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은폐·조작 의혹이 일고 있는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그는 떳떳했다. 정부의 축소·은폐 각본의 '행동대장'격이었던 수사팀의 '일원'이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가질 법한 책임감이나 양심의 가책마저도 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검찰의 본분을 저버리는 처신을 결코 하지 않았다."
박 후보자가 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한 일관된 주장이다.
물론 그는 이날 한 모두 발언에서 "1987년 1차 수사에서 경찰의 조직적 축소·은폐를 다 밝히지 못한 점은 수사 검사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께 대단히 송구스러운 마음"이라고 말하기는 했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다. 이후 그의 입을 통해 나온 청문회 발언들을 모아보면, '은폐·조작' 의혹은 물론이거니와 '부실 수사' 비판마저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박 후보자가 방패로 활용하는 논리는 '검사동일체의 원칙'이다. "검찰청법도 규정하듯, 검사는 상명하복과 검사동일체 원칙을 검사는 따른다"고 그는 거듭 강조했다.
그는 이날 '1차 수사에서 조한경·강진규 두 경찰만을 기소한 데 최종 책임은 누구에게 있느냐'는 새누리당 민병주 의원 질문에는 "최종적인 판단과 결정은 주임 검사가 하도록 돼 있다. 이 사건에선 당연히 신창언 당시 서울지검 형사2부장 검사의 결정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창언 전 헌법재판관에게 최종 책임이 있다는 논리가 박 후보자에겐 책임이 없다는 논리로 연결될 수는 없다. 박 후보자가 이날 청문회에서도 스스로 밝혔듯 그는 "말석 검사였다고 해서 행정 업무만 한 것이 아니다. 검찰로서의 직분을 가지고 수사에 참여했다."
그의 '떳떳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박 후보자는 "(1차 수사 당시) 강진규, 조한경이 일관성 있게 두 사람의 범행이라고 자백했고 다른 경찰들도 관련 사실이 없다고 증언했다"면서 "공권력의 가장 중추인 경찰에서 조직적으로 각본에 따라 축소하고 조작했다는 것은 정말 검사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당시는 민주화 운동 활동가들을 상대로 한 공공연한 고문이 이루어지던 시기다. 게다가 물고문은 보통 4~5명이 한 조가 돼 진행되곤 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박 후보자가 이날 "제가 정말 열심히 수사해서 이 사건의 진상이 다 드러났다"고 말한 데 있다.
그는 "그런 역사적 사건에 제가 평검사 시절 수사팀의 일원으로 참여해 미력하나마 진상을 밝히기 위해 1~2시간 눈을 붙이면서 최선을 다해 수사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2차, 3차 수사에서 제가 (진실을) 규명한 것"이라면서 "(3월 초 안상수 전 검사로부터 전해 듣기 전까지는 물고문 가담 경찰이) 3명 더 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한 바가 없다. 2차 수사 때 제가 정말 열심히 수사해서 3명이 더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고도 했다.
여기서 짚고 가야 할 것이 있다. 2차 수사팀은 그해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고문 경찰이 더 있다'는 충격적인 폭로를 한 후인 5월 20일에야 가동됐다. 그리고 박 후보자가 공범이 더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때는 이로부터 2달이나 전인 3월 초다. 그는 조한경을 면회한 안상수 전 검사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 들었다고 주장한다.
자연히 두 가지 문제가 다시 제기된다. 그렇다면 그는 3월 초부터 5월 18일 사이에는 무엇을 했나. 박 후보자는 이날 "당연히 상부에 수사 계획서를 작성해 보고했고 상부에서도 조만간 재수사를 할 것이라고 하는 지시가 있었다고 전해 들었다"고 주장했다. (☞ 관련 기사 : "박종철의 죽음, 박상옥에겐 3번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박 후보자의 이 같은 '노력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어떤 주장이나 증언도 당시 수사팀 참여 검사로부터는 물론, 박 후보자를 추천한 대법원 쪽에서도 나온 것이 없다. 2차 수사는 외부의 압력(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와 국민적 분노)으로 마지못해 착수한 수사였단 게 지금까지의 정설이다.
더욱이 그가 '진상 규명을 해냈다'는 2차 수사 때에도 검찰은 사건의 '몸통'과도 같았던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또 다시 무혐의 처리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구속된 것은 박 군을 부검했던 황적준 부검의가 '경찰로부터 부당한 압력을 받았다'고 <동아일보>에 폭로한 후에야 이루어졌다. 때는 해를 넘긴 1988년 1월이었다.
이처럼 사건은 둘 중 하나다. 박 후보자의 떳떳함과 어울리지 않게도, 당시 검찰의 행태는 은폐·조작을 의도했거나 무능력한 부실 수사를 했거나 둘 중 하나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안상수 전 검사는 당시 수사를 '치욕적이었다'고 자신의 책에 회고한다. (☞관련 기사 : 박상옥 "박종철 수사, 외압 없어"…안상수는 왜?)
사건을 다시 돌이켜보자. 1987년 1월 14일 오전 8시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온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 고 박종철 군은 끔찍한 물고문을 받다 3시간여 만에 숨졌다.
이후 범 정부 차원의 관계기관 대책회의가 가동됐다는 것이 훗날 밝혀졌다. '턱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식의 정부나 검찰·경찰 발표는 때마다 누군가의 폭로나 증언으로 뒤집혔다. 은폐 조작 의혹으로 달궈진 국민적 분노 여론은 1987년 6월 10일 민주화 항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현재 대법관이 되고자 하는 박상옥 당시 수사 검사는 인사 청문회 자리에 와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검찰로서 본분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이다.
고 박종철 열사의 친형인 박종부 씨는 이날 인사청문회가 열리기 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이 정의롭지 못했다는 것이 모든 사태를 촉발시킨 원인"이라면서 "그간 박종철 사건을 검찰은 세 차례 수사했다. 그러나 검찰의 잘못은 한 번도 수사 대상이 된 적이 없다. 바로 이 점이 오늘의 사태를 만든 원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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