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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주가 조작, 그 뒤에 정보 당국이 있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56> 제3공화국의 탄생, 세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일곱 번째 이야기 주제는 제3공화국의 탄생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5.16쿠데타, 첫 번째 마당] 박정희 쿠데타 연재는 왜 그 신문에서 사라졌나

[5.16쿠데타, 두 번째 마당] 오랜 꿈 이룬 '박통'…대한민국은 짓밟혔다

[5.16쿠데타, 세 번째 마당] 박정희는 왜 한국인의 '노예근성'을 주목했나

[5.16쿠데타, 네 번째 마당] 청와대·참모총장의 위험한 선택…헌법은 죽었다

[5.16쿠데타, 다섯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 미국이 개의치 않은 이유

[5.16쿠데타, 여섯 번째 마당] 정치 깡패 이정재는 진정 죽어 마땅했나

[5.16쿠데타, 일곱 번째 마당] 나라 구한 박정희? 장준하는 왜 그리 판단했나

[5.16쿠데타, 여덟 번째 마당] 청와대 '부정 선거' 앞잡이, 정보부…어쩌다?

[5.16쿠데타, 아홉 번째 마당] '전 재산 헌납' 삼성 약속은 왜 물거품이 됐나

[5.16쿠데타, 열 번째 마당] 박정희 거듭 구한 은인, 제대로 뒤통수 맞다

[5.16쿠데타, 열한 번째 마당] '박통'의 특별한 선배, 왜 간첩으로 죽어야 했나

[5.16쿠데타, 열두 번째 마당] '장면 맹비난' 박정희, 사실은 대부분 따라 했다

[제3공화국, 첫 번째 마당] '가만있어라' 강조한 '박통', 은밀히 뒤통수쳤다

[제3공화국, 두 번째 마당] '구악 쇼' 박정희, '적폐 쇼' 박근혜…닮은꼴 부녀

프레시안 : 5.16쿠데타 세력은 기성 정치권 등을 구악으로 몰아붙이고 자신들은 깨끗하고 참신한 세력이라고 내세웠다. 이러한 쿠데타 세력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 대표적인 사건이 4대 의혹 사건이다.

서중석 : 1962년 말 시중에 파다하게 나돌던 게 있다. 사전 조직한 신당의 정치 자금 때문에 우리 경제가 망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게 나중에 그 악명 높은 4대 의혹 사건이 되는 것이다. 이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얘기된다. 1963년 초 김재춘이 중앙정보부장이 되면서 신문에 공개되고 그런다. 그러니까 지난번에 얘기한 이원 조직 중심의 사전 조직이라든가 다른 여러 조치들을 4대 의혹 사건과 표리 관계 속에서 살펴보지 않으면 이 당시 정국, 특히 1962년 말에서 1963년 초에 왜 그렇게 정국이 무섭게 폭풍 속에 휩싸이게 되는가를 이해하기 어렵다.

4대 의혹 사건은 증권 파동, 새나라자동차 사건, 워커힐 사건, 회전 당구기 사건('파친코' 사건)이다. 새나라자동차 사건을 먼저 보자. 한국은 지금 세계적인 자동차 국가 아닌가. 자동차 국가가 된 원조는 시발택시에 있다고 써놓은 글들이 있다. 박현채의 <민족 경제론>에도 이 시발택시가 나온다. 미군들 차에서 여러 부품을 빼다가 만든 택시 또는 미군 지프차를 개조해서 만든 택시라고들 이야기한다. 하여튼 한국인들 솜씨로 이렇게 스스로 조립을 하면서 자동차 산업에서 한 단계 나아가는 방향으로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최초의 국산 차인 시발 자동차는 1955년 탄생했다. 영업용 택시로 널리 쓰였고,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 이 차를 사기 위한 '시발계'까지 생겨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편집자>)

그런데 김종필은 '시발택시가 볼품이 없으니까 날씬한 일본산 소형차를 들여와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1961년 12월경에 일제 부분품을 수입해서 국내에서 조립한다는 명분으로 중앙정보부에서 새나라공업주식회사 설립을 추진했다. (이 회사는 1962년 설립됐다. 박노정이라는 재일 교포가 표면에 나섰지만 그 뒤에는 중앙정보부가 있었다. <편집자>) 그런데 부분품을 수입해서 조립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완제품 승용차를 면세로 들여왔다. 처음엔 250대를 들여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나중엔 계속 늘어서 2000여 대가 됐다.

한 대당 수입 원가를 그 당시 돈으로 13만 원으로 보고 있다. 이걸 얼마에 팔았느냐 하면, 25만 원으로 국내에서 판 것으로 돼 있다. 여기서 당시로서는 아주 큰돈인 2억5000만 원이라는 부당 이익을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챙긴 것으로, 그 돈을 민주공화당 사전 조직 공작과 야당 분열을 하는 데 쓴 것으로 돼 있다. 이러한 새나라자동차가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시발택시는 시골로 밀려나게 되고 우리나라 자동차 공업도 한동안 어렵게 됐다. (1962년 5월 31일, 최고회의는 자동차공업보호법을 만들었다. 이 법에는 외국산 자동차와 그 부품의 수입을 제한할 수 있다는 항목과 함께 자동차 시설재 및 부품 수입 관세 면제, 자동차세와 취득세 감면 등의 내용도 담겨 있었다. 새나라자동차는 이 법에 근거해 다양한 세금 혜택을 누렸다. <편집자>)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검은돈에 눈멀어 경제와 법 뒤흔든 4대 의혹 사건

프레시안 : 한국 최초의 자동차 고유 모델은 1974년 현대자동차에서 만든 포니다. 포니는 1976년 국산 자동차 수출 시대도 열었다. 새나라자동차 문제가 불거진 후 10년 넘게 지난 시점이다.

서중석 : 그렇다. 이번엔 워커힐 사건을 살펴보자. 군사 정권에서 압력을 가해 서울 광장동 광나루 위 임야를 싼값으로 차지했다고 한다. 여기다가 월튼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딴 고급 관광호텔을 역시 중앙정보부 고위 간부가 주도해서 짓게 된다. (워커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세상을 떠난 미군 장군이다. <편집자>) 이 과정에서 상당히 복잡한 주식 처리니 정부 지주니 하는 게 얘기되고 그런다. 당시 최고회의 감찰위원장, 지금 감사위원장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요직에 있던 채명신 이 양반의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에 이런 것들이 잘 나온다.

이 워커힐 공사 자금을 조달할 길이 없자 중앙정보부의 담당 국장 석아무개가 재무부에 압력을 가해 산업은행으로 하여금 융자를 해주도록 했고 각 군 병력 등 3만여 명과 4000여 대의 장비를 동원해 공사를 벌였는데, 각종 법규가 무시되고 불법으로 한 것이라고 채명신은 밝혔다. 석아무개라고 돼 있는데, 김종필과 동기인 육사 8기 석정선이다. (불법 동원 인원 규모가 2만4000여 명으로 나오는 기록도 있다. 1963년 4월 4일 <동아일보>는 석정선 등이 1962년 1월부터 1년여 동안 건설부와 교통부의 기술직, 육군 교도소에 수감 중인 복역수, 해군과 공군의 기술 요원 등 연 2만4000여 명을 워커힐 공사에 동원했다는 사실이 수사 결과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수치는 약간 다르지만 명백한 직권 남용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편집자>)

시공업자와 발주자 사이에 거액의 커미션이 오갔고, 건축자재도 민주공화당사 보수 자재와 같아서 온갖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막대한 공사 자금을 모측에서 횡령했을 뿐 아니라 건설용 자재 가운데 예컨대 나이트클럽의 회전 무대부터 전기 장치, 심지어 시멘트까지 일제 수입품을 무검사 무관세로 들여왔다고 돼 있다.

'파친코' 사건, 회전 당구기 사건이라는 건 4대 의혹 사건 중에서 제일 규모가 작다. 장면 정권 때 이미 500대를 일본에서 들여왔었다고 한다. (1967년 5월 25일 자 <매일경제>에 따르면, 4월혁명 후인 1960년 8월 10일 "오 영감"이라는 재일 교포가 '파친코'를 처음으로 국내에 들여왔다고 한다. <편집자>) 그러나 이건 바로 금지된다. 우리나라는 도박에 대해선 상당히 강한 알레르기 반응이 있지 않나.

그런데 5.16쿠데타 후 중앙정보부가 관계하면서 2527대를 들여왔다고 한다. 이게 문제가 된 것은 '파친코' 업자들이 시세보다 엄청 비싼 고가로 이걸 들여왔고 그 과정에서 뇌물이 수수료 형태로 중앙정보부로 넘어갔는데, 아 1962년 10월 25일 내각에서 돌연히 '파친코' 놀이 시설에 대해 폐쇄 조치를 한 것이다. 그러니까 업계에서 '이럴 수가 있느냐'고 들고일어났다. 그러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 중앙정보부는 탄생부터 정권 안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안기부, 국정원으로 이름이 거듭 바뀌었지만 그 체질도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들이 의문을 품고 있다. ⓒ연합뉴스

주가 조작해 국민 등친 작전 세력…구악 뺨치는 신악

프레시안 : 증권 파동 차례다. 작전 세력이 주가를 조작해 국민들을 등쳐 먹은 사건이다. 이 문제 역시 중앙정보부를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서중석 : 우리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고, 좀 커보려는 증권 시장을 망쳐놓은 것은 그 유명한 증권 파동이다. 이게 제일 심한 파란을 일으켰다. 이것에 대해 전문적인 설명을 해놓은 것이 여러 개 있는데, 역시 제일 쉬운 것은 나중에 주월 한국군 사령관을 하는 채명신이 쓴 것이다.

감찰위원장 채명신이 감사를 해보니, 증권 파동은 중앙정보부 간부인 강모, 그리고 통일·일흥증권의 윤모 사장이 협잡해 벌인 조작극이었다. 윤 사장은 중앙정보부 강 소령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1962년 2월부터 5월까지 주가를 엄청나게 올려놓고는, 개미 군단이 몰려들자 상투에서 팔아 30억 환을 모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때는 화폐 개혁(1962년 6월) 직전이라 아직 환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강 소령의 압력으로 윤 사장은 기관들이 보유하던 한전 주를 1만5813원70전에 불하를 받았는데, 이게 6만 원까지 치솟았을 때 내다 팔았다. 또 증권거래소는 액면가 50전에도 미달하는 38전짜리 대증주를 폭발 장세를 틈타 액면가의 29배인 14환50전에 공모 증자를 하기도 해서 민주공화당 창당 멤버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줬다. 채명신 책에 그대로 나오는 내용이다.

이렇게 되니까 일반 투자자들도 돈을 벌려고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고 한다. 급기야 그해 5월부터 7월에 가면 수도(受渡) 결제 불능이란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져 5000여 명의 선량한 투자자들이 피해를 봤다. 그래서 증권거래소에 정부가 특별 융자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모든 거래를 무효로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간신히 수습했으나 6월에 통화 개혁이 있지 않았나. 그러다보니 휴장에 들어가 버리는 불상사까지 있었다며 채 장군이 아주 개탄해 마지않는다.

이 선의의 투자자, 5242명으로 나오는데 이 사람들은 엄청난 피해를 봤다. 파동을 일으킨 자들은 재판에 회부됐다. 그런데 1963년 6월 27일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에서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래서 김재춘 회고담을 보면, 온 국민이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고 나와 있다.

(강모는 중앙정보부 연구실 행정관이던 강성원 소령, 윤모는 윤응상이다. 증권 파동과 중앙정보부의 관련성을 지적한 건 채명신만이 아니다. 중앙정보부 자체 조사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1963년 3월 6일 자 <동아일보>는 4대 의혹 사건을 수사 중인 중앙정보부 특별조사위원회가 증권 파동 관련자로 12명을 구속하고 1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보도했다. 이 13명 중 3명(강성원, 중앙정보부 관리관 실장 정지원, 중앙정보부 전 차장 이영근)이 중앙정보부 쪽 인사였다. 대선을 석 달여 앞두고 "원인 없는 의혹으로 국가를 소란케 하는 일이 근절돼야 한다", "강성원, 이영근, 정지원 피고인들은 증권 시장 육성으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수행을 위한 내자 동원이라는 국가 시책에 순응, 애국적 충정으로 한 것"이라며 무죄를 선고한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의 판결에 수많은 국민이 배신감을 느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강성원, 이영근은 석정선 등과 함께 김종필의 측근으로 꼽히던 인물이다. 이와 관련, 2005년 <한겨레>는 1963년 당시 사건 송치서를 입수해 '김종필이 증권 파동을 주도했다'고 보도했다. 4대 의혹 사건을 수사한 김재춘의 중앙정보부가 김종필 전 부장이 증권 파동을 주도한 사실을 밝혀냈지만, 김종필을 외국에 보낸 뒤 은밀히 기소 중지 처분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채명신 "중정, 부패의 온상…마적단처럼 재물 나눠 먹자고 거사했나"

프레시안 : 채명신은 5.16쿠데타에 동참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중앙정보부 문제까지 손을 대면서, 쿠데타 실세인 육사 8기들과 소원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서중석 : 제5사단장이던 채명신이 1961년 7월 감찰위원장을 맡은 건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었다. '네가 군에 있으면 8기가 불안해 한다'며 박정희가 불러들인 걸로 돼 있다. 그때 분위기가 그랬다. 그러니까 좋은 자리 하나 준다고 하면서 억지로 끌고 나온 것이었다. 채명신은 안 하려고 했다. 군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했다. 감찰위원장을 하고 나서 바로 군에 다시 들어간다. 채명신은 정치인 같은 기질은 없고 우직한 군인이었다.

(1996년 7월 1일 자 <경향신문>에 게재된 채명신 회고에 따르면, 채명신은 군 복귀를 조건으로 감찰위원장 자리를 맡았다. 당시 상황을 채명신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혁명 세력을 감찰 대상 1호로 정했다. 국영 기업체 장으로 나간 군 출신 인사 중에 비리와 비행을 저지른 사람들을 솎아냈다. 권력의 실세이던 중앙정보부(부장 김종필)까지 손댔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5.16정권의 증권 파동 등 4대 의혹 사건에 빠짐없이 관여하는 등 부패의 온상이자 복마전의 극치였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4대 의혹 사건 등을 철저히 조사하는 채명신을 찾아가 항의하는 일도 벌어졌다. <국방일보> 2007년 8월 29일 자에 실린 채명신의 또 다른 회고에 따르면, 김종필은 "선배님이 혁명 동지들을 감싸주셔야지 자꾸 목을 치면 불안해서 어디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채명신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거사한 것은 마적단처럼 약탈한 재물을 나눠 먹자고 한 게 아니오. (…) 못된 짓을 하는 자는 동지가 아니라 적이오. 듣기로는 당신들이 전방에 있는 나를 끌어냈다고 알고 있소. 전방에 있을 때도 불안하다고 하고, 감찰위원장으로 와도 불안하다고 하니 어쩌자는 것이오? 난 주어진 직책이니 부정부패 척결에 매진할 뿐이오." 훗날, 채명신은 박정희의 유신 쿠데타에 반대했다. 그리고 1972년 그해 군복을 벗어야 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4대 의혹 사건을 일으킨 5.16쿠데타 세력에 대해 세간에서는 '구악 뺨치는 신악'이라고 비판했다. 민주공화당 사전 조직, 정치활동정화법 등에 더해 4대 의혹 사건으로 자금을 모은 쿠데타 세력의 핵심 인사들은 민정에 참여해 권력을 계속 잡겠다는 뜻을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서중석 : 이렇게 4대 의혹 사건으로 알려진, 참 우리 경제에 짙은 어둠을 드리운 사건까지 일으키면서 나중에 민주공화당으로 알려진 신당을 만들게 된다. 만반의 준비를 다 갖췄다고 생각해서인지 1962년 10월 8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박 의장이 다음 대통령 선거에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같은 달 30일에는 이후락 공보실장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등 혁명 주체 세력의 민정 참여는 기정사실이다', 이렇게 밝혔다.

그다음에 박정희가 대답할 차례다. 1962년 12월 27일 박정희 의장은 '1963년 1월 1일부터 정치 활동을 허용하겠다. 대통령 선거는 4월 초에 치르고 총선은 5월 말에 하겠다. 그리고 민정 이양식은 8월 중순에 하겠다. 최고위원들과 자신은 군복을 법고 장외로 나가겠다'고 했다. '8월 중순'이면 8.15 아니겠나. '모든 준비를 갖췄으니 우리가 다음 정권을 맡겠다'는 것을 마음속에 깔면서 본격적으로 민정 이양으로 가겠다고 했는데, 엄청난 폭풍이 밀어닥치고 있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쉰일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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