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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악 쇼' 박정희, '적폐 쇼' 박근혜…닮은꼴 부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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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구악 쇼' 박정희, '적폐 쇼' 박근혜…닮은꼴 부녀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55> 제3공화국의 탄생, 두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일곱 번째 이야기 주제는 제3공화국의 탄생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5.16쿠데타, 첫 번째 마당] 박정희 쿠데타 연재는 왜 그 신문에서 사라졌나

[5.16쿠데타, 두 번째 마당] 오랜 꿈 이룬 '박통'…대한민국은 짓밟혔다

[5.16쿠데타, 세 번째 마당] 박정희는 왜 한국인의 '노예근성'을 주목했나

[5.16쿠데타, 네 번째 마당] 청와대·참모총장의 위험한 선택…헌법은 죽었다

[5.16쿠데타, 다섯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 미국이 개의치 않은 이유

[5.16쿠데타, 여섯 번째 마당] 정치 깡패 이정재는 진정 죽어 마땅했나

[5.16쿠데타, 일곱 번째 마당] 나라 구한 박정희? 장준하는 왜 그리 판단했나

[5.16쿠데타, 여덟 번째 마당] 청와대 '부정 선거' 앞잡이, 정보부…어쩌다?

[5.16쿠데타, 아홉 번째 마당] '전 재산 헌납' 삼성 약속은 왜 물거품이 됐나

[5.16쿠데타, 열 번째 마당] 박정희 거듭 구한 은인, 제대로 뒤통수 맞다

[5.16쿠데타, 열한 번째 마당] '박통'의 특별한 선배, 왜 간첩으로 죽어야 했나

[5.16쿠데타, 열두 번째 마당] '장면 맹비난' 박정희, 사실은 대부분 따라 했다

[제3공화국, 첫 번째 마당] '가만있어라' 강조한 '박통', 은밀히 뒤통수쳤다

프레시안 : 박정희와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5.16쿠데타 세력이 권력을 내놓지 않기 위해 한 일은 민주공화당 사전 조직만이 아니었다.

서중석 : 사전 조직을 방대하게, 밀실에서, 중앙정보부 조직을 최대한 이용해서 했는데 이것만 가지고 집권을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앞에서 얘기한 1961년 8월 12일 박정희의 민정 이양 성명에는 중요한 내용이 또 하나 들어 있었다. "구정치인 중 부패·부정한 정치인의 정계 진출을 방지하기 위한 입법 조치를 취한다", 이것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구정치인 중 상당수가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인위적으로, 법의 이름을 빌린 물리력으로 막겠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정치활동정화법이라는 것을 만드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도 참 악명 높은 법이다. 1962년에 들어와 중앙정보부 중심으로 작업을 해서 재건동지회가 만들어진다고 지난번에 얘기했는데, 정치활동정화법도 1962년 들어 구체화된다.

1962년 2월 3일 윤보선 대통령은 기자 회견에서 '구정치인의 출마를 제한한다는 것은 재검토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구정치인에는 자기도 들어가지 않나. 간단히 이야기하면 기존의 모든 정치인을 구정치인으로 규정하고 쿠데타 이후 등장한 군인들이 신정치인이라고 한 셈이다. 그러니 자기가 대통령일 때 이 법이 통과되면 자기 동지들한테 얼마나 욕을 얻어먹겠나.

그런데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아직도 일부 몰지각한 구정치인들이 혁명 성업을 모독하고 있는 것은 용서 못할 처사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정권을 넘길 수 없다'고 하면서 '1∼2년 동안에 이런 부패한 역사가 해결된다고 보기는 어렵겠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

프레시안 : 정치활동정화법은 5.16쿠데타 세력에게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무기였다.

서중석 : 1962년 3월 16일 최고회의에서 정치활동정화법이 통과됐다. 이 법에 대해선 역시 김종필 부장이 참 짤막하고 적절하게 잘 얘기했다. 앞으로 정부가 정책을 강력히 수행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부당한 말썽을 일으킬 만한 "보균자"들에게 한 번 내지 두 번 정도 국회의원만 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보균자"라고 표현했다. 대통령은 자기들이 할 것이라고 확고하게 생각했는지, 하여튼 한 번 내지 두 번 정도만 국회의원이 되지 말아 달라고 얘기했다. (김종필은 1962년 3월 20일, "정치활동정화법은 구정치인들 중 신정부를 까부술 위험성이 있는 자들을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그 근본 목적"이라며 "보균자는 자진해서 국회에 안 나오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편집자>)

이 말은 나중에 정확하게 구체화된다. 다수는 1963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수 있게 되지만, 몇 사람은 1963년 총선은 물론 1967년 선거에도 출마를 못 하게 된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두 번 출마를 못하게 되는 것이고, 상당수는 한 번(1963년 선거) 못하게 되는 것이며, 나머지 다수는 정치 활동이 허용된 것이다.

단순하게 보면, 정치활동정화법은 박정희, 김종필이 강력한 통치를 하기 위해 방해물을 제거하거나 정치적 반대자를 약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정치활동정화법을 적절히 이용하면, 그러니까 누구는 풀어주고 누구는 안 풀어주는 식으로 하면서 야권을 서로 불신케 하고 분열, 갈등을 조장하는 간특한 머리도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반대파 옥죄고 야권 분열 조장한 정치활동정화법

프레시안 : 5.16쿠데타 세력은 이승만 정권의 주요 인사들을 선별해 끌어들이고 혁신계의 발을 확고하게 묶어두는 데도 정치활동정화법을 활용했다.

서중석 : 그렇다. 윤보선은 더는 대통령을 할 수 없으니 3월 22일 사임했다. 그러니까 박정희가 바로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된다. 4374명을 '해당자'로 정하고 그 명단을 공고했다. 그러면서 구정치인 가운데 신고를 하게 했는데, 2958명이 정치활동정화위원회에서 자신들의 적격 여부를 처리해달라고 청구한 것으로 돼 있다. (이 위원회에서 적격 판정을 받지 못하면 1968년 8월 15일까지 정치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법에 규정돼 있었다. <편집자>) 1962년 5월 30일, 2958명의 45퍼센트인 1336명을 적격자로 규정해 '이 사람들은 정치를 할 수 있다'고 풀어줬다. 그해 12월 31일에 가서는 171명을 또 추가 해금했다. 어느 경우나 자유당이 많다. 특히 12월 31일에는 이승만 정권 말기 국방부 장관을 한 김정열, 초대 내무부 장관인 윤치영 같은 사람들이 풀렸다. 나중에 둘 다 민주공화당 의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다.

1963년 2월 1일에는 또 275명을 해금한다. 이때도 자유당계가 많았다. 박정희 의장은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앓고 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귀국 문제를 심심히 고려하고 있다고 하면서, 자유당계의 민주공화당 입당을 유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치적 필요에 따른 이런 몸짓과 반대로,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의 귀국을 막았다. <편집자>) 마지막으로, 물론 선거를 앞두고 한 것인데, 1963년 2월 27일까지 추가 해제했으나 269명은 제외했다. 이 269명 여기에 중요한 사람들이 많았다. 자유당계로는 이승만, 민주당 정권의 장면 같은 사람들이 여기에 포함돼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제일 많은 건 혁신계 간부급 인사들이다. 김달호, 고정훈, 정화암, 박기출, 장건상, 윤길중 등이 다 묶여 있었다.

이 정치활동정화법은 개폐할 수가 없다고 헌법에까지 못을 박았다. 부칙 제4조 2항에다가 '못 고친다'고 못을 박아 놨다. 이렇게 해서 쿠데타 세력이 일부를 제외하면서 야당을 분열시키는 데 정치활동정화법을 이용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훗날 전두환 신군부는 총칼로 권력을 잡은 후 기성 정치권 등의 발을 묶은 5.16쿠데타 세력의 방식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신군부는 1980년 11월 '정치 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 조치법'을 만들고 기성 정치인 등의 정치 활동을 금지한다. 그 대상에는 김종필도 포함돼 있었다. 그에 앞서 신군부는 김종필을 부정 축재자로 규정했다. 5.16쿠데타 후 기성 정치인 등을 보균자로 몰아붙였던 김종필은 그렇게 20년도 안 돼 정반대 처지에 놓인다. 전두환 정권이 막바지에 접어든 1987년 6월항쟁 이후에야 김종필은 정치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새 헌법 만들어 대통령에게 막강한 힘 부여한 이유

프레시안 : 쿠데타 세력은 정치활동정화법을 만들어 야당 정치인들을 옥죄고 분열시키는 한편 헌법을 만드는 작업에 구체적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국민이 직접 뽑은 대의 기관도 아닌 최고회의에서 헌법 문제를 다루는 게 적절한가 하는 것도 논란거리다.

서중석 : 나중에 제3공화국 헌법으로 불리는 것이다. 1962년 7월 11일 최고회의는 헌법심의위원회를 구성했다. 여기에는 민간 전문위원을 비롯한 21명이 참여했다. 대개 새로 만드는 헌법은 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쿠데타로 제2공화국을 무너뜨렸으니) 장면 정부 때 헌법의 수순에 따라 새 헌법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데 최고회의에서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고쳐 헌법 개정의 절차를 취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헌법안을 만들면 최고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 투표로 확정한다'고 했다. 이러면서 국민 투표가 다시 부각된다. 국민 투표법은 10월 12일에 제정된다.

국민 투표는 이승만 정권의 악명 높은 사사오입 개헌에 포함돼 있었다. 이승만 이 노인네가 중임 제한을 철폐하려고, 그러니까 영구 집권을 하려고 개헌을 밀어붙였는데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국민들의 반대가 워낙 심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이 양반이 '그것만 개헌하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개헌은 국민 투표를 할 필요성 때문에 꼭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몰고 갔다.

그래서 1954년 11월 국회에서 부결됐다고 선포한 걸 다시 사사오입으로 강변하면서 통과됐다고 주장하는 그 헌법에는 제7조에 "대한민국의 주권의 제약 또는 영토의 변경을 가져올 국가 안위에 관한 중대 사항은 국회의 가결을 거친 후 국민 투표에 부친다"고 돼 있었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국민 투표 조항을 전혀 지킬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법률로 국민 투표법을 만들지 않았다. 1952년 발췌 개헌 때 참의원 조항을 넣었는데도 지키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양원제에서 참의원은 상원, 민의원은 하원 격이다. 이승만 정권 때는 헌법에 참의원 조항이 있긴 했지만 한 번도 구성되지 않았다. <편집자>) 그런데 드디어 이 군사 정권에 의해 국민 투표법이 의결되기에 이르렀다.

국민 투표는 그 당시 어느 나라건 간에 대개 집권 세력의 의도에 맞게 통과되며, 집권 세력의 의도와 다르게 국민 투표가 되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고들 얘기하고 있었다. 이것도 마찬가지였다. 최고회의에서 통과시킨 것을 합법화한다고 할까, 합리화하는 구실로 국민 투표를 치른다. 박정희 정권 때는 이것 말고도 3선 개헌, 유신 체제 때 등 국민 투표가 몇 번 더 실시된다.

프레시안 : 쿠데타 세력이 만든 새 헌법은 대통령에게 강력한 힘을 부여했다. 이는 쿠데타 세력의 핵심 인사들이 영도자의 강력한 통치를 선호한 것과 관련 있어 보인다.

서중석 : 이 헌법 개정안은 최고회의를 통과해서 1962년 12월 17일 국민 투표를 거쳐 확정됐다. 이 새로운 헌법은 다 알다시피 내각 책임제였던 제2공화국과 달리 대통령 중심제였다. 그것도 대통령의 권한이 대단히 강화된 것이었다. 첫째, 부통령제를 없앴다. 부통령제를 없앤 데는 박정희와 김종필의 속셈이 각각 달랐을 수 있을 것이고, 다른 최고위원들의 생각도 작용하고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부통령 제도를 제도화해놨더라면 과연 유신 체제가 탄생할 수 있었겠느냐, 3선 개헌을 하는 게 용이했겠느냐 하는 점은 생각해볼 수 있다. 부통령이라는 자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일정 정도 견제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헌법을 고쳐야 한다는 여론이 있는데 이 부통령제를 다시 살리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경우엔 이승만 정권처럼 대통령과 부통령을 따로따로 선거하게 하는 게 아니라 러닝메이트 제도로 꼭 해야 한다. 박정희 정권의 행태를 되돌아볼 때 부통령제를 두는 것은 충분히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어쨌건, 부통령제를 없앤 대신 국무총리를 뒀다. 헌법에 국무총리의 권한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도 논란이 많이 되는 국무위원의 임명 제청권과 해임 건의권을 갖고 있었다. 물론 어느 누구도 과거에 그 권한을 제대로 행사해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도 한다. 이승만 정권 때도 '국무총리는 장관만도 못하다', 그렇게 얘기됐다. 이승만은 권력에 대한 집착이 워낙 강해서 사사오입 개헌을 할 때 국무총리제까지 없앴다. 어쨌건 새 헌법에선 국무총리제를 뒀다.

그리고 헌법심의위원회 다수 의견으로 국무원을 장면 정권 때나 제헌 헌법처럼 의결 기관으로 해야 한다고 했지만, 쿠데타 세력은 국무회의로 이름을 바꾸고 결국 심의 기관으로 격하했다. 이처럼 대통령의 권한이 강력했다. 대통령한테는 국가 긴급권, 입법 거부권까지 보장돼 있지 않았나.

▲ 민정 이양을 앞두고, 5.16쿠데타 세력은 대통령에게 강력한 힘을 부여한 새 헌법을 만들었다. 사진은 1973년 국군의 날(10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는 동안 스탠드에 펼쳐진 대통령 초상화 카드 섹션. ⓒ연합뉴스

괴상한 비례 대표제…헌법·선거법을 자기들 입맛에 맞춘 쿠데타 세력

프레시안 : 이 헌법에는 독특한 조항도 있었다.

서중석 : 그렇다. 이 헌법에 아주 독특한 게 들어갔다. 제36조에 "국회의원 후보가 되려는 자는 소속 정당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 제64조엔 "대통령 후보가 되려는 자는 소속 정당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돼 있었다. 한마디로 무소속 후보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으로 나올 수 없게끔 만들어버렸다.

이것에 대해 여러 정치학자가 '정당을 육성하려고 그런 것'이라고 썼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 그 당시 이미 한 신문에서 '이것은 야당 난립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여러 야당이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지적이었다. '무소속으로 나올 수 있으면 당을 안 만들어도 되지만 이런 식으로 해놓으면 꼭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되든 안 되든 대통령으로 나오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당을 만드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면 야당이 제구실을 할 수가 있느냐. 그런 점에서 이 부분은 문제가 많으니 이를 고려하라'고 요구한 것에 문제점이 잘 나타나 있다.

이 헌법은 제38조에 뭐까지 붙여놨냐 하면, "국회의원은 임기 중 당적을 이탈하거나 변경한 때 또는 소속 정당이 해산된 때는 그 자격이 상실된다"고 해 놨다. 국회의원이 당의 명령을 잘 듣지 않으면 안 되게끔 하는 부분이었다. 한마디로 야당을 난립시키면서 여당이 강력한 통치를 하기 위한 방책으로 이걸 만들어놨고 그렇게 활용된다.

그래서 유신 헌법으로 가면 또 싹 바뀌지 않나. 다 알다시피 유신 체제에서는 한 선거구에서 국회의원을 두 명씩 뽑게 돼 있었다. 그러면 반드시 한 명은 여당, 즉 민주공화당이 될 수 있다고 봤으니 문제는 야당을 떨어뜨리는 것 아닌가. 그렇게 하려면 무소속 후보가 나오게 해야 한다. 그래서 유신 헌법에서는 무소속 출마를 가능하게 해버렸다.

프레시안 : 지난번에 살펴본 8.15 계획서의 핵심 중 하나는 '군인들이 민정에서도 계속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새 헌법과 선거 제도를 고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헌법뿐만 아니라 국회의원 선거법에도 이것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대목이 눈에 띈다.

서중석 : 국회의원 선거법에도 문제 조항이 있었다. 1963년 1월 16일에 제정됐는데, 처음으로 전국구 비례 대표란 것을 두었다. 이게 44명이었다. 지역 대표가 131명이었던 걸 생각하면 그 비중도 적은 게 아니다. 비례 대표제가 당시 독일 등 다른 나라에서 시행된 것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정당에 투표한 것에서 유실 표를 막자는 것이다. 정당 대표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직능 혹은 전문성 대표라는 의미다. 각 당이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여러 좋은 사람들을 국회로 보내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쿠데타 세력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이것도 역시 강력한 통치와 관련이 있다. 제1당의 득표율이 50퍼센트 이상이면 비례 대표 의석의 3분의 2, 그 미만이면 절반을 주게 돼 있었다. 선거에서 제1당이 되는 건 대개 여당 아닌가. 그러니 비례 대표의 최소한 반절은 여당이 먹는 것으로 돼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게 또 야당한테도 나중에 이상하게 이용된다. 이 선거가 끝나고 그다음 선거부터는 '어떻게 보면 이게 국회의원 거저 되는 것이지 않나. 그러면 돈 좀 내야 하는 것 아니냐', 이렇게 됐다. 당시엔 '비례 대표는 국회의원 거저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전국구로 나오려면 상당한 정치 자금을 내도록 했다. 처음에는 박정희 정권이 그걸 탄압하기도 했지만 이걸 막을 수도 없었다. 야당은 돈이 궁해 죽을 처지였으니, 전국구 비례 대표가 돈을 갹출하는 한 방법이 돼 버린 것이다.

비례 대표가 직능 대표성이라든가 전문성을 진정으로 갖게 되는 것은 1987년 6월항쟁 이후다. 20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여성에게 비례 대표 자리를 많이 주지 않나. 나중엔 반절까지 배정했는데, 여성이 의회에 진출하는 데 큰 힘이 됐다. 그리고 정말 직능 대표성이 있는 사람들도 각 당에서 추천하고 그러면서, 21세기에 와서는 비례 대표가 예전보다 그 본질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프레시안 : 5.16쿠데타 세력은 지방 자치의 싹도 잘라버렸다.

서중석 : 1962년 11월 14일, 조시형 최고회의 내무위원장은 지방 자치 단체장 선거 제도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지금 지방 자치 할 생각 없다. 단체장을 선임하거나 지방 의회를 구성할 생각이 없다', 이 말이다. 그러면서 그 후 30년 동안 풀뿌리 민주주의가 사라진 나라가 됐다. 전 세계에서 지방 자치를 완전히 없앤 나라는 한국 빼놓고는 없지 않느냐고까지 그때 애기를 많이 하더라.

이렇게 사전 조직, 그것도 이원 조직에 의한 사전 조직을 하고, 정치활동정화법도 만들고, 헌법과 국회의원 선거법도 자신들한테 유리하게 만들고, 지방 자치도 없애버리면서 박정희와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이제 큰 골격은 이뤘다고 생각하게 된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의 문제적 인물이다. 사진은 2011년 8월 27일 경북 청도에서 열린 새마을운동 성역화 사업 준공식에 참석한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이 이날 공개된 박 전 대통령 동상에 손을 대며 활짝 웃는 모습. ⓒ연합뉴스

"구악 일소" 강조한 박정희 세력, '구악 중 구악' 자유당계 대거 포섭

프레시안 : 독재자들은 대개 '강력한 영도자를 뒷받침하는 정도의 역할만 하는 국회'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지난번에 했다. 영도자의 손발 노릇을 하는 국회라는 건데, 박정희 정권이 1970년대에 만든 유신정우회가 떠오른다.

서중석 : 비례 대표를 발전시킨 게 유신 체제에서는 유신정우회다. 대통령이 사실상 임명하는 방식으로 국회 의석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전두환 신군부 때 가서는 그것이 조금 미안했는지 신군부한테 절대 유리하게 의석을 분배하는 방식으로 약간 바꾼다. (1980년 10월 신군부가 만든 헌법은 국회 의석의 3분의 1을 전국구로 배정하고 그 전국구의 3분의 2는 제1당이 차지하도록 규정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5.16 혁명 공약'에는 "부패와 구악을 일소"한다는 내용도 있었다(제3항). 정치권의 구악을 일소한다는 명분 아래 만든 것이 정치활동정화법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혁신계와 민주당 정권을 쥐 잡듯 몰아세운 쿠데타 세력이, 민주당 정권보다 훨씬 부패했고 국민을 학살하기까지 한 자유당 정권의 인사들을 대거 받아들인 것도 앞뒤가 안 맞는 일이다. 4대 의혹 사건 등이 보여준 것처럼, 쿠데타 세력이 구정치인들보다 덜 부패했다고 볼 근거도 없다. 결국 쿠데타 세력이 구악 일소를 내세워 정치 쇼를 한 셈인데, 세월호 참사 후 박근혜 정부가 내건 "적폐 청산" 주장과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예컨대 참사의 밑바탕에는 '생명 뒷전, 돈벌이 우선' 논리가 있었는데도, 박근혜 정부가 "적폐"의 핵심인 무분별한 규제 완화에 오히려 힘을 싣는 역주행을 하는 데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적폐라는 비판을 받는 것이 조금도 과하지 않은 인사들을 중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 적폐의 일부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서중석 : 거듭 얘기하지만 박정희나 김종필한테는 '상식적으로 안 맞는다', 이게 통하지 않았다. 일부 최고위원까지 포함한 다른 정치 세력을 다 묶어놓고 자기들끼리만 뭘 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지 않나. 그리고 자유당계를 대거 포섭했다. 나중에 공화당 간부 중에서 군인 다음으로 많이 차지하는 게 자유당계다. 이것도 도무지 이해가 안 가고 나도 항상 의아했다. 그러나 이런 점은 있다. 박정희가 1962년에 쓴 <우리 민족의 나갈 길>, 박정희의 사상과 의식이 가장 잘 담긴 책으로 보는데 어쨌든 이 책도 그렇고, 1963년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나 박정희의 다른 어떤 글을 봐도 이승만 대통령을 직접 비판하는 대목을 찾아보기 어렵다. 소설가 이병주가 쓴 글에도, 쿠데타 전 부산에서 술 마실 때 박정희가 이상하게 이승만을 직접 욕하지는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난 이런 걸 보고 참 놀랐다. 박정희 관련 자료를 많이 봤지만, 이승만을 직접 비판하는 걸 찾기가 어렵다. 자유당을 욕하는 것도 거의 안 나온다. 1963년 이후에는 욕을 좀 덜한다고 하더라도 1962년 <우리 민족의 나갈 길>에서는 자유당을 강하게 비판해도 되는 것 아닌가 싶은데, 그렇지가 않더라. 그때는 누구나 자유당을 비판했다. 4월혁명 이후에는 자유당 비판이 보통 강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게 별로 없다. 이와 달리 장면 정권에 대해선 하나의 장을 만들어서 엄청난 비판, 사실상 비방과 중상에 가까운 태도를 보인다. (박정희가 "이승만 노인의 눈 어두운 독재"라는 정도로 비판한 대목이 있긴 하지만, 반공을 강조한 장면 정권을 용공 세력으로 몰아가는 등 제2공화국을 사실과 다르게 몰아세운 것에 비하면 이승만 정권을 겨냥한 강도 높은 비판은 훨씬 적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쉰여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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