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학교(교장 최연. 인문지리기행학자, 서울 해설가)는 7월 제28강으로, 한양(漢陽)의 외사산(外四山)이며 외안산(外案山)에 해당하는 관악산(冠岳山)을 서울대 쪽에서 올라 그 정상에서 청량한 기운을 마음껏 느끼고 과천 쪽 물줄기인 자하동천(紫霞洞天)으로 내려가 탁족(濯足)을 하며 닭백숙으로 폭염에 지친 심신을 보양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탁족(濯足)이란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창랑의 물이 맑거든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발을 씻는다(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세속의 모든 근심을 잠시 내려놓고 자연의 품에 안겨 안일(安逸)의 여유를 즐긴다는 의미입니다.
서울학교 제28강은 2014년 7월 13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 관악구 서울대 신공학관(제2공학관) 앞에서 모입니다(서울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4번 출구로 나와서 20m 앞 좌회전하면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습니다. 서울대 가는 02번을 타고 신공학관(제2공학관) 앞에 하차하세요. 배차시간은 6분 간격이고 약 15분 걸립니다). 정시에 출발하니 출발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지난 6월부터 서울학교 강의가 사정상 매달 둘째 일요일 열리게 됐으니 착오없으시기 바랍니다).
서울대 신공학관→효령각→연주암→연주대→관악사지→자하동천→점심식사 겸 뒤풀이(탁족)→암각글씨→과천향교→온온사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7월 답사에 대해 들어봅니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속리산(俗離山)에서 갈라진 한강 남쪽, 금강 북쪽의 산줄기인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안성의 칠장산(七長山)에서 서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김포 문수산(文殊山)에 이르는 해발 고도 200m 내외의 낮은 산줄기를 일러 한강의 남쪽을 지나는 산줄기란 뜻으로 한남정맥(漢南正脈)이라고 합니다.
이 산줄기는 경기도의 한강 본류와 남한강의 남쪽 유역의 분수령으로 서쪽에 위치한 인천, 시흥, 안산, 수원, 오산, 평택, 천안 등 아산만(牙山灣)을 중심으로 한 해안평야의 경계를 이룬 산줄기로서 서해안 가까이는 100m 미만의 낮은 구릉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남정맥의 산줄기가 수원 광교산(光敎山)에서 서해안으로 향하는 본줄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져 나와 한강 남쪽에 이르는 지맥(支脈)에 마지막으로 우뚝 솟아오른 봉우리가 관악산(冠岳山)으로, 개성의 송악산(松岳山), 가평의 화악산(華岳山), 파주의 감악산(紺岳山), 포천의 운악산(雲岳山)과 더불어 경기오악(京畿五岳)의 하나로 수려한 봉우리와 빼어난 바위를 자랑하는 명산으로 꼽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는 남경천도(南京遷都)의 적당한 천도지로 삼각산(三角山) 남쪽의 오덕구(五德丘)가 거론되었는데, 오덕구란 중앙에 둥근[圓] 토덕(土德)의 북악(北岳), 서쪽으로 모난[方] 금덕(金德)의 계양산(桂陽山), 동쪽으로 곧은[直] 목덕(木德)의 아차산(峨嵯山), 북쪽으로 굽은[曲] 수덕(水德)의 감악산(紺岳山) 그리고 남쪽으로 뾰족한[尖銳] 화덕(火德)의 관악산이 둘러친 명당으로, 한강을 중심으로 한 지금의 서울 일대를 말합니다.
관악산은 일찍이 역사무대에 등장하여 많은 옛 기록에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강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삼국이 쟁탈전을 펼칠 때나 결국 한강을 차지한 신라가 당나라를 내몰 때에도 관악산은 지형적 특성으로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은 관악산에 잇대어 서쪽에 솟아있는 호암산(虎岩山)에 삼국시대에 쌓은 석축산성(石築山城)이 남아있어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호암산(虎岩山)은 호랑이 모양을 한 범바위[虎岩]가 있어 그렇게 불렀으며 이 바위호랑이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 시흥에 있던 호암사라는 절을 산 위로 옮겨 호압사(虎壓寺)라 이름 짓고 이것도 모자라 상도동 국사봉(國師峰)에 호랑이와 쌍벽을 이루는 사자를 상징하는 사자암(獅子庵)을 지었다고 합니다.
관악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여덟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팔봉능선(八峯陵線)을 따라 잇대어 솟아있는 삼성산(三聖山)은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 의상(義湘), 윤필(潤筆) 세 스님이 이곳에서 세 개의 초막을 짓고 수행하였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고려 말에는 스승과 제자 사이로 양주 회암사(檜巖寺)에 주석(駐錫)하였던 지공(智空), 나옹(懶翁), 무학(無學)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서산(西山)과 사명(四溟)대사도 이곳에서 수행하였습니다. 산 중턱에는 세 개의 초막 중 하나인 삼막(三幕)만이 삼막사(三幕寺)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남아있고 일막(一幕)과 이막(二幕)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습니다.
삼막사에는 몽고가 고려를 침범했을 때 삼막사 스님인 김윤후(金允侯)가 승병(僧兵)이 되어 용인 처인성(處仁城) 전투에서 몽고군 원수(元帥) 살리타이를 죽였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된 삼층석탑이 남아있으며 이 탑은 달리 살례탑(撒禮塔)이라고도 부릅니다. 김윤후는 전쟁이 끝난 후 나라에서 상장군(上將軍)의 지위를 내렸으나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며 끝내 그 직책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관악산은 한양도성의 외사산(外四山)의 하나로 조선의 법궁(法宮)인 경복궁(景福宮)의 조산(朝山) 또는 외안산(外案山)이 되고 산봉우리는 불의 모양을 하고 있어 풍수상 관악산의 형세(形勢)는 화성(火星)으로 예로부터 ‘왕도남방지화산(王都南方之火山)’이라 하여 화기(火氣)의 산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한 압승책(壓勝策)으로 관악산 옆에 있는 삼성산에 한우물이라는 연못을 설치하였으며 관악산 주봉인 연주대에는 아홉 개의 방화부(防火符)를 넣은 물단지를 놓아두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숭례문 밖에 인공 연못인 남지(南池)를 조성하였고 사대문의 글씨를 모두 가로로 썼으나 남대문인 숭례문(崇禮門)은 세로로 썼는데 이것은 숭례문의 예(禮)는 5행(行)의 화(火)에 해당되고 숭(崇)은 불꽃이 타오르는 상형문자(象形文字)이므로 숭례(崇禮)라는 이름은 세로로 써야 불이 잘 타오를 수 있고 이렇게 타오르는 불로 맞불을 놓음으로써 관악의 화기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합니다. 그야말로 불로써 불을 제압하고[以火制火] 불로써 불을 다스리는[以火治火] 격입니다.
관악산 정상에 잇대어 죽순처럼 하늘을 향해 치솟은 절경 속 바위가 연주대(戀主臺)로, 이곳 바위틈에 축대를 쌓고 나한을 모신 응진전(應眞殿)을 지었습니다. 신라 문무왕17년(677) 의상조사(義湘祖師)가 한강 남쪽에 유화(遊化)하다가 관악산의 수려함에 끌려 산 정상에 의상대(義湘臺)를 창건하는 동시에 관악사(冠岳寺)를 개산하다는 옛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곳 의상대가 바로 연주대입니다.
이렇듯 의상대(義湘臺)가 연주대(戀主臺)로 달리 불러지게 된 연유는 고려가 멸망하자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姜)씨의 오빠 강득용(康得龍)이 서견(徐甄), 남을진(南乙珍) 등과 같이 두문동(杜門洞) 72인의 행적을 본 따 불사이조(不思二朝)의 뜻을 품고 관악산 의상대에 올라 개성(開城)을 향해 통곡을 하며 고려(高麗)를 연모한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하며 강득룡의 묘는 과천 정부종합청사 뒤편에 있습니다.
연주암(戀主庵)은 기록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관악산에 의상대를 세우고 수행할 때 그 아래에 관악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대웅전 앞에 있는 3층석탑이 고려 후기 양식을 나타내고 있음을 볼 때 창건 연도가 꽤 오래된 고찰이라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관악사가 연주암으로 달리 부르게 된 연유는 고려 말에 의상대가 연주대로 이름이 바뀌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동생인 충령대군이 왕위를 물려받자 평소 불교에 심취하여 많은 불사(佛事)와 역경사업(譯經事業)을 한 효령대군이 유랑길에 나섰다가 관악사를 찾아와 수행하면서 궁궐이 잘 보이는 현재의 위치에 40칸 규모의 건물을 새로 지었는데 이때부터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 때문인지 연주암 바로 곁에는 효령대군의 영정(影幀)을 모신 효령각(孝寧閣)이 세워져 있습니다. 원래는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을 1994년 효령각을 짓고 옮겨 봉안하고 있으며 또한 효령대군은 연주대에 올라 시를 짓고 궁궐에 있을 세종을 그리워하며 제일 높은 바위에 연주대라는 글씨를 친히 새겼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연주대 바로 밑에 위치한 관악사지(冠岳寺址)는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연구소의 발굴조사로 15세기부터 18세기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발굴조사보고에 의하면 관악사지는 적어도 6개 이상의 건물이 있었으며 이는 일시에 건립된 것이 아니고 시기에 따라 일정한 가람을 건립하고 이것이 수해(水害)에 의해 폐사(廢寺)되며 인근으로 옮기거나 혹은 그 자리에 대지를 조성하여 새로운 가람을 건립하여 명맥을 유지하다 18세기에 폐사(廢寺)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사찰 건물은 급경사 지역에 석축을 쌓아 평탄하게 만든 후 평탄대지를 따라 계단식으로 축조하였는데 이는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인공적인 건물과 자연지형과 조화를 꾀하려는 전통적인 산지 가람의 배치 방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결국 관악사는 신라시대에 의상이 창건한 사찰을 조선시대의 왕족인 효령이 중건한 사찰로서 구국기원도량(救國祈願道場)의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관악산의 북동쪽 능선은 우면산(牛眠山)으로 이어지는데 그 안부(鞍部)에 남태령(南泰嶺)이 자리잡고 있어 지금은 그곳으로 서울로 입경(入京)합니다만 193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면산 쪽의 산길로 한양(漢陽)에 입성하였습니다.
남태령의 본래 이름은 관악산을 넘나드는 천년 묵은 여우가 많이 나타났다는 전설이 전해져서 호현(狐峴) 또는 엽시현(葉屍峴)이라고 했으나 그저 쉽게 여우고개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隆陵)으로 가는 길에 이 고개마루에서 잠시 쉬면서 고개이름을 물었는데 이때 과천현 이방 변씨가 머리를 조아리며 “남태령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한 신하가 “이 고개이름은 예로부터 여우고개라 하거늘 어찌 상감께 거짓으로 아뢰느냐”며 힐책하자, 이에 변 이방은 “본디 여우고개라고 하나 그런 요망스런 말을 감히 아뢸 수 없어 삼남대로로 통하는 첫 번째 큰 고개이므로 삼가 남태령이라 한 것입니다” 라고 아뢰자 정조는 이를 가상히 여겨 변 이방을 칭찬하였으며 이 뒤부터 남태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관악산은 마주보고 있는 청계산에 비해 골이 얕은 골산(骨山)이라 남성산(男性山) 또는 백호산(白虎山)에 비유되고 청계산은 관악산보다 비록 높이는 낮지만 골이 깊은 육산(肉山)이라 여성산(女性山) 또는 청룡산(靑龍山)에 비유됩니다. 이처럼 골산인 관악산과 육산인 청계산이 부려놓은 고을이 과천현으로, 한양에서 삼남지방(三南地方)으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도성 안의 정보에 제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고을이라 일찍부터 과천현감(果川縣監)을 제일로 꼽았습니다. 과천고을의 관아(官衙)는 폐허가 되어 주춧돌과 석물들만이 남아 있고 객사(客舍)와 향교(鄕校)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온온사(穩穩舍)는 조선시대 과천현(果川縣) 객사 건물입니다. 객사는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관사(官舍)로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의 숙소 역할과 함께, 임금의 상징인 궐패(闕牌)를 모셔 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향궐망배(向闕望拜)를 행하는 곳으로 군현(郡縣)의 읍치구역(邑治區域)에서 가장 권위를 지닌 건물로 중앙의 정전(正殿)에 궐패를 모시고 양 옆으로 익실(翼室)을 꾸려 숙소로 사용하였습니다.
과천의 객사는 다른 지역의 객사보다 규모가 큰 데 이는 조선시대 왕이 남행할 때에는 과천을 경유해야 했고 경우에 따라 왕이 하루를 자고 가야 했으므로 규모가 컸던 것입니다.
온온사란 명칭을 갖게 된 것은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원묘인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후 현륭원으로 고치고 이곳에 참배하기 위해 능행할 때 과천의 객사에 머물며 주위 경관이 좋고 쉬어가기 편하다 하여 온온사(穩穩舍)란 현판을 내림으로써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하며 이때 관아동헌에는 옛 별호인 부림을 따서 부림헌(富林軒)이란 현판도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과천향교는 조선시대인 1398년(태조 7)에 처음 세워졌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소실되어 중건하였으며 1690년(숙종 16)에 과천 서이면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1944년에는 일제(日帝)의 1군 1향교 원칙에 따라 시흥향교, 안양향교, 과천향교를 통합하여 과천향교라고 하였는데, 1959년 시흥향교라고 하였다가 1996년에 다시 과천향교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향교 건물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이루며 홍살문과 외삼문을 지나면 강학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이 있고 그 뒤로 내삼문을 들어서면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동국18현(東國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배향공간인 대성전(大成殿)이 있습니다.
자하동천(紫霞洞天)은 관악산의 연주대에서 과천고을로 이어지는 가장 깊고 수려한 20여리의 골짜기로 입구에는 깎아지른 듯한 바위와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장관을 이루고 있어 이 일대의 계곡을 특히 자하시경(紫霞詩境)이라고 부르며, 이곳의 바위에는 4종의 암각글씨가 새겨져 전하는데 그중 단하시경(丹霞詩境), 자하동문(紫霞洞門), 백운산인 자하동천(白雲山人 紫霞洞天)은 신위의 글씨고 우암서(尤庵書)는 송시열의 글씨로 추정됩니다. 자하(紫霞)는 조선시대 정조, 순조, 헌종에 이르는 3대에 걸쳐 시, 서예, 그림으로 유명한[詩書畵三絶] 신위(申緯)의 호로서 그가 살던 마을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신위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이라 불렸으며 이 소문을 듣고 정조 임금이 궁중으로 불러보고는 크게 칭찬하였다고 하며 정조 23년(1799)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관직이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으나 노년에는 관직을 모두 버리고 자하동천에 내려와 시, 글씨, 그림으로 낙을 삼고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는 특히 시에 있어 한국적인 특징을 찾으려고 한역(漢譯)한 <소악부(小樂府)>와 시사평(詩史評)을 한 <동인논시(東人論詩)> 35수와 우리나라의 관우희(觀優戱)를 읊은 <관극시(觀劇詩)>와 같은 없어져가는 악부(樂府)를 보존하려 노력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시를 가리켜 김택영(金澤榮)은 시사적(詩史的)인 위치로 볼 때 500년 이래의 대가라고 칭송하여 이후의 시인들이 모두 그를 작시법(作詩法)의 스승으로 추대했으며 이러한 그의 영향은 강위(姜偉), 황현(黃玹), 이건창(李建昌), 김택영으로 이어져 우리나라 한문학(漢文學)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그림은 산수화와 함께 묵죽에 능하여 이정(李霆), 유덕장(柳德章)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손꼽히며 강세황(姜世晃)에게서 묵죽을 배웠던 그는 남종화(南宗畫)의 기법을 이어받아 조선 후기 남종화의 꽃을 피웠고 다시 그의 묵죽화풍은 아들 명준(命準), 명연(命衍)을 비롯하여 조희룡(趙熙龍) 등 추사파(秋史派) 화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표 작품으로 <방대도(訪戴圖)>와 <묵죽도(墨竹圖)>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우비, 장갑, 모자,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서울학교 제28강 참가비는 5만원입니다.(강의비, 점심식사 겸 뒤풀이,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현장에서는 참가 접수를 받지 않습니다).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 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번씩, 둘째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오전 9시 30분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에 1시간 30분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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