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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화살처럼 가슴에 꽂힌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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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사랑의 화살처럼 가슴에 꽂힌 섬

7월 섬학교는 보령 삽시도

충청도 언어는 느릿느릿 여유가 있습니다.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 제29강은 7월 5(토)∼6(일) 1박2일로, 느린 말처럼 느린 충청도의 섬 삽시도(揷矢島)로 갑니다. 섬의 형태가 마치 화살촉과 같다는 삽시도. 삽시도는 충청도의 섬들 중에서 외연도와 함께 걷기 좋은 섬으로 손꼽힙니다.

섬은 최고 높은 곳이 113m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낮은 평지입니다. 작은 섬이지만 아름다운 백사장이 세 곳이나 있고 섬은 또 온통 솔밭입니다. 솔숲은 옛 모습 그대로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더없이 편안한 안식을 줍니다. 89ha나 되는 너른 갯벌에서 기르는 삽시도 바지락은 씨알이 굵고 맛있기로 명성이 자자합니다. 느린 섬 삽시도를 걷고 나오는 길에는 서해안 최고의 해수욕장 대천해변의 백사장 길도 걸을 예정입니다.

▲우리네 생처럼 아득하고 아련한 삽시도 바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7월 답사지인 삽시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바지락과 홍합과 석화의 섬

삽시도(揷矢島) 밤섬 선창가. 여객선이 도착하자 어민들은 뭍으로 보낼 홍합과 바지락 망태기를 싣느라 분주해진다. 오후 막배에는 섬에서 나가는 사람보다 조개들이 더 많다. 삽시도는 충남 보령의 섬이다. 면적 3.78㎢. 안면도 남쪽으로 약 6km 지점에 있다. 200여 가구 500여 명의 주민들이 터잡고 살아간다. 대천항에서 여객선이 오간다. 마한 때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전하지만 조개무지가 발견된 것을 보면 선사시대부터 이미 사람살이가 시작됐을 것이다. 섬의 형태가 마치 화살촉과 같은 모양이라 해서 삽시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거멀너머, 진너머, 밤섬해변 등 물놀이하기 좋은 해변이 많아 여름이면 사람들이 몰린다. 섬 곳곳에 새로 지은 팬션과 방갈로들이 제법 눈에 띈다. 민박도 많다. 더러 IMF 때 외지에서 들어와 정착한 사람들이 숙박업을 하며 생계를 꾸리기도 한다.

오늘 섬은 온통 구수한 멸치젓 냄새로 은은하다. 섬사람들은 늙어가고 섬은 깊이깊이 곰삭아간다. 이즈음 삽시도는 한창 홍합철이다. 멸치잡이철이다. 배를 가진 어민들은 안강망 그물로 멸치를 잡고 무인도에 가서 홍합을 따온다. 홀로 사는 노인들은 갯가에 나가 바지락을 파다 살아간다. 저물녘 선창가에는 할머니 한 분, 바닷물에 열무를 씻고 있다. 텃밭에서 솎아온 열무들. 바닷물에 담갔다 건져내면 소금뿌리지 않아도 간간하게 저려진다. 난생 처음 들어가보는 바닷속이 숨막혔던 것일까. 땅속에서 나왔어도 여전히 빳빳하게 고개 쳐들고 있던 열무들이 이제는 할머니의 고무 대야에 숨죽이고 누웠다.

작은 섬이어도 삽시도는 농토가 많다. 밭농사뿐만 아니라 논농사도 자급이 가능할 정도다.
"할머니 어디 묵을 만한 데 있나요?" "이 동네는 민박할 곳 많아유. 좋은 집 데려다 줄테니 따라와유."
"할머니 집은 민박 안 하세요?"
"우리 집은 별로 안 좋아."
"그래도 할머니 집에 재워주세요."
할머니는 바닷물에 저려 손수레에 싣고 온 열무로 김치를 담근다. 내일 아침 도시 사는 아들집에 꽃게무침이랑 택배로 부치실 생각이다. 움직일 힘이 있는 한 내내 그러하실 게다.

선창가 벽보판에는 삽시도 어촌계의 안내말씀이 붙었다. 삽시도 주위 갯바위는 해삼, 전복 양식장이다. 섬 주민의 텃밭인 것이다. 매년 막대한 돈을 들여 해삼, 전복의 종패를 뿌려 키우고 있으니 관광객들은 갯바위에 들어가 해삼, 전복을 채취하지 말아 달라. 주민들이 조를 짜서 주야 순찰하고 있으니 불미스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협조해 달라. 바지락 양식장도 통제하고 있으니 알아달란 말씀들이다. 그동안 몰지각한 관광객들로 인해 피해가 컸었나 보다.

삽시도에는 여객선이 접안하는 선창이 두 곳이다. 윗말 선착장과 이곳 밤섬 선착장. 들고 나는 물때에 따라 대는 선착장이 다르다. 수심이 다르기 때문이다. 40여 가구가 사는 밤섬 마을 앞 해변 갯벌은 펄과 모래가 섞인 혼합갯벌인데 바지락 양식장이기도 하다. 삽시도는 바지락섬이다. 89ha나 되는 갯벌에서 바지락을 양식한다. 삽시도 어촌계 120여 가구가 참가하는 바지락 채취는 봄, 가을 두 번이다. 4월부터 6월까지, 또 9월부터 10월까지 채취하는데 연간 무려 200여 톤의 바지락이 채취된다. 삽시도 바지락은 타 지역의 바지락보다 속이 꽉 차고 씨알이 월등히 크다. 그래서 타 지역보다 20∼30% 비싼 가격에 판매된다. 주민들도 큰 소득을 올린다. 바지락 채취가 없는 늦가을부터 겨울 동안은 홍합을 따거나 해변에서 굴을 깨 소득을 올린다. 삽시도 갯벌은 그야말로 황금벌판이다.

▲삽시도 금송사에서 진너머로 가는 아늑한 솔밭길 Ⓒ섬학교

모래섬의 둘레길을 걷다

민박집에 짐을 풀고 삽시도 둘레길을 걸으러 간다. 밤섬마을 뒤안 해변은 밤섬해수욕장이다. 수루미해수욕장이라고도 불리는 이 해변은 길이 1km의 아담한 해수욕장이지만 폭이 100m나 되는 너른 백사장이 있고 수심도 낮아 물놀이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물길이 끝나는 곳이라 해서 수루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한다. 이 백사장은 푸른 솔숲이 감싸고 있어 그야말로 백사청송의 장관을 이룬다. 수루미해변 앞 바다에는 불모도가 있어 물안개라도 피어오른 날이면 한편의 산수화를 방불케 한다. 불모도는 또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구실을 한다. 불모도는 여객선이 들어가지 않는 섬인데 원주민들은 모두 떠나고 외지인들이 별장을 지어놓고 ‘뽀트’를 타고 수시로 다녀간다고 해변에서 만난 노인이 알려준다. 불모도 옆에는 추여, 용메기라고도 하는 바위섬이 병풍처럼 서 있다.

밤섬 선착장에서 만난 키 작은 개 한 녀석이 내내 따라온다. 해변에서 만난 노인은 애완견이었는데 버려져 들개가 됐다고 일러준다. 녀석은 눈망울이 더없이 순하고 슬퍼 보인다. 사람에게 버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뒤따르는 녀석의 순정이 눈물겹다. 녀석은 앞서 가다가도 내가 잠깐 멈추면 저도 멈춰서 기다려준다. 해변에는 금송사라는 작은 절이 있는데 절의 스님일까? 밀짚모자를 쓴 노인 한 분이 절 근처 텃밭에서 풀을 뽑고 있다. 금송사 주변은 온통 너른 솔숲이다. 이 섬도 신안의 임자도나 자은도 같은 모래섬이다. 땅은 온통 모래땅이고 곳곳에 방죽이 있다. 저 또한 모래치, 물치이리라. 바람에 날려온 모래가 구릉을 이루고 그 사이 웅덩이가 생겨 모래들이 머금고 있던 물이 흘러들어 모래치라는 방죽이 생긴 것이다. 방죽에서는 개구리가 울어댄다.

금송사에서 거멀너머로 가는 숲길을 빠져나오자 산속에 분지가 나타난다. 작은 방죽이 있고 그 옆으로는 제법 너른 습지가 있다. 이곳은 늪일까. 일부는 농사를 짓던 논 같기도 한데 지금은 온갖 수서생물들이 살아가는 늪처럼 보인다. 첨벙거리며 울어대는 개구리떼 울음소리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장엄한 생명의 대합창 소리다. 요즈음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 밭일을 하는 노인에게 물으니 3∼4년 전까지만 해도 농사를 지었던 논이란다. 대천에 살던 이가 트랙터까지 가져와 벼농사를 지었는데 모가 한참 자랄 때 태풍을 맞고 말았다. 1만 평의 논농사가 파농이 된 것이다. 태풍이 지나간 후 결국 농사를 짓던 이는 병이 났다는 소문이 돌았고 논은 묵혀져버렸다.

그 사이 모래섬답게 물이 풍부한 덕에 묵혀진 논은 습지로 변했다. 단지 3년 남짓 사람의 개입이 중단된 것뿐인데 생태계가 살아난 것이다. 사람이 논으로 만들기 전에는 이곳 또한 자연습지였을 것이다. 이 습지가 된 논은 공유지가 많다고 한다. 되살아난 습지를 그대로 살려 생태습지로 보존한다면 삽시도의 또다른 보물이 될 듯하다. 습지의 끝자락 진너머해수욕장 부근에서 둘레길이 시작된다. 삽시도 서쪽 해변 산중턱을 따라 길을 낸 둘레길의 풍경은 아름답지만 새로 만든 길이라 아직은 부자연스럽다. 그래도 내내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는 솔숲길은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기에 충분하다.

둘레길은 면삽지에서 물망터, 황금곰솔을 지나 다시 수루미해변의 금송사까지 이어진다. 면삽지는 삽시도와 연결된 아주 작은 무인도다. 물이 들면 서로 다른 섬이 되고 썰물이면 하나가 된다. 물망터는 들물이면 바다 속에 잠기고 물이 빠지면 민물이 나오는 곳이다. 칠월칠석날 목욕을 하면 신병이 없어진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황금 곰솔은 수령 45년의 작은 소나무다. 염록소 부족으로 솔잎이 푸르지 않고 황금빛을 띈다. 백사나 흰동백 같은 변이종이다. 세계적으로 희귀한 소나무라 보존가치가 크다. 둘레길은 수루미해변에서 끝이 난다. 나그네는 둘레길도 좋지만 섬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오고간 작은 오솔길들이 더 아늑하고 좋다. 이런 오솔길을 산책하는 것이야말로 삽시도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해안을 따라 도는 둘레길은 더없이 아늑하고 평화롭다. Ⓒ섬학교

자식들 다 줘도 안 아깝죠

웃말 논둑길을 걷는다. 논둑길의 끝은 뒷말이다. 텃밭이 볏짚으로 덮여있다. 무얼 심은 걸까. "마늘을 심었시유." 톳을 널고 빈 수레를 끌고 오던 초로의 여자가 말을 받는다.
"삽시도서 얼마 안 살았슈, 한 30년밖에 안 됐는디."
여자는 뭍에서 시집와 살았던 세월을 짧다고 한다. 섬에서 태어나 살아온 노인들에 비해 짧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고단한 섬살이 30년이 어찌 짧을 것인가. 여자는 부여의 무량이란 마을에서 태어났다. 여자의 나이 스물아홉일 때 뭍으로 시집와 살던 큰 시누이 소개로 섬 남자를 만났다. 그때까지 여자는 베 짜는 일을 했었다. 기모노 만드는 베를 짜서 일본으로 수출하는 가내수공업 공장을 다녔다.

문명을 누리던 여자가 섬으로 왔을 때 섬에는 발전소가 없었다. 자가발전으로 저녁에만 잠깐 전기를 쓸 수 있었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석유를 들고 가서 발전기를 돌렸다. 1990년대 중반에야 비로소 온전히 전기를 쓸 수 있게 됐다. 난생 처음 불 때서 밥을 하려니 힘들었다. 석유를 때는 풍로도 없었다. 섬살이가 하도 힘들어서 몇 번인가 도망칠 맘도 있었다.
"근디 배가 없어서 못 도망가."
여객선밖에는 섬 밖으로 나갈 길이 없는데, 마을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던 거다. 여자는 남편과 함께 바다로 나가 김발을 했다. 김이 잘 안 되자 자망배를 타고 꽃게를 잡으러 다녔다. 그렇게 섬살이에 적응해갈 무렵 남편이 덜컥 죽었다. 바다 나갔다가 경운기를 타고 오던 중 경운기가 뒤집어져버렸다.

"운이 나빠서 그랬지."
큰 아들이 중1 때였으니 벌써 16년 전 일이다. 그때부터 여자는 혼자 힘으로 삼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켰다.
"삼남매 기르느라 죽을 뻔 봤어요."
섬에서 혼자 힘으로 살아온 그 세월이 어떠했을까.
"큰 아들은 학교도 안 댕기고, 고등학교 넣는데 홀랑 도망가고, 그거 붙잡으러 다니느라 울기도 숱하게 울었시유."
근방 섬 어디나처럼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천에 나가 자취를 하며 학교를 다녔다. 부모가 곁에 없으니 돈은 돈대로 더 들면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고생이다.

"대천읍 피시방으로 잡으러 다니고. 엄마 아빠 떨어져 있으니 애들이 탈선하기 쉽죠. 부모 책임도 있죠. 애들만 보내놓고 안 됐어서 돈 달라면 달라는 대로 주고, 모르고도 속고, 알고도 속아주고, 가끔 가면 반간께(반가우니까) 잘해주지. 그런데서 역효과도 나고."

하지만 아들은 끝내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었다. 지금은 산업기능요원으로 군 생활을 했던 그 회사에 취직해서 성실하게 산다. 그렇게 온전하게 제몫을 살아주니 고맙고 또 고맙다.
"도둑질 안하고 경찰서 안간 것만 해도 어딘디. 그것만 해도 감사하지유."
여자는 아이들이 셋 다 착하게 자라주어서 마음 든든하다. 여자가 커피를 타온다. 잔을 건네는데 손가락이 셋이나 없다.
"시집와서 손가락도 잘렸어요. 그 이쁜 손가락."

두 개는 꽃게잡이 나갔다가 그물 감던 롤라에 잘리고 또 한 개는 그 전에 김발하다 잘렸다. 그 시절 그 섬에서는 봉합수술 따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전화벨이 울린다. 옆집에서 멸치 말리는 일 도와주러 오라는 전화다.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은 배도 부리고 어장도 하며 살지만 여자는 갯벌에 나가 바지락을 파고 고동도 잡고 멸치 말리는 일도 다니며 그렇게 살아간다. 여자는 섬사람들 대부분이 교회에 다니는 것과 달리 절엘 다닌다. 벌써 몇 십 년째, 고향 부여의 무량사에 다닌다. 그 힘으로 외롭고 고단한 섬에서의 세월을 견뎌왔을 것이다. 잔뜩 주름이 졌으나 여자의 얼굴은 보살님처럼 편안하다.
"이제 자식들도 다 컸는데 쉬어가며 일하고 그러세요."
"그래도 애들 도와줘야죠. 다 줘도 안 아깝죠."
그렇게 섬의 한 세월이 간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삽시도 황금곰솔 Ⓒ섬학교

섬학교 제29강, 2014년 7월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7월 5일(토)>

07:30 서울 출발(뱃시각에 대야 하니 출발시각 엄수 바랍니다. 07시 2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29강 여는 모임
11:00 대천항 도착
11:00-12:00 점심식사(대천항에서 복해장국 혹은 아구탕)
13:00 대천항 출항
13:40 삽시도 도착
13:50-18:00 삽시도 둘레길 걷기(약 7km)
삽시도 술뚱선착장→윗마을→진너머해수욕장→둘레길 입구→면삽지→물망터→황금곰솔→금송사→수루미(밤섬)해수욕장→수루미 들판→진너머해수욕장 숙소
18:30-20:30 저녁식사 및 뒤풀이(생선회와 매운탕)
20:30 자유시간 및 취침(삽시도 동백하우스팬션, 다인실)

<7월 6일(일)>

06:00 기상
07:00-07:40 아침식사(바지락국백반)
08:10 삽시도 출항
09:40 대천항 도착
10:00-11:30 대천해수욕장 걷기 및 해변 산책(3.5km)
12:00-13:00 점심식사(대천항 어시장에서 매운탕)
13:00-14:00 장보기
14:00 서울 향발. 제29강 마무리모임

▲섬학교 제29강 답사로 Ⓒ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모자, 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다음의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어머니전>

▲해안을 따라 늘어선 솔숲이 아름다운 수루미해수욕장 Ⓒ섬학교

섬학교 제29강 답사 참가비는 23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 1일 숙박비, 5회 식사비 겸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8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3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삽시도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도로까지도 솔숲인 숲섬이다. Ⓒ섬학교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 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 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러싸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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