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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석가·예수·마르크스가 공유한 꿈, 포기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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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석가·예수·마르크스가 공유한 꿈, 포기할 건가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34> 이상 사회의 꿈과 진보의 미래

새로운 '진보 정당'이 태동하면서 위기의 진보가 화두에 오르고 있다. 사실 1980년대 말 이래 진보는 항상 위기였다. 한때 진보 하면 으레 사회주의를 떠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진보를 말하면서도 사회주의를 부정하거나 회피할 필요가 생기면서 진보의 위기는 시작되었다.

사회주의(또는 공산주의)는 노동자의 이념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잘사는 공산주의 자체를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가장 이기적인 자본가조차도 공산주의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단서를 달 뿐이다. 모든 위대한 세계종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도 결국은 공산주의적인 이상향 아닌가?

모든 사람이 '공산주의 그 자체는 아름다운 '꿈'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도대체 그 꿈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제아무리 해괴한 망상이라 해도 어디엔가 존재하는 것을 이리저리 뒤집고 짜깁기한, 현실의 왜곡된 반영이다. 하물며 모든 사람이 최소한 '아름다운 꿈'으로 인정하고 있는 공산주의가 아무런 현실적 연원도 없는 순수한 관념의 산물일 리는 없다. 쉽게 생각하면 불평등하고 자유롭지 못한 현실의 여러 가지 부정적인 측면들을 보고 겪으면서 그것을 뒤집어 놓은 사회를 그린 것이리라.

돌아올 수 없는 먼 과거에 이상 사회를 봉인했던 동서양의 옛 엘리트들

사람들은 언제부터 그런 이상 사회를 그렸을까?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공산주의적 이상 사회의 꿈은 유교 경전인 <예기> '예운편'에 있는 대동(大同) 사회가 아닐까 싶다.

대도(大道)가 행해져 천하가 공(公)이 된다. (…) 사람들은 자신의 어버이만 어버이로 알지 않고 자기 자식만 자식으로 알지 않게 된다. 노인으로 하여금 편안한 여생을 보내게 한다. 젊은이는 일할 조건이 보장되고, 어린이는 길러주는 사람이 있으며, 의지할 곳이 없는 과부나 홀아비를 돌보며, 폐질자(廢疾者)도 모두 부양받는다. (…) 재화가 땅에 버려지는 것을 싫어하지만 사적으로 저장할 필요가 없다. (…) 집집마다 대문을 닫을 필요가 없다. 이런 상태를 대동(大同)이라고 한다.

이것은 공자가 천하에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개탄하며 한 말로 전한다. 이 말에 따르면 마르크스가 꿈꾼 것과 같은 공산주의 사회가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먼 옛날에 있었던 셈이다. 공자를 따르는 유학자들에게 대동은 미래가 아닌 과거에 놓여 있는 사회이고, 가장 이상적인 정치는 그러한 과거로 돌아가는 정치였다. 그러나 현실은 대도가 이미 무너져 그나마 인의(仁義)로 버티던 소강(小康)에도 미치지 못하니, 최선을 다해 소강 사회라도 회복하면 천만다행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결국 지난 2000여 년 동안 대동은 사실상 지나가 버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꿈으로 먼 과거 속에 봉인되고 말았다.

대동처럼 공산주의적인 이상 사회를 과거에 배치한 사례는 서양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에덴동산이 그렇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황금시대'가 그렇다. 인간이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지복(至福)을 누리며 살던 시대가 먼 옛날에 있었다는 것이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에서 황금시대가 '정의와 권리를 자발적으로 향유하던 시대'였다면서 이렇게 노래했다.

(…) 법은 없었다.
형벌도 필요치 않았다. 두려움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청동 서판에는
어떤 법률적 협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탄원의 무리들이
판관의 얼굴을 살피는 일도 없었다. 판관이 없었으니
그럴 필요가 어디 있었으랴? (…)

판관 없이도 정의와 권리가 향유되는 세상! 사법기관과 관련된 최근 한국 사회의 파동들을 생각하면 황금시대는 정말 살맛나는 사회였을 것 같다. 대동 사회도 그랬고 에덴동산도 그랬다.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어 성경에서 에덴동산이 영어의 파라다이스에 해당하는 '파라데이소스'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울타리를 둘러친 정원'을 뜻하는 고대 이란의 '파리다이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는 점이다.

울타리를 둘러친 낙원이라니, 어쩐지 '네모난 동그라미'가 떠오르지 않는가? 모든 사람이 복되게 사는 낙원은 안과 밖을 구분하는 울타리를 칠 필요가 없다. 내 것 네 것이 없는 대동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도 태평하게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파라데이소스는 이미 사유재산이 생겨나고 나만의 낙원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분하고 지켜야 할 특권 계급이 등장한 시대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옛날 동서양의 엘리트들에게 공산주의적인 이상 사회는 돌아올 수 없는 먼 옛날에 있을 뿐이고, 현실에서는 그들만의 낙원을 만들어 이를 다수의 사람들과 갈라놓는 울타리가 필요했다.

▲ 16세기 독일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파라다이스>. ⓒ위키미디어커먼스


과거에서 미래로 이상 사회를 옮기고 진보를 꿈꾼 사람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러한 엘리트의 가르침을 항상 순종하고 따를 수는 없었다. 대동을 포기하고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를 외치는 공자의 가르침대로 신분 질서에 안주할 수만은 없었다는 말이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영화를 누리지 못하고 불평등한 현실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에게 '대동'은 혁명적 사상이요 무기였다. 조선 선조 때 대동계(大同契)를 결성했던 정여립이 역사의 기록대로 정말 반역을 꾀했다면, 그가 바로 대동 사회를 과거로부터 끄집어내어 미래에 가져다 놓으려던 혁명가였을 것이다.

불교에서도 미래를 지향하는 혁명 사상은 생겨났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세계종교인 불교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과 억겁의 인연으로 얽힌 세상을 매우 역동적으로 보여 주었지만, 도처에서 왕권과 결합해 현실을 인정하는 사상으로 이용되곤 했다. 그러나 불평등한 현실은 이 종교에서도 강력한 미래의 구세주를 탄생시켰으니 그가 곧 미륵이었다.

미륵은 석가모니 다음으로 부처가 된다는 약속을 받은 보살이다. 그는 도솔천에서 도를 닦다가 석가모니가 열반하고 55억7000만 년이 지나면 이 세상에 내려와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한 뒤 세 차례의 설법을 하리라고 한다. 그런데 미륵이 내려올 미래의 세상은 이미 이상 사회가 되어 유리와 같이 평평한 땅에 꽃과 향기가 뒤덮이고 사람들의 수명이 팔만 사천 살에 이르리라고 한다. 이 같은 미륵 신앙은 고통 받는 민중의 염원과 결합해 엄청난 혁명적 에너지를 분출하곤 했다.

서양에서도 성경을 독점하고 혹세무민하려던 종교 지도자와 지배자들에 맞서 천년왕국의 도래를 외치며 미래의 이상 사회를 향해 나아간 용감한 사람들이 많았다. 모든 차별과 억압이 사라지는 공산주의적 미래를 향한 그들의 외침은 대개 신비주의적인 주문(呪文)과 관념적인 유토피아 사상으로 인해 한계에 부딪히곤 했다.

그러나 역사의 진전과 더불어 사람들은 대동이나 에덴동산 같은 이상 사회를 과거로부터 끄집어내어 미래로 옮겨 놓았고, 점점 더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신념을 굳혀 나가게 되었다. 과거가 아닌 미래에 이상 사회가 놓이는 순간, 나쁜 사회를 개조하려는 인간의 행동은 복고나 회귀가 아닌 '진보'가 되었다.

그러한 진보의 목표, 곧 미래에 현실화될 이상 사회가 '사회주의'로 정식화된 곳은 서유럽이었다. 서유럽의 진취적이고 용감한 사람들은 중세의 질곡을 뚫고 이상적인 사회로 진보해 나갔다. 그런데 여러 차례의 혁명을 일으키며 그들이 도달한 지점은 만인이 자유롭고 평등한 공산주의적 이상 사회가 아니었다. 그것은 경쟁과 이윤 추구를 제약하는 봉건 체제를 무력화하고 등장한 자본주의 사회였다.

어, 이게 아닌데…. 사람들은 당황했지만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어렵게 과거로부터 끄집어내어 미래에 가져다 놓은 이상 사회가 자본주의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포기를 모르는 진취적인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모습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이를 모태로 삼아 태어날 새로운 이상 사회를 그렸다.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다.

가장 먼저 사회주의란 말을 쓴 것으로 알려진 19세기 프랑스 사상가 피에르 르루는 그 말을 개인주의에 대립하는 것으로 사용했다고 밝혔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고 소유와 경쟁을 주요 요소로 삼는 개인주의 체제이다. 19세기 사상가들은 그러한 자본주의에서 자본 집중, 자원 낭비, 실업과 빈곤의 증대, 주기적 공황 따위 병폐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를 개조하려면 개인주의를 폐지하고 반대 원리인 사회주의를 도입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개인이 아닌 사회가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계획적으로 관리해 평등과 정의를 실현하자는 데서 출발했다. 그 후 사회주의를 표방한 사상은 200여 종에 이르렀지만, 세세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생산 수단의 사회적 공동 소유와 계획 경제를 주장하는 데는 일치했다고 한다. 19세기 말에 등장한 '사회민주주의' 일파가 195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소유 대신 분배의 평등화를 통해 자본주의를 점진적으로 개조해 나가겠다고 선언하기 전까지는.

▲ 과거가 아닌 미래에 이상 사회가 놓이는 순간, 나쁜 사회를 개조하려는 인간의 행동은 복고나 회귀가 아닌 '진보'가 되었다. (그림은 1830년 프랑스 7월혁명을 주제로 한 들라크루아의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위키미디어커먼스


자본주의에 대한 도전 회피, 올바른 선택일까?

사회주의 운동이 전 세계적 차원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왔고, 어떻게 분열되었으며, 어떤 성공과 실패를 거두었는지는 구구한 설명이 필요치 않다. 소유를 강조하는 공산당은 혁명을 통해 체제를 뒤집어엎었고, 분배를 강조하는 사회민주당은 대의제 선거를 통해 곳곳에서 집권당이 되었다. 그러나 공산당이 집권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자본주의의 공세에 굴복했고, 사회민주당이 집권한 국가들은 자본주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실사회주의가 자본주의와 맞서 패배했다면 뭔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패인을 분석하고 문제점을 뜯어고치는 것이 다음 순서일 터이다. 반면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극복할 대안이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라는 것이 현재까지는 분명해 보인다. 사회주의를 뜯어고치는 것도 어렵고 사회민주주의를 반자본주의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도 어려워 보인다.

그런데 요즘 진보를 자임하는 사람들은 후자나 그 아류의 방법에 집착하는 것 같다. 아니, 굳이 자본주의에 반대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자유롭고 평등한 이상 사회를 갈구해 오다 근대 들어 그런 사회를 향해 '진보'하기 시작한 인류의 대장정에 비추어 볼 때 과연 그것이 올바른 선택일까? 선택은 자유지만, 다만 '두려움'과 '안주에 대한 욕구'의 발로가 아니기를 빌 뿐이다.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는 역사에 비추어 오늘을 살피는 기획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의 의미를 새겨 보았으나 새해부터는 현대 한국 사회의 현안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되새겨 볼 예정이다. 필자는 다양한 역사책을 기획하고 써 왔으며, 현재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을 맡고 있다. '편집자'

역사 오디세이
<1> 분단에 대한 배상…세 번째 8.15가 필요하다
<2> 8.29는 국치일일 뿐이다? "신한국 최초의 날"
<3> 서태지는 왜 노동당사 앞에서 발해를 꿈꿨나
<4> 김구도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 당찮은 소리
<5> 해방 공간의 '전태일'들, 망각의 늪에서 구하라

<6> '단군이 오래전 건국', 그것만 자랑할 건가
<7> 세종은 오로지 존경 대상? 세종을 질투하라
<8> 10월유신 41년…더 무서운 괴물이 솟아나고 있다
<9> 하얼빈역·궁정동…한국 근현대사 관통한 두 번의 10.26
<10> 러시아혁명의 교훈, 대중을 외면하면 진보도 없다
<11> 전태일과 박정희의 대결은 끝나지 않았다
<12> 미국이 한국 독립 낙점? 유영익의 기묘한 이승만 띄우기
<13> 개화파의 역사적 과오, 안중근이 씻어 내다
<14> 망령 되살린 수구의 '종북' 칼춤…6.29의 저주 풀어야
<15> 억압과 저항의 '선사 시대' 넘어 '민중기원'은 온다

<16> 부활하는 일제 망령…해법은 동학농민군 계승

<17> 박근혜·남재준, '푸에블로호 교훈' 잊었나

<18> 일본인들이여, 러일전쟁의 진실을 기억하라

<19> 166년 전 문서, 현대 한국의 비밀을 말하다

<20> 이것은 3.1운동이 갈구한 나라가 아니다

<21> 여성의 날, 여성 대통령 박근혜를 생각한다

<22> FTA 경제 영토 3위? 기황후가 기가 막혀

<23> 추신수 둘러싼 '가증스런 피라미드'에 대한 단상

<24> 대한민국이 한 4.3 사과, 미국은 왜 안 하나

<25> 중국·베트남에 건넬 건 '한류'만이 아니다

<26> 영웅 없는 한국 현대사, 그럼에도 위대한 이유

<27> 표류하는 세월호 진실…'탁 치니 억' 떠오르는 이유

<28> '총기 참사' 재발 방지를 위한 역사학

<29> 제일 먼저 도망친 '거짓말' 대통령이 구국 영웅?

<30> '명량' 이순신 지도력? 여당도 야당도 자격 없다

<31> 미국보다 중국 섬기는 게 낫다? 위험한 착각

<32> 근현대사 축소? 아이들 발목 잡자는 '물귀신 작전'

<33> 한국 진보, 스타만 있고 팀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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