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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산이수(三山二水)의 사통팔달 김천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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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삼산이수(三山二水)의 사통팔달 김천고을

2월 고을학교

2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는 제16강으로, 삼산이수(三山二水)의 사통팔달이었던 경상북도 김천(金泉)고을을 찾아갑니다. 예부터 김천을 일컬어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을’이라 하는데, 세 산은 북쪽으로 황간과 경계를 이루는 황악산(黃嶽山, 1111m), 남쪽으로 성주와 동쪽으로 선산과 경계를 이루는 금오산(金烏山, 977m), 남쪽으로 거창, 서쪽으로 무주고을과 경계를 이루는 대덕산(大德山, 1290m)을 이름이요, 두 내는 대덕산에서 발원한 감천(甘川)과 황악산에서 발원한 직지천(直指川)을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김천고을을 품고 대덕산, 삼도봉, 황악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김천시

고을학교 제16강은 2월 15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07:00)-김산읍치구역(김산향교/연화지/객사터10:00-10:30)-개령읍치구역(개령향교/모광지10:50-11:20)-김천역터(과하천/남산11:40-12:10)-지례읍치구역(방초정/지례향교12:30-13:00)-점심식사 겸 뒤풀이(<김천삼거리식당>에서 막걸리를 곁들인 지례돼지고기13:00-14:00)-섬계서원(14:20-14:40)-직지사(15:10-16:10)-괘방령(16:20-16:30)-서울(16:30-19:30 예정) 순입니다.

▲김천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6강 답사지인 김천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소쿠리 형국의 기름진 땅
김천(金泉)은 낙동강(洛東江)의 지류인 감천변(甘川邊)에 자리잡고 있는 상주, 선산, 성주, 고령, 현풍과 함께 경상우도(慶尙右道) 고을로, 감천의 하류인 북동부만 넓게 트여있고 나머지 부분은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는 소쿠리 형국입니다. 백두대간을 따라 경북, 충북, 전북의 도계가 만나는 곳에 삼도봉(三道峰), 황악산(黃嶽山), 대덕산(大德山)이 솟아있고 경북, 경남, 전북의 도계가 만나는 대덕산 부근에서는 수도산(修道山)과 가야산(伽倻山)으로 이어지는 가야산맥이 갈라져 나옵니다.

김천의 물줄기는 크게 보아 낙동강 유역에 속하는데 백두대간의 대덕산과 수도지맥의 수도산(修道山, 1316m)에서 각각 발원한 계류가 지례에서 합류하여 감천이 되어 북쪽으로 흐르다가 황악산에서 발원한 직지천과 황산 아래서 만나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선산고을의 해평들 앞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듭니다.

감천은 조선 후기까지도 낙동강 본류에서 50리쯤 소금배가 거슬러 올라올 만큼 깊었으며 용두동 일대 모래밭에 배가 닿으면 자연스럽게 해산물 장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소금은 물론 염장과정을 거친 생선과 건어물 등은 전라도와 충청도, 경상도 내륙 깊숙한 고을까지 보부상(褓負商)의 등짐으로, 때로는 수레에 실려서 퍼져 나갔습니다.

김천고을을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산(金山) 서쪽이 곧 추풍령이고 추풍령 서쪽이 황간 땅이다. 황악산과 덕유산 동쪽 물이 합해져 감천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접어든다. 감천을 낀 고을이 지례(知禮), 김산(金山), 개령(開寧)이며 선산과 함께 감천 물을 관개하는 이로움을 누린다. 논밭이 아주 기름져서 백성들이 안락하게 살며, 죄를 두려워하고 간사함을 멀리 하는 까닭에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가 많다. 김산은 판서 최선문(崔善門)의 고향이다. 선산에는 금오산이 있는데, 문하주서 길재(吉再)의 고향이다. 최선문은 노산군(魯山君)을 위하여 절의를 지켰고, 길재는 고려를 위하여 충절을 지켰다.”

김천 지역은 삼한시대에는 감문국(甘文國)과 주조마국(走漕馬國)이 있었고 삼국시대에는 신라가 감문국과 주조마국을 병합하여 감문주(甘文州)를 설치하였습니다. 신라 때는 이 지역의 정치, 군사적 비중이 크게 약화되어 변방이었다가 고려시대에 교통중심지로서 김산현(金山縣)에 김천역(金泉驛)이 설치되었고 1172년(명종 2) 개령군에, 1390년(공양왕 2) 지례현과 김산현에 감무(監務)가 파견되면서 행정 단위로서의 중요성을 인정받았습니다. 고려시대 역마제도가 생긴 이후 조선시대까지는 인근 주민들의 물물교환 및 주변 지역과의 교역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특히 김산현에 정종(定宗)의 태가 묻혔다 하여 김산군으로 승격되면서 1413년(태종 13) 개령군은 개령현으로 강등되어 현감이 파견되고 지례현에도 현감이 파견되었습니다.

사림파 등장 이후 많은 서원들 건립
김천고을의 감천과 직지천이 이루어 놓은 금릉평야와 개령평야는 들이 넓고 비옥하여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했고 생산력이 급격히 증가하여 여러 개의 제언(堤堰)이 축조되는 등 물산이 풍부한 지역이 되었고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문풍(文風)도 성행하여 김산, 개령, 지례 등에 향교가 세워졌으며 사림파(士林派)의 등장 이후 많은 서원들이 건립되기도 하였습니다.

김산향교(金山鄕校)는 중설위(中設位)로 창건 시기가 1392년(태조 1년)으로 추측되나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34년(인조 12년)에 선비 강설, 강여구 부자가 2대에 걸쳐 사재를 희사하고 유림의 도움을 얻어 널리 모금하여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동무, 서무를 복원하여 향교를 재건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사대부(士大夫)의 자제는 대개 7, 8세 이전에 서당에서 한문의 초보와 습자(習字)를 배우고 15-16세 이전에 향교에 입학하여 수년에 걸친 수업을 마치고 소과(小科)에 응시하였는데 소과에 합격되면 생원(生員), 진사(進士)의 호칭을 얻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개령향교(開寧鄕校)는 소설위(小設位)로서 1473년(성종 4년)에 개령 현감 정난원(鄭蘭元)이 지금의 위치보다 남동쪽으로 떨어진 관학산 아래, 감천 변에 창건했다고 하는데 창설한 경위는 잘 알 수가 없으며 1609년(광해 1년)에 홍수로 인한 잦은 침수로 동쪽 어딘가에 옮겼다가 1837년(헌종 3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건했습니다. 일제 말에 김산향교에 폐합되었다가 1946년에 복원되고 1988년부터 91년까지 4년간에 걸쳐 중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특히 개령향교는 만인소사건(萬人疏事件)의 영남 중심지였습니다. 1881년 김홍집(金弘集)이 일본 주재 청국공사가 지은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입수하여 왕에게 바치고 개혁을 주창하며 상소운동을 벌렸는데 이때 영남지방은 개령향교를 중심으로 이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지례향교(知禮鄕校)는 소설위(小設位) 향교로서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명륜당 창설기(創設記)에 따르면 세종 8년에 창건하여 성종 16년에 명륜당을 중건하였으며 숙종 16년(1690)에 교궁을 중수하고 영조 50년에 사반루(思泮樓)를 건립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1913년 김산향교에 폐합되었다가 유림의 진정으로 1920년에 복원되었고 1961년 대성전을 개수하고 1988년 명륜당 서재를 보수하고 1990년에 동재를 신축 복원하였습니다.

자동서원(紫東書院)은 남와 강설(姜渫)과 그의 아들, 기재(耆齋) 강여호(姜汝㦿)를 배향한 서원으로 1804년(순조 4)부터 1806년 (순조 6년)에 걸쳐 모연하여 5년 뒤인 1811년(순조 11년)에 준공하였습니다. 강당을 자동서원, 사우(祠宇)를 상의사(商懿祠)라 하였으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7년 중수 복원하고 학암 강석구(姜碩龜), 호은 강이화(姜履和)를 추가로 배향하였습니다.

강설은 김천 찰방 강부(姜符)의 손자로서 1612년(광해군 4년)에 증광 진사시에 합격하고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는 기호지방 선비들의 의병장으로 추대받은 바 있으며 정한강 문하에서 공부하였습니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김산향교를 1634년 (인조12년)에 대성전과 명륜당을 향내 유림의 협조를 얻어 재건하고 유지를 받들어 아들 강여구가 동재, 서재와 묘문을 복원하였습니다.

도동서원(道東書院)은 충간공 이숭원(李崇元), 정양공 이숙기(李淑琦), 문희공 이호민(李好閔)을 배향하고 다시 1794년에 문장공 이숙감(李淑減), 문천공 이후백(李後白)을 추가 배향한 서원으로 1871년 (고종 8년)에 훼철되었다가 1918년에 그 자리에 강당을 건립하고 명례당(明禮堂)이라 현액하였습니다.

충간공 이숭원은 1453년(단종 1년)에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1491년 병조판서에 이르렀고, 정양공 이숙기는 1453년(단종 1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호조판서에 이르렀습니다. 문희공 이호민은 이숙기의 증손으로 임란왜란 때 이조좌랑으로 의주까지 왕을 호종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예조판서와 좌찬성에 이르렀고, 문장공 이숙감은 1454년(단종 2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1457년(세조 3년)에 문과 증시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며, 문청공 이후백은 16세 때 향시에 수석으로 합격, 1546년 사마시를 거쳐 1555년 식년 문과에 급제 1563년 사가독서를 했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양관의 대제학을 지내고 호조판서에 이른 인물입니다.

원계서원(遠溪書院)은 조선 말부터 성리학의 학맥을 현대에까지 계승해온 근대의 성리학자이며 국권을 빼앗긴 일제 때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한 독립유공자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을 배향한 서원입니다. 송공산은 고향인 성주에서 3.1운동을 일으키고 유림의 독립청원운동인 파리 장서사건에서 곽종석(郭鍾錫), 장석영(張錫英) 등과 더불어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루고 난 후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1923년 이곳으로 은거하면서 학문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면서 20년을 지내다가 1943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자들이 1932년 이곳에 원계서당을 세우고 강학연구소로 삼다가 스승을 제사하는 사당을 1986년에 세우고 숭덕사(崇德祠)라 현액하였습니다.

섬계서원(剡溪書院)은 1802년(순조 2년)에 창건되었으며 세충사(世忠祠)에는 백촌 김문기(金文起)와 여병재 김현석(金玄錫)을, 동별묘에는 반곡 장지도(張志道), 절효 윤은보(尹殷保), 남계 서즐(徐騭)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김문기는 1456년(세조 2년) 병자사화(丙子士禍) 때 이조판서로 이개(李塏)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순절한 충신으로, 1778년부터 사육신에서 빠져 오랫동안 논쟁이 분분했다가 근년에 사육신 묘역에 봉안되었고 김현석은 백촌의 맏아들로 병자사화 당시 영월군수로서 부자가 동시에 순절하였습니다.

장지도 선생은 고려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으나 조선 건국 후 초기의 정치적 혼란과 정권을 둘러싼 골육상쟁의 참극을 겪으며 낙향한 후 육영에 헌신한 학자이며 동별묘에 배향된 서즐, 윤은보는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오른 특이할 만한 제자들로서 자손이 없는 반곡 선생의 상(喪), 제의(祭儀)에 정성을 다했습니다.

▲직지사 대웅전 탱화에 나오는 천녀의 모습 Ⓒ김천시

‘조선 5대 시장’에 꼽혔던 ‘짐천장’
김천은 역참제도(驛站制度)에 따라 김천역(金泉驛)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전북 무주, 충북 영동, 경북 상주와 문경 등 이른바 삼도를 잇는 길이 김천으로 통했으니 사람과 물산이 모여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져서 ‘삼도시장(三道市場)’이라고도 불렸던 ‘짐천장’이 섰던 곳입니다. 평양, 개성, 강경, 대구와 나란히 ‘조선 5대 시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지리적 조건 때문입니다.

김천역은 조선 팔도 44개 역도(驛道)의 538개 속역(屬驛) 가운데 추풍역, 문산역, 부상역, 양천역, 작내역, 장곡역 등 김천 지역 6개 역은 물론이고 성주, 구미, 고령을 거쳐 대구의 속역과 경남 함양, 거창, 합천지역의 역까지 21개 역을 관할하는 김천도(金泉道)의 핵심 역이었습니다. 김천도(金泉道) 찰방역(察訪驛)은 지금의 남산동 중앙초등학교에서 남산공원 일대에 있었으며 공물의 수송과 집산이 활발하고 인마가 내왕하는 역 주변에 있으면서 낙동강을 통해 나룻배로 실어 온 해산물을 부릴 수 있었던 용두동 감천 변에 시장이 발달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역의 설치와 운영을 통칭하는 역참제도는 고려시대 지방 행정구역이 확립됨과 동시에 지방 호족세력을 통제하기 위한 포석으로 정비되기 시작했으며 고려의 집권세력은 전국을 22역도(驛道) 체제로 편성한 후 역의 규모에 따라 역전(驛田)을 지급하여 역의 조직과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조선 시대로 들어오면서 역의 기능은 더욱 강화되어 병조(兵曹)-승여사(乘輿司)-역승(驛丞)-찰방(察訪)-속역(屬驛)으로 이어지는 역의 관리 감독 체제가 완비되었습니다. 30리(약 12.9㎞)마다 역을 설치하여 전국을 종6품이 관리하는 44개의 역도(驛道)를 두고 538개의 속역(屬驛) 체제로 정비했고 이후 역의 기능은 더욱 다양해져 공물의 운송과 내왕인의 규찰, 죄인의 체포와 압송, 파발과 봉수대의 관리 기능까지 수행했으며 국경을 중심으로 적의 동태를 감시하고 첩보 수집과 군수품 조달 등 유사시 국방의 일익까지도 담당했습니다.

<택리지(擇里志)>를 쓴 조선시대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李重煥)이 1713년(숙종 39) 과거에 급제한 후 1717년(숙종 43)부터 1722년(경종 2)까지 종6품으로 김천도 찰방으로 근무 하였는데 보통 찰방은 종8품 벼슬에 해당되는 직책이지만 김천역은 그 중요성 때문에 종6품 관리가 맡았습니다.

그러나 1725년(영조 1) 병조좌랑에 오른 이중환은 역모죄에 연루된 지관 목호룡(睦虎龍)에게 말을 빌려 준 혐의로 곤장 180대를 맞는 악형을 당하고 섬으로 귀양까지 갔다가 풀려났는데 그 후 관직을 접고 30년간 전국을 유람하며 풍토, 지리, 산물, 교통을 집대성한 우리나라 인문 지리학의 보고인 <택리지>를 저술하였습니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이중환에게 김천은 관직을 벗어나 자유롭게 글쓰기 작업에 몰두할 수 있게 해 준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셈입니다.

김천고을은 김산군(金山郡), 개령현(開寧縣), 지례현(知禮縣)에 읍치구역(邑治區域)이 있었습니다. 김산군의 읍치구역은 교동(校洞)에 위치하며 객사(客舍)와 관아(官衙)가 있었다고 하나 그 위치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는데 1996년에 실시된 ‘김천시 교동과 삼락동 일대의 조선 시대 주요 공공 건물지 및 그 주변의 일반 건물지에 대한 발굴 조사’를 통해 그 규모와 형태를 추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확한 창건 시기는 미상이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4년(선조 37)에 중수하여 금릉관(金陵館)이라 현액(顯額)하였고 건물지가 중첩돼 있어서 초창기 건물지의 석재는 고려시대 건물지의 것을 재사용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개령현의 읍치구역에는 개령초등학교 자리에 객사가, 개령면사무소 자리에 개령관아가 있었으며 현감이 집무를 보던 동헌은 근민헌(近民軒)이라 현액하였고 현감 아래에 좌수 1인, 별감 2인, 군관 3인, 인리 70인, 지인 27인, 사령 27인, 관노 28인, 관비 14인을 두었다고 합니다.

지례현의 읍치구역에는 지례초등학교 자리에 객사가, 지례면사무소 자리에 관아가 있었으며 , 현감이 집무를 보던 동헌은 수경당이라 현액하였고 현감 아래에 좌수 1인, 별감 2인, 군관 30인, 인리 38인, 지인 20인, 사령 19인, 관노 20인, 관비 25인을 두었다고 합니다.

김천 지역은 교통의 요충지답게 산성 터[城址]가 많이 남아 있는데 대부분 삼한시대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축조된 것들입니다. 취적봉 성지는 삼한 시대, 고성산 성지, 고소산 성지, 속문산 성지, 감문산 성지, 주치 성지, 어전령 성지, 부항령 성지, 구산 성지 등 8개의 성은 삼국시대, 덕대산성, 금오산성(金烏山城) 등은 고려시대에 축조된 성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김천 지역에는 4개의 봉수 터[烽燧址]가 남아있는데 김산군에는 지례의 구산 봉수를 받아 충청북도 황간 남이정산 봉수로 보내는 고성산(高城山)봉수대와, 감문산 봉수를 받아 상주 회룡산 봉수로 보내는 소산(所山)봉수대가 있었고, 지례현에는 거창 거미흘 봉수를 받아 김산군의 고성산봉수로 보내는 구산(龜山)봉수대가, 개령현에는 선산 감산 봉수를 받아 김산군 소산 봉수로 보내는 감문산(甘文山)봉수대가 있었습니다.

중국 금릉(金陵)의 과하천 물맛으로 빚은 과하주(過夏酒)
김천 지역을 대표하는 향토지(鄕土誌)로서 1718년(숙종 44)에 간행된 여이명(呂以鳴)이 쓴 <금릉승람(金陵勝覽)>에 김천의 향토주(鄕土酒)인 과하주(過夏酒)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옛날에 금(金)이 나는 샘(泉)이 있어 김천(金泉)이라 했다. 그 샘물로 술을 빚으면 맛이 향기로웠기 때문에 주천(酒泉)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금을 캐는 부역이 두려워 그 샘을 묻어버려 지금은 그 장소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다만 김천의 과하주는 여산(礪山)의 호산춘(湖山春)과 더불어 국내에서 이름있는 술이 되었는데, 타지 사람들이 금릉 사람에게 술 빚는 방법을 배워가지만 그 맛은 본토의 술만 같지 못하니 이것은 물이 타지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무릇 특산품이란 각기 자연 환경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과하천의 본래 이름은 김천(金泉)이고 지명도 여기로부터 말미암아 고려 전기 역참제도의 정비로 이 지방에 역이 처음 설치되면서 역명(驛名)을 정할 때 이 샘의 이름을 따서 김천역(金泉驛)이라 한 것만으로도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으며, 샘 안쪽 벽면에는 ‘금릉주천 광서 팔년(金陵酒泉 光緖 八年)’이라 하여 1882년(고종 19)에 새겨진 금석문(金石文)이 있어서 과하천의 역사를 짐작하게 합니다.

임진왜란 때 이곳을 지나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샘물 맛을 보고 중국 금릉(金陵)에 있는 과하천(過夏泉)의 물맛과 같이 좋다고 감탄한 이후부터 금지천을 과하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며 금릉이란 이름도 과하천이 있는 중국의 명소인 금릉에서 딴 이름이라고 합니다.

금릉이란 지명은 서기 314년 중국 동진(東晋)이 세워지고 수도를 금릉이라 한 데서 유래되었으며 그 뒤 여러 번 나라가 바뀌면서도 이곳에 도읍했기 때문에 고도(古都)로서 유적이 많고 경관이 아름다워 역대 시인들이 즐겨 시제(詩題)에 올렸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태백(李太白)의 <금릉 봉황대에 올라(登金陵鳳凰臺)>라는 것인데, 이태백은 최호(崔顥)의 <황학루에 올라(登黃鶴樓)>라는 시에 감복되어 이와 겨루기 위해 지었다고 합니다.

이태백의 시 가운데 ‘금릉(金陵)’이니 ‘삼산이수(三山二水)’니 ‘봉황대(鳳凰臺)’니 ‘황학산(黃鶴山, 黃岳山이라고도 함)’이니 하는 말들이 나오는데 김천 지방의 여러 이름들도 모두 거기에서 따온 것입니다.

금릉(金陵)은 김천의 별호(別號)로서 1949년 김천군의 김천읍이 시로 승격되고 나머지 지역인 김천군은 별호를 따서 금릉군으로 개칭되었다가 그 후 김천시와 금릉군이 합쳐져 통합 김천시가 되어 지금에 이릅니다.

김천은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으로 불린 고을답게 골짜기마다 누각과 정자가 세워졌습니다.

1937년 간행된 <교남지(嶠南誌)>에 따르면 김산군(金山郡) 관내에는 군수 김세조가 세운 서하루(棲霞樓), 김종직(金宗直)이 세운 경렴당(景廉堂), 여이랑이 세운 동락당(同樂堂)과 군자정(君子亭), 군수 김탄행이 건립한 풍월루(風月樓), 군수 이능연이 세운 봉황대(鳳凰臺), 이홍명이 세운 사미정(四美亭), 군수 여희필이 세운 도암재(道岩齋), 최대권이 세운 백원당(百源堂), 이시현이 세운 백원재(百遠齋), 최창락이 세운 남애정(南厓亭), 김천중학교 내에 세운 시열재(時悅齋), 최병록이 세운 경원재(景遠齋), 성산 여씨 문중에서 세운 광암정(廣岩亭)이 있었다고 하는데 대부분 훼철되고 현재 봉황대와 시열재, 도암재, 남애정, 백원당, 경원재, 광암정 등이 남아 있습니다.

지례현(知禮縣) 관내에는 현감 조인상이 세운 감호정(鑑湖亭), 조하성이 세운 화옥정(華玉亭), 박경순이 세운 한송정(寒松亭), 이정복이 세운 방초정(芳草亭)과 옹취정(擁翠亭), 현감 이병건이 세운 삼소정(三笑亭), 현감 이병건이 세운 사명정(四明亭), 개령향교 앞에 세운 사반루(思泮樓), 도동서원 앞의 임해루(臨海樓), 섬계서원 앞에 세운 상설루(常雪樓), 김종해(金鐘海)가 세운 만취정(晩翠亭), 이장원이 세운 충효당(忠孝堂), 은진 송씨 문중에서 세운 미호정(美湖亭), 인동 장씨 문중에서 세운 쌍호정(雙湖亭)과 옥류정(玉流亭), 김난규가 세운 경파정(鏡波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방초정과 지례향교 문루인 사반루, 만취정, 미호정, 쌍호정 등이 남아 있습니다.

개령현 관내에는 관아 내에 있던 무민루(撫民樓)와 팔승정(八勝亭), 유산위의 동락정(同樂亭), 1713년 건립된 오수정(五授亭), 향약소로 세워진 내신정(來新亭), 진주 강씨 문중 재실인 숙청각 앞에 세워진 숭덕재(崇德齋), 묘광저수지 내에 세워진 낙원정(樂園亭), 우상학이 세운 화학정(華鶴亭)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팔승정, 내신정, 숭덕재, 낙원정 등이 남아 있습니다.

▲지례읍치구역에 있는 지례향교 Ⓒ김천시

왕건 살려준 직지사 주지 능여조사(能如祖師)
직지사(直指寺)는 황악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직지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연원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설이 전하는데 첫째는 선종(禪宗)의 핵심 가르침인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의 맨 앞 글자인 직지(直指)에서 따왔다는 것과, 둘째는 직지사를 창건한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선산에 있는 태조산에 도리사(桃李寺)를 창건한 후 김천 황악산을 가리키며 “저 산 아래에도 절을 지을 만한 훌륭한 터가 있다”고 하여 ‘곧을 직(直)’과 ‘손가락 지(指)’ 자를 따서 직지사라 했다고 합니다.

고구려 승려인 아도화상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선산 해평면 모례(毛禮)라는 사람 집에 숨어 살았는데 마침 신라 왕녀가 병이 난 것을 향을 피워 고쳐 준 인연으로 신라 왕실로부터 포교를 묵인 받고 417년(눌지왕 1) 신라 최초의 사찰인 도리사를 창건하고 이듬해인 418년(눌지왕 2) 직지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집니다.

신라 불교는 귀족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전파되었으나 선산과 함께 신라 불교의 유입 경로였던 김천에는 직지사, 갈항사, 쌍계사, 청암사, 수도암 등 신라 시대에 창건된 사찰이 많습니다.

신라가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527년(법흥왕 14)보다 110년이나 앞서 직지사가 창건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김천은 신라에 아직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 선산과 더불어 포교의 전진 기지로서 신라 불교의 발상지로 자리 잡았다는 데 큰 의미를 갖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927년 견훤(甄萱)이 서라벌을 급습하자 경애왕(景哀王)의 요청을 받아들여 군사 1만 명으로 서라벌로 향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대구 팔공산에 진을 칩니다. 맹장 견훤은 이를 간파하고 역습했고 대패한 왕건은 남은 군사 2,000명을 수습하여 구미 인동현까지 밀려 절대절명의 순간이 되었으나 휘하 장수의 권유로 직지사의 능여조사(能如祖師)를 만나게 됩니다. 능여는 왕건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급히 퇴각하는 과정에서 신발도 신지 못한 군사들에게 짚신 2,000켤레를 삼아 주고 또 큰 짚신을 만들어 사방에 흩어두는 심리전을 펴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며 왕건이 개경으로 귀환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936년(태조 19)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300만 평에 달하는 전답과 임야 1천결을 직지사에 내려 은혜를 갚았고 4대 광종 때까지 매년 전답 10결과 노비를 하사했습니다. 이후에도 고려 왕실은 왕조를 개창하는데 기여한 사찰이라 하여 계속해서 직지사를 받들었으며 이러한 왕실의 지원 속에 직지사는 고려 후기까지 사세를 크게 확장했습니다.

직지사 대웅전 뒷산인 북봉은 황악산의 산줄기가 뱀의 허리처럼 길게 내려 뻗다가 뱀이 머리를 치든 것처럼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하여 기가 드센 사두혈(蛇頭穴)의 길지로서 명당 터로 알려져 왔습니다. 이 같은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조선 정종(定宗)의 태실(胎室)이 1399년(정종 1) 대웅전 뒤의 북봉에 안치되어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조선시대에도 직지사는 정종의 어태(御胎)를 관리하는 태실 수호사찰로 지정되어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인 1928년 태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조선총독부의 명분 아래 파헤쳐져 태항아리만을 꺼내어 경기도 고양에 있는 서삼릉으로 이전하고 현재 북봉 정상에는 석물 여러 기가 흩어진 채 방치되어 있습니다. 또 태실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던 중동석은 극락전 앞 잔디밭에 옮겨져 있고 여덟 개의 울타리 석 중 두 개는 직지성보박물관 앞에 옮겨져 있습니다.

직지사에는 국보 1점과 보물 11점이 전해지고 있으며 황악산 일대에는 직지사에 소속된 암자가 서른일곱 곳이나 있었다고 전하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었고 이후 직지사의 사세(寺勢)가 극도로 기울면서 대부분 퇴락하고 현재는 은선암(隱仙庵), 명적암(明寂庵), 중암(中庵), 운수암(雲水庵), 백련암(白蓮庵), 삼성암(三聖庵), 북암(北庵) 등 여섯 곳의 암자만 남아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모자, 장갑,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 제16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관람료,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 드립니다. 사전예약 관계상 2월 9일까지 참가접수를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 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고을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goeul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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