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제가 활동하는 녹색당에서 청와대를 상대로 정보공개청구를 해 본 경험이었습니다.
녹색당이 공개청구한 정보는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비서실과 국가안보실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고 지시를 받은 내용, △청와대에서 생산하거나 접수한 정보목록, △청와대에서 사용하는 예산집행 관련 정보 등이었습니다.
그래도 정보공개법(정식 명칭은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이 1998년부터 시행된 국가인데, '어느 정도는 공개가 되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기대는 처참하게 깨졌습니다. 청와대는 세월호 참사 관련 정보는 물론이고, 예산집행 관련 정보도 전혀 내놓지 않았습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정보공개법에 의해 의무적으로 공개하게 되어 있는 '정보목록'마저도 공개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정보공개법을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정보목록'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실 겁니다. 정보목록이란, 해당 공공기관에 어떤 정보가 있는지를 시민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작성해서 공개하도록 의무화되어 있는 목록입니다. 그에 따라 중앙부처, 지방자치단체 모두 정보목록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청와대는 '정보목록'조차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결국 청와대는 국민들에게 아무것도 공개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홍보하고 싶은 것만 홈페이지에 올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행정소송을 제기해 법원의 판단을 받기로 했습니다. 어쨌든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수준을 다시 돌아보게 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공약으로 '정부 3.0'을 추진하겠다고 했습니다. 정부의 투명성을 강화하겠다며, '정부 3.0' 사이트도 구축을 했습니다. 아래 링크에 들어가 보면, 정부 3.0에 대해 엄청난 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청와대는 '정부 3.0'은커녕, '정부 1.0'도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아래 '정부 3.0' 사이트를 들어가 보더라도, 청와대만 쏙 빠져 있습니다.
청와대도 정보공개법의 적용을 받는 기관입니다. 청와대도 시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입니다. 그런데 청와대는 스스로를 법 위에 군림하는 기관으로 생각하나 봅니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일도 최근에 겪고 있습니다. 바로 삼척 원전 문제입니다. 청와대는 그나마 존재하는 민주주의 제도를 훼손하고 있지만,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민초들이 삼척에서 분투하고 있습니다. 오늘(10월 9일) 강원도 삼척에서는 민간 차원의 주민투표가 실시됩니다. 대한민국 최초로 원전 유치에 대해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입니다.
저는 주민투표를 준비하는 분들을 지지하는 의미에서 최근 삼척을 방문했습니다. 휴일인 10월 3일에 삼척을 방문했을 때, 삼척 시내 곳곳은 현수막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현수막의 내용은 모두 주민투표를 통해 삼척 시민들의 뜻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삼척 시민들은 삼척 원전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지역 민주주의가 상실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김대수 전임 삼척시장이 일방적으로 원전 유치를 밀어붙였고, 지역에서는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말하기도 힘든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원전 유치의 근거로 제출된 주민서명조차도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삼척 원전을 유치하겠다면서 제출된 주민서명부는 실종된 상황입니다. 무려 96.9퍼센트(%)의 주민이 서명했다는 이 서명부가 사라진 것입니다.
최근 <경향신문>에서 이 문제를 보도했는데, 한마디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이런 식으로 삼척 원전 유치는 엉터리 절차, 비민주적이고 일방적인 방식으로 추진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비민주적인 과정을 거쳐 원전 유치가 추진되었지만, 원전에 반대하는 삼척 시민들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촛불집회를 하고, 시장 주민 소환을 추진하고, 그리고 지난 지방선거에서는 반핵을 내세운 시장을 당선시켰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민투표는 그동안 삼척시민들이 겪어온 설움과 분노를 '투표'라는 민주적 방식으로 표출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과연 오늘(10월 9일) 삼척에서 얼마나 투표율이 나올지, 그리고 찬·반 의견 분포는 어떻게 나올지가 벌써부터 관심사입니다.
현장에서 활동하시는 분들 얘기를 들어보니, 민간에서 추진하는 주민투표여서 투표인명부(선거인명부와 유사한 것입니다)를 작성하는 게 가장 어렵다고 합니다.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법령이 까다로워져 일일이 개인의 동의를 얻어 투표인명부에 이름을 올리는 식으로 투표인 명부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주민투표 준비는 풀뿌리 민초들의 힘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중앙정부의 태도입니다. 중앙정부는 투표도 하기 전부터, 원전건설은 주민투표 대상이 아니라는 얘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지난 9월 26일 조석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은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투표결과가 법률적으로 효력을 미칠 수 없다"고 발언하기도 했습니다.
몇 차례 <주간 프레시안 뷰>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외국에서는 원전과 관련해서 국민투표나 주민투표를 실시한 국가들도 많습니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웨덴 등은 국민투표를 했습니다. 이웃 일본에서도 주민투표를 실시한 사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대한민국은 원전에 대해 국민투표도 안 되고 주민투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민투표법이 있지만, 중앙 정부가 하고 싶은 주민투표는 해도 되고, 지역주민들이 원하는 주민투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법을 운영합니다. 2012년 10월 경남 남해에서는 화력발전소 건설에 관한 주민투표를 실시한 사례가 있는데, 지금 중앙정부 논리에 따르면 화력발전은 되고 원전은 안 된다는 셈입니다.
이처럼 삼척 주민투표도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위로 갈수록, 중앙으로 갈수록 민주주의가 안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희망은 풀뿌리 민초들에게서 발견됩니다.
중앙정부의 방해, 그리고 선관위의 주민투표 거부에도 불구하고, 직접 주민투표를 만들어가는 삼척 시민들이 민주주의의 희망입니다.
<주간 프레시안 뷰>는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만의 차별화된 고급 칼럼지입니다. <프레시안 뷰>는 한 주간의 이슈를 정치/경제/국제/생태/세월호 등으로 나눠 각 분야 전문 필진들의 칼럼을 담고 있습니다.
정치는 임경구 프레시안 기자 및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번갈아 담당하며, 경제는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국제는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이 맡고 있습니다. 생태와 세월호는 각각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과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원장이 격주로 진행합니다.
이 중 매주 한두 편의 칼럼을 공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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