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민한 권력 교체다. '비박'계의 유승민-원유철 원내지도부의 탄생은 총선을 앞둔 새누리당 특유의 '발빠른 변화'를 또 한 번 여실히 보여줬다. 김무성 대표 체제를 만든 지난해 7.14 전당대회가 친박계에 대한 '견제'를 뜻했다면, 2일 치러진 새누리당 원내대표 경선은 총선 위기감이 만든 '변화'에 가깝다. 박근혜 정부 집권 2년만, 지지율 하락세 1달여 만에 새누리당 내 권력 지도는 이렇게 '탈박'했다.
당초 이번 원내대표 선거는 결과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일반적이었다. 10표 차 이내의 팽팽한 접전 속에 새 원내 사령탑이 결정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우세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84(유승민)대 65(이주영)이란 싱거운 승부로 끝이 났다. 표면적으론 계파 불문, 지역 불문 '당·청 공동운명체'를 외쳤지만, 실상은 내년 총선을 내다본 의원들의 '전략적 투표'가 확인된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 간판'의 매력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한 현역 의원들이 주판알을 튕긴 결과는 비박계 유승민이었다.
상대편인 이주영 후보 또한 수도권 표심을 잡겠다며 홍문종(의정부을) 의원을 러닝메이트로 영입했지만, 역부족이었다는 평이다. 외려 친박계 핵심인 홍 의원의 출마는 계파 구도로만은 설명할 수 없었던 선거전을 완연한 '비박 대 친박' 구도로 못질하는 기능을 했다. 유 원내대표의 파죽지세와 달리 박 대통령 이외의 구심력을 갖지 못한 친박계는 사실상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형편으로 쪼그라들었다. 지도부 구성에서도 8명의 최고위원 가운데 친박계는 서청원·이정현, 김을동 최고위원 정도다. '친박' 몰락의 신호탄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거수기 역할에 지친 새누리당의 선택, 총선 승리 만들까
유승민 원내대표는 직설적인 사람이다. 지난해 국정감사 때 청와대 비서진들을 "청와대 얼라들"이라고 일갈한 장면은 그의 정치 스타일을 드러낸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재연기는 공약 파기"라고 청와대를 비판하기도 했다. 2011년 출범한 홍준표 대표 체제 지도부의 일원이었으나 총선 전망이 어두워지자 최고위원직을 던지고 지도부 총사퇴를 이끈 적도 있다. 청와대와 정부를 향한 비판을 에둘러 하지는 않을 거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이런 유 원내대표의 체제가 출범함으로써 당·청 관계는 중대 전환기를 맞았다. 김무성 대표와 유 의원은 공교롭게도 청와대 문건 유출 파동의 배후로 지목받은 K와 Y다. 박 대통령은 앙금 있는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터놓는 사람이 아니다. 박 대통령이 당내 비박계의 지도부 싹쓸이에도 국정 운영 스타일을 바꾸지 않으면, '박근혜당'에서 탈피하려는 새누리당의 원심력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내년 총선이 다가올수록 그럴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유 의원은 이미 '수평적 당·청 관계'를 수차례 강조했다. 그는 이날 오전 합동 토론회에서도 "대통령과 청와대 식구들, 장관들도 더 민심에 귀를 기울이고 당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했다. 공무원연금 논란, 건강보험료 개편 혼선, 노동시장 구조개혁 문제 등 여론 민감도가 높은 정책에서 당 중심성을 확실히 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청와대가 목표 설정한 국정 과제는 입법으로 완성된다. 원내대표는 당의 입법 행위를 총괄한다. 2012년부터 이한구→최경환→이완구로 이어진 친박 원내대표들은 청와대 '하명'에 충실했다.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직선적 성격인 데다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정책 코드가 다른 유승민 원내대표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여의도연구소장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래 대표적인 브레인으로 손꼽힐 만큼 정무 감각도 높게 평가받는다. 청와대는 임기 3년차에 통제가 어려운 '유승민 변수'를 만난 셈이다.
더욱 긴장해야 할 쪽은 청와대가 아니라 야당
당장 공무원 연금 개편과 소득세법 개정안이 당·청 무게추의 변화를 볼 수 있는 시험대다. 박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공무원 연금 개편 시한을 4월로 못박았다. 그러나 유 의원은 출마 선언 후 기자들을 만나 "공무원들의 얘기를 충분히 들어보려고 한다"고 했다. "요구를 다 들어줄 수는 없겠지만, 지금 새누리당 안에서 한 자도 못 고치는 건 아니다"라고도 했다. 당내 친박계가 여론의 반발을 무릅쓰며 공들여 온 공무원 연금 개편안에 칼질을 할 수도 있단 얘기다.
이 외에도 유 의원의 전공인 경제 영역에서는 청와대와의 빈번한 마찰이 예상된다. 유 의원의 경제 지론은 박근혜 정부가 제1의 국정과제로 설정한 '경제살리기'와 코드가 다르다. 지난해 연말 그는 "단기 부양책은 재정 건전성만 해칠 뿐"이라며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진두지휘하는 경제정책을 전면 비판했고, "복지와 분배를 외면할 수는 없다"고 말한 일도 있다. 최근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고 한 그의 주장이 연말정산 파동을 고려해 급조된 발언이 아니란 얘기다.
다만 '유승민'이란 새 옷을 입은 새누리당이 당장에 '증세'로 급격히 물꼬를 돌릴 가능성은 높지 않다. 연말정산 파동으로 조세 저항감의 수준이 수면 위로 드러난 상황인 데다, 유 의원으로서도 상대편으로부터 '콩가루 집안을 만들 것'이란 견제를 받은 상황에서 무리한 당·청 충돌을 먼저 조장할 이유는 없다. 유 의원은 이날 "국민 동의가 없으면 지금 재정으로는 선별적 복지를 할 수밖에 없다"면서 "저부담-저복지를 할지 중부담-중복지를 할지 국민들의 선택과 동의를 구하는 어려운 절차를 천천히 시작해 보겠다"고 했다.
이처럼 유승민 당선이 당 안팎에 주는 메시지는 '새누리당의 변화'로 요약된다. 전당대회조차 주목받지 못하는 새정치민주연합에 비해 역동적인 변화다. 유 원내대표는 "보수는 보수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개혁해야 한다"고 말한 보수주의의 원조 에드먼드 버크를 멘토로 삼는 사람이다. 유승민 체제의 등장에 청와대보다 긴장해야 할 쪽은 야당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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