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적 여성을 대통령에 당선시킨 주체들은 '한국 민주주의의 진화'를 자랑했습니다. 생물학적 여성이 사상 첫 교섭단체 원내대표에 오르자 '언니 리더십'을 기대한 신문 보도도 기억합니다. 입지전적인 여성 정치인들에 대한 기대는 '양박(朴) 시대'라는 말이 함축했습니다. 여성 권력 이상의 '여성 정치'에 대한 기대, 성적 희소성 차원을 뛰어넘어 뭔가 새로운 정치의 구현에 대한 갈망의 투사였으리라고 짐작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박근혜 대통령과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에게 '유리 천정'을 깬 공적 이상을 바라는 건 이제 무리인 듯싶습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깬 유리 천정을 대신해 '아이언 돔'을 구축하려 합니다. 난공불락의 철옹성을 쌓으려는 것 같습니다. 그가 지난 16일 국무회의와 새누리당 지도부 회동에서 보여준 모습은 절대군주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세월호 문제에 관한 오랜 침묵을 깬 박 대통령의 일성은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라는 유가족들의 요구를 단칼에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지난 154일 동안 하루하루를 4월 16일로 살아온 유가족들의 상처를 다독이려는 단 한 마디의 수사조차 없었습니다. "순수한 유가족" 운운하며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이들을 체제도전적인 불순세력으로 낙인찍었습니다.
"삼권분립"을 말하면서도 세월호특별법 2차 합의안이 "마지막 결단"이라고 새누리당 수뇌부에 '가이드라인'을 내렸습니다. 검찰에겐 '명예 회복'을 거론하며 유언비어 단속을 주문하는가 하면, 세월호 참사 당일 자신의 행적과 관련한 '7시간 미스터리'에 대해선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이 도를 넘고 있다"는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드러냈습니다. 국회의원들을 조롱하는 듯이 세비를 반납해야 한다는 말까지 했죠. 한마디로 가뜩이나 비좁은 세월호 정국 출구에 커다란 바윗덩이를 얹어 틀어막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와 행정부는 물론이고 새누리당을 한 손에 틀어쥔 여권의 '오너'입니다. 오너의 공개적인 지침에 새누리당 지도부는 연신 조아리는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김무성 대표는 "대통령이 혼신을 다하고 계신데 도와드리지 못해 대단히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이완구 원내대표는 "더 이상 국회를 공전으로 둘 수는 없어서 단호한 입장에서 처리하려고 한다"며 단독 국회도 불사하겠다는 의사를 비췄습니다. 이런 분위기와 맞물려 교육부는 전국 시도교육청에 '노란 리본 달기'를 불허하라는 지침을 내렸습니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일방적으로 정기국회 의사일정을 공표했음에도 이조차 성에 안 찼는지 새누리당은 국회선진화법을 이참에 뜯어고칠 심산입니다. 정의화 의장을 상대로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몸싸움과 날치기를 없애자는 취지에서 마련한 국회선진화법은 새누리당이 주도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자기들 손으로 만든 국회 운영의 원칙을 스스로 부정하고 헌재에 떠넘기는 못난 짓을 어떻게 이렇게 당당하게 하는지 놀랍습니다. 모두 '박근혜 표 법안'들의 일사천리 처리를 위한 시도입니다.
박 대통령의 초강경 발언에 대해선 여권 일각에서도 비판이 나옵니다. 이재오 의원은 "쪽박을 깨면 안 된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출구까지 막으면 안 된다"고 반박했습니다. 또한 "협상이란 건 끊임없이 서로 양보를 통해 결실을 이뤄내는 건데 청와대가 이게 마지막이라고 하면 더 이상 정치할 게 없다"고 했습니다. 지리멸렬한 야당의 상황을 틈타 마치 군사 작전 하듯이 밀어붙이는 박 대통령의 모습에 여당의 중진의원조차 혀를 찬 거죠.
절대군주로 현화한 박 대통령은 세월호 출구만 틀어막은 게 아닙니다. 잇따른 증세안을 쏟아내면서도 증세 논쟁 자체를 이상하게 왜곡시켜버렸습니다. 정부는 담뱃값 인상, 정확히 말하자면 '담뱃세 인상'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주민세와 자동차세를 올리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서민들의 지갑을 털어 펑크 난 세수를 메워보려는 거죠. 담뱃값이 4500원으로 오를 때 세수증대 효과가 가장 크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듯이 이번 담뱃값 인상안의 목적은 세수 증대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과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국민건강 증진 차원"이라며 '서민 증세' 비판을 못 들은 척 합니다. 증세를 인정하는 순간 이명박 정부가 '대기업 프렌들리'로 추진했던 ‘부자 감세’를 되돌려놓으라는 요구에 직면할 테니까요. 최경환 부총리는 법인세 인상에 대해선 "경제주체들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증세를 하게 되면 경제를 위축시키는 문제가 있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러니 대기업 눈치 보느라 조세 저항이 크지 않은 간접세로 장난을 친다는 비판이 나오는 겁니다.
먼저 '증세 없는 복지'가 불가능함을 인정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복지 계획을 마련하고 부자 감세를 철회한 뒤에 서민들도 증세에 동참해달라고 설득했으면 애연가들의 속이 이리도 쓰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소통도 솔직함도 없이 현대판 인두세, 죄악세를 거두려 하니 '꼼수 증세' 논란 속에 증세 논쟁 자체가 들어설 자리를 잃어가게 되는 겁니다. 세금 더 걷지 않고 복지를 실현시켜주겠다던 박 대통령에게 속은 서민들은 이제 '복지 없는 증세'의 시대를 견뎌야 할 판입니다.
세월호 문제와 담뱃세 인상 등에서 드러난 박 대통령의 공격성은 2016년 4월 총선까지 전국단위 선거가 없는 정치 일정에 바탕합니다. 시기적으로 박 대통령의 임기 2~3년 차에 해당하는 '무(無)선거 기간'동안 국정의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에 집중하겠다는 방향에는 누구나 동의하지만, 출혈적인 재정확대와 부동산 경기 부양에 기댄 경제 활성화 정책이 서민들에게 이로운 결과를 가져다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박 대통령은 무선거 기간을 맞아 거침없이 악셀을 밟아대는 역주행 과속이 문제라면, 야당은 시동이 꺼져 도로 한 가운데 멈춰 선 고장 난 자동차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런 민폐가 또 없습니다. 선거 없는 21개월이 야당에게 꼭 불리하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거덜 난 밑천을 채우고 무너진 대들보와 내려앉은 지붕을 수리할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상한 각오로 당 혁신에 나서겠다던 박영선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는 탈당 운운하며 사흘간 잠적해버리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박영선 원내대표의 정치력은 바닥을 드러냈고 고질적인 계파 갈등은 백약이 무효라는 진단을 받기에 이릅니다. 지난 11년 간 무려 28명의 대표가 교체되었던 '어마무시'한 전력을 가진 새정치민주연합은 이제 임시지도부조차 조기 붕괴하는 최악의 리더십 진공상태에 빠졌습니다.
비대위원장 자리는 내려놓았으나 원내대표직을 한시적으로 유지키로 한 박 원내대표가 세월호특별법 협상을 제대로 마무리 지을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이미 두 번의 협상 실패의 멍에를 진 당사자인 데다 이번 탈당 소동으로 리더십의 바닥을 드러낸 그가 "세월호특별법에 마지막 혼신의 힘을 쏟겠다"고 한들 힘이 실릴 리 만무해 보입니다. 세월호특별법은 이제 박 대통령이 국회의 자율성을 틀어막은 '가이드라인' 안에서 매듭 되거나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기약 없이 장기 표류하는 최악의 선택지만 남은 듯이 보입니다.
세월호특별법도 문제이지만 '이상돈 파동'이 '박영선 파동'으로 번진 과정은 새정치민주연합이 정당으로서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느냐는 데에 회의를 심어준 점에서 문제가 심각해 보입니다. 이상돈 교수가 당의 정체성에 맞는 인물이냐 아니냐는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사활을 걸고 싸울 일은 아니었다는 생각입니다. 그가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공을 세운 상징적 인사라고 할지라도 정식 지도부가 아닌 비대위원장의 실질적 역할은 다음 전당대회의 룰을 정하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불과 몇 달 간의 임기 동안 새정치민주연합을 수권의 비전과 대안 제시 능력을 가진 정당으로 탈바꿈시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하기에 이상돈 영입을 둘러싼 거창한 노선 논쟁은 현실적인 의미를 갖기 어려운 말싸움에 불과했고, 실제는 전당대회 룰을 둘러싼 계파 간 이해관계의 충돌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겁니다. 문재인 의원에게 사전에 동의를 구한 문제로 왜 뒤통수를 치냐며 토라진 듯이 잠적해버린 박 원내대표나 누구든 당 대표로 올려세운 뒤엔 흔들어 떨어뜨리는 계파들의 이중 정치가 새정치민주연합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 거죠.
박 원내대표가 "원로 고문들의 간절한 요청"이라며 탈당 의사를 접고 당무에 복귀하는 과정도 보기에 딱했습니다. 그는 "당이 백척간두에 서있다"면서 "60년 전통의 뿌리만 빼고 끊임없이 혁신해서 바뀌어야 한다"고 힘을 줬으나 자신을 흔든 세력에 대한 억울함만 잔뜩 배인 말로 들렸습니다.
나흘간의 '박영선 파동'은 이 같은 소극으로 끝났지만, 새정치민주연합은 너무 익숙한 패턴으로 사태를 봉합하는데 급급해 보입니다. '질서 있는 퇴각'은 현상 유지를 포장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다음 비대위원장으로 거론되는 계파 대리인들은 '관리형 체제'라는 익숙한 방식으로 바닥을 헤맬 겁니다. 그렇게 전혀 비상하지 않은 비상대책위의 시기가 끝나면 다음 총선 공천권에 혈안이 된 계파들의 '동족상잔'이 반복될 겁니다. 야권 발 정계 개편설이 잠시 주목받았지만, 새정치민주연합은 현재 쪼개질 능력조차 없다는 게 가장 큰 비극입니다.
<주간 프레시안 뷰>는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만의 차별화된 고급 칼럼지입니다. <프레시안 뷰>는 한 주간의 이슈를 정치/경제/국제/생태/세월호 등으로 나눠 각 분야 전문 필진들의 칼럼을 담고 있습니다.
정치는 임경구 프레시안 기자 및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번갈아 담당하며, 경제는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국제는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이 맡고 있습니다. 생태와 세월호는 각각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과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원장이 격주로 진행합니다.
이 중 매주 한두 편의 칼럼을 공개하고자 합니다.
※ 창간 이후 조합원 및 후원회원 '프레시앙'만이 열람 가능했던 <주간 프레시안 뷰>는 앞으로 최신호를 제외한 각 호를 일반 독자도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주간 프레시안 뷰> 내려받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