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학교는 8월 8일(금)부터 10일(일)까지 <여름특집>으로 신비로운 신안의 섬 우이도로 떠납니다. 가벼운 숲 트레킹과 해변에서의 물놀이, 나무 그늘 아래에서의 낮잠, 풍요로운 어장에서 나오는 싱싱한 해산물들과 2박3일. 외딴섬은 휴식 그 자체입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8월 답사지인 우이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새벽은 밤을 꼬박 지샌 자에게만 온다.
낙타야,
모래 박힌 눈으로
동트는 지평선(地平線)을 보아라.
바람에 떠밀려 새날이 온다.
일어나 또 가자.
사막은 뱃속에서 또 꾸르륵거리는구나.
지금 나에게는 칼도 경(經)도 없다.
경(經)이 길을 가르쳐 주진 않는다.
길은,
가면 뒤에 있다.
단 한 걸음도 생략할 수 없는 걸음으로
그러나 너와 나는 구만리(九萬里) 청천(靑天)으로 걸어가고 있다.
-황지우 <나는 너다 503>
우이도 처녀, 모래 서 말 먹어야 시집간다
사막으로 가는 배를 탄다. 우이도는 모래섬, 사막의 섬이다. ‘우이도 처녀는 모래 서 말을 먹어야 시집간다’는 속담이 전해질 정도로 우이도는 모래가 많은 섬이다. 목포항에서 섬사랑6호를 탄다. 여객선은 기항지 도초도를 거처 우이도로 간다. 우이도는 신안군 도초도의 새끼섬이다. 그러나 도초도의 새끼섬 우이도 또한 더 작은 새끼섬, 동소우이도와 서소우이도에게는 어미섬이다. 사람에게만 피가 흐르랴. 섬들도 모두 크고 작은 핏줄로 이어진 혈육지간이다. 우이도는 과거 흑산진의 관할이었다. 일제가 가거도를 소흑산도로 명명했지만 원래는 우이도가 소흑산이었다. 나그네는 먼저 동소우이도에 내린다. 이곳 사람들은 동리라 부르는 섬이다. 섬사랑6호는 완행 여객선이다. 우이도 본섬의 진리, 돈목, 성촌과 동소우이도, 서소우이도를 빼놓지 않고 기항하는 여객선은 우이도 사람들의 ‘마을버스’다.
섬의 전성기 때는 동리에만 200여 명의 사람이 살았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6가구 10여 명의 노인들만 산다. 노인들뿐이니 민박을 하는 집도 없다. 배에서 우연히 만난 할머니에게 통사정을 해 민박을 허락받았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둘이서 산다. 전복 양식을 하다 소금섬 증도로 이주해간 아들을 따라가려고 ‘가대’를 내놓았다. 가대란 집과 집에 딸린 전답을 이르는 이 지방말이다. 짐을 풀고 마을 뒷산을 오른다. 산 고개를 넘으니 외딴 해변에 낡은 집 한 채 오롯하다. 마당은 폐가처럼 어수선하지만 문들은 모두 새 것 같다. 오래된 한옥을 개조한 집이다. 방문은 창호문이 아니라 판자문에 유리를 달았다. 초봄에 써 붙였던 것일까.
부엌문에는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두 문장이 선연하다. 누가 살기 위해 폐가를 수리하다 중단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새로 고처 살다가 금방 떠난 것일까. 텃밭에는 매화나무와 비파나무 어린 묘목들이 풀 속에 파묻혀 있다. 마룻장은 뜯어내다 말았고 마당에는 고기를 굽기 위해 불을 지피던 흔적이 뚜렷하다. 가만히 방문을 열어본다. 집안은 서까래와 파헤쳐진 구들장으로 어지럽다. 필경 누군가 살기 위해 집을 고치다 만 것 같다. 어떤 사정이 있어 일시 중단 했거나 아주 마음을 바꿔 살기를 포기하고 돌아가 버린 것일까.
사립문을 나서면 작은 백사장이 안마당이다. 파도소리는 꿈결처럼 멀고도 가깝다. 이 집에 잠시 살다 간 사람은 버려진 집과 바다풍경에 반했던 것이리라. 외딴섬, 외딴집, 외롭고, 높고, 쓸쓸하고 고적한 삶을 꿈꾸었으리라. 하지만 깨지 않는 꿈이란 없는 법. 꿈은 사라지고 집은 다시 폐허가 되어간다. 동리, 섬은 산과 해변을 다 돌아도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을 만큼 작다. 건너 섬 서리는 더 작아 동리의 반도 되지 않는다. 할머니 댁으로 돌아오니 할아버지만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해바라기 중이시다.
“꽃게잽이가 한창일 때는 배가 못 다닐 정도로 이 앞 바다가 빽빽했더랬어. 그 담에는 새비(새우)잽이 배가 많았는데. 멀리 인천에서도 오고. 어장이 없어지니까 배가 귀해져. 이 건너 대니는 배도 귀해져.”
노인은 거동이 불편해 집 밖으로 나서지 못하고 종일 마당과 방안만을 들락거린다.
“서리만 새비잽이 하는 배가 대여섯 척 있고 멜잡이 배도 있고. 여그 동리는 아주 없어. 옛날에는 이짝이나 저짝이나 어장으로 묵고 살았는디 인자 어장이 없어진께 심들어.”
노인도 어장을 하기 위해 우이도 본섬에 살다 이 섬으로 이주해 왔지만 일손을 놓은 지 오래다. 동·서 소우이도는 어장 때문에 생긴 마을이었으니 어장이 사라지자 마을도 쇠락해버린 것이다. 떠드는 소리에 잠이 깬 것일까. 할머니가 방문을 열고 나오신다.
“암만 해도 옮겨야 쓸랑갑소. 해줄 반찬이 없어서.”
할머니는 재워주기 어렵다고 하신다. 밥을 해주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나야 한 끼쯤 굶어도 상관이 없지만 노인들 마음은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할아버지가 연신 미안하다며 할머니를 거든다. 대책 없이 들이닥친 나그네가 오히려 면목이 없다.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신 것일까. 꼭 반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낯선 사내가 미심쩍기도 했을 것이다. 두 분의 표정에서 언뜻 그런 느낌이 든다. 할머니는 나그네에게 교회 목사님 사는 사택을 찾아가라고 일러 준다. 그러마고 집을 나선다. 나그네는 교회로 가지 않는다. 어차피 내일 아침 서소우이도로 갈 거라면 지금 건너는 편이 낫겠다 싶은 것이다. 그래 이참에 바로 서리로 건너자.
바닷가를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가두리 양식장 근처에서 작업 중인 배가 한 척 있다. 새우잡이 배다. 옳다! 배에서 작업 중인 선원들에게 서리로 가려는데 좀 건너 줄 수 없겠느냐고 소리쳐 묻는다. 선원 한 사람이 선장실로 가는가 싶더니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후 선장이 선창머리에 배를 댄다. 배에서는 네 명의 선원들이 잡아온 새우를 세척중이다. 흰 젓새우들!
선생님 귀 먹는다 목소린 소곤소곤
어선이 서리 선창에 접안한다. 서리에는 벌써 새우와 멸치잡이 어장 배 대여섯 척이 정박해 있다. 선창가에서 주민들이 마른 멸치를 분류 중이다. 멸치는 크기에 따라 상품 가치가 다르다. 멸치 작업에 온 식구들이 다 달라붙어 있다. 주인 여자는 그물에서 건져온 멸치를 가마솥에 삶아낸다. 크기는 동리의 절반도 안 되지만 사람은 서리가 많다. 그래봐야 7가구 15~16명의 주민들이 전부지만 뭍에서 들어온 선원들도 있으니 전체 거주 인구는 그보다 더 많을 것이다. 뭍에서 온 선원들은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창고에서 생활하며 조업에 나간다.
마을을 둘러보니 교회와 초등학교 분교 건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럴 때는 무조건 학교로 가는 것이다. 섬의 유일한 공공기관이 아닌가. 마침 선생님이 계시다. 교실에라도 재워 달라 하니 선뜻 허락한다. 2학년짜리 초등학생 1명이 전교생의 전부인 분교. 교실이 곧 교무실. 선생님은 총각선생님.
선생님은 둥근 탁자에 학생과 마주 앉아 1대1 수업을 한다. 가정교사가 따로 없다. 신안 섬사람들은 대개 자녀들이 저학년일 때는 섬에서 학교를 보내고 고학년이 되면 목포로 유학을 보낸다. 지금 분교에 다니는 아이의 동생이 4살이니 이 학교는 적어도 10년 동안은 폐교될 염려가 없을 것이다. 급식은 따로 할 수 없어 교육청에서 아이의 집에 쌀을 지원 해준다.
선생님은 아직 군대도 갔다 오지 않은 새내기 선생님. 교대를 졸업하자마자 이 외딴 섬으로 발령받았다. 선생님은 내년에 입대 예정이다. 어린 후배들을 상관으로 모시고 군 생활 할 것이 벌써부터 걱정이다. 교실에는 선생님 책상과 칠판, 책꽂이, 컴퓨터 3대가 있다. 인터넷은 위성 인터넷이다. 놀라워라! 낙도까지 깔린 정보고속도로. 벽에 붙은 표어가 정겹다.
선 생 님 귀 먹 겠 다
목 소 린 소 곤 소 곤
아이 녀석 목청이 제법 좋은 모양이다. 섬마을 총각선생님에게 저녁까지 얻어먹는다. 배추김치와 김, 된장과 고추장이 전부인 소박한 식사지만 나그네에게는 성찬이다. 선생님은 관사로 들어가고 나그네는 교실에 남았다. 서소우이도의 밤이 가뭇없이 깊어간다.
교실 마룻바닥에서 단잠을 잤다. 선생님은 계란프라이 하나를 넣은 토스트를 건넨다. 고마운 청년이다. 아침 여덟시, 섬사랑6호를 타고 우이도 진리로 건너갈 예정이다. 태풍이 북상중이라는 소문이 돈다. 내일부터 태풍의 간접 영향권에 들면 이 바다에도 파도가 거세질 것이다. 선창가에는 마을주민 너덧 사람이 서성거리지만 정작 배를 타는 사람은 나그네 혼자다.
누구는 목포로 멸치와 새우젓을 부치고 또 누구는 선원에게 심부름을 시킨다. 건너 우이도에 보낼 서류 봉투를 들고 나온 사람도 있다. 어제 동리에서 얻어 타고 온 새우잡이 배 태성호에는 선원 한 사람만이 나와 있다. 화부. 주민들이 화부에게 건네는 인사는 동일하다.
“몇 개 했능가?”
“세 개 했어라우.”
그도 아니면 말없이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인다. 새우를 세 상자 잡았다는 소리일까? 야간 어로로 고단하지만 배에서 가장 서열이 낮아 밥 짓기까지 해야 하는 화부는 먼저 일어나 아침밥을 짓는다. 쌀을 씻는 화부의 팔뚝에 문신 자국이 선명하다.
늙어가는 섬
서리를 떠난 여객선은 잠깐 새 우이도 본 섬의 진리 포구로 입항한다. 우이도란 이름은 섬의 모습이 황소의 귀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것이다. 섬의 서쪽 양단에 두 개의 반도가 돌출한 것이 소귀 모양으로 보였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소구섬, 우개도라고도 했다. 면적 10.70㎢, 해안선 길이 21㎞, 인구 150여 명이 사는 아담한 섬이다. 주민등록상에는 120세대 210명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는 80세대 150여 명만이 거주한다. 고향에 집과 적을 두고 가끔씩 드나드는 이들 때문에 생긴 오차다. 옛날에는 흑산진 산하 수군이 주둔하던 우이보가 있었던 진리마을이 지금도 섬의 행정 중심이다. 그래서 도초면 출장소도 진리에 있다.
하지만 진리 포구는 드나드는 사람은 적다. 우이도에 오는 여행객들은 모두 모래언덕이 있는 돈목이나 성촌으로 가기 때문이다. 진리 포구에 구수한 젓갈 냄새가 진동한다. 멸치젓갈을 삭히는 드럼통 여섯 개가 나란하다. 섬에 다니면 가장 흔하게 접하는 이름이 진리, 진촌, 읍리, 읍동 등의 이름이다. 읍동은 고려 때 섬의 행정 관청이 있던 마을이고 진리는 조선시대 수군이 주둔하던 마을이라 보면 된다. 비금도에는 효자비가 많더니 우이도에는 열녀비가 여럿이다. 밀양 박씨, 상원 김씨 열녀비가 길 가에 정렬해 있다. 선정비가 유난히 많은 섬들도 있다. 유행을 따르는 풍습은 시대를 초월한다.
우이도는 서소우이도보다 면적이 열 배 이상 크고 인구도 많지만 학교가 없다. 진리에 있던 분교가 폐교된 뒤 아이들이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 늙은 섬이 되었다. 교육청에서는 취학 아동이 없어지면 학교를 폐교시키지만 아이들이 생긴다 해서 다시 학교를 열어주지는 않는다. 폐교는 쉬워도 개교는 어렵다. 학교가 없는 섬에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 길은 요원하다. 섬은 점점 늙어가고 무인도가 되지 않더라도 내내 늙은 섬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우이도 홍어장수 문순득 조선 밖을 떠돌다
1801년(순조1년) 제주도에 한 척의 배가 표류해 왔다. 배에는 5명이 타고 있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청나라 사람으로 여기고 심양으로 송환했지만 청나라에서는 자기 나라 사람이 아니라며 다시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표류인들은 제주도에 억류됐다. 그런데 1809년 이들 앞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우이도에 사는 문순득이란 사람이었다. 이들은 여송국(呂宋國, 필리핀) 사람들이었는데 문순득이 여송국 언어를 알고 있었다. 마침내 표류인들은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머나먼 외딴섬 우이도에 살던 문순득은 어떻게 필리핀어를 알게 됐던 것일까.
문순득 또한 표류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이도 출신 홍어장수 문순득(1777∼1847)은 1901년 12월 흑산 홍어를 사서 싣고 영산포로 가다가 표류해서 외국의 여러 나라를 떠돌다 4년만에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홍어장수 문순득이 홍어를 사러 갔던 곳이 신안군 태도군도의 서쪽 바다, ‘서바다’라 부르는 곳이다. 홍어잡이 배들이 태도 바다에서 잡은 홍어를 문순득 같은 상인들은 도매로 사서 영산포로 싣고 나가 팔았던 것이다. 상중하 태도,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태도는 당시 태사도(太砂島)라고 했었다.
태사도(太砂島)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류한 문순득 일행은 유구국(琉球國)즉 현재의 오기나와까지 흘러갔다. 문순득 일행은 오까나와에서 3개월을 머물다가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중국행 배를 탔는데 다시 풍랑을 만나 여송국(필리핀)의 마닐라까지 표류해 갔다. 문순득은 여송국에 9개월을 머물다가 마카오, 광둥, 난징, 베이징을 거쳐 1805년 1월에야 고향 우이도로 돌아갔다.
역사 속에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문순득의 표류담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것은 당시 우이도에서 유배살이를 했던 손암(巽菴) 정약전(丁若銓, 1758~1816) 덕분이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형이자 <자산어보(玆山魚譜)>의 저자인 정약전은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 100여 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됐던 신유박해(1801년) 때 흑산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정약전은 흑산진 관할이던 흑산도와 우이도를 오가며 유배생활을 했는데 문순득이 귀향한 1805년에는 우이도에 살고 있었다. 문순득은 정약전에게 표류담을 전했고 정약전은 이를 기록한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책을 남겼다.
문순득의 표류담은 당시 강진에 유배 중이던 정약전의 동생 정약용에게도 전해졌다. 정약용은 문순득이 마카오에서 보고 온 화폐제도를 참고해 <경세유표(經世遺表)>에 화폐제도의 개혁안을 남겼다. 정약전은 문순득이 개국 이래 해외의 여러 나라를 최초로 보고 돌아온 사람이란 뜻으로 천초(天初)라는 자(字)를 지어주었다. 물론 문순득이 외국을 표류했다 귀환한 최초의 사람은 아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최부(1454~1504)나 제주도 유생 장한철(1744∼?) 또한 항해 중 표류를 경험하고 표해록을 남긴 바 있다. 그 밖에도 기록으로 남지 않은 수많은 어부나 뱃사람들의 표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약전과의 만남으로 문순득은 자신의 표류담을 후세에 전할 수 있었고 우리는 그 덕에 그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게 됐다.
정약용도 문순득이 여송까지 표류했다가 살아 돌아왔다는 뜻으로 문순득의 아들에게 여환(呂還)이란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정약전 사후인 1818년에는 정약용의 강진 유배시절 제자 이강회가 우이도로 문순득을 찾아가 외국의 선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 선박에 관한 논문인 <운곡선설(雲谷船說)>을 썼다. 이강회는 정약전의 <표해시말>과 자신이 쓴 <운곡선설> 등을 묶어 <유암총서(柳菴叢書)>를 남겼다.
정약전이 최후를 맞이한 곳도 우이도다. 1814년(순조14년) 여름, 다산은 유배에 풀려날 것 같다는 소식을 접하고 형을 만나러 흑산도에 가겠다는 전갈을 보냈다. 하지만 정약전은 “나의 아우로 하여금 나를 보기 위하여 험한 바다를 건너게 할 수 없으니 내가 우이보(牛耳堡)에 가서 기다리겠다”고 한 뒤 우이도로 떠나려 했으나 흑산도에 남아주길 간청하는 주민들의 만류로 1년여를 더 흑산도에 머물렀다. 1816년 다시 우이도로 건너온 손암은 결국 동생인 다산을 만나지 못하고 우이도에서 숨을 거두었다. 진리마을에는 홍어장수 문순득이 살았던 집이 있는데 그 뒤편에 정약전이 살았었다. 문순득이 살던 집은 근래까지도 후손들이 살았으나 지금은 빈집이 되었고 정약전이 살던 집은 터만 남았다.
최치원도 머물고 정약전도 살다간 섬
배를 타지 않고 육로를 택한다면 진리마을에서 돈목이나 성촌마을을 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십리 산길. 진리 고개를 넘으니 산 속에 너른 분지가 나타난다.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에 의지에 힘겹게 산길을 오른다. 돈목에서 오시는 길이다. 할머니는 저 느린 걸음으로 족히 두 시간은 걸어왔을 것이다. 산에는 산열매들이 익어간다. 으름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고 가막사리는 시큼하다. 구지뽕나무 열매는 주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산머루는 설익은 것이 반이다. 산머루와 구지뽕 열매를 따서 갈증을 채운다. 가을 산길을 가는 즐거움의 반은 산열매들이 준다.
산속에 빈집 두 채가 보인다. 돌담만 남은 집터도 여럿이다. 전봇대를 보니 아주 오래된 것들이다. 언제까지 사람들이 살았을까. 젊은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남은 노인들도 이승을 떠나면서 마을은 폐촌이 되었을 것이다. 떠나간 노인들은 저승의 어느 산골짜기 양지녘에 또 집을 짓고 머무시는 것일까. 빈집은 두 채만이 아니다. 빈집과 담장들, 여기도 한때는 제법 흥성한 마을이었다. 농사짓던 산밭도 제법 넓다. 나무를 때고 곡식이 귀하던 시절에는 우이도의 부촌이었을 것이다. 마을은 20여 년 전에 폐촌 된 대초리. 500여 년 전 우이도에 처음으로 생긴 마을이었다. 시간은 가장 오래된 것을 가장 먼저 사라지게 만들었다.
바닷바람을 덜 받는 산속이라 그런 것일까. 마지막 사람이 떠난 지 20여 년이 지났다는데 집들은 조금만 손보면 살 수 있을 정도로 멀쩡하다. 빈집, 광에 놓인 항아리들도 성하다. 괘종시계는 11시 15분에서 바늘을 멈추었다. 시계가 멈추고 난 뒤에도 시간은 또 얼마나 무심히 흘러갔던 것일까. 문간방의 낡은 재봉틀만 홀로 녹슬어 간다. 저 망가진 재봉틀처럼 흘러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사람도 생애도 되돌릴 길은 영영 없다.
이제 고개 하나를 더 넘으면 돈목, 성촌마을이다. 산 아래 모래밭과 바다는 청옥빛으로 푸르다. 모래 언덕이 있는 성촌마을 해변에는 금도치 전설이 서린 굴이 있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의 탄생 설화인 금도치 설화가 이 섬에도 전해진다. 우이도와 고운의 인연에서 비롯된 전설일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당나라 유학길에 고운이 이 섬에 기항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우이도 상산봉에는 고운이 당나라 유학길에 신선과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신라 때부터 우이도는 중국으로 가는 항로상에 있었다. <택리지>는 영암의 구림이나 월남 마을을 출항한 배가 흑산 바다를 거처 순풍을 만나면 6일 만에 당나라의 태주 영파부 정해현에 도착했다고도 하니 중국과의 최단거리 항로로 각광받았던 것이다. 장삿배를 타고 이 길로 유학을 떠났던 최치원과 김가기, 최승우 등은 모두 당나라의 과거에 급제했다.
골짜기의 끝에 서니 드넓은 모래 해변이 펼쳐진다. 저 아름다운 백사장의 끝에는 거대한 모래언덕이 있다. 어느 해 돈목마을 총각과 성촌마을 처녀가 사랑에 빠졌다. 둘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산태(모래언덕) 그늘 아래에서 사랑을 나누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총각이 나오지 않았다. 고기잡이배를 타고 나간 총각이 큰 파도에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처녀는 슬픔을 못 이기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 후 산태에는 애절한 이야기가 깃들었다. 죽은 총각은 바람이 되고, 처녀는 모래가 되어 매일 산태에서 만나고 있다는 것이다.
성촌마을 80m 높이의 모래언덕은 마치 사막의 일부 같다. 옹진 대청도의 모래언덕만큼이나 거대하다. 이 섬 주민들은 오랜 세월 모래언덕을 ‘산태’라 불러왔다. 그런데 어느 날 외지에서 들어온 학자들이 풍성사구라 이름 붙였다. 풍성사구란 바람에 의해 형성된 모래언덕을 말한다. 풍성사구라는 생경한 말보다는 산태란 말이 더욱 정겹다. 바람 불면 모래가 날리니 산태는 주민들에게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골재로 팔릴 뻔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산태를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우이도를 찾는다. 골칫거리가 보물이 된 것이다. 하지만 나그네는 성큼 산을 내려갈 수 없다. 나그네는 사막을 찾아 왔는가. 아니면 사막 너머의 그 무엇을 찾아 왔는가!
섬학교 제30강, 2014년 <여름특집>은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8월 8일(금)>
06:30 서울 출발(뱃시각에 대야 하니 출발시각 엄수 바랍니다. 06시 2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30강 여는 모임
10:30 목포 도착
10:30-11:20 점심식사(자연산 회덮밥 혹은 장어탕)
11:40 목포 출항
14:40 우이도 진리항 도착
14:50-17:00 우이도 숲길 걷기(큰 짐은 배편을 통해 돈목 민박집으로 보냅니다)
진리항→진리몰랑(고개)→대초리→대초리고개→돈목해수욕장(3.5km, 2시간)
17:00-18:00 휴식 및 자유시간
18:00-20:00 저녁식사 겸 뒤풀이(민박집 주인이 직접 잡은 자연산회와 매운탕 그리고 민박집 여주인이 직접 담근 막걸리)
20:00 자유시간 후 취침
<8월 9일(토)>
07:00 기상
08:00-09:00 아침식사(우이도 가정식)
09:00-12:00 둘째날 걷기(3km)
돈목마을→돈목해수욕장→모래언덕(산태)→성촌마을→성촌큰대치미해수욕장→성촌마을→돈목마을→띠밭너머해변→숙소
12:00-13:00 점심식사(우이도 가정식)
13:00-18:00 자유시간(물놀이, 낚시, 독서, 낮잠 등)
18:00-20:00 저녁식사 겸 뒤풀이(민박집 주인이 직접 잡은 자연산회와 매운탕 그리고 민박집 여주인이 직접 담근 막걸리)
20:00 자유시간 후 취침
<8월 10(일)>
05:00 기상
05:30-06:30 아침식사(우이도 가정식)
07:00 우이도 돈목항 출항
10:30 목포 도착
11:00-12:00 점심식사(아구탕과 준치회무침)
12:00-13:00 장보기(수협위판장 및 목포종합수산시장)
13:00 제30강 마무리모임. 서울 향발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모자, 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다음의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어머니전>
섬학교 제30강 답사 참가비는 29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 2일 숙박비, 8회 식사비 겸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8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3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 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 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러싸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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