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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 독가스, 철조망, 기관총, 그리고 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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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 독가스, 철조망, 기관총, 그리고 철도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 <43> 자본주의의 '장자', 1차 세계대전

2014년인 올해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지 딱 100년이 된 해이다. 이 한 세기 동안 인류는 산업문명의 기관차를 타고 살육이란 내리막길을 거침없이 달려왔다. 1차 세계대전 이전의 대규모 전쟁 중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전쟁 하나를 꼽으라 하면, 1815년 나폴레옹의 군대와 반(反)프랑스 연합군인 영국, 프로이센, 네덜란드의 군대가 싸웠던 워털루 전쟁을 꼽을 수 있다. 이 전쟁의 결과가 본국에 알려지는 데 걸렸던 시간은, 기원전 카이사르 군대가 갈리아 원정 당시 로마에 전령을 보내 승전보를 알리는 데 걸렸던 시간과 별 차이가 없다. 과거 전쟁의 전형은, 군대를 모아 오랫동안 이동한 후 전장이라 불리는 곳에 모여 상대 병력과 전투를 벌이는 형태였다. 전투 상황에 맞게 보급을 더 확대하거나 군대를 보충할 방법은 없었다. 전황을 전달받는 데에만 여러 날이 걸렸다. 불리한 걸 깨닫고 군대를 더 보내봐야 이미 전투는 끝난 후다. 전술의 핵심 역시 기병과 보병의 적절한 배치와 운영 정도의 수준이었다. 기병의 기동력으로 상대의 허를 찌른 후, 결정적인 순간에 보병을 돌격시키는 전술, 이것이 승리 여부를 결정짓는 관건이었다. 물론 나폴레옹은 탁월한 포병 전술을 운용해 성과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파괴력과 전술적인 영향력은 현대전을 따라갈 수 없다.

1차 대전에 참전한 전쟁 지휘관들은 과거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군대의 전술 패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들은 자본주의가 사회를 완전히 바꿔놓았던 것처럼, 자본주의가 전쟁도 바꿔놓았을 거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그래서 1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 교전 당사국들의 최고위급 장군과 참모들은 전쟁이 오래가지 않을 것으로 봤다. 독일은 쉽게 파리를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고 프랑스군은 서너 달이면 독일을 물리치고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이들 장수와 참모는 모두 과거 방식의 전쟁을 생각했다. 전술과 교리도 그것에 바탕을 둬 만들어져 있었다. 이런 판단은 결국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결과를 낳았다. 이전까지 전쟁에서 그 정도로 큰 인명손실은 나온 적이 없었다.

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체제가 시작된 이후 최초의 대규모 전쟁이다. 자본주의가 낳은 전쟁이면서 자본주의 체제가 수행한 전쟁이었고, 이후 벌어질 전쟁의 양상을 보여줬던 묵시록이었다. 생산력의 폭발은 산업혁명의 기치 아래 근대 자본주의 체제를 살찌웠다. 근대 산업자본주의 체제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생산품을 만들어냈고, 그것을 개선시켜 세상을 바꿨다. 그중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것 중의 하나가 시공간을 재편한 이동 수단, 바로 철도였다. 이동 시간의 단축은 상품과 정보, 사람의 이동 수요를 폭발시켰다. 세상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철도가 노동자들을 서로 연결시켜 줌으로써 노동자들의 단결을 돕는다고 말했다. "중세의 도시민들이 보잘것없는 도로망으로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단결을 현대의 노동자들은 철도 덕분에 불과 몇 년 만에 이루어낸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철도가 노동자의 결집과 단결에만 도움을 준 건 아니었다. 철도는 군대의 이동도 수월하게 해, 단결한 노동자들을 진압하거나 적국과의 전투에 투입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산업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무기의 발달을 가져왔다. 산업혁명 이후 과학기술의 발달은 기계공학과 화학, 생물학에도 엄청난 진전을 가져오게 했다. 현대식 무기의 개발과 생산이 앞다투어 이루어졌다. 독가스 같은 화학 무기도 만들어졌다. 1차 대전의 가장 인상적인 것들은 참호, 독가스, 철조망 그리고 기관총이었다. 특히 기관총은 1차 대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무기이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 스크린샷 ⓒ워너브러더스

참호, 독가스, 철조망, 그리고 기관총

극강의 효율적 살인 무기인 기관총의 효과는 2003년 톰 크루즈가 주연한 할리우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일본군의 현대화를 담당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백인 주인공이 사무라이 정신에 매료된다. 결국 그는 사무라이 편에 서게 된다. 사무라이들과 함께, 한때 자신이 가르쳤던 신식 일본 군대에 맞서 전투를 벌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톰 크루즈는 사무라이들과 함께 일본군 진영을 향해 말을 달린다. 그리고 화면 가득 풀 샷으로 태양에 번뜩거리는 황금빛 기관총이 불을 뿜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좌우로 움직이며 회전하는 총열에서 발사된 총탄은 벌판 가득 달려오는 사무라이를 가차 없이 고꾸라뜨린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1894년 동학농민항쟁 때의 우금치 전투를 떠올렸었다. 백성들은 아랑곳하지 않는 무능한 왕실과 주변의 친일 정치 모리배들, 일본의 제국주의 침탈에 맞서 일어났던 동학농민들은 전라도, 충청도를 거쳐 공주에 다다랐다. 패악질을 일삼던 관군은 분노한 농민군에 참패하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11월 8일 관군을 밀어붙이던 농민군은 공주 우금티 고개에 다다랐다. 다음날 농민군 수만 명은 500년 한을 풀고자 한양을 향한 진군의 북소리와 함께 일제히 우금티 고개 정상을 향해 달려나갔다. 조일연합군의 일원으로 일본군을 이끌고 우금치 고개 정상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모리오 마사이치 대위는 미소를 머금은 채 사격 명령을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내 사정거리 내에 수천 명의 동학군이 당도한 것을 확인한 마사이치 대위는 사격 개시를 알리는 총성을 울린다. 앞서 말한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미국제 개틀링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2000여 명의 일본군은 열 배가 넘는 병력으로 달려오는 조선 농민군을 폭풍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날려버린다. 이날의 헌병대 전황 보고서에는 '조선비적 수천 사망, 부상. 아군 피해 무'라는 짧은 기록이 실렸다.

1800년대 중반부터 개발된 기관총은 해가 갈수록 성능이 개량됐다. 6개에서 10개의 총구가 회전 프레임 안에 탑재되어 1분에 300발 이상의 총탄을 발사할 수 있었던 기관총은, 1885년 미국의 발명가 맥심의 개발에 의해 전환점을 맞는다. 탄환의 반동 에너지를 이용해 소비된 탄약을 방출하고 다음 탄약을 집어넣는 방식을 택한 맥심기관총은 총알을 이어붙인 탄띠가 전부 소모될 때까지 사격할 수 있었다. 1분당 600여 발 가까이 발사되는 매력적인 무기는 군부를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1889년 영국 육군은 맥심기관총을 채택했고 다음 해에는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 러시아 육군도 맥심기관총을 구비했다.

맥심기관총은 1893년 시작된 아프리카 마타벨레 전쟁에서 영국군이 최초로 실전에 사용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 마타벨레 해방을 위해 나섰던 전사 5000명을, 4정의 맥심기관총을 가진 50여 명의 영국군이 단 한 차례의 교전에서 궤멸시켰다. 1898년 수단에서도 영국군이 맥심기관총을 가지고 원주민 군대에 대승을 거두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때 이미 맥심기관총의 가공할 성능을 알았음에도 엄청난 사상자가 단지 흑인의 열등함을 알려주는 증거일 뿐이라고 치부해버렸다. 이런 일들이 문명화된 유럽에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1차 대전을 연구한 역사가 존 엘리스 맨체스터대학 교수는 기계시대에 들어온 후에도 고수됐던 '돌격 앞으로'라는 허망한 전술이 비참하고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군 지휘부와 수많은 고위 장교들은 "단호하고 줄기차게 돌격하면 적의 투지가 와해된다"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적진을 향해 돌격할 것을 명령했다. 존 엘리스 교수는 백 년 전이면 타당했을 전술이었을 이것이, 기관총 사수들에게는 측은함을 일으키게 하는 대량 살육행위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영국군 청년 장교는 편지에서 "용감한 병사 세 명이 운용하는 이 작은 악마가 부대원들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본다면 대규모 돌격전, 특히 기병대의 돌격은 꿈도 꾸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썼다.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대규모 공세를 벌인 솜 전선의 독일군 기관총 사수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그들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전에는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교들이 앞장을 섰다. 우리는 사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탄약을 장전하고 재장전하기만 하면 됐다. 그들은 수백 명씩 스러졌다. 조준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총알을 빗발처럼 퍼부었을 뿐이다." (참호에 갇힌 1차 세계대전, 존 엘리스)

1차 대전에서 기관총과 함께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은 대포였다. 산업기술의 발전은 대포의 성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 주인공 파울은 포탄이 비 오는 듯 쏟아지는 전선에서 공포에 떨며 지옥 같은 전장의 현실을 생중계한다.

"한 발의 포탄이 터지고 곧이어서 다른 포탄이 터진다. 콩 볶는 듯한 기관총 소리가 들린다. (…) 갑자기 포탄이 다시 튀어 뒤로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즉각 포탄 구덩이의 물웅덩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철모를 목덜미까지 눌러 쓰고는, 겨우 숨을 쉴 수 있을 정도까지만 입을 위로 들어 올린다. 그런 다음 옴짝달싹하지 않는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 레마르크)

머리 위를 뒤덮는 거대한 포탄 덩어리들과 눈앞에 날아오는 기관총탄 세례에, 최고의 문명을 이루어냈다고 자부하는 인간들은 처참하게 쓰러져갔다. 3개월이 못 가 끝날 거라는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게 지속되었다. 독일, 프랑스 국경과 벨기에를 관통해 북대서양까지 거대한 참호가 파였다. 이 참호를 사이에 두고 전쟁은 4년 넘게 계속되었다. 대포와 참호, 기관총을 1차 대전의 상징적 아이콘으로 만든 것은 철도였다. 철도는 본국의 군수공장에서 생산되는 대포와 기관총을 전쟁터로 수송했다. 징집병이 전장으로 가기 위해 집결한 곳은 역 광장이었다.

긴 바케트 빵의 갈라진 틈으로 야채와 소스를 발라 넣듯, 끝없이 이어지는 참호 속에 소모된 분만큼의 사람과 무기가 계속 채워졌다. 1차 대전은 참호전이자 소모전이며 경제전이었다. 사람이 얼마나 죽어 나가는지는 문제 될 게 없었다. 그저 주기적으로 보고되는 전황 목록에서 차지하는 한 줄의 기록에 불과했다. 모든 것은 요리 재료 리스트처럼 취급됐다. 사망 560명. 다음 주문은 가장 빨리 도착하는 열차 편으로 병사 1000명과 잼 500박스, 방독면 100박스.

최악의 기차 사고, 희생자 중 장교는 없었다

1914년 8월 독일은 애국의 물결로 뒤덮인다. 영웅적이고 낭만적인 전쟁에 대한 환호는 월드컵 응원전처럼 거리를 뒤덮었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 이를테면 로자 룩셈부르크나 카를 리프크네히트, 하인리히 만 등 노동자와 시민을 중심으로 제국주의 전쟁을 거부하자는 기치를 내건 스파르타쿠스단이라는 사회주의단체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쟁의 광기가 뒤덮은 세상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가볍게 무시되었다. 어린 학생들은 책을 내려놓고 시인들은 펜을, 화가들은 붓을 던져 버리고 총을 잡았다. 정부와 언론과 교육당국은 하나가 되어 전쟁을 독려했다.

1차 대전에 참전했던 많은 지식인들은 전쟁을 미화하고 영웅시하는 자국 정부에 진저리를 쳤다.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는 애국심을 고취하며 전쟁 참전을 독려했던 고등학교 담임선생을 휴가 나온 주인공이 조롱하는 장면이 나온다. 전쟁을 고발하는 그림을 그렸던 화가 오토 딕스는 자신이 겪은 전장의 끔찍한 장면을 있는 그대로 재현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간절히 말한다. 전쟁의 진실을 보라!

낡은 전술로 무의미한 희생을 양산하는 군부는 파렴치했다. 군부는 자신들의 결정적 실수조차도 영웅행위로 둔갑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1914년 11월 10일 벌어진 랑게마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은 제대로 훈련조차 받지 않은 젊은 대학생 지원병을 전선에 투입해 프랑스와 영국군의 기관총 앞으로 돌격시켰다. 무모한 공격은 희생자만 양산했다. 투입병력의 70%가 허망하게 쓰러졌다. 랑게마르크 전투는 향후 4년 반 동안 독일인에게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강조할 때마다 대표적인 사례로 인용되었다.

세계 최대의 철도 사고는 1차대전 시기에 일어났다. 전쟁 막바지였던 1917년 12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승기를 잡고 있었다. 미국의 참전으로 영불연합군의 사기도 한껏 올라갔다.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군에 압박을 가하던 이탈리아 전선의 프랑스군은 겨울을 맞이해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는 전선에서 간만에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프랑스군 당국은 장기 복무한 병사나 전과를 세운 병사를 선발해 15일간의 크리스마스 특별휴가를 주었다. 동료 부대원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며 진흙 범벅의 참호에서 탈출한 1000여 명의 프랑스 병사들은 두 개의 열차에 나눠 타고 이탈리아 전선을 벗어나 알프스 산맥 자락의 프랑스 국경 부근 모단(Modane) 역에 도착했다.

주요 군 수송수단인 열차(기관차+객차)는 늘 부족했다. 특히 기관차는 더했다. 군은 기관차를 활용하기 위해 두 개의 열차를 하나로 이어 붙였다. 한 편성의 열차에서 기관차를 떼어 다른 용도로 쓰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기관차에 두 편성의 열차가 연결되었는데 모두 19량이었다. 맨 앞과 뒤 칸에는 화물 수송용 화차가 연결되어 있었고 17량의 객차가 중간에 자리 잡았다. 이 중 두 개의 차량은 모단 역에서 연결되었는데, 곡선 주행에 부적합한 고정식 바퀴 축을 가진 구형 차량이었다.

두 개의 기관차에 의해 견인된 객차와 화차를 하나의 기관차로 운행하게 되면 견인력이나 제동력이 급격히 약화된다. 제동력은 열차 안전을 책임지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이것이 확보되지 못하면 절대 운행을 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모단 역에서 연결된 객차 19량 중 기관차에 의해 제어되는 자동공기제동 장치는 앞에서 3량까지만 작동되었다. 나머지 객차의 브레이크는 어떻게 했을까. 중간중간 배치된 7명의 제동수가 기관사의 기적신호를 받아 수동으로 바퀴에 연결된 지렛대를 움직여 속도를 줄이게 되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출발할 열차 앞은 급경사의 긴 내리막길이었다. 모단 역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지대로 높이 4000미터 급의 봉우리들이 산맥을 이루고 있는 곳이었다. 기관사 지라드(Girard)는 운전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떤 기관사라도 자살행위라는 것을 알기에 운행거부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전시에 작전 책임자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운송 책임 장교는 기관사를 윽박질렀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운송장교가 철도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것이 불행이었지만, 숭고한 군인 정신 앞에 불가능은 없다는 신조는 진짜 군인의 증명서 같은 것이었다. 1000여 명의 병사들은 마주 오는 열차를 통과시키기 위해 모단 역에서 1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장교들은 모두 하차했다. 장교들에게는 모단-파리 간 특급열차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대 전쟁에서 어처구니없는 희생의 당사자는 징집된 사병들의 몫이다.

1917년 12월 12일 밤 11시 15분, 1000명이 넘는 병사들을 태운 파리행 크리스마스 휴가 열차는 모단 역을 출발해 곧바로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기관사들에게 급경사 내리막길은 온 신경을 집중시키게 한다. 운전법도 평지와 다르다. 한국 철도에서도 "하구배 운전법"이라고 불리는 급경사 내리막길 운전 매뉴얼이 있다. 기계적 힘이 중력을 극복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운전하는 것이 급경사 내리막길 운전법이다. 출력을 최대한 낮추고 정지 상태에서 타력으로 내려가다가 속도가 시속 30~40킬로미터 정도 붙으면 제동을 써 정차시킨 후 다시 타력으로 움직이는 일을 반복한다. 잠깐의 실수로 가속이 붙어 제동력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면 아무리 브레이크 단수를 올려도 제동은 듣지 않게 된다. 기관사들은 이런 경우를 "비행기 탄다"라고 하는데 열차가 공중에 뜨게 되면 그걸로 모든 것이 끝장남을 의미한다. 실력 있는 기관사는 평지를 고속으로 달리는 능력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경사와 곡선 주행을 능숙하게 조정하는 사람이 실력 있는 기관사다.

파리행 군용열차는 안내륜 4개와 구동륜 6개로 이루어진 4-6-0 형식의 텐더 형(석탄과 물을 기관차에 연결된 부수차에 따로 적재하는 형) 중대형 증기기관차였지만, 350미터 길이에 526톤을 끌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짐이었다. 모단 역을 출발한 열차는 평소처럼 천천히 내리막길을 주행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통제 불능에 빠졌다. 기관차의 속도계는 시속 135킬로미터를 지시했다. 열차는 미친 야수처럼 알프스 계곡 사이를 질주했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라 프라츠(La Praz)역의 승강장에 서 있던 역장은 순식간에 역을 통과해 버리는 열차를 보고 심각한 사태를 직감했다. 역장은 산 아래 생 미셀 드 모리안느(Saint Jean de Maurienne) 역으로 연락해 막 출발하려던 열차를 정지시켰다. 모리안느 역에서는 영국군 2개 사단 병력이 모여 있었고 이들 중의 일부를 태운 열차가 막 출발할 예정이었다.

기관사는 최선을 다해 제동 핸들을 당겼고 객차 중간에 탄 제동수들도 온 힘을 다해 브레이크 레버를 밀어젖혔다. 열차의 쇠바퀴는 브레이크 슈우와 밀착되어 벌겋게 달아올랐고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 불똥들이 목재로 만들어진 객차 밑바닥에 꽃을 피웠다. 불이 붙은 객차 안은 젊은 병사들의 비명이 가득 찬 생지옥이 되었다. 일부 병사들은 불길을 피해 열차 밖으로 뛰어내렸지만 생존 가능성은 없었다. 산 아래 모리안느 역을 1300여 미터 남겨놓고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를 지난 곡선 지점에서, 기관차에 연결된 첫 번째 차량이 탈선했다. 기관사와 제동수들이 브레이크를 최대한 작동시켰지만 제한 속도 시속 40킬로미터 지점을 시속 102킬로미터로 통과하던 중이었다. 7명의 제동수 중 2명은 이 과정에서 열차 밖으로 튕겨나갔다.

불길에 휩싸인 객차들은 앞서 탈선해 선로 옆 산길에 처박힌 차량 위로 차례차례 돌진, 산산조각이 났다. 열차를 휘감은 불길은 다음 날 저녁에서야 꺼졌다. 모리안느 역에 있던 영국군 사단 병력과 철도 직원들, 모단 역에 대기하던 프랑스군이 긴급 구조에 나섰지만 험난한 바위 지형에서 구조작업을 벌이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파괴된 열차의 잔해 속에서 신원이 확인된 사망 병사는 424명이었다. 135구의 사체는 형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37구 이상의 사체가 철교와 난간 사이에서, 곡선 반경을 따라 이어진 수백 미터의 선로 우측에서 흩뿌려진 채로 발견됐다. 이들은 불길을 피해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린 병사들이었다. 183명만이 다음 날 아침 점호에서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구조작업을 통해 살아남은 병사 중 100명이 넘는 인원이 호송 과정과 병원 치료 과정에서 숨졌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기관사는 군사재판에 넘겨졌다가 8개월 만에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800여 명의 젊은이가 숨진 이 엄청난 열차 참사는 몇 년간 비밀에 부쳐졌다. 군과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적을 이롭게 해 국가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언론에 대한 통제도 철저히 이루어졌다. 사고 4일 후 일간지 <르 피가로>에 단신으로 실린 게 전부였다. 군이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버릇은 국경이 없는 모양이다. 진상규명에 소극적이던 군 당국은 1923년에서야 국방부장관이 위령비 건립 추진을 약속했다. 1961년에 모리안느 공동묘지에 묻혀 있던 희생자들이 리용의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1998년에는 사고 현장에 희생자를 추념하는 위령비가 세워졌다.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모순을 잉태한 1차 세계대전

국가는 전쟁이 대의를 지키는 숭고한 행위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속에는 저마다의 검은 속셈이 숨겨져 있다. 식민지의 보전이나 자원의 획득, 정권의 안정, 다가올 선거에서의 승리 등 그 속셈은 다양하다. 전쟁의 수행으로 이익을 보는 세력의 입장에서 전쟁은, 다수의 비극을 등에 업고서라도 계속 이어져야 할 수지맞는 장사일 뿐이다. 전쟁 수행을 업으로 할당받은 군부는, 전쟁을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여긴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호전적 대결을 부추긴다. 그러나 이들 군부의 행태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일관된 오류를 반복한다. 존 엘리스의 <참호에 갇힌 제1차 세계대전>에 소개된 삽화를 보자. 포탄이 빗발치는 참호의 한 벙커에서 목숨을 걸고 상부로부터 전달된 긴급 전화를 받는 병사의 모습이 보인다. 제목은 '중요한 문제'이다. 루스 9월 대공세가 한창일 때 최전방의 지휘 장교가 총사령부로부터 받은 긴급 전언은 다음과 같다.

"지난 금요일에 귀 부대로 지급된 딸기잼 깡통 수를 최대한 빨리 보고하라!"

어느새 대의는 사라졌다. 눈을 시퍼렇게 뜬 채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권에만 몰두하는 아비규환의 전쟁터에서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믿었던 사람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후 현대사에서 벌어질 모순과 굴곡의 초기 배아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많은 것을 압축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판도라 상자가 열리자 세상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우주의 블랙홀과 화이트홀처럼, 오늘날 존재하는 세계의 저 끝에 있는 문과 같은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은 유럽 전선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다. 아프리카에서도 제국주의 국가 간 전쟁이 벌어졌다. 영국, 프랑스, 벨기에, 포르투갈 등 연합국 군대가 1916년 이후 토고, 카메룬, 나미비아를 포함한 서남아프리카와 탄자니아 등 독일의 동아프리카 식민지 군대를 공격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이 전쟁에 강제로 징발되었다. 연합국과 독일은 식민지의 자원과 인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벌여 무고한 아프리카인들의 희생을 초래했다. 약 20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1차 세계대전에 동원됐다. 이 중 20만 명이 전사하거나 사망했다. 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식민지 모국의 통치 편의에 의해 국경이 변경되고 종족 간 차별이 일어났으며 자원의 약탈이 심화되었고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아프리카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아랍도 1차 세계대전의 광풍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미국의 CIA가 미국에 적대적이거나 비우호적인 정권을 견제, 제거하기 위해 저항 세력을 지원했듯,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는 아랍동맹군을 지원했다. 영국 입장에서는 아랍 지역에 있는 엄청난 석유 자원을 못 본 척할 수가 없었다. 이슬람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 주변 헤자즈 지역의 샤리프 후세인이 지도하는 하심아랍 세력은 영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오스만에 저항하는 핵심으로 부상하게 된다. 결국 이들은 중동에서 아랍정부를 수립했다. 오스만 독재에서 벗어난 아랍은 정치적으로 서방의 후원을 받는 1인 지배 체제로 변환된다. 현재의 요르단과 사우디아라비아 등, 친 서방 아랍국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만나는 것이 1차 세계대전 시기의 세계사이다.
팔레스타인에서도 오스만 제국의 터키군과 영국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집트 원정군 사령관으로 팔레스타인 전투를 지휘한 영국의 알렌비 장군은 수차례 교전 끝에 1917년 12월 9일 예루살렘에서 터키군을 몰아냈다. 서방의 언론들은 1187년 이후 처음으로 기독교인이 예루살렘을 손에 넣었다고 환호하며, 알렌비 장군을 현대의 십자군으로 추켜세웠다.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영국은 1917년 벨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유대민족국가 수립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오늘날까지 비극이 끊이지 않는 팔레스타인 분쟁의 시발점이었다.

현재의 이라크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터키군은 영국에 의해 쫓겨나고 러시아에 의해 압박받는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러시아와 대결하던 1915년과 1916년에 터키군은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기독교인들을 공격했는데, 이때 학살당한 아르메니아인들이 100만 명에 달했다. 이 끔찍한 민간인 학살은 이후의 전쟁에서 벌어질 수많은 대량학살극의 불길한 예고편이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끄는 볼세비키가 혁명에 성공했다. 이에 대응해 구체제를 옹호하는 러시아 백군이 발기했고, 곧바로 적백 내전에 들어갔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에 반대해 내전에 개입한다. 연합군은 러시아 곳곳의 지역에서 백군의 장군과 병력을 지원하면서 볼세비키에 대응했다. 프랑스와 영국, 미국의 군대가 러시아 혁명의 분쇄를 위해 분투를 벌였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 차르 체제의 혹독함을 경험했고 기나긴 전쟁에 환멸을 느꼈던 러시아 민중들은 사회주의를 대의로 내건 혁명 세력을 선택했다. 인류역사상 최초로 자본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의 국가 간 대립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 대립은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양 진영의 패권 다툼으로 크고 작은 비극을 양산해내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동아시아에서는 1차 대전의 혼란을 틈타 일본의 대륙 진출 야욕이 불타올랐다. 이미 조선에서는 일본의 대륙 진출 정책 수행을 위해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한반도 종단철도가 놓여 있었다. 조선 철도와 만주 철도는 조선을 짓밟고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일본 제국주의의 열쇠였다. 일본이 연 철도노선을 따라 폭력의 세상이 열렸다.

1차 대전은, 산업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급속한 성장을 이룬 서구 제국주의의 이권 쟁탈 과정에서 파생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모순을 담은 채 폭발했다. 안락한 북반구와 비참한 남반구의 남북문제, 아프리카의 영토·종족 분쟁, 아랍과 이슬람권의 자원과 패권 문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점령문제, 발칸 반도를 비롯한 여러 곳의 민족 문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동서 대립과 냉전 문제,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유권 분쟁 문제, 대량학살 문제, 인종청소 문제, 난민이나 이민자 등 디아스포라적 문제 등이 판도라 상자 밖으로 튀어나왔다.

더 심각한 문제는 1차 대전 이후 전쟁, 혹은 전쟁 위협이 경제위기나 국제분쟁, 국내 정치를 해결하는 주요 수단으로 자주 이용됐다는 점이다. 소위 상대에 대한 전쟁 억지력을 담보한다는 미명 하에 벌어진 끝없는 군비 경쟁은 비극적인 전쟁을 일상화했으며, 그 전쟁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정의롭다는 국가의 군대는 한시도 전쟁을 멈춘 적이 없다. 공동체에 비극적 결과를 안겨다 줄 전쟁을, 일상적이면서도 주요한 문제 해결의 한 방편으로 삼고 있는 인류와 그들이 신봉하는 체제는 과연 정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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