 쉬겠어요"
<5> "이모에서 엄마 된 지 8년, 듬직했던 우리 큰아들…"
<7> "아프다고 수술받는 것도 죽은 딸한테 미안해요"
<8> "아들이 조립한 컴퓨터도 그날, 작동을 멈췄다"
<9> "'거위의 꿈' 부르던 보미 목소리가 듣고 싶어요"
<10> "우리 강민이 옷, 죽을 때까지 입을 거예요"
<12> 아이들의 빈 방에 놓인 어른들의 숙제
2부. 아직 4월 16일을 사는 사람들
<14> "세상 밑바닥 본 1년…아직 손 내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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