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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보수주의자인가?"

[김기협의 자본주의 이후]<9> 연재를 끝내며

홍익표 의원실에서 의뢰받은 작업은 역사학자로서 내가 공부를 통해 떠올린 생각 중에서 정책 판단에 참고가 될 내용을 정리해 달라는 것이다. '공부'라는 일의 공적 측면보다 사적 측면을 중시해온 내게는 익숙지 않은 일이다. 공부란 것은 하는 사람이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떠난 후 25년간 혼자 공부를 해왔기 때문에 제도적 요구에 맞추는 일에 익숙지 못하다. (그 동안 연구비를 받은 작업이 꼭 한 차례 있었다.)

한편 공부한 내용을 응용한다는 전망은 무척 반가운 것이다. 나는 역사 공부의 본질적 역할이 정치의 참고에 있다고 생각하며 학문의 지나친 제도화 때문에 이 역할이 흐려지는 데 아쉬움을 느낀다. 제도의 압력은 학문을 천박한 정략 차원에서 이용하려 들거나 '정치적 중립성'을 명분으로 학문의 심층적 문제 제기를 가로막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제도권 밖에서 연구 작업을 하는 동안 칼럼과 서평 등 언론매체의 글쓰기에 활동의 비중을 두고 지내게 되었다. 이 시대에 이 사회에서 성찰을 필요로 하는 과제들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교수직을 지키면서 제도권 학회 내에서 활동을 계속했다면 내 연구 분야는 '동서교섭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도권의 관행적인 연구 분야 구분에 매이지 않은 입장에서 내가 공부해온 영역은 '문명사'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정치계에서 처음 받는 요청이지만, 생각해 보면 내 공부의 보람을 크게 느낄 수 있는 일이다. 환자의 진단에서 병력(病歷)은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지만 실제 임상에서 크게 주목받는 일이 드물다. 나타난 증세만으로도 충분한 진단이 가능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회가 병들었다고 느낄 때도 조치에 앞서 진단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개체의 질병에 비해 병력의 중요성이 크다. 증세가 대개 복합적으로 얽혀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문명사회의 학술활동에서 역사학이 큰 비중을 가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앞만 바라봐서는 현실을 볼 수 없다

1987년의 민주화 이전에는 군사독재라는 외과적 문제가 이 사회의 모든 문제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정밀한 진단이 아예 불가능했다. 현대사 연구의 봉쇄로 인해 역사의 성찰이 현재의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다. 사회의 병리적 문제들이 제대로 관찰될 기회를 갖게 된 것이 민주화의 가장 큰 혜택이다. 호소할 데 없던 환자가 의사 얼굴이라도 보게 된 셈이다. 근년 현대사 연구가 역사학 분야 중 가장 큰 발전을 본 것도 상황의 요구에 따른 일이다.

1987년 이래 지금까지 이 사회의 질병을 치유하고 건강을 향상시키기 위해 많은 이들이 큰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역사학도의 눈에는 아쉬운 감이 있다. 문제를 충분히 깊게 살펴보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병이 고황에 들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증세에만 매달리는 것 같다. 왜 눈길이 깊이 파고들지 못하고 있을까?

선진국을 모델로 보는 풍조에 이유의 상당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선진국에서는 우리가 지금 겪는 문제들을 앞서 겪어봤기 때문에 그런 문제로 파탄을 일으키지 않는 자세가 갖춰져 있다. 물론 선진국에도 새로 닥치는 문제들이 끝없이 있지만, 그 문제들이 기존의 문제와 얽혀 합병증을 일으킬 위험이 적다. 말하자면 건강상태가 좋은 사람이어서 치료의 노력이 크게 필요하지 않다. 몸이 약한 사람이 그것을 따라 치료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 그래서 있는 것이다.

선진국을 모델로 보는 한 적극적 치료가 필요하다고 보는 사람들조차 적극성에 한계가 있다. 그들은 미용적(cosmetic) 개혁이 안이하다고 비판하며 외과적(surgical) 혁명의 필요성을 외친다. 외과수술보다 더 적극적인 대책까지 모색하는 일이 드물다. 환자의 체질을 바꾸고 치료에 대한 자세를 세워주고 치유를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노력이 부족하게 된다.

선진국을 모델로 볼 때 또 하나 사고를 제약하는 문제가 있다. 선진국은 '근대화'에 먼저 성공한 나라들이기 때문에 근대적 가치기준과 사고방식에 얽매이는 경향이 강하다. 이 점이 역사의 고찰에는 한계가 된다. 근대화 이전의 문명을 '봉건'이니 '야만'이니 깔보는 관점으로는 고찰이 근대화 이후의 역사에 제한될 수밖에 없다.

내가 40년 넘게 역사를 공부해 온 목적이 지금 이 사회의 병세를 진단하는 데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문명사'로 방향을 세운 후 30년 동안의 공부도 이 사회보다는 인류문명 전체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이 사회의 병세가 심각한 단계에 와 있고, 이 사회에 집착하지 않고 쌓아온 내 공부가 지금 단계의 진단에 오히려 더 유용한 점이 있는 것 같다. '지금 여기'의 문제에 매달려온 이들에게 참고가 되기 바란다.

자연에 대한 오만을 버린다면?

이 사회의 병세를 가장 가볍게 보는 사람들은 몇몇 사람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을 비롯한 중요한 역할을 더 나은 사람들이 맡고 일하는 자세를 바로잡기만 하면 별 문제없을 것으로 본다. 이런 관점을 흔히 '보수'라 한다.

보다 깊은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제도를 바꿀 필요를 말한다. '진보'의 관점이다. 그중에는 큰 틀을 지키면서 잘못된 부품을 갈아 끼우거나 정비하는 정도의 '개혁'을 말하는 이들도 있고, 틀 자체를 바꾸는 '혁명'을 말하는 이들도 있다. 

문명사를 공부한 내 관점으로는 혁명을 말하는 '극좌'조차도 이 사회의 현실이 요구하는 변화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혁명의 모델 역시 근대문명의 '프레임(frame)'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프레임의 단적인 한계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시각을 바꾸기 어려운 것이다.

이 사회의 많은 병리적 문제의 원인으로 나는 '자유'와 '권리'에 대한 환상을 짚는다. 재벌처럼 특별한 사람들이 아랫집 개 짖는 소리 시끄럽다고 야구방망이 휘두르는 자유나 승무원이 마음에 안 든다고 램프 떠난 비행기를 되돌리는 권리는 꼴 보기는 민망하지만 있을 법한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재산도 적고 사회에 대한 공헌도 작은 나 같은 사람까지 그들과 같은 수준의 자유와 권리를 누리겠다는 것이 가당한 일일까?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상당한 수준의 자유와 권리를 누려야 한다면 인간 이외의 존재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가 존재해 온 수십만 년 동안은 물론, 문명을 가진 '만물의 영장'으로 지내 온 수천 년 동안에도 인간이 자연에 대해 이처럼 오만한 태도를 보인 일이 없었다. 19세기 사람들은 인간이 과학을 발전시킨 업적 때문에 오만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학을 더 발전시킨 21세기에 와서는 과학을 잘 이해하는 사람일수록 종래의 오만을 깊이 반성하고 있다.

계몽주의 시대 이래의 인권사상은 '자연 정복'의 꿈 위에 세워졌고, 과학의 한계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한다면 거두어야 할 환상의 거품이 많이 끼어 있다. 18세기 이후 유럽에서 발전시킨 모든 정치사상에는 이 기준에 따른 재검토가 필요하다. 자본주의만이 아니라 공산주의, 사회주의, 심지어 민주주의까지도 모두 재검토를 필요로 한다. 

재검토의 기준을 다듬어내기 위해 전통시대의 가치관과 정치 원리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폐기된 지 오래된 가치관과 원리를 오늘의 세상에 그대로 복원할 수는 물론 없다. 하지만 자연과의 관계를 환상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던 자세를 배워야 한다.

한 가지 예가 '봉건적' 사회조직방법이다. 보호와 충성의 개인적 종속관계를 중층적으로 결합하는 봉건체제는 계몽주의사상의 '천부인권' 기준으로 미개한 제도다. 그래서 근대인은 '봉건'을 '야만'과 거의 동의어로 생각했다. 그러나 하늘이 인간에게 그런 권리를 내린 일이 없다면? 인간은 자연의 제약을 감수해야 할 것이고, 그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각자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개인주의 원리보다 소규모 공동체 내에서 갈등을 분담하는 봉건 원리에서 배울 점이 있다. 

내가 보수주의자인 이유

혼자 틀어박혀 공부하고 지낼 때는 내 정치적 입장에 대해 누구도 문제 삼을 일이 없었다. 2008년 <뉴라이트 비판>을 발표할 때 비로소 입장을 밝힐 필요를 느꼈다. 굳이 따진다면 진보보다는 보수 쪽 같아서 그 이후 '보수주의자'를 자처해 왔다. 

변화의 필요를 크게 보는 것이 진보주의고 작게 보는 것이 보수주의다. 그런데 나는 사람이나 제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유, 인권 같은 가장 기본적인 정치적 가치의 재검토를 주장하고 있으니 변화의 필요를 누구 못지않게 크게 보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도 어떻게 보수주의자를 자칭할 수 있는가?

나는 진단에 과격하지만 처방에서는 온건하다. 2009년 중에 쓴 칼럼을 모아 책으로(<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낼 때도 이 점을 생각하며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나는 정말 이 세상에 근본적인 불만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분노와 고통과 슬픔이 넘치는 세상이긴 하지만 인간세상이 원래 그런 것 아닌가? 그런 것 다 겪으면서도 대개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 아닌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람들 말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분노와 고통을 오히려 불필요하게 늘리기 쉬운 일에 따라 나설 마음은 들지 않는다.

나 자신 불만이 매우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근년에 얻은 편안한 마음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리라. 나 자신을 확! 바꾸고 싶은 마음이 많았기에 이 세상이 바뀌었으면 하는 욕심도 강했을 것이다. 지금은 더 풍족한 생활도 바라지 않고 더 훌륭한 사람 되고 싶지도 않고, 그저 편안하게 살고 싶다. 그러기에 사회에 대해서도 더 풍요로운 세상이나 더 정의로운 세상보다 그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조건만을 생각하는 것일 게다.
 
이 세상에 근본적인 불만이 없기 때문에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게 된다. 근본적인 불만이 있다면 더 좋은 원칙을 세우기 위해, 그리고 잘못된 상식을 바로잡기 위해 애쓰는 진보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사회의 '현상'에 큰 문제를 느끼면서도 대다수 사람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원칙과 상식에 만족한다.

문제는 원칙과 상식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는 데 있다. 표현되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에 작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유'와 '인권'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절대자유'와 '절대인권'은 보통사람의 원칙과 상식을 벗어나는 환상이다. 이런 허깨비들이 세상을 휩쓸고 있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 현상이다. 이 현상을 해명함으로써 원칙과 상식으로부터 환상의 거품을 걷어내는 것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다.

내가 원하는 변화가 어떻게 보면 큰 것이지만, 없는 것을 만들어내자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살려내자는 것뿐이다.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지만 바뀐 세상이 완벽할 것을 바라지 않는다. 어차피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제 몫의 고통을 겪으며 살더라도, 불필요한 고통까지 자초하게 하는 '근대적' 환상에서 벗어나기 바랄 뿐이다. 변화에 대한 욕심을 스스로 줄이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는 보수주의자를 자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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